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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 공간의 소음은 자동차의 소리뿐.
그 속에서 한지연은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회상했다.
몇 시간 전.
휴식기를 맞이한 엘리시아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룹 내 멤버끼리 친하긴 하지만, 완벽한 단짝친구라 말하긴 힘들었다.
활동기에는 싫어도 24시간 붙어 다녀야 하는데.
휴식기 정도는 떨어져 지내도 되지 않겠는가.
암묵적 동의 하에 네 명의 멤버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다, 중국인 멤버 포유에게 연락이 온 것이 오늘이었다.
간만에 둘이서 만나 놀지 않겠냐고.
얘가 웬일이지?
한지연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유는 제일 마지막에 그룹에 합류한 멤버였다.
다른 사람보다 연습생 기간도 훨씬 짧았고, 교류도 적었으니 외로울 수 있었다.
게다가 저 혼자만 중국인이었으니, 한국에 친구도 없을 터.
이 기회에 좀 더 친해지자는 거겠지?
한지연은 그런 생각으로 포유의 제안을 승낙했다.
처음엔 괜찮았다.
회사와 제휴를 맺은 까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수다를 떨고, 맛있는 걸 먹었다.
하지만 수다도 한 두 시간이지.
같은 장소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지루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아, 재밌게 놀고 싶다. 놀이동산도 가보고 싶어.”
스마트폰으로 뉴튜브를 보던 포유가 중얼거렸다.
스마트폰에는 또래의 여자애들이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즐기는 영상이 틀어져 있다.
“지금 놀고 있잖아.”
한지연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정반대였다.
그녀들은 간절히 바라던 연예인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화려한 삶에는 반대급부가 있는 법.
그녀들은 특별함을 얻은 대신 평범함을 잃었다.
수만의 팬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대신, 길거리를 다니거나 평범한 여대생들처럼 모여 노는 일 등은 하지 못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인기가 떨어졌을 때뿐.
그러니 신포도 취급해야 한다.
저런 건 하나도 재미없어.
가봤자 안 좋은 일만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고를 칠 테니까.
“넌 지금 재밌어?”
“너가 아니라 언니라니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외국인이거든?”
“지금은 한국에서 생활하잖아. 그러면 한국 방식을 따라야지.”
“어쨌든. 지금 재밌어? 재미없잖아. 이게 뭐야. 휴식을 취하라는데 매일 갇혀만 있고. 지루해.”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중국 몇 번 다녀왔잖아?”
“거기도 마찬가지야.”
포유의 푸념에 한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K-POP의 인기는 한국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달 된 세상.
문화·콘텐츠의 세계적 리더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아이돌은 어느 나라에서나 선망받는다.
중국이라고 다를 바 없다.
“야. 우리 클럽 가볼래?”
“야가 아니라 언니라니까.”
“어쨌든. 클럽 갈까? 우리?”
“미쳤어? 그러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아니, 사진 말고도 썰이라도 돌면? 괜한 사고 치지 마. 심심하면 영화라도 보던가.”
“걱정 마. 비밀 클럽 같은 곳 있으니까. 중국인만 오는 곳이라서 다른 사람은 몰라. 그리고 우리가 선글라스도 끼고 마스크도 쓰면 어떻게 알아 봐?”
“비밀 클럽…?”
비밀 클럽이라는 말에 한지연의 호기심이 동했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거짓말쯤으로 치부했겠지만.
포유라면 능히 그럴 수 있었다.
팬들에게는 절대 알려져선 안 되는 사안이지만, 그녀는 중국 10대 재벌 그룹의 손녀였다.
사실 실력이 부족한 그녀가 엘리시아에 들어올 수 있던 것도 연줄 덕분이었다.
회사가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그녀 가문 그룹의 투자를 크게 받았다고 한다.
“관심 있지? 가볼래?”
“그런데…. 뭔가 이상한 곳이면 어떻게 해?”
관심이야 있다.
그녀도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인 21살이었으니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기에 놀아본 추억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더욱 놀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까 참고 있는 것뿐이다.
“걱정 마. 신원 확실한 사람들만 받는 곳이니까. 알지? 내 주변에 누구누구가 있는지?”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다.
포유가 저렇게 말하니 신뢰가 간다.
중국 상류층들만 오는 비밀 클럽이라….
이거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지 않을까?
한지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돈이 많으면 황제처럼 살 수 있는 곳이 중국인데.
그 돈 많은 놈들이 왜 굳이 한국까지 오는 것인지 말이다.
처음 와 본 클럽은 재미있었다.
어두운 공간 안이니, 다른 사람이 알아볼 것 같지도 않고.
은근히 달라붙는 남자들을 쳐내는 건 조금 짜증 났지만.
소규모 비밀 클럽이라 그런지, 몇 번 거절했더니 더 이상 달라붙지 않았다.
“아쿠아! 아는 오빠들이 잠깐 보자는데. 같이 갈래?”
그녀가 클럽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데.
어디론가 사라졌었던 포유가 나타났다.
“아는 오빠?”
“응! 너랑 같이 왔다고 하니까 얼굴 보고 싶다고 하던데?”
가도 괜찮나…?
포유랑 어울릴 정도면 뭔가 사건이 생길 일은 없겠지?
흥에 취한 한지연은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뭐야?
시발.
연습생이 되고 나서부터 끊었던 욕설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클럽 위층에 마련된 룸.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술들은 이해할 수 있다.
클럽에서 술을 판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아아앗!”
“허리를 더 흔들라고 빵쯔년아!”
“시발! 시발! 존나 좋아!”
끝없이 들리는 중국어.
벗고 있는 남자와 여자.
그냥 벗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은 상관없다는 듯, 성행위하고 있다.
처녀인 한지연에겐 너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아쿠아. 놀랐어? 걱정 마. 우린 절대로 안 건드릴 테니까.”
잔뜩 굳은 한지연의 어깨에 포유가 손을 올렸다.
그 손길에 한지연이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갈래.”
“잠깐, 인사만 하라니까? 너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니야.”
“조건은 무슨 조건! 필요 없어!”
한지연의 포유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 순간,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같이 이야기하자. 한국어로 말하면 못 알아듣겠잖아. 영어 괜찮지? 영상 보니까 영어 잘하더만.”
“앗!”
“그래, 아쿠아. 이 오빠, 가문 장난 아니야. 잘 보이면 수십억 버는 건 우습다? 너한테 광고가 쏟아질 거니까.”
“이거 놔!”
끼어든 남자가 다짜고짜 한지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지연이 거칠게 남자의 손목을 뿌리쳤다.
“까칠하긴. 분위기가 나빠서 그런가? 어이, 쟤네 다 내보내.”
그가 이 무리의 보스인 것 같다.
그의 한 마디에 가만히 앉아서 술을 홀짝이던 남자들이 일어섰다.
그리고 섹스를 하던 남자와 여자들을 강제로 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이야기 좀 해볼까?”
갑작스레 조용해진 방 안.
남자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의자를 두드리며 한지연에게도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한지연의 시선에 흰색 가루들이 보였다.
이쪽 업계를 잘 모르는 그녀라도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마약.
진짜 미쳤구나.
연예계에선 건드리면 안 될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 마약은 절대 안 된다.
“너…. 어떻게…. 이거 회사에서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회사가 모른다고 생각해?”
“뭐…?”
“알면서도 놔두는 거야. 내 할아버지 지분이 절반이나 되니까. 을인 입장에서 걔네가 뭐라고 할 수나 있겠어? 그리고 고작 한국 언론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퍼뜨릴 수도 없을 테고.”
“미친….”
욕설이 나왔다.
버릇없고 싸가지 없는 애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아….
그러고 보니, 연습생 때도 가끔 밤에 사라지고 낮 연습에 안 나오는 일이 있었지.
다른 연습생이 그랬다면 퇴출감이었는데.
그녀는 어쩐지 무사하더라.
어쨌든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냥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명령을 듣는 떡대도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
“일단 한잔하면서 이야기 들어 보라니까?”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한지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남자가 건네준 잔 대신, 깨끗해 보이는 잔을 가져와 자신 앞에 둔다.
그 잔에 양주를 가득 따랐다.
“이거 한잔. 다 마실 때까지만 이야기 들을게. 그 이후엔 보내줘.”
“하핫. 좋아. 듣던 대로 성깔 있네. 대신 그거 다 마시기 전까진 내 이야기 듣는 거다?”
“좋아.”
한지연은 약속받아낸 뒤, 온 더 락 잔을 들었다.
양주가 가득 채워진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우웩.
맛없어.
게다가 식도부터 위장까지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참고 마신다.
어떻게 해서 아이돌이 됐는데.
여기서 아이돌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가도 되지? 잡지 마.”
쾅, 하고 한지연이 잔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카리스마 눈빛을 발사했다.
놀란 눈빛의 남자와 포유.
한지연은 거칠게 걸음을 옮기며 클럽에서 빠져나왔다.
대리를 부를 정신조차 없었다.
여기서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
어느 정도 비밀 클럽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안도감과 함께 걱정이 밀려온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저런 미친년이 같은 그룹이었을 줄이야.
이거 터지면 엘리시아는 무조건 끝이었다.
그녀 한 명의 일탈이라 할지라도.
그룹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거다.
회사에 전화해야 하나?
하지만 포유가 말하는 걸 봐서는 이미 회사도 알고 있는 것….
쾅!
무거운 고민거리.
그리고 술기운에 전방 주시를 잘하지 못했다.
다행히 속도를 그리 내지 않았기에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아…. 진짜 울고 싶다…. 오늘 되는 일이 없어….’
그녀는 일단 매니저에게 전화했다.
엘리시아가 휴식기를 맞이한 만큼, 매니저도 간만의 휴가를 보내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밥줄 끊기기 싫으면 와야지.
그런데 남자는 상당한 강적이었다.
그녀를 완전히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고.
돈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음주 운전이라는 걸 알고 처벌받게 하겠다는 의지만 내보였다.
그러다 원하는 조건이 섹스라는 걸 알아내었다.
‘미친 새끼….’
오늘따라 욕설을 떠올릴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하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상대는 돈이 많아 보였고.
아이돌에 빠질 나이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오늘 일은 절대로 기사가 나면 안 된다.
“할게요.”
까짓거 하자.
소중히 간직해온 처녀가 아깝긴 하지만.
애초에 간직하고 싶어서 간직한 건 아니었다.
연습생 생활, 데뷔 이후의 연예인 생활이 너무 바빠서 남자 만날 시간조차 없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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