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음, 신차는 아무리 빨라도 1개월은 걸립니다. 그리고 가격대가 높으면 그만큼 출고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됩니다. 아무래도 비싼 차는 그리 많이 만들지 않거든요.”
이현우는 돌고 돌아 처음 방문했던 수입차 매장으로 왔다.
서울 시내의 수입차 브랜드는 다 둘러봤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차가 없더라.
차알못 이현우에겐 그놈이 그놈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냥 가격과 김하나의 의견을 듣고 결정했다.
이현우가 고른 것은 검정색 스포츠카였다.
세단은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SUV는 너무 커서 싫었다.
“그러니 리스는 어떠신가요? 어차피 할부 36개월을 하실 거라면 리스가 더 나으실 겁니다. 리스는 출고가 압도적으로 빠르거든요. 만약 지금 계약하신다면 저녁에 차량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요.”
영업 사원이 허허거리며 자기 능력을 자랑한다.
그 자신감이 마음에 든다.
그나저나 리스라.
생각해 본 적 없는 구매 형태였다.
그러나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할부나 리스나, 돈을 나눠서 낸다는 것 같다.
기간이 끝나면 자동차가 완전히 이현우의 것이 된다는 것도 같고.
이현우는 망설임 없이 펜을 들었다.
“좋아요. 오늘 저녁에 차를 받을 수 있다는 말. 참 마음에 드네요. 서명하죠.”
“감사합니다. 고객님.”
영업 사원의 입꼬리가 귀까지 걸린다.
그만큼 큰 거래를 성사한 거다.
풀옵션까지 전부 다 합쳐서 2억 5천 6백만 원.
이현우 덕분에 영업 사원은 이달 실적을 다 채웠다.
“조심히 가십시오! 차는 인도되는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가는 길.
이현우는 영업 사원이 건넨 사은품을 양손 가득 들고 있다.
그런 이현우를 향해 영업 사원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호텔로 데려다주면 돼?”
이제 김하나와도 헤어질 시간이었다.
3시가 다 되어간다.
오후 5시부터 방송하는 김하나는 얼른 집에 가서 방송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이현우도 호텔로 돌아가 할 일이 있다.
오늘 낮은 정소림 방송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쿵쾅녀에 대한 복수와 카섹스를 하느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정소림의 방송이 끝나는 시간이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이니, 서둘러 가야 한다.
“어, 빨리 가자. 방송 늦겠다.”
“응? 나 방송 시간 한참 남았는데? 가서 커피도 한잔할 수 있어.”
“네 방송 말고. 다른 여캠 방송 늦겠다고.”
“이잇! 이 오빠가. 진짜. 나 오늘 예쁜 짓 엄청 많이 했다면서. 딴 여캠 방송을 보러 간다고?”
타 여캠에 대해 말을 하자, 김하나가 입술을 삐쭉였다.
화가 난 듯 보이는 음성.
하지만 그저 여우짓일 뿐, 진짜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너도 일하듯 이것도 내 일이니까. 자, 출발.”
“아우. 오빠는 진짜 내 남친이었으면 반쯤 죽었어. 남친이 아니라 회장님이라 봐준다 내가.”
빨간 외제 차가 도로를 달린다.
비싼 차의 앞길을 막는 차가 없어서인지 호텔까지는 금방이었다.
“오빠!”
오늘 아울렛에서 산 물건과 사은품을 손에 가득 들고 차 문을 닫으려는데, 김하나가 운전석에서 내려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흘린 게 있나?
지금은 손이 없어서 받을 수가 없는데.
“차에 흘린 거 있어? 작은 거면 내 주머니에 넣어줘. 주머니에 안 들어가는 거면 여기 올려주고.”
“응. 놓고 간 거 있어.”
잔뜩 미소를 지은 김하나가 점점 더 이현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쪽하고 이현우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작별 선물! 딴 여캠을 봐도 난 잊지 말라고! 진짜 갈게!”
볼에 남겨진 촉감에 이현우가 헛웃음을 뱉었다.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김하나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빨간 외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호텔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간다.
“들어드릴까요?”
이현우의 양손 가득한 짐을 보고 벨 보이가 다가왔다.
그는 이현우의 볼을 잠깐 바라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짐을 똑바로 쳐다본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이현우는 기분 좋게 짐들을 맡겼다.
그렇게 무겁진 않았지만, 불편했는데 들어준다면 땡큐지.
이현우의 쇼핑백들이 벨 보이 웨건에 차곡차곡 쌓였다.
“1114호인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리셉션에 말할 게 좀 있어서요.”
차가 오늘 저녁에 온다고 하니, 미리 호텔 측에 말해두어야 했다.
이현우가 리셉션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항상 웃는 미소로 맞이하던 직원들이 표정을 굳힌다.
이현우는 뭐지? 싶으면서도 여기 온 목적부터 이야기한다.
“제가 차를 한 대 샀거든요? 저번에 들어보니, 장기 투숙자는 지정 주차를 할 수 있다던데요.”
“네. 고객님. 장기 투숙자 전용 주차 공간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객님. 혹시 거울을 한 번 보여드려도 될까요?”
“거울이요?”
이현우는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그간 보여준 서비스 정신이 있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셉션 직원이 거울을 앞으로 내민다.
거울로 비치는 이현우의 볼에는 새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 ㅆ….”
ㅣ발.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김하나가 볼에다가 장난을 쳐놓고 간 것이다.
어쩐지 주차장에서 서둘러 나가더라니.
이현우가 손으로 볼을 비벼 립스틱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새빨간 립스틱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지우시면 번질 텐데, 제가 지워드려도 될까요? 립스틱은 화장 솜으로 지우는 게 제일 빠르거든요.”
“아,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살포시 웃은 리셉션 직원이 파우치에서 화장 솜을 꺼냈다.
촉촉한 화장 솜이 얼굴에 닿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
직접 닦으라고 주면 될 걸 왜 굳이…?
요새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녀서 그런지 금세 의문이 해결되었다.
여직원의 행동과 몸짓, 손짓에서 느껴지는 호감.
그녀는 명백히 이현우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동안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왜 이러는 걸까?
이것 또한 잠깐 생각해보니 금세 의문이 해결되었다.
이현우가 바깥에 나올 땐 예전 옷들을 입고 나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하나가 코디를 해준 명품들을 휘감고 있다.
옷 하나 차이로 대우가 이렇게 바뀐다.
참으로 우습다.
“큭….”
“왜 웃으시는….”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나서. 립스틱은 다 지워졌나요?”
“네.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여자친구분이 장난끼가 심한가 보네요.”
“여자친구 아니에요.”
몇 번이고 여자가 바뀌는 것을 봤을 텐데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 남산 호텔엔 드나드는 손님이 많으니, 이현우가 직접 여자를 옆에 끼고 오지 않는 이상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호의를 받았으면 돌려주는 게 도리겠지?
“어쨌든 감사합니다. 제가 창피를 당할 수도 있었는데. 막아주셨으니까 보답을 하고 싶은데. 식사라도 한 끼 어떠신가요?”
상대 쪽에서 먼저 작업을 걸어왔다.
호텔 리셉션에 뽑힐 정도의 외모.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이현우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적극적인 한 걸음을 내디덨다.
“아, 이러시면 곤란한데….”
“곤란하시면 어쩔 수 없고요.”
하지만 튕기는 건 사양이다.
어딜 밀당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지.
여캠들을 거느리기 전이라면, 이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간 쓸개를 내주고도 모자라 영혼까지 받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우에게 아쉬운 건 없었다.
반반하고 깔끔한 스타일에 잠깐 호감이 갔던 것뿐이다.
이현우가 깔끔하게 물러서자 호텔 여직원이 낭패한 기색으로 다시 말을 붙였다.
얼마나 급했는지, 호텔 규정도 어기고 이현우의 손을 번쩍하고 낚아챘다.
“죄송해요. 호텔 규정이 어쩔 수가 없어서요.”
손에서 종이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며, 표정으로는 제발, 제발, 제발을 외치고 있었다.
이현우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손에 잡힌 것은 그녀의 명함이었다.
사원 문혜지 010-XXXX-XXXX.
“웃기는 사람이네.”
“예?”
“아,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벨 보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이현우는 혼자 피식했다.
정말 웃긴 여자였다.
매달리는 입장, 그러니까 을의 입장이라면 모든 것을 다 걸고 매달려야지.
그 상황에서 자존심과 자기 위치를 지키려고 하면 되나.
이게 그 여자식 기 싸움인가, 뭔가인가?
이런 면에 있어선 BJ들이 훨씬 더 나았다.
그녀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만큼, 갑을 관계에 있어서 완벽하게 굴종하니까.
재밌다.
돈이 많아지니까 인생 참 재밌다.
누군지 모르지만, 누군가 말했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 있다고.
아니다.
그건 틀렸다.
이현우는 그 말을 한 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해보니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더라.’라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던 거였다면.
돈이 부족한 거 아니었을까?
이현우는 명함을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버릴 필요는 없지.
버릴 거라면 먹고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여캠이 아니라, 순수 일반인 중에서 처음으로 이현우에게 먼저 다가온 여자였다.
그 기념으로 이현우는 소중하고 귀한 시간을 내어 쾌락을 가득 느끼게 해줄 의향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혹시 팁 받으시나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호텔 비용에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남산 호텔 직원 전부는 팁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객님의 마음은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여기까지 봉사해준 벨 보이에게 팁을 주고 싶었는데.
벨 보이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안 받으면 어쩔 수 없지.
이현우는 쇼핑백과 사은품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옆에 쇼핑백들을 대충 놔둔 뒤, 노트북부터 켰다.
-열혈 팬 백수킹 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오! 백수 형이다.
-ㅂㅅㅇ
-ㅂㅅㅇ
-외쳐! 백수업!
[백수킹 님께서 코인 10,000개를 선물!]
-입장료. 현생 때문에 좀 늦었어요.
-ㅂㅅㅇ
-와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백수형님 클라쓰ㄷㄷㄷ
-백수 형 전매특허 입장 만코인
-ㅂㅅㅇ
-ㅂㅅㅇ
‘ㅂㅅㅇ’ 이란 꼬레아TV의 채팅 문화 중 하나로, 인지도 있는 BJ나 큰손이 왔을 경우에 치는 채팅이었다.
시청자들이 열심히 치는 ‘ㅂㅅㅇ’ 사이로 이현우의 만 코인이 터졌다.
방송 화면과 채팅창 사이에는 딜레이가 있기에, 시청자들이 먼저 반응하고 난 뒤에야 정소림이 반응한다.
“앗! 백수 회장님, 오셨…. 만 개! 오늘도 입장하자마자 만 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요새 회장님 덕분에 방송이 너무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