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시간을 되돌려 수요일.
이유나는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 있었다.
아니, 사실 잠을 못 잤다.
이현우의 고백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였다.
“으아아. 진짜 어떡하지?”
솔직히 말해 이현우가 싫은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사귄다고 생각하면?
물음표가 띄워진다.
호감은 있지만 사귈 만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는 그녀가 모쏠인 탓이 컸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자기감정을 제대로 모르는 거다.
그리고 아예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기도 했고.
“후우우, 일단. 톡을 보내놓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거야.”
-좋은 아침입니다. 회장님.
-어제 고백하신 거 답변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이유나.
그러다 사족은 다 빼버리고 필요한 내용만 남게 된다.
그러길 10분.
답장이 없다.
가만히 누워 답장을 기다리던 이유나는 하나의 메시지를 더 보냈다.
-죄송해요. 제가 모쏠이라서.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이번에도 답장이 없었다.
“주무시나? 다른 때엔 이 시간쯤에 일어나 계시던 것 같은데. 아씨! 진짜아아!”
답답한 마음에 짜증이 울컥 생겼다.
그녀가 벽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야이 씨! 너 내 방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라고 했지!”
“아악! 미친! 야! 베개 던지지 마!”
“뭐? 야? 너 이리 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데 잘 걸렸다.
이유나는 함부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동생을 응징하며 화를 풀어냈다.
“후우….”
몸을 움직였더니 스트레스가 좀 풀렸다.
화가 풀린 이유나가 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던 동생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또 지랄이야?”
“지랄?”
“그럼 지랄이지. 아침부터 왜 저기압인데?”
이게 또!
동생의 막말에 발끈하는 이유나.
하지만 아까처럼 달려들 힘은 없다.
“회장님 때문에.”
“아, 그거. 사귀는 걸로 결정하지 않았어?”
“누가? 내가?”
“어, 누나가. 어젯밤에 그렇게 하기로 한 줄 알았는데….”
“아냐. 아직 고민 중.”
“고민할 게 있나? 어차피 결혼도 아니고 사귀는 건대. 어차피 1년은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잖아. SAT 점수 유효기간도 5년이고.”
쓸모없는 동생이 의외로 조언 같은 조언을 하려했다.
이유나도 그 분위기에 동승해 진지하게 답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얼렁뚱땅 사귀어도 되는 걸까? 회장님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걸리는 점이 몇 개 있잖아. 나이 차이도 그렇고. 안 지 얼마 안 된 것도 그렇고.”
“에이. 그게 뭐 대수라고. 연예인들 보면 12살, 16살 차이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던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대화만 통하면 되지. 그런데 다른 건 좀 생각해볼 만하네. 회장 형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모르긴 하니까. 게다가 누나 말고도 후원하는 여캠들이 일고여덟 명은 되던데. 회장은 누나 포함해서 여섯 명이나 달고 있고.”
“아…. 그것도 그렇네. 으으음…. 모르겠다. 진짜….”
의외로 동생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답은 내리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시험 문제였다면 공식을 대입해서 쉽게 풀 수 있을 텐데.
이건 정말이지 답이 없는 문제였다.
“아…. 자야 하는데….”
이제 슬슬 위험하다.
지금 안 자면 저녁 방송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현우의 답장이 없어서 잠을 못 자고 있었다.
이유나는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스마트폰만 바라봤다.
그 순간, 까톡 알림음이 울렸다.
이유나가 바로 확인한다.
-괜찮아. 천천히 답을 줘도 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보다 나 오늘 방송 못 가.
“예쓰! 좋아.”
시간을 벌었다.
고백에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감이 확 줄어드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한 말이 뒤에 붙어있다.
“방송을 못 온다고?”
이현우의 메시지를 본 이유나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유나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로 답장했다.
-네?
-오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아니면 혹시 제 대답이 너무 늦어서….
-아니ㅋㅋㅋㅋ
-약속 있어.
-내가 아무리 백수라지만 현생 약속 때문에 방송에 못 들어갈 수도 있잖아 ㅋㅋㅋㅋ
-아 ㅋㅋㅋ
-죄송해요.
다행이다.
진짜 약속이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현우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을 테니.
항상 방송에 접속하진 못할 거다.
-그럼 오늘 방송은 회장님 없이 진행하도록 할게요.
-그런데 제 뉴튜브 벌써 구독자 500명 찍었어요!
-동생 말로는 엄청 빠른 속도라고 하는데, 이것도 다 회장님 덕분인 거 같아요.
-오 잘됐네 ㅋㅋㅋ
-얼른 천명 찍도록 노력해봐.
-그땐 축하 코인 엄청 쏴줄 테니까.
-넵!
-미리 감사합니다.
-(커여운 캐릭터가 절하는 이모티콘)
마지막으로 까톡을 전송하고 이유나가 스마트폰을 내려두었다.
이제 자야지.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은 왕창 벌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나는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누나! 누나!”
“으음…. 조금만 더어….”
한참 맛있는 잠을 자고 있는데, 흔들어 깨우는 동생이 너무 귀찮다.
이유나는 눈도 뜨지 않고 손을 휘적여 동생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동생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야! 일어나! 너 방송 늦었어!”
그가 이유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동생의 반말에 올라오는 빡침.
거기서 잠이 한 번 깨고.
방송에 늦었다는 말에 잠이 확 달아난다.
“지, 지금 몇 시야!”
“5시 40분. 20분 남았는데. 준비할 수 있어?”
“아악! 씨이! 야! 왜 안 깨웠어!”
“누나가 계속 조금만 더라며. 난 분명 계속 깨웠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때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남매 관계에선 언제나 잘못한 쪽은 동생이다.
이건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아마도.
“넌 일단 공지부터 써. 1시간 늦는다고.”
“하…. 진짜 내가 더러워서 동생을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뭐? 용돈 안 받고 싶다고? 내일 정산일인데?”
“아하하핫. 동생 때려치우고 노예로 전향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주인님. 지금 당장 공지 쓰러 갑니다앗!”
이지훈이 공지를 쓰러 가고.
이유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1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러나 여자의 준비시간 치곤 짧은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유나가 평소에도 화장을 그리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는 거였다.
본판이 예뻤으니, 화장에 굳이 공들일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이유나는 1시간 만에 머리 세팅과 화장을 마쳤다.
곧바로 동생이 준비해둔 방송 세팅 앞에 앉아 시작 버튼을 눌렀다.
[20살 현역 고딩) 님들 ㅈㅅㅈㅅ! 왕죄송! 늦잠자서 1시간 늦어요!]
봄여름 · 시청자 수 99명
원래 방송하는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은 탓인지.
대기방(BJ가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 시청자들이 모여있는 채팅창)에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유나가 방송을 켜자마자 채팅을 쏟아냈다.
-(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
-해
-(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
-명
-나
-기다렸어ㅠㅠㅠ
-나
-락
-후우, 올 때까지 숨 참다가 숨질 뻔.
-해
-뭐 하다 이제 온 거야
-(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
-방장은 사죄하라!
-여기가 대역죄인 봄여름이 있는 곳인가?
-해
-(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불타는 채팅 콘)
-명
-나
-잠을 왜 지금 잤어!
-이딴 게 신입 여캠?
-락
-락
-해
원래도 채팅 치는 시청자 비율이 높은 이유나의 방송이었다.
그런 시청자들이 단체로 화를 내기 시작하자 감당이 되질 않는다.
이유나는 곧바로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민나! 고멘네! 와타시…. 크게 사죄한다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상황에서 나온 한본어.
아니, 씹덕체.
그리고 도게자를 하는 듯 절을 하는 모습.
확실히 이유나는 대성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민심이 불탄 상황에서 단 한마디로 여론을 뒤집었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
-미친 갑자기 오타쿠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씹ㅋㅋㅋㅋ
-뻘하게 터졌다
‘이거! 먹힌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씹덕체였는데.
생각보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다.
이유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여자다.
그녀가 씹덕체를 밀어붙인다.
“내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다능!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아아, 그것이…. 와타시와 민나의 우정! 이랄까?”
-ㅁㅊㅋㅋㅋㅋㅋ
-아 이 또라잌ㅋㅋㅋㅋㅋ
-언니ㅠㅠㅠ 그 얼굴 그렇게 쓸거면 나줘욬ㅋㅋㅋㅋㅋ
-(토하는 채팅 콘)(토하는 채팅 콘)(토하는 채팅 콘)
“하라쇼. 그럼 민나가 용서해줬으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데스!”
-아니 얔ㅋㅋㅋ 하라쇼는 러시아어잖앜ㅋㅋㅋㅋ
-대체 어느나라 말이야 ㅋㅋㅋㅋㅋ
-이래서 여르미 방송을 못끊읍니다
민심을 잠재운 이유나는 스무스하게 방송 주도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평소대로 방송을 한다.
아니, 하려 했다.
그런데 뭔가 평소와 달랐다.
그건 이현우의 부재.
이유나 방송의 큰손이자 유일한 젖줄인 회장님이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코인도 터지지 않았다.
보통 이유나의 방송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백수킹의 돈지랄(미션).
백수킹과의 티키타카.
그리고 일반 시청자와의 소통.
여기서 두 가지나 이현우와 관계된 것이었다.
돈을 쏴주는 사람이 없으니, 리액션도 할 수가 없고.
메인 티키타카를 할 사람도 없었다.
[[름]큐깡 님께서 코인 7개를 선물!]
-오늘 해장님 안 오셔?
봄여름의 팬 네임을 달고 있는 팬이 후원했다.
고작해야 7개.
700원도 감사하긴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다.
“소, 소우데스…. 와타시 버려진 걸까나…? 아하하….”
-웃는 게 웃는 게 아닌데?
-진짜네. 왜 회장님 안 오심?
-엌ㅋㅋㅋ 딴 여캠한테 NTL 당한 거? 엌ㅋㅋ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봄여름이 지금 딱 그걸 느끼고 있었다.
항상 방송에 들어와서 코인을 후원해주는 이현우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인지.
그녀는 오늘 다시금 깨달았다.
큰손이 없으니까 방송 텐션을 유지하는 게 너무너무너무 힘들다.
그래도 그녀에겐 방송 재능이 있었다.
이현우가 없었지만 어떻게든 다섯 시간짜리 방송을 끌어나갔다.
씹덕체로 이름을 붙인다면, ‘절찬! 봄여름 똥꼬쑈!’ 정도가 되지 않을까.
방송의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짓 저 짓 다 해야 할 정도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다행히 시청자들은 만족했지만.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산일인 오늘은 굳이 이유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이현우에게 쉽게 연락할 수 있었다.
정오에 칼입금된 정산금에서 이현우의 몫을 입금하면 되니까.
“넵! 그럼 방송에서 뵐게요!”
다행이다.
오늘은 이현우가 방송에 들어온다고 한다.
어제의 똥꼬쇼를 다신 하고 싶지 않은 봄여름이었다.
이현우가 방송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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