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지루하다.
이미 대입을 마치고 SAT라는 미국판 수능을 끝낸 이유나에게 수업 시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공부도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SAT를 다시 칠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수능에 응시할 것도 아닌 이유나에겐 수업 시간은 그냥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원래 이 시간쯤에는 회장님이랑 통화하면서 노닥거리고 있을 때인데.’
‘회장님은 지금 뭐 할까?’
‘연락하고 싶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잡생각만 무수히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생각 중 90퍼센트 이상 차지하는 것이 이현우였다.
연애 초반.
설렘의 단계를 지나 깊은 감정을 막 느끼기 시작한 상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도, 틈만 나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는데.
이처럼 무료한 시간이라면 더더욱 그가 생각날 수밖에.
‘남자 친구….’
이현우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맞았다.
길거리를 같이 다니는 것도 자랑스럽다.
키도 적당히 있고, 돈도 많고, 대화도 잘 통하는 최고의 남자친구니까..
외모야…. 그 정도면 남자답게 잘생겼지.
그런데 이상하게 남들 앞에서 내 남자친구라고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이현우가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그저, 첫 연애인지라 남자친구를 소개하고 알리는 과정이 막연히 부끄럽게 느껴지는 거였다.
‘그래도 말하긴 해야겠지?’
이현우가 학교에서 한 말을 들을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듣게 된다면 슬퍼질 테니까.
그녀가 그랬다.
만약 이현우가 어떤 모임 같은 곳에 나가서, 여자친구가 없다고 하거나 그녀를 소개하는 걸 부끄러워한다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그래 밝히자.
이유나는 이현우에 대해 자세히 말하진 않더라도, 남자친구에 대한 대략적인 건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쉬는 시간.
반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유나 곁으로 모여들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니! 남자친구 어떤 사람이에요?”
“미국에서 만났어요?”
“아니, 미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야. 나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알게 된 사람. 그리고 지금 사귄 지는 5일째.”
“5일? 꺄아아아!”
“완전 풋풋할 때네요! 대박.”
이유나의 말에 남자 학생들의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하지만 시름은 깊지 않았다.
첫눈에 깊은 사랑을 느낄 정도로 빠진 학생은 없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남자친구에 대한 화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학생들의 관심은 다시 이유나에게로 넘어왔다.
어디서 살았는지, 취미는 뭔지, 왜 학교를 다시 다니는지 등.
이유나가 말을 이어 나갈수록 학생들의 호기심은 충족되었고.
그만큼 주변을 둘러싸던 학생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여학생 셋과 남학생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의 시선이 남학생에게 쏠린다.
넌 왜 여기 뭉개고 남아있냐는 시선, 다른 남학생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노는 중이었다.
“크흠. 누나. 차근차근 알아가고 싶은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신가요?”
“뭐? 미친. 야! 언니 남친 있다는 거 못 들었어?”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그리고 지금 당장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친구로서 조금씩 알아가자는 뜻이거든?”
“와…. 지영호 진짜 미친놈. 하여튼 개 또라이라니까….”
방금 전에 남자친구 있다는 얘기를 못 들은 걸까?
지영호라 불린 남학생이 호감을 잔뜩 표시하며 수줍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잠깐 고민하던 이유나는 그의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친구로서 번호는 줄 수 있어. 근데 골은 절대 안 들어갈 거야. 우리 회…, 오빠가 골대를 치워버렸거든. 아무도 골을 못 넣게 말이야.”
“헐. 대박!”
“꺄아아, 미쳤다. 언니 멋지다아.”
“와…. 좋겠다. 나도 연애하고 싶다.”
“읏….”
여학생들이 꺄꺄 거리고, 지영호는 당황한 듯 눈을 여기저기 굴린다.
그러다 포기 못 하겠다는 듯 외쳤다.
“그, 그래도! 지내다 보면 모르는 것 아닐까요?”
“글쎄. 나도 장담은 할 수 없지. 하여튼 그건 너랑 나 사이에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 같아. 연락은 단톡에서만. 개인적인 연락은 문자 말고는 안 받을 거야. 문자도 그냥 한 연락이면 씹을 거고. 미안해.”
“왜…. 그렇게 까지 하시는 거예요? 연락 정도는 그냥 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 하면 내가 싫을 것 같으니까. 나부터 먼저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이해해주길 바래.”
이유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고백받은 경험이 수없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네…. 그래도 학교에서 말 거는 것 정도는 해도 되죠?”
“이상한 짓만 안 한다면야.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지. 그래도 나 곤란하게 하면 안 된다?”
“네? 어떤…?”
“널 좋아하는 누군가는 네가 방금 한 말로 인해서 내가 싫어졌을 수도 있거든.”
이유나가 교실의 한구석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질투심에 불타는 눈으로 이유나를 노려보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이유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놀라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있어 그런 게. 어쨌든 난 남자친구가 있고, 네 마음은 받아 줄 수 없으니까. 주변에서 좋은 인연을 찾아보길 바래.”
이유나는 자연스럽게 지영호를 물리치면서,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도 피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찍어서 이야기했으니, 뒷공작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뒷담화 정도는 당하겠지만….
그거야 그녀의 얼굴로 살아가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와, 언니…. 진짜 어른스럽다.”
“이게 스무 살…?”
“언니! 진짜 제 언니 해주세요!”
이유나의 어른스러운 대응에 여고생 3인방은 그녀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그녀들이 이유나에게 한층 더 달라붙으며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한 살 어린 친구들이지만, 이유나도 한국 친구가 없었기에 친화력을 발휘해 무리 속으로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그녀들은 절친인 것 마냥 몰려다니게 되었다.
“헐. 미친. 진짜요? 키스도 아직?”
“무슨 키스야. 이제 5일째인데.”
“아니, 그래도 성인 연애인데.”
“맞아. 우리 언니 년…. 아, 유나 언니 말고요. 친언니요. 걔는 선섹후사 맨날 이 지랄 하고 다니는데.”
“뭐, 뭐? 서, 선 뭐?”
“선섹후사요. 선 섹스 후 사귐. 헐, 이 언니 뭐야. 얼굴 빨개진 거 봐. 설마 지금 섹스라고 했다고 얼굴 빨개진 거예요? 대박!”
“와! 언니 설마 아직…?”
“아직은 뭐가 아직이야!”
이유나의 반응에 동생들이 더 짓궃게 그녀를 놀렸다.
“와아! 우리 언니. 어른인 줄 알았는데. 아직 애기였구나.”
“언니 설마 첫 연애예요?”
“어…. 첫 언애야. 그동안 공부하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었거든.”
“그 얼굴 가지고 대체 왜?”
“언니 얼굴 썩힐 거면 나 주지….”
“아니, 이제 연애한다니까? 그런데 너희는…. 설마 전부 다 해본 거야?”
“당연하죠.”
걸즈 토크가 펼쳐졌다.
친구가 없는 이유나에겐 굉장히 오랜만인 여자들의 수다다.
아니, 미국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그녀와 같은 과인 공부 벌레들이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이유나는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중, 고딩 커플의 진도가 엄청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키스는 빠르면 사귄 날에도 하고, 늦어야 1주일?
키스 이후 섹스까지도 빠르면 2, 3일이라고 한다.
종교 때문에 혼전 순결을 주장하는 애도 있긴 하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고.
‘미, 미쳤어. 사귄 뒤에 섹스까지 짧으면 5일이라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이유나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연애가 처음인 그녀에겐 너무 면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이현우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이현우와 키스를 하는 상상과….
그 뒤….
이현우와 침대에서….
‘으아아아아!’
봄여름이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머릿속에서 불순한 상상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전학생? 전학생? 이름이…. 이유나!”
“네? 네!”
“얼굴이 왜 그렇게 붉어? 어디 아파?”
“네? 아뇨! 괜찮습니다!”
“푸흡!”
수업하던 선생님이 걱정할 정도로 이유나의 얼굴이 붉었다.
이유나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상태를 부정한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여고생 3인방은 고개를 숙이며 강제 웃참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늘은 남동생과 특별하지 않게 등교했다.
영상도 찍지 않고, 시간도 지켜가며, 다른 학생들과 부대껴서 버스를 타고 말이다.
남동생이 야자 안 해서 좋겠다며 계속 궁시렁거렸지만 무시했다.
“언니!”
“유나 누나다!”
“엑? 오늘은 왜 또 몰려드는데? 어제 취조는 끝난 거 아니었어?”
그녀가 반에 들어오자 어제처럼 또 같은 반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어제 끝난 거 아니었냐고오….
이유나가 항변해보지만 호기심이 치솟은 무적 급식은 막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이유나의 주위를 둘러싼 급식들.
“언니! 방송한다는 게 진짜에요?”
“꼬레아TV랑 뉴튜브 한다면서요! 채널 이거 맞죠? 이거 언니랑 똑닮았는데!”
“어, 어떻게 안 거야?”
방송한다는 사실은 웬만하면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Vlog 찍을 때도, 교내에서 스마트폰 사용 금지에 안심하지 않았던가.
점심시간에 촬영을 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촬영조차 하지 않았다.
“누나 동생이 제 동생이랑 친구 먹었거든요. 이름이 이지훈이던가? 걔가 다 말했다고 하던데요?”
“아 씨! 이지훈 이 자식을 그냥!”
“언니! 왜 방송하는 거 말 안 해줬어요?”
“너무해!”
“누나 방송하는 거 구경가도 되요? 방송 몇 시에 해요?”
이렇게 이유나가 방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역 고딩 20살 방송인이라니!
심심하고 무료한 고등학교에 이보다 더 자극적인 소문이 있을까!
이유나에 대한 정보가 전교에 퍼지기까지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적 급식 군단이 이유나의 방에 몰려오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같은 반 친구들 이외엔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생방송보다는 뉴튜브를 보러 갔으니까.
그리고 저녁 시간이 1시간 밖에 안 된다는 것도 참 다행이었다.
1시간만 버티면 급식이들이 물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