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만삭인 아내들]
"하아..."
배가 만삭임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부풀어올라있지만 여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은발의 미녀, 카일라는 할짝 한숨을 흘렸다.
또 그런 그녀의 이마에 살짝 나있는 식은땀들을 새하얀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주는 새하얗고 고운 손길이 있었다.
이 예쁜 하얀 손의 주인의 이름은 바로 엘리나. 카일라, 그녀의 남편인 카이라스의 친엄마이자 그녀의 친고모로 그녀에게 있어서 사실상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여인이었다.
"2 주 밖에 안남았네. 아니, 그 이전에 나올 수도 있겠는걸?"
카일라의 이마를 닦아주며 엘리나가 연분홍색 입술을 살포시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맑은 호수와도 같은, 혹은 사파이어빛과도 같은 그녀의 눈동자는 기쁨과 기대감이 공존하며 눈 안을 가득채우고 있었는데 카일라의 출산일이 다가온다는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손자 혹은 손녀.
물론 경국지색의 절세미모를 아직도 완벽히 유지하고 있는 그녀에게 카이라스와 같은 아들이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딸이라면 모를까, 손자나 손녀가 생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설게 받아들이겠지만 엘리나 본인은 이미 아이리스라는 손녀도 있었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카일라가 낳는 손녀는 단순한 친손녀일 뿐만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친아버지에게 폭언을 들으며 여린 마음에 상처까지 입었던 카일라는 엘리나에게 있어서 단순히 조카딸이 아닌 그녀가 직접 키운 딸이나 다름 없었다.
친아들인 카이라스와 조카딸이자 그녀의 딸이나 다름없는 카일라가 결혼을 하고, 카일라가 카이라스의 아이를 임신하며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그녀는 감격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조용히 기쁨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리고 손자일까, 손녀일까도 무척이나 궁금하면서도 기대가 되었지만 어느 쪽이 태어난다해도 엘리나는 아낌없는 사랑을 줄 것이었다.
"고모...아니, 어머님..."
그 때 카일라가 살짝 힘겨운 목소리로 엘리나를 불렀다.
어제부터 자궁과 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분비물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그녀는 팬티가 흠뻑 젖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튼튼한 육체 덕에 배 안의 아기의 무게에도 허벅지가 뻐끈하거나 마비가 오는 느낌을 느끼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문제 때문인지 카일라는 평상시보다 몸이 나른하고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출산에 대한 염려와 아기가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 때문인지 카일라는 수면을 취하더라도 편안히 자지 못하고 자꾸만 일어나기 일쑤였고, 그 탓인지 카일라의 안색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더라면 초췌해지고도 남았겠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그녀는 그냥 땀만 흘리며 힘겨운 목소리를 낼뿐 안색은 전혀 초췌하지 않고 그냥 조금 피곤해보이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목소리가 힘겹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엘리나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카일라, 어디 아퍼?"
"아뇨...그냥...애가...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겨울의 여신과도 같다고 불릴 정도로 차갑고 고고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카일라는 엘리나의 앞에서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녀에게는 감정표현을 어색해할 뿐 착한 조카딸이었던 것은 카이라스와 결혼 후에도 여전했었다.
그런 그녀가 현재 지금, 엘리나의 앞에서 자신의 뱃속의 아기를 걱정하는 모습을 숨김없이 보이고 있었다.
"응, 분명 건강할꺼야. 우리 라스랑 카일라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기인데 남자아이건 여자아이인걸?"
엘리나의 밝은 미소를 본 카일라도 살짝 연분홍빛 입술이 미소를 잠시 그렸다가 그녀는 이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때 그녀들은 동시에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은채로 카이라스가 돌아온 것이었다.
"미안...지금 돌아왔어."
카이라스는 1 시간 정도 자리를 비웠던 것을 카일라에게 사과했다. 아니, 그녀에게만 사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방은 단순히 카일라와 엘리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 개인용의 침대가 필요하여 침대를 여러개를 둔 이곳에서 현재 배가 부풀어오를대로 부풀어오른 만삭의 상태인 디아나가 카일라의 오른쪽 옆에서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놓여진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고, 그 오른쪽은 마찬가지로 배가 부풀어오른 셀리나가, 또 그 옆에는 티세라와 레이나가 연달아 누워있는 상태였다.
단지 디아나와 셀리나는 뱀파이어로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수면에 들어가있었고, 마법사인 티세라의 경우는 출산 경험이 있다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카일라와는 달리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어 스스로에게 슬립 마법을 걸어 잠들어버린 상태였으며 레이나는 소드 마스터였기에 무게의 쏠림에 의한 통증을 그다지 느끼지는 않았지만 불과 16 살의 나이에 출산을 해야한다는 것이 큰 긴장이 되었는지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고는 잠들어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깨있는 것은 카일라가 유일했다.
'린은 세르티네스가 돌봐주고 있지만...'
카이라스의 아이를 임신한 것은 아이린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며 이곳에 다른 아내들과 함께 보살핌을 받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덕분에 세르티네스도 그냥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정도였고, 카이라스는 둘의 우정이 상당히 깊다는 것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그나마 세르티네스와 정신적 연결을 통해서 그녀가 보는 시야를 그 역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세르티네스가 아이린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즉, 자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되었기에.
그렇기에 카이라스는 1 개의 사고는 세르티네스의 눈을 통해서 아이린을 계속해서 간접적으로라도 지켜보며 나머지 사고들은 각자 아내들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하나씩 집중시킨 후 조용히 나머지 4 개의 사고들을 카일라에게 집중하며 카일라를 바라보았다.
"누나, 몸은 좀 어때?"
"힘들어."
카일라는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카이라스는 이번에도 그 속에 담겨진 그녀의 진짜 감정을 읽어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2, 3 일이면 태어날 것 같아보이는데...일주일 이상이나 평균일보다 일찍 태어나네. 애가 너무 힘이 좋아서 그런가?"
태아의 탄생일이 평균이 280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269 일에서 2, 3일이 지나도 271 일과 272 일이었으니 확실히 일주일 이상이나 평균보다 빨리 태어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아니 엄마, 고생 많으셨어요. 카일라 누나를 제가 없는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카이라스가 엘리나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엘리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살짝 다가와서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머, 얘는~카일라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인걸? 당연히 이 엄마가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겠니? 호호~"
엘리나의 말에 카이라스는 살짝 웃기만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나의 체향은 여전히 향기로웠지만,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에게는 엄마의 포근한 향기일 뿐이었기에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엘리나가 잠시 후 포옹을 풀어주자 살짝 카일라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새하얀 손을 잡아준 카이라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일라 누나, 현재 기분은 어때?"
"긴장되지만 기대되기도 해. 그리고 검을 다시 손에 쥐고 싶어."
만삭의 상태에 오자 카일라는 이제 하루에 30 분씩은 검을 손에 쥐던 것도 멈추었고, 식사 역시 거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녀를 비롯한 카이라스의 아내들은 밤일을 보내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세르티네스 역시도 아이린을 돌보면서 카이라스와 밤일을 하지 않았기에 카이라스 역시 자연히 밤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들을 돌보냐고 카이라스는 밤일에 관한 것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당장 아내들이 건강하게 출산을 해주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으니까.
'세르티네스'
카이라스는 조용히 정신 연결고리를 통해서 세르티네스를 불렀고, 이윽고 황도 쪽에서 아이린을 지켜보고 있던 세르티네스가 응답을 해왔다.
[무슨 일인가? 카이라스.]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그녀의 전용 말투를 들으면서 카이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바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고마워서.'
[뭐가 말인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다니 고맙다고 하는 카이라스의 말에 세르티네스가 의아해하자 카이라스는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드리운채로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나는 자식들을 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거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고마워.'
카이라스의 고맙다는 인사에 카이라스에게는 세르티네스의 당혹스러워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뭔가 기뻐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쑥쓰러워하는 느낌이랄까?
[후훗, 고마워 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 간에는 서로 보호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틀린건가?]
'아니, 틀리지 않았어. 그렇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지.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야.'
카이라스는 자신의 말에 세르티네스가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의 대화를 끝내었다.
그리고 세르티네스와 대화를 끝낸 후 다시금 카일라를 바라보던 카이라스는 이윽고 나머지 사고들로 상태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던 아내들에게도 직접 시선을 주었다.
'디아나도 출산일이 빠르겠네.'
뱀파이어 퀸인 디아나는 빨리 애를 낳고 싶다는 마음이 유달리 컸는지, 아니면 그녀가 워낙에 튼튼한지라 뱃속의 아기도 카일라의 아기처럼 튼튼하기 때문인지 카일라와 더불어 빠른 시일 내에 태어날 것 같았다.
셀리나나 티세라, 레이나의 경우는 셋 모두 그저 건강하게만 태어나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280 일을 딱 채우거나 그 근처 쯤에 태어날 것 같았지만 카이라스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들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은 모두 자신의 아이들이었고, 그녀들이 모두 건강히 낳아주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어쩌면 당분간 나 혼자 여행을 다녀야할지도 모르겠네.'
카이라스는 태어날 자식들을 생각하자 그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때까지는 엄마들을 옆에 붙여줄 생각이었기에 혼자서 필요한 던전들을 공략하고 다녀야할 것을 생각하자 약간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녀들을 참여시킬 수는 있겠지만, 이전처럼 그녀들을 데리고 다양한 곳에서 수면을 취해보는 것 등은 불가능했다. 그녀들은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랄때까지는 함꼐 자야하니까.
물론 아르테일 공작가의 가풍이 직계의 경우는 5 살이 넘으면 혼자서 잠을 자야하기에 그것도 5 년 이상은 가지 못하겠지만.
'뭐, 그래도 수련들을 다들 할테니...전쟁이 벌어질때 쯤이면 다들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라스는 늑대인간들의 전대 대칸인 에르나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뱀파이어들의 전대 퀸인 루나를 떠올렸다. 시공회귀 이전의 카루스와 디아나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일 실력자들...
'적들이 강해지기는 했지만...우리도 강해지고 있지.'
전쟁의 날은 계속해서 다가와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이종족들이 인간 세계를 뒤흔들기 위한 공작이 시작할테고...'
카이라스는 앞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종족들을 막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