〈 200화 〉[외전 : 둘 만이 기억하는 세계, 힘을 갈망하는 소녀]
-둘 만이 기억하는 세계-
카이라스의 시공회귀 이전.
인류는 멸망했다.
아니,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거의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카르시스 제국은 최후의 황제인 플로리아가 살해당하고 절대강자들도 대부분 죽임을 당했으니까.
"키에엑!"
오크 전사의 목이 베어짐과 동시에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하아...하아..."
긴 흑발의 머리카락을 보유하였으며 진주 같은 새하얀 살결에 눈가에 살짝 눈물점이 나있는 요염한 인상의 아름다운 미녀가 매혹적인 붉은 입술 사이로 숨을 거칠게 토해내었다.
"...괜찮아?"
그리고 그녀의 옆에 다가온 흑발의 잘생긴 용모의 청년이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땀에 흠뻑 젖어있는 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아...정말 마나를 회복할 틈을 안주네. 벌써 몇일 째야."
"......"
미녀의 불만에 청년은 그저 조용히 가만히 서있었다. 20 대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용모의 청년은 무척이나 잘생긴 용모의 청년으로 여자들을 꽤나 울릴법한 상당한 미남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흑안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는데 그 속에 담겨진 광기와 분노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라스...근데 이제 정말 우리 둘 뿐일까?"
"......"
"정말, 녀석들에 맞서 싸울 사람들은 우리 둘만 남게 되어버린거야?"
"...모르곘어."
청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청년의 이름은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 인류의 최강자로서 마법왕이라 불렸던 10 서클의 마스터이며 이종족들에게는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으로 불리고 있는 현존하는 대륙의 최강자였다.
또한 대륙 최강의 가문이며 대대로 9 서클의 대마법사들을 배출해온 아르테일 공작가의 가주이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것은 모두 옛말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들을 비롯하여 가족들을 모두 잃었으니까.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가족은 그의 어머니인 엘리나 뿐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엘프들에게 붙잡힌채 말 그대로 사육당하고 있었고 그들의 애완동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후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 아니, 지옥도 이것보다는 나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카이라스의 눈은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이미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반면, 이종족들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살아남아있었다.
그가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특히나 그가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숫자 역시도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에 의해 급격히 줄어들어있었고 그에 비해서 이종족들의 숫자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았다.
"라스, 아직 포기하지마."
그녀가 동료로서 카이라스를 살짝 위로해주며 속삭였다.
"아직 라스에게는 어머니가 남아있잖아?"
"...그렇지."
카이라스는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하늘을 맑고 푸르었다.
'차라리 저 하늘이 무너져서 모조리 다 죽여버렸으면 좋겠거늘...'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라스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크큭,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면 설사 에라시안이 있다고 해도 대륙을 통째로 없앨 수 있으면서도 망설이고 있다니.'
그렇지만 그가 알아낸 시공회귀의 방법은 너무나 달콤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니? 그렇다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오지 않게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목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반드시 미래가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을 없애고, 밝은 미래가 펼쳐진 세상을 만들어야했으니까.
'일단 어머니를 구하는데 중점을 둬야겠지.'
지금 그의 어머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숨을 쉬고 있기만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아를 가진채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해야 비로소 인간이었다.
지금의 엘리나는 엘프들에게 사육당하며 인간으로서 살아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녀를 다시 인간으로서 살아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같이 과거로 돌아가자고 제안을 해야겠지.'
카이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언젠가 잠에서 일어난다면 이 손이 미래를 향해 뻗어지게 될 수 있으려나?'
나름 감상적으로 변했던 카이라스는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그의 옆에 있던 흑발의 미녀가 손으로 살짝 부채질을 하며 물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이네?"
"그래, 고마워."
제니.
마지막 남은 동료의 이름을 가볍게 부른 카이라스의 말에 흑발의 미녀, 제니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라스네 어머니 구출을 시작해볼까?"
"어..."
그리고 둘은 엘리나의 구출을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몸만이 아닌 마음도 영혼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은 엘리나는 세레시아를 비롯한 엘프들을 스스로의 마나 폭발을 이용한 일종의 자폭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시켜서 복수를 하는 길을 택하였다.
* * *
카이라스는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고 그의 옆에 선 흑발의 미녀, 제니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님의 선택이었어, 라스."
"...알아."
"이미 지금 세상에 우리 인간에 대해 희망은 없어. 그 분은 그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신거야."
"그렇지..."
카이라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의 뛰어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미 상황은 충분히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끝없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가족인 그의 어머니 엘리나마저도 이 세상을 떠나고나니 정말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사라져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목숨을 대가로 하여 이 대륙 자체를 없애버릴까도 했지만 그의 진정한 원수인 에라시안은 그런다고 죽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는 분노도 슬픔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다.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제니. 나는 지금부터 마지막 수단을 사용할 생각이야. 성공할 가능성은 100%는 아니고 잘못하면 아예 소멸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지. 함께 시도해볼래?"
카이라스의 제안에 그녀가 호기심을 담은 표정으로 맑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어떤 것이길래 마지막 수단이라고까지 하는거야?"
"시공회귀."
카이라스의 말에 제니의 눈이 살짝 놀라운듯 커졌다.
"시공회귀라고?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우리가 과거로 간다는 그거?"
"맞아, 그렇지만 우리의 육체는 가지 못할거야. 대신 우리의 영혼들만이 과거의 우리의 어린 시절의 육체에 덧씌워지겠지."
카이라스의 말에 제니가 약간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그러고보니까 어머님이랑 같이 가고 싶었구나?"
"...맞아."
"그리고 어머님은 그 제안을 거부했었지?"
"응..."
"하아...하지만 어머님의 선택을 너무 원망하지마. 여자로서 이미 정신적으로도 마음으로도 견디기 힘들으셨던거야."
세레시아와 엘프들의 영혼은 카이라스가 에라시안이 소생시키지 못하도록 소멸했다. 그리고 엘리나의 영혼을 구한 카이라스는 그녀를 소생시키고자 하였지만 엘리나의 영혼은 다시 소생하는 것을 극렬히 거부했다.
"머리로는 이해해. 하지만 가슴이 이해가 안되는거야."
카이라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시공회귀, 함께 시도해볼래?"
"물론이지. 이 미래가 없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시도인데 안할 이유는 없잖아."
제니의 수락이 떨어지자 카이라스가 살짝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이지. 모든 것이."
"그렇지만 우리가 원하는 희망이 있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지옥 같은 세계의 모습을 기억해둬야해, 라스."
제니의 말에 카이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곳은 이제 우리 둘만이 기억하는 세계이니까."
그리고 얼마후, 그들은 시공회귀를 시도했고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여 카이라스는 10 살의 소년 시절로 돌아갔고 제니는 13 살의 소녀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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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갈망하는 소녀-
시공회귀를 한 이후 나는 줄곧 고민해왔다.
처음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르기만 하면 바로 라스를 찾아가서 도와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르는 것은 금방이었고 나는 그를 찾아가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그를 찾아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그런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시공회귀 이전에도 라스는 드래곤 로드 에라시안과 1 : 1로 싸울 경우 승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보유한 최강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를 도와주는 강자들의 숫자가 부족하여 밀렸었다.
하지만 에라시안의 부하들을 만약 자신이 홀로 감당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전쟁은 인간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었고 그런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후 유리엘 스승님께 작별을 고하면서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으로 나온 후 나는 마나를 보충해가며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나의 재능은 카일라, 유리아나, 레이나 같은 다른 여성 검사들에 비해서 떨어졌다. 그녀들과 같은 천재들 중에서도 천재인 재능이 아닌 그냥 천재에 불과한 재능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해매었다.
카이라스가 올랐던 경지인 10 서클의 마스터를 마법의 길을 걷는 마법사로서 신의 경지에 오른다 하여 세상에서는 10 서클 마스터의 경지의 다른 이름을 마법신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검사인 내가 필요로 여기는 단계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 아닌 그 위의 단계, 검의 길을 걷는 검사로서 신이 되는 경지라는 검신의 경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검신으로서의 길을 하나도 알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다르게 했다. 꼭 검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만으로 라스에 필적하는 힘을 얻는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나는 예전에 라스가 가지고 있던 서적 중에서 보았던 하나의 구절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행하면 나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해야만 했다. 다시는 그 지옥 같은 미래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하고 소름 돋는 미래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색상은 다양해야했다. 인간들이 모두 함께 그릴 수 있는 색이어야만 했다.
에라시안과 이종족들에 의해 아무런 색상을 그릴 수도 없게 시커멓게 뒤덮혀지게 놔두진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여자로서 이 미모는 유지할 수 있으니 다행이네."
나는 작게 웃었고, 더 이상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흑요석 같았던 나의 두 눈은 이제 홍옥과도 같은 붉은 빛을 띄게 되었지만, 나는 나.
그저 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