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3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263/380)



〈 263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흐응, 인간들의 암흑가 쪽을 담당하던 우리 쪽이 모두 전멸했다는 거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듯한 초신적인 미모를 지닌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가 황금색 눈동자를 흥미롭다는듯 뜨고는 새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면목 없습니다, 에라시안 님."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금발의 아름다운 엘프 미녀, 엘프 퀸 세레시아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예상 밖이기는 하지만 저 쪽의 대비가 워낙에 잘되어있는거 같군요."

에라시안은 각 왕국에 침투시키려던 계획에 이어서 암흑가를 이용하려는 계획까지 실패했음에도 태연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무엇인가 전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 약간의 불만을 품은 것인지 엘프 퀸 세레시아는 고개를 숙인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흐으응..."

에라시안은 왼쪽 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몇 번 두드리다가 세레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인간들이 있는 곳에 잠입해있던 모든 이들을 도로 불러들이도록 하세요. 아무래도 지금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 같군요."
"에라시안님?"

의외의 명령에 세레시아가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그녀를 쳐다보자 에라시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후후훗, 저 쪽의 '운명의 대적자'도 꽤나 재미있는 상대로군요. 제 운명의 대적자는 이번에 10 서클의 마스터가 되었다는 저들의 사이에서 마법왕이라 불리고 있는 카이라스 폰 아르테일이라는 소년일까요? 아니면 제 불길함의 근원인 그 누군가일까요?"

에라시안의 말에 아는 것이 있을리가 없는 세레시아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다시 조아렸고, 그런 그녀를 향해서 에라시안이 다시금 미소를 얼굴에 드리우며 말했다.

"일단 당분간 10 년 정도는 우리 쪽 내부를 안정시키고 통합을 하는데 집중을 하도록 하죠. 지금 여러가지 계략을 써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아이린에게 밀려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여 열등감을 품고 있는 황자들을 이용한 계획이나 인권단체들을 이용한 계획들을 에라시안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궁 측의 경우 보다 강력해진 결계들과 수많은 마법진들이 이루어져있었고, 척 보아도 10 서클의 마스터인 카이라스가 만든 것이었기에 에라시안이 보내었던 드래곤들은 황급히 빠져나와야만 했었다.

잘못했다가 마법진에 걸릴 경우 드래곤 하트는 뽑혀지고 육체 전신은 골고루 여러가지 마법 재료로 쓰이게 될 터였으니까.

드래곤으로서는 절대로, 반드시 사절하고 싶은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여자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여황제, 아이린은 철저하게 황자들을 거의 감금시켜놓은 후에 감시를 하고 있어 접근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인권단체들을 크게 이용하기도 불가능했다.

인권단체들의 망언들을 경멸하고 치를 떠는 아이린이 언제든지 인권단체들이 헛점을 보일 경우 그들을 아예 이종족들과 내통한 인간의 반역자로 몰아서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권단체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탄압이라고 떠들겠지만, 아이린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따스한 면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철혈의 여제였다.

큰 혼란이 일어나고 많은 피를 보게 되겠지만, 카이라스라면 모를까 아이린이라면 100 만, 아니 1000 만에 달하는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대륙 전역의 대다수의 인간들을 위해서라면 쓰레기에 속하는 인간들일 경우 가차없이 폐기처분해버릴 수 있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직 어리석은 인권단체 놈들은 쓸모가 많이 있죠. 일단 이번 암흑가 쪽도 인권단체 놈들을 이용해서 우리 쪽의 '일부'가 인간 세계를 동경해서 끼어들고 싶어서 한 것으로 알려지게 만드세요. 후후훗."

에라시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인권단체들을 조소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신들만이 무조건 옳다고 여기며 남의 말은 결단코 듣지 않는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잔악하고 사악한 자들이고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정의롭다고 여기는 스스로들까지 속이는 위선적인 집단들.

만약 자신들의 행동이 인간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행동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들이 할 절규에 묘한 기대감을 품은 에라시안은 잔혹하게 미소를 지었고, 세레시아는 하찮게 여기는 인간들의 세계 따위를 동경한다고 거짓말을 해야하는 것이 기분이 나쁜듯 했지만 에라시안의 명령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세레시아는 밖으로 나간 후 혼자서 자신의 레어 안에 남게 된 에라시안은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거의 평상시에는 그녀의 옆에 있던 루나도 엘프들에게 하루 동안 '빌려준' 상태였기에 지금쯤 엘프들의 집중 윤간 속에서 쾌락에 깊이 빠져있을터였으니 이곳 레어에 있는 생명체는 오직 드래곤 로드인 그녀 한 명 뿐이었다.

"방비가 제법 철저하군요. 후후훗, 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한 번은 져주도록 하겠지만, 10 년이 지나고 난 후에 준비가 갖춰지면 그 때부터 대계가 시작될 겁니다. 운명의 대적자 씨."

에라시안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드리워진 잔혹한 미소는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무시무시하였다.

*              *             *

"......"
"......"

카이라스와 카일라는 연무장에서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검을 겨누고 있었다.

대련.

현재 그들은 둘 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상급에 오른 검사로서 순수하게 검술로만 대련을 하려는 것이었다.

"......"

카이라스의 손에 쥐어진 대검은 강렬한 패도적인 기세를 풍기고 있는 반면, 카일라의 손에 쥐어진 장검의 경우는 예리하면서도 현란하다는 느낌이 아직 검이 휘둘러지지 않았음에도 전해져왔다.

"카일라 누나, 괜찮겠어?"
"응, 봐주지 말고 해."

카일라가 차가운 얼굴 위로 단호한 의지를 새기면서 차갑게 말하자, 카이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알았어. 그럼."

그리고 카이라스의 검에서 푸른 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카일라의 검에서도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올랐다.

그 후 둘의 검에 서려진 오러 블레이드들에서는 이윽고 오러의 고리, 오러 서클들이 생성되었으며 이윽고 카이라스가 자신의 대검을 들며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도록 할께.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서의 힘을 모두 쓸테니까."
"...알았어."

선공을 양보한다는 것은 고수가 하수에게 하는 행동이었지만, 카일라는 연분홍빛 입술을 살짝 깨물 뿐 그의 말에 얌전히 따라 먼저 선공을 했다.

콰아아앙-

그리고 처음부터 날라온 것은 공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쇼크 웨이브의 물결이었다.

이곳 연무장 자체가 자체 수복 능력과 10 서클의 마스터인 카이라스 본인이 직접 설계한 온갖 마법들이 쳐져있었기에 카일라는 자신의 힘을 마음껏 전력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처음부터 이런 무지막지한 것이라니, 뭐 그런 카일라 누나도 좋긴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라스는 간단하게 검을 휘둘러서 공간을 뒤흔드는 쇼크 웨이브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마법을 쓴 것은 아니었다.

10 서클 마스터인 그라면 마법을 쓰는 것으로 간단하게 카일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검술로 하는 대련일 뿐이었다.

그가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서 그야 보유한 권능 중 하나인 공간격리를 사용해 카일라에 의해 뒤흔들리는 공간과 자신이 있는 공간을 '격리'하여 가볍게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었다.

"......"

그것을 본 카일라의 눈이 떨려왔다.

'검사의 힘을 쓴 것 만으로 저렇게 가능하다니.'

자신의 남편이 마법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 본인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검사로서의 힘으로 자신의 권능을 간단히 막아냈다는 것에 솔직히 말해서 아내이기 이전에 검사로서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설경(雪景)과도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진 풍성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떨리면서 그녀의 머리카락들까지도 함께 떨려진 것이었다.

분하거나 하는 감정 때문에 떨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엇인가...깨달음이 보일듯 말듯 하는 느낌?

'아...'

방금 전 카이라스가 보여준 한 수에서 카일라는 무엇인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바로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미 선공을 당했음에도 가만히 서있는 카이라스를 향해 2 번째의 공격을 날렸다.

그리고 이번에 그녀가 날린 공격은 공간을 뒤흔들어대는 것은 여전했지만, 아까와는 틀렸다. 바로 카이라스가 격리해둔 공간을 뛰어넘어서 그의 앞까지 전진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카이라스의 앞에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이번에는 카이라스가 공간차단의 힘을 사용하여 아예 격리를 넘어서서 완전히 '차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좀 더 높아졌네?"

카이라스는 공간격리를 파훼할 방법을 깨달은 카일라를 칭찬했다. 그런 그의 칭찬에도 카일라는 계속해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카이라스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사실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파악했다.

'역시 카일라 누나가 어떻게 보면 제일 귀여운거 같아.'

카이라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이 차가운 여인이다. 여신 같은 고고한 여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에게 있어서 카일라는 그저 사랑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아름다운 아내였을 뿐이었다.

오직 그만의, 자신만의.

당연하게도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카이라스는 이미 시공회귀 이전부터 그녀가 겉은 차가워도 사실은 속은 여린 면도 있고, 부끄러움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차가운 가면과 더불어서 자존심이 강한 면이 있어서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뿐이었다.

'카일라 누나의 그런 면도 난 좋지만.'

물론 그녀의 모든 점을 다 좋아하는 카이라스에게는 카일라의 이러한 성격들이 다 귀엽게만 보이지만 동시에 그녀가 보다 강해져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임신 이전보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어. 감도 완전히 돌아왔고 말이야."

카일라의 실력에 대해서 그녀가 원하는대로 사실대로 평가를 해준 카이라스는 가볍게 공간이동을 통해서 순식간에 그녀의 뒤를 점하면서 살짝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

카일라의 푸른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카이라스가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살짝 때리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기에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방금전 카이라스는 그저 간단하게 검사로서의 권능만으로 그녀의 뒤를 점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기까지 한 것이었다.

만약 이 때 카이라스가 죽일 생각으로 공격을 했다면(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녀는 검사로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카이라스가 아니었기에 그는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마. 오히려 조급해하는 것은 검사에게 독이 된다고. 오늘은 일단 좀 위험하긴 하지만 공간과 시간의 권능을 다루는 자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계속 가르쳐줄테니까 너무 상심해하지마."
"...응."

카일라는 카이라스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은 살짝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 했다가 얼른 미소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행동을 파악한 카이라스는 키득 웃었다.

'아, 정말 너무 귀여워 미치겠다니까.'

이렇게 귀여운 아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카이라스는 카일라의 긴 은발에 살짝 얼굴을 대며 그녀의 향기를 음미하였다. 언제나 맡아도 질리지 않고 자극적인 그녀의 향기를.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지만...카일라 누나도 곧 다시 임신을 해야겠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카이라스는 자신의 여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 엘리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절로 아버지 루스칼리스의 능글맞은 얼굴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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