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부 (16/17)

16부

“중학생이라고? 나는 고등학생인줄 알았는데 중학생이구나.” 라고 N이 말했다.

카오리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 앞에서 고등학생은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중학생이라는 것에 괜히 창피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학년이니?” 하는 그녀의 물음에 대하여 “3학년이요.” 라고 그만 거짓말을 해버렸다.

N은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이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는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둘은 N의 방안에 있었다. 카오리의 집과 같은 넓이, 같은 구조의 방이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잔뜩 들어 있는 너저분한 카오리의 집에 비해, N의 방은 무척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물론 청결함에 있어서는 카오리의 어머니 덕분에 카오리의 집이 보다 더 깨끗한 편이었지만, N 역시 여자 혼자 사는 방치고는 제법 깨끗하게 해놓고 살고 있었다.

게다가 카오리는 침대라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아이보리색의 시트 위로, 하늘색의 이불이 반듯하게 덮여있는 모습은 카오리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을 정도였다.

“그럼 나하곤 네 살 차이네.”

“스무 살이세요?”

“응.”

카오리도 N이 사가지고 온 떡볶이와 순대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아까부터 굶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꿀맛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집은 왜 나온 거니? 부모님한테 혼났어?”

“그게…”

카오리는 대답을 얼른 하지 못했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면 카오리의 집안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주위 시선에 민감해지곤 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어머니는 몸을 팔고 있고,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항상 때리고, 그러한 환경에 그는 전혀 이상한 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만 살아왔고, 그래서 그게 정상인 줄 알았다.

자신의 가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그때부터 카오리는 주위 시선에 민감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카오리의 집안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N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싶었다.

“할아버지랑 싸웠어요.”

“할아버지랑? 여기서 할아버지까지 같이 살고 계신다고?”

“예.”

N은 또다시, 무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룸에 그렇게나 대가족이 살고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뭐 때문에 싸운 거니?”

“그냥… 별 거 아닌 일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고, 어머니한테 뭘 던지고 있었는데 그게 어머니한테 맞고 튕겨져 나와서 저한테 맞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어요.”

“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때린다고?”

“예.”

N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치켜 떴다. N의 눈은 쌍꺼풀이 없고 옆으로 찢어진 아주 작은 눈이었는데, 놀라서 크게 뜬 모습은 어쩐지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동공이 순식간에 크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럼 네 어머니께선 시아버지한테 맞고 사는 거야?”

“시아버지요?”

“그래. 시아버지.”

카오리는 난처한 표정을 하며 난감해 했고, N은 그런 카오리를 보면서 얘가 무식해서 시아버지도 모르나 싶었다. 그래서 “시아버지 몰라? 네 아버지의 아버지.” 라고 말을 해봤지만 카오리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오리는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카오리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개념은 낯선 것이었다. 카오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 친구들이나 친구들의 부모님은 카오리에게 아버지에 대한 것을 물어보곤 했는데, 그때 마다 카오리는, 자기한테는 아버지가 없다고 대답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에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고, 카오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앞으로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얘기하고 다니라고 했다. 할아버지하고 아버지의 차이점이 뭐냐고 카오리가 묻자, 할아버지는 그게 그거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도 있고 아버지도 있는 아이가 있다고 카오리가 되물었지만, 할아버지는 귀찮으니까 그만 물어보라고 카오리를 다그쳤다.

그 뒤 학교에 진학하면서, 카오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실생활에서 적용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것이었다.

“엄마는 누구하고 결혼했어?” 하고 카오리가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엄마는 결혼 안 했어.”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내 아버지는 누구야?” 라고 물어보면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네 할아버지가 아버지일 거야.” 라고 애매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개념이 올바로 이해되기란 무척 벅찬 일이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라는 건, 물론 학교에서 배운 것이긴 하지만 N이 막상 그렇게 물어봤을 때는 그 개념이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 아버지의 아버지가 네 어머니한테는 시아버지잖아. 너 좀 무식하구나.” 라고 말하며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게 좀 복잡해요. 제 어머니의 아버지가 제 아버지입니다. 제 할아버지인데 사실 제 아버지예요.”

N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방금 말한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야 외할아버지야?”

이번에는 카오리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여간 저는 할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살고 있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없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말하길 제 할아버지가 실은 제 아버지래요.”

N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번에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카오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혹시…’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네 어머니의 아버지인 거야. 그치?”

“예.”

“그런데 네 할아버지가 네 어머니하고 잔 거지?”

“자요?”

“섹스… 섹스 말야.”

“섹스요?”

“섹스 몰라? 남녀가 그… 옷 벗고 부등켜 안고…”

“박는 거요?”

“그… 그래. 그거 박는 거.”

“맞아요. 할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박아요.”

N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그러나 ‘역시…’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린지 알겠다. 알겠어.”

어쩐지 N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하여튼 그렇게 할아버지하고 싸웠단 말이지?”

“예.”

“언제 싸웠는데?”

“아까 전에요.”

“그럼 지금도 할아버지께서 집에 계셔? 안 계시면 몰래 들어가보지 그래?”

“지금도 계세요.”

“일은 안 나가셔?”

“어머니가 돈을 버느라…”

그러나 카오리는, 어머니가 몸을 판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았다. 카오리가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 집으로 찾아오는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박아대고 그래서 버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을 하자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서 카오리의 할아버지와 심하게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했고, 할아버지가 데려온 아저씨도 “아니라는데 니들이 뭔 상관이야?” 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함께 싸움을 했는데, 경찰은 돌아가버렸지만 카오리는 방구석에서 할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던 것이다.

그때 카오리의 어머니 역시 할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는데, “너는 왜 애새끼 입단속도 제대로 못 시키는 거야?” 라는 말에서, 카오리는 자기가 학교에서 내뱉은 말이 문제였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아저씨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머니한테 박는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일을 하신다고? 무슨 일을 하시는데?” 라고 묻는 N에게도 “그냥 회사요.” 하고 어색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참 힘들게 사는구나.” 하고 N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카오리는 N의 태도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N이 보여준 호의는, 사실 그렇게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힘들게 사는구나” 라는 말은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오리 주변의 그 어떤 사람도, 카오리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의 가정사를 알게 된 그의 선생들은, 오히려 골치덩이를 하나 떠안은 얼굴로 그를 멀리했고,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신들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치를 떠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카오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지 않았던 것이다. 속으로는 그래도 불쌍한 녀석이라고 동정할지 모르겠지만, 괜히 역일까 봐 카오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참 힘들게 사는구나, 라는 짧은 말에, 카오리는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려 버렸다. N은 왜 우냐고 묻지 않고, 카오리에게 다가와서 등을 톡톡 두들겨주었다.

그들은 그러한 위로 속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모두 다 먹어 치우고,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해서 라면을 끓여서 먹고, 하루 정도 지난 밥인데 여름철이라서 이걸 먹어도 되나 망설이다가, 그래도 배가 부족해서 그것까지 다 말아서 먹고 난 후에야 비로서 배가 부르다고 만족을 할 수 있었다.

“실은 나도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괴로워하고 있었단다.”

“누나도요?”

“그래.”

N은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어서 뚜껑을 땄다.

“얼마 전 남자친구하고 헤어졌거든.”

“애인이요?”

“그래. 애인.”

카오리에게 있어서 애인이라는 개념 또한 무척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잠자코 N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N은 뚜껑을 딴 캔맥주를 입에 쏟아 넣은 뒤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같은 과 선배야. 오티 때부터 나한테 자상하게 잘해줬던 사람인데, 입학 후에도 나한테 밥 사주겠다고 데리고 다니고, 수업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잘 들어갔냐고 항상 문자를 보내주던 사람이었어. 어쩌면 지겨울 정도로 나한테 자주 문자를 보내주곤 했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이 사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술자리에서도 내가 취한 것 같으면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몇 번이나 그러길래, 이 선배는 확실히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인 것 같으니까 어쩌면 사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지.”

“잘생겼어요?”

“생긴 거는 그냥 보통이었어.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머리는 짧았고, 얼굴도 새카만 편이었어. 키는 너 보다도 작았고, 고향이 경상도인데 군복무도 경상도에서 했기 때문에 경상도 사투리가 말투에 진하게 배어 있었지.”

N은 말을 하는 도중에 계속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 선배에 대해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의 이별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종강을 바로 앞두고 헤어졌기 때문에, 그 이별에 대해 하소연할 대상도 모두 이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 이별 후 그 심정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카오리와의 대화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주말에 같이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단둘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사귀기 시작했어. 누가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술을 마신 후에 선배가 나를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키스를 하면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지.”

그러나 카오리는 사귄다거나 연애를 한다거나 하는 말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카오리는 이성에게 호감을 느껴본 일이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일그러진 가족사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그의 성장과정이, 어쩌면 그의 감정 마저도 메마르게 한 것일지 모른다. 그는 연애를 하기 위한 감정이라는 것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것을 몰랐다.

“사귄다는 것이 과내에 다 알려지고, 우리는 축복과 놀림을 동시에 받으며 연애를 이어나갔지.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정말로 행복한 시간들이었어. 둘이 손잡고 팔짱 끼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남들의 시선이 잠시라도 사라지면 당연하다는 듯이 키스를 해댔고, 같이 시험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다녔고, 그렇게 순식간에 몇 달이 훌쩍 지나가버렸어. 그러다가 헤어진 거야.”

여기서 N은 말을 끊었다.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를 다시 홀짝였다. 그리고 창문 밖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무엇엔가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 카오리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카오리가 궁금한 것을 못 참고 “왜 헤어졌어요?” 하고 물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카오리가 그렇게 물었을 때에도 “응?” 하고 다시 되물을 정도였다.

“다른 여자하고 잤어. 그 선배의 동기하고, 잠을 잔 거야.”

“박는 거요?”

“그래. 박는 거.”

“그런데 왜 헤어진 거예요?”

“왜 헤어졌냐니? 나 말고 다른 여자하고 잤으니까 당연히 헤어진 거지.”

그러나 카오리는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생리를 할 때마다 그 여자한테 추근댔던 것 같아. 내가 생리를 하는 바람에 나하고 섹스를 못해서 발정이 나서 죽겠으니 한 번만 대달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추근거렸다고 하더군. 그 여자, 알고 보니 선배가 휴가 나왔을 때 술에 취해서 선배하고 한 번 잔 적이 있었던 사이였어. 그러니 그렇게 과감하게 들이댔던 거지. 한 번 몸을 섞은 사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계속 거절을 했다고 했어. 나하고 선배하고 사귀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지난 달에 한 번 허락했던 것 같아. 왜 허락을 했는지 나한테 말해주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어쩌면 또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 왜냐면 나한테 미안하다고 울면서, 내 얼굴 볼 때 마다 나한테 미안해 죽겠다고, 더 이상은 속이지 못하겠다고 모든 걸 다 실토했으니까…”

카오리의 개념으로는, 애인이 다른 여자랑 잤다고 해서 그것을 큰일로 여기는 N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건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었다. 카오리에게 있어서 ‘박는다’ 라는 것은, 눈앞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카오리 자신도 어머니와 흔히 즐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남과 한다고 해서 헤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척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N을 실의에 빠지게 한 일이라는 건 감을 잡을 수 있었으므로, 그는 N의 심정을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다.

“헤어진 후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랑 잤다는 것 보다, 도대체 나로서는 뭐가 부족해서 다른 여자를 찾은 건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다는 것인지, 생리를 하는 건 고작 며칠 뿐이고, 참으려면 충분히 참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만약 참지 못하겠어도 나한테 말했으면 내가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만족시켰을 수 있었을 건데, 그럼에도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거야. 그 여선배는 나 보다 키가 큰데, 그럼 나처럼 키가 작은 여자는 싫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 여선배는 나 보다 말랐는데 내가 통통한 것이 거슬렸던 것인지, 다른 무엇 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거야. 이해되겠니?”

카오리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N은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비어버린 캔을 구석에 있는 비닐봉지에 넣으면서 “내가 너한테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라고 말했고, 카오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에요.” 라고 대꾸했다.

“하여간 누나도 지금 이렇게 힘든 일이 있는데 참고 견디고 있는 거야. 너도 할아버지랑 싸운 일이 속상하겠지만, 그러나 어쩌겠니? 네 할아버지인데? 게다가 아버지이기도 하다면서? 그냥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집에 들어가. 아마도 네가 들어오지 않아서 네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무척 속상해 계실 거야. 살다 보면 그렇게 싸우는 일도 있지 않겠니? 누나도 가끔 엄마하고 싸울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내가 말을 조금 심하게 할 때도 있지. 그러나 금방 화해를 해. 가족이니까. 어쩌겠어? 그 선배처럼 헤어지면 끝인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카오리에게 있어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자, 그러니 이제 집에 들어가는 거야? 응?” 이라고 N이 말했을 때에도, 그는 마지 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카오리는 여전히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N에게 떠밀려 N의 집을 나서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잘못했다고 빌어.” 라고 N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카오리와 N의 첫 만남이었다. 카오리는 그렇게 N의 집을 나서며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고, 카오리가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N은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으면 누나한테 종종 찾아와도 좋아. 이달 말까지는 여기 있을 거 같으니까.” 라고 말을 했다.

카오리는 그 길로 집에 들어가서 할아버지에게 정신이 나갈 때까지 두들겨 맞았지만, 그래도 N을 만난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쩐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그렇게 자상하게 대해준 사람은 N이 처음이었다. 그의 집을 찾는 그 ‘아저씨들’도, 덩치가 큰 카오리를 겁내는 같은 반 친구들도, 그와 그의 가족을 경계하는 동네 사람들도, 그에게는 언제나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카오리는 N이 전혀 싫지 않았다. “참 힘들게 사는구나.” 라는 말은, 그가 잠이 들 때까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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