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주의***
이번 편에는 NTL(네토리, 타인의 연인을 빼앗는 것)이 서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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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림은 인상을 쓰며 도로 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그 남자가 회색 추리닝을 입고 있던가요? 키는 180 정도에.”
“어? 맞아요. 혹시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 네. 현우 씨. 정말 죄송한데, 요 앞 정류장 말고 다른 곳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어요? 금방 가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소림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던 남자는 높은 확률로 남자친구일 것이다.
오늘의 외출 때문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으니까.
저번의 외박과 까톡 때문에 남자친구가 바람을 의심하고 있었다.
요즘 갑자기 붙은 큰손과 무슨 일 있는 것 아니냐고.
저번에 밖에서 자고 온 것이 정말 친구 집에서 자고 온 것이 맞냐고.
까톡은 왜 그리 자주 하냐고.
정소림은 그런 의심을 완전히 벗겨줄 수 없었다.
진짜 바람을 피운 일은 없지만, 비슷한 일은 했으니까.
그리고….
그에겐 밝힐 수 없지만, 그런 마음을 품기도 했었으니까.
증명할 수 없으니 마주 화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면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순 없었다.
조금만.
그래, 딱 1년만.
이현우와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으면 결혼 자금은 물론 집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지금 혼자 좋자고 이현우를 만나러 가는 건가?
아니었다.
둘이서 하는 결혼이지 않나.
“여기서 뭐 해?”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뒤.
그녀의 남자친구가 숨어있었다.
추레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항상 여유롭고 매너 있던 수현의 모습에 비하면….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정소림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털어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남자친구에게 미안한 부분이 있지만, 분노로 뒤덮는다.
“소, 소림아.”
“지금 설마 나 미행한 거야? 내가 그 회장인지 뭔지 만나러 갈까 봐? 오빠는 이제 나 완전히 못 믿는가 보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생각해 봐. 안 그러던 애가 옷도 그렇게 입고 나가는데. 남자친구로서….”
“아. 나는 옷도 이렇게 입으면 안 된다? 그냥 매일 추레하게 다녀라?”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게 그 소리가 아니잖아!”
“아니면 뭔데! 결국 오빠가 나 못 믿겠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도로 위에서 격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10년 차 커플은 주변 사람이 있든 말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싸워댔다.
그리고 그 끝에.
정소림이 선언했다.
“오빠, 우리 10년이나 만났는데. 아직도 참 믿음이 없다. 그치? 잠시 떨어져 있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헤어지자는 거 아니니까 괜히 오버할 생각은 하지 말고. 진짜 좀 떨어져 있고 싶어. 지금 오빠 하는 행동 지긋지긋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현우를 만나러 가는 데 둘러댈 말도 더 이상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남자친구를 믿었다.
서로 첫사랑이었다.
만난 기간만 10년이다.
정소림은 이 정도 고난은 견딜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잠깐! 소림아!”
“이거 놔. 집은 오빠가 써. 난 잠깐 엄마 집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그럼 당분간 안녕.”
남자 친구가 정소림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정소림은 거칠게 팔을 휘둘러 손을 떨쳐냈다.
단화를 신은 정소림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그 뒤로 팔을 뻗고 있는 남자 친구가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
정소림은 검은색 스포츠카 조수석에 올라타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돈을 벌려면 일해야 하고,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 감정은 뒤로 숨겨야 했다.
“아니에요. 별로 늦지도 않았는데요, 뭘. 그보다 아는 사람이면 혹시….”
“네. 맞아요. 남자친구. 저번에 외박한 거 하고 까톡하던 거를 들켜서. 의심하고 있더라고요.”
“아이구, 그럼 어쩌죠? 괜찮아요? 이대로 나와도?”
“네. 방금 싸워서….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현우가 남자친구를 목격했기에 어쩔 수 없이 화제가 나왔다.
정소림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직도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남아있는 탓이다.
그때, 이현우가 슬며시 몸을 틀며 조수석까지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정소림을 껴안았다.
“…!”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뒤따라올 정도로 남자친구가 소림 씨를 좋아한다는 거 같으니까요. 그러니 안 좋은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다가 데이트 하는 동안에는 내가 남자친구인데? 나도 좀 신경 써 줘요.”
“아…. 그랬죠….”
정소림은 갑작스러운 허그에 놀랐지만 이현우를 밀쳐내진 않았다.
데이트를 할 때엔 큰손이 남자친구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주입된 덕분이었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검은색 스포츠카 안에서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그중에는 오늘 가는 곳에 대한 화제도 포함되었다.
“꼬레아TV 큰손 모임이요?”
“네. 소림 씨가 알지 모를지는 모르겠는데…. 꼬레아TV에선 꽤 유명한 형님들이에요. 사실 오늘 소림 씨랑 둘이서만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형님들이 계속 부르셔서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됐어요. 혹시 많이 부담돼요?”
“네? 아뇨. 괘, 괜찮아요. 큰손 분들이 많이 계시는 곳이라면 좋죠. 안면도 트고 하면요.”
이는 진심이었다.
큰손이 모이는 곳이라니.
BJ에겐 꿈의 장소나 다름없지 않나.
만약 거기서 다른 큰손과 친해지게 되기라도 한다면.
이현우 말고도 또 다른 수입원이 생기는 거다.
물론, 이현우만큼 많은 돈을 쏴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의 모처.
간판조차 없는 모던한 건물.
크고 세련되어 보이는 건물이기는 하나, 풀빌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밖과는 전혀 달랐다.
방음에 엄청 신경 는지, 밖에선 전혀 들리지 않던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도.
화순 방송에 인사를 하고 온다고 좀 늦었더니, 그사이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가죠. 3층에 있다고 하니까.”
“네, 네.”
이런 곳인 줄은 몰랐던 듯, 정소림이 약간 떨면서 대답했다.
이런 곳인 줄 몰랐던 건 이현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의연한 척 정소림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랐다.
오로지 유흥과 숙박 목적으로만 지어진 건물인 듯, 여러 시설이 있는 1, 2층을 지나쳐 올라가자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는 공간이 펼쳐졌다.
족히 4, 50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간.
그 안엔 7쌍의 남녀가 짝을 맞춰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
흥청망청의 어원이 무엇이던가.
조선시대 연산군이 궁궐 기생을 뜻하는 흥청과 놀아나다 망했다고 하여 생겨난 말 아니던가.
처음 보는 큰손 형님들과 여자들은 딱 그런 식으로 놀고 있었다.
여기 앉아있거나 서 있는 사람 중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입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다.
여기 모인 여자들은 전부 옷을 헐벗고 있었다.
그들이 벗은 옷은 테이블과 소파 주위에 흩어져 있었고.
테이블의 위엔 007가방이라 부르는 각진 서류 가방이 올려져 있다.
그 속에 든 것은 5만 원 뭉치 다발들.
몇 번 꺼내 갔는지, 절반 정도가 비어있다.
“어! 누구야?”
누군가 새로 들어온 이현우와 정소림을 보고 외쳤다.
얼굴이 새빨간 것이 거나하게 취한 모양.
그나마 멀쩡한 큰손 중 하나가 이현우의 정체를 추론했다.
“백수? 백수 맞지? 이제 온 거야? 꽤 늦었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형님들. 백수킹 이현우입니다.”
“어어, 백수! 백수구나! 어서 와 어서 와.”
“자자, 형님 아우님들. 백수도 새로 왔으니까 분위기 환기 좀 하고 갑시다. 아무래도 백수는 처음 오는 자리인데 벌써 달리면 적응 못하지 않겠어요? 다들 정신 차리고 자리에 앉고. 좋아요. 백수는 이리 오고.”
큰손들은 이현우를 격하게 환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로선 돈 많은 친구가 단톡방에 들어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경쟁상대도 아니고.
서로서로 돕고 끌어주는 관계인데,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면 좋은 거였으니까.
“혀, 현우 씨…. 여긴 원래 이런 분위기에요…?”
이현우의 손에 끌려 뒤를 따라가는 정소림이 조심스럽지만 급박한 어조로 물었다.
이런 곳인지 알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모여서 재밌고 신나게 노는 게 아니라.
무슨 퇴폐업소나 유흥업소 처럼 노는 곳 아닌가.
이는 이현우도 몰랐던 사안이었다.
재밌게 논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건 무슨 거의 섹스 파티 분위기여서 크게 놀랐다.
그래도 큰 걱정은 없었다.
‘너무 걱정 마. 네 여자는 아무도 안 건드리니까. 애초에 다른 여자도 많은데 굳이 데려온 파트너를 건드릴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이 방에 없어.’
여기 오기 전, 단톡방에서 나눴던 대화다.
이현우가 파트너를 데려가는 것에 걱정을 하자 큰손 중 하나가 해준 말이었다.
“걱정 말아요. 저기 형님들하고 여자들하고 서로 좋아서 저러는 거니까. 소림 씨가 싫다고 하면 강요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가 지켜줄게요.”
“아, 네….”
이현우의 말에도 정소림이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싶은 얼굴이다.
이현우는 그녀의 고민을 덜어주기로 했다.
“저기 테이블 위에 돈 보여요?”
“네? 네, 보이긴 보이는데.”
“오늘 이 장소하고 저 상품 마련한 게 전부 제리 형님인데. 저 돈 오늘 다 쓸 거래요. 누구한테 쓸 건지는 말 하지 않아도 알겠죠?”
“아….”
정소림의 얼굴에서 고민이 사라졌다.
그녀가 남자친구와 싸우고, 이현우를 따라나선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돈.
결혼 자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테이블 위엔 5만원 짜리 뭉치가 몇십 다발이나 있었다.
한 뭉치에 500만 원이니, 대략 1, 2억은 쉽게 넘어 보이는 금액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소근대? 빨리 와. 빨리. 후레자식 삼잔 먹어야지. 으하하.”
“아으, 형님 아재 냄새나요. 그게 언제적 개그에요? 백수야, 후래자 삼배는 알지? 페이스 맞추기 위해 같이 달리자는 거니까. 한 방에 가즈아.”
진짜 세 잔을 따라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 잔 같은 글라스 한 잔.
그것도 40도가 넘는 위스키가 이현우와 정소림에게 내밀어졌다.
“예! 가겠습니다!”
이현우는 호기롭게 글라스를 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넘긴다.
독한 양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화끈하다.
그 모습을 본 정소림도 조심스레 글라스를 붙잡았다.
그리고 꿀꺽꿀꺽 삼킨다.
아니, 삼키려 했다.
“으엑…!”
양주는 너무 쓰고 독하고 화끈했다.
정소림이 양주를 마셔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너무 독하고 쓰고 화끈해서 한 번에 마시질 못하겠다.
그때, 누군가 정소림을 향해 외쳤다.
“다시 원샷하면 50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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