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8/17)

“너 정말 경험이 많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 여러 남자랑 막 몸을 섞고 그랬냐고.”

“.봤잖아요. 그걸 왜 이제 와서 또 물어봐요?”

“하긴. 직접 보긴 했지.”

“왜요?”

“아니야. 배고프다. 오늘 뭐 먹으러 갈까?”

동영상을 봤고 직접 내 두 눈으로 변한 신이의 모습도 확인했었다.

분명 강한상에게 길들어진 것도 사실이었고 쓰리섬에 스와핑 같은 것도 한 게 확실할 것이다. 그건 다른 어떠한 동영상이나 사진, 얘기보다 변한 신이의 몸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텔에서 나오기 전 피곤함을 겨우 이기며 소곤거림에 눈을 떴을 때에 들었던 신이와 박항구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신이를 홍콩으로 보내는 동안 네 번째임에도 신이의 얼굴을 잔뜩 적신 박항구의 사정은 너무나 빨리 이뤄졌고 아쉬움을 잔뜩 남긴 상황에서 끝을 냈으며 더 이상의 섹스는 없었던 나름 깔끔한 쓰리섬이라 생각했었다. 우리가 잠든 시간이 새벽 4시를 넘긴 시간임을 감안하면 새벽 6시에 신이를 나 몰래 깨웠던 박항구는 거의 잠을 못 이뤘을 것이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신이는 조용히 얘길 하는 박항구의 목소리에 내가 깬 줄도 모르고 같이 조용히 애길 나눴었다.

그 내용은.

“누나.”

“으음.?”

“저기.”

“응? 왜요?”

“혹시. 전화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왜?”

“저. 9일 후에 들어가는데. 한 번만 단둘이서 만나 주시면 안 돼요?”

잠결에도 박항구의 목소리에 화가 난 나였다. 박항구의 행동은 그 아쉬움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긴 했지만 그 상대가 틀렸다. 아니! 날 속이고 번호를 따려는 행동은 분명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난 조용히 잠을 자는 척을 한다. 왜냐하면. 

“항구씨.”

“네?”

“이건 아니에요.”

“이이가 나중에라도 이 일을 알면. 많이 화를 낼 거 같아요.”

“.”

“그리고 항구씨.”

“네.”

“오늘. 이 일은 잊어주세요. 이런 변태적인 행위에 끌어들여서 정말 죄송해요. 그러니까.”

“아닙니다!”

“쉿! 이이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 목소리 낮춰요.”

“오늘.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저씨하고 같이 있어서 아쉽긴 했지만.누나하고 같이 보낸 시간은 절대로 못 잊을 겁니다. 저 진짜 누나 좋아하게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 제 번호라도.”

“이러면 안 돼요. 이런 건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에요. 그리고. 절대로 오늘일은 잊어요. 꿈같았다고 했죠. 꿈이라고 생각해요. 황홀한 꿈이요. 아니면 자랑처럼 친구들한테 얘길 해요. 항구씨라면 충분히 사람들한테 자랑할 만 테크닉과 능력을 갖췄으니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절대로 이런 일 하지 마라요.”

“오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런 일은.”

“잊어요! 사람한테 중독되면. 그 사람 때문에 고통만 남을 수 있다는 거. 경험자로서 충고처럼 얘기 해 줄게요. 누나라고 불러줘서 고마운데. 그 누나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얘기에요.”

“.”

“그럼. 저 피곤해요. 두 분한테 너무 시달렸더니.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에요. 잘래요.”

“.네.” 

신이가 내 등에 가슴을 맞대고 돌아눕자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텔 방을 걸어 나가는 박항구의 발소리가 들렸다. 적막한 모텔방안을 채우는 무거운 방한구의 구둣발 소리가 사라졌을 때. 신이의 얼굴에서 내 등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묻어 흘러내리기 시작했었다.

“태규씨!”

“으.응? 왜?”

“무슨 생각해요? 멍한 사람처럼 갑자기 벽만 쳐다보고.”

“뭐라고 했어?”

“그럼 내일은 저 집에 있어도 되는 거냐고요!”

“아니.”

“.네?”

“내일 나랑 같이 좀 나가자.”

“또요? 어딜요? 혹시?”

“그런 거 아니야. 이혼 후에. 내게 도움을 많이 준 분들이 있어서. 그 분들 좀 만나러 가려고. 당신 만나기 전에 잡힌 약속이라서 취소를 못 해.”

“도움.그런데 제가 가도 되요?”

“응. 괜찮아. 당신도 아는 분도 있으니까.”

“제가 아는 분이라면. 당신 친구들이에요?”

“글쎄. 만나보면 알게 될 걸 뭘 그리 궁금해 해?”

“.”

“것보다. 나 배고프다. 뭐 좀 먹자.”

“그럼 나가서 먹을까요? 밥도 없는데.”

“아냐. 밥 해줘. 당신이 한 밥 먹고 싶다.”

“반찬도 없어요.”

“기다릴게. 저번 주에 사다둔 반찬거리 많잖아.”

“알았어요.”

“저기.”

“네?”

“등산할 건데 그러고 가게?”

“등산이요?”

앞섬이 교차하는 붉은 색 와인 블라우스에 무광의 앞트임 회색 스커트로 한 것 멋을 낸 신이를 보며 조금은 툭명스럽고 어이없다는 말투로 얘길 하는 내게 신이도 ‘갑자기 웬 등산?’이라며 맞받아쳤다 

“당신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제 도움 준 지인이라고.”

“응. 지인을 꼭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만나라는 법 있나? 그 분들이 등산을 좋아하시니까. 항상 산 초입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등산이라니. 그런 건 미리 좀 얘길 해줘야죠. 등산복도 없는데.”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만 신으면 돼. 어차피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청바지하고 당신이 즐겨 입던 흰색 티셔츠도 빨아 놨으니까. 그거 입어.”

“당신이 세탁을 해 놨다고요?”

“왜? 난 세탁기 돌리면 안 되나? 그리고 당신 없는 동안 나도 빨래는 하면서 살었거든!” 

으름장을 놓듯 말을 하며 옷장에서 어제 새벽에 들어와 챙겨둔 옷가지를 침대에 던지듯 올려놓는다.

그런 내 행동에 ‘피식’하고 웃은 신이는 옷을 벗고는 내가 준 옷으로 갈아입는데.

“그럼 그렇지.”

“왜?”

청바지는 어차피 스판으로 된 재질이었기에 신이의 각선미와 빵빵한 엉덩이를 더 돋보이게 드러내며 찰싹 달라붙어 보기 좋았지만. 문제는 티셔츠였다. 내 메리아스처럼 흰색 빨래는 분명 온수빨래로 돌려도 무관할거란 생각에 온수전용으로 티셔츠와 내 매리아스 등을 같이 넣고 빨았는데,, 크기가 아가 옷 마냥 엄청 작아져있었다.

아니. 신이의 커진 가슴으로 더 작게 보이는 흰색 티셔츠는 신이의 몸에 파고들 듯 달라붙어 가슴의 굴곡과 잘록한 허리의 경계를 확연하게 드러내며 속옷처럼 보여졌다.

“내가 못 살아. 이거 손빨래해야 되는데.그냥 세탁기에 돌렸어요? 그것도 온수로?”

“응?.그렇긴 한데. 어쩌지?”

“이걸 입고 나가라고요? 요즘 고등학생도 이렇겐 안 입겠다!”

“옷이. 없지?.그럼. 내 메리아스라도 줄까?”

“에휴. 믿은 내가 잘못이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요. 나가다가 티셔츠라도 하나 사야지.”

체념하듯 티셔츠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친 신이는 한숨을 푸욱 하며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몇 번 신지 않았던 하얀 운동화를 툭툭 털어내고 마지막 코디를 완성한 신이를 보며 나도 서둘러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향한다.

보통 때였다면 버스와 기차를 이용해 혼자 움직였을 테지만, 오늘은 어처구니없는 게임에 공짜로 얻은 고급스러운 외제차로 드라이브의 기분까지 내며 출발을 하게 된다.

“어느 산으로 가요?”

“응? 경기도 쪽으로.” 

“서울에 있는 산이 아니고요?”

“응. 가보면 알아.”

“아.”

“왜?”

“왜긴 왜에요!? 사람이 참. 에휴. 아파 죽겠네.“

“.많이 아파?”

“그럼 안 아파요!? 무식하게 그걸 말도 없이 막 쑤셔 넣고.”

“기분. 안 좋았어?”

“기분이요? 그럼 좋았겠어요!? 꼭! 변비로 한 달 동안 고생한 기분이라고 하면! 혈변 싸는 기분이라면 알겠냐고요!”

“.그 정도구나.”

“그 정도구나? 참나. 오늘 저녁엔 제가 해드립죠!”

“뭐?”

“또옥같이! 제가 태규씨 똥꼬에 넣어주겠다고요!”

“허. 그러다가 나 중독되면 어쩌냐? 만날 똥꼬 좀 쑤셔달라고 하면?”

“이 이가! 진짜.”

“크크크크. 항문섹스 한 번 맛들이면 헤어 나오질 못한다고 하던데. 남녀 구분 없이 말이야. 그리고 당신도 좀 느끼지 않았어? 막 몸을 부르르 떨면서 즐기던데.”

“그거야 당신이. 하여튼 다시는 그거 할 생각도 하지마라요! 알았죠!”

“그게. 은근히 중독성 있던데. 와 그 조임이 진짜.”

“그래서 계속 하겠다고요?”

“뭐. 하다가 또 생각나면 나도 모르지. 어차피 수목금은 내가 주인이잖아. 당신은 내 노예고! 아니야?”

“.”

“그리고 하다보면 당신도 거기로 더 잘 느끼게 될지 누가 알아?”

“절대 아니거든요! 얼마나 아팠는데! 아무리 반복해서 한다고 해도. 전 절대로 적응 안 될 거 같아요. 하나도 좋지도 않았고.”

“정말? 에이 솔직히 말 해봐. 그래도 조금은 느끼지 않았어? 내가 볼 땐 항구가 사정할 때 똥꼬까지 움찔거리면서 진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니까.”

“그거야 당신이 좋아하니.까. 그냥 참았던 거죠.”

“참아?”

“뭐. 항구씨가 너무 열심히 해주니까 더 참을 만 했고.”

“그럼 뒤로는 전혀 못 느꼈다고? 그게 그냥 참은 거라고?”

“네! 그러니까 다시는 꿈도 꾸지 마세욧! 알았죠!”

“음.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안 될까? 해보니까 당신 보지하고는 완전히 딴 맛이더라고.”

“.”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냐.”

“혹시.요.”

“응? 혹시 뭐?”

“.아니에요.”

“아니긴 뭔데?”

“제. 거기요. 헐.”

“헐?”

“헐거웠어요?”

“헐겁다니? 아! 아니! 절대 아니야!”

“정말요?”

“그럼! 한상이 그 새끼 왕자지가 들락거렸다고는 전혀 생.가.”

엉뚱한 신이의 반응에 괜히 황급히 변명처럼 말을 하다 뒤를 흐리게 된다.

“.”

“정말이야. 항구도 느꼈으니까 몇 번이나 싸질렀지! 당신 보지가 맛없었으면 그 놈이 그렇게 네 번이나 싸고 또 쌌겠냐!? 아주 발정난 개새끼처럼 계속 벌떡거리기만 하던데. 안 그랬어?”

“발정난 개는 또 뭐에요. 말을 해도.”

“크크크 하긴. 그런데 이런 대화도 나름 재밌네.”

“.재밌어요?”

“응. 뭔가 꼴릿하면서. 섹스까지 솔직해지니까 편하다고 해야 하나?”

“.아직 멀었어요?”

“응? 한 30분?”

신이가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느새 고속도로에 진입한 우리의 차는 토요일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훤히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신이가 그 바람을 만끽하려는 듯 창문을 열었다.

“여기에 산이 있어요?”

“.”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금방 도착해.”

우리의 차는 시골진 골목을 지나 산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언덕을 올라가 학교 같은 건물 앞에 도착하게 된다.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난 무심한 듯 시동을 끄고 차문을 열었다.

그런 날 영문도 모른 채 쫓아온 신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본다.

“여기가 어디에요?”

“내려.”

또 무심한 듯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 미리 실어둔 상자들을 꺼낸다.

“아저씨!”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날 발견하곤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언제나 아무 대가 없이 웃음으로 날 반겨주는 이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속까지 푸르게 정화되는 듯 느껴진다. 비록 더럽고 지저분한 일을 바로 어제 했어도 난 아이들의 웃음으로 씻기는 듯 한 느낌을 받으며 트렁크에서 커다란 박스 두 개를 힘겹게 내리며 그 아이들의 미소를 미소로 화답했다. 

“오셨어요.”

“안녕하셨죠. 오늘은 좀 늦었습니다.”

“아니요. 잊지 않고 매달 찾아와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요.”

“내려? 뭐하냐?”

“안녕하세요. 애들아 원장님하고 얘기를 해야 되니까. 잠시 저기 가서 놀아요.”

“아.안.녕하세요.”

내 큰 목소리에 신이가 머뭇거리다말고 차에서 내린다. 그리곤 신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푸근해 보이는 아줌마에게 얼떨결에 인사를 한다. 

“인사드려 여긴 장원장님. 여기 관리해주시는 분이셔.”

“.네.”

“그런데 누구? 애인?”

“네? 하하하하하하하. 음 전 와이프라고 할까요?”

“전 와이프라니?”

“언젠가 말씀드렸죠. 저 이혼했다고. 그 상댑니다.”

“응? 이혼. 아. 그런데 여긴 어떻게?”

“점수 좀 따려고요. 오늘이 셋째 주 토요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눈 딱 감고 데려왔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점수를 다시 딴다면. 그럼 왜 이혼을 했나?”

“그러게요. 듣고 보니 그러내요. 하하하하하.”

“하여튼. 그나저나 태규씨한테 흑심 좀 품어볼라고 했는데. 아쉽네요 호호호호.”

“앗! 진작 말씀 하시지! 이 사람 다시 만나기 전에 말씀해주셨으면 혹 했을 텐데 말이에요!”

“때끼! 애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런 말 하면 못쓰지!”

“원장님이 먼저 말씀하셨는데요! 크크. 그리고 전 와이프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애인 사이잖아.”

“아 그런가? 하하하.”

“실없이 웃지만 말고. 밥 안 먹었죠? 밥 먹어요.”

“넵!”

“왕찌찌!”

“어.어머! 그런 말 하면 못써요! 호호.호호호호호.”

인사를 나누던 우리 사이에서 갑자기 한 아이가 끼어들어선 신이의 가슴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신이가 입고 있는 옷이 아직도 몸에 바짝 달라붙는 흰색 티셔츠였고, 아무 생각 없이 운전만 하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닫게 된 나였다. 

물론 누구보다도 얼굴이 발개진 건 신이였다.

그런 신이의 얼굴을 확인한 원장님이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 뒤를 쫓아가던 날 신이가 팔목을 잡아 멈춰 세웠다.

“옷 사러 간다는 걸 깜빡했다. 당신도 잊었지?”

“등산로 초입에 있는 용품점에서 사려고 했죠. 그런데 이게 뭐에요?”

“응? 뭐라니?”

“천사보육원이라는 간판을 보면 여기가 어딘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여긴 왜 왔냐고요. 그리고 당신이 저 원장이라는 분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당신 기억 안나?”

“네?”

“매월 2만원씩 내 핸드폰에서 빠져나가는 거.”

“.?”

“있잖아. 예전에 우리 병원에 갔을 때. 그때 전단지 중에 고아들 도와주는 전단지 같이 봤잖아. 그리고 내 핸드폰 요금으로 도와주자고 동의도 했으면서.”

“그걸 아직도 하고 있어요? 당신이?”

“뭐. 귀찮아서 해지를 안했다고 하는 게 정답이지만. 그럼 폼이 안서니까 계속 도와주고 싶어서 일부러 안 끊은 걸로 하자고.”

“.”

“밥 먹으러 가자. 여기 원장님이 해주시는 씨레기국이 진짜 일품이야. 뭐해?”

“그럼. 여길 계속 온 거예요?”

“.응. 자주는 못 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언제부터요?”

“그래도 꽤 됐어. 한 7개월?”

“.”

“뭐 해? 가자. 어! 혜빈아!”

머뭇거리며 우릴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쪼그려 앉아 두 팔을 벌린다. 그제야 신이를 경계하듯 쳐다보던 혜빈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우리 혜빈이 아저씨 보고싶었죵!?”

“.”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혜빈이를 품에 안고 일어난 난 볼을 내밀었고 여전히 신이를 경계하듯 쳐다보던 혜빈이가 내 볼에 뽀뽀를 해준다. 일반 보육원과 마찬가지로 1:1임시보육시스템이란 것이 이 보육원에도 존재했으며 내가 지원해주는 상대가 바로 이 혜빈이었다.

5살의 혜빈이는 보육원 안의 아이들이 거의 다 그렇지만 그중 극도로 말이 없는 아이로 참담한 마음으로 찾아왔던 그 날의 기억 속에 유난히 내 마음속 깊숙이 다가왔던 아이였다.

“아! 이를 어쩌지?”

“뭐가요?”

“오늘. 사람 많을 텐데.”

“사람이 많다뇨?”

“나 혼자 찾아오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날짜 정해서 모이는 거거든.”

“그걸 지금 얘기하면 어떻게 해요! 옷도. 아.”

“뭐. 어쩔 수 없지. 우선 들어가자.”

“참.”

지금 시내로 나가 옷을 사기엔 너무 늦을 거란 생각에 우선 먼저 온 사람들에게 인사부터 시키기 위해 보육원 안으로 신이를 데리고 들어간다. 신이도 들어오던 길목을 나와 함께 봤기에 이 한적한 곳에서 옷을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날 뒤쫓아 온다.

“안녕하십니까!”

“오 태규씨 왔어!”

“오늘은 늦었네. 가장 먼저 오더니.”

“안녕하세. 어.”

이미 세 커플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둘째 주엔 학생들이 와서 봉사를 하고 첫째 주엔 일반 단체인가가 온다고 했었다. 그리고 부부들로 이뤄진 우리 모임 같지 않은 모임은 총 여섯 커플과 나로 이뤄진 셋째 주 방문모임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이혼이란 단어조차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나였기에 어쩌다보니 커플들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까지 네 커플이 이 보육원을 찾았다.

“누구셔?”

리더 격인 김선배가 신이를 늦게 발견하곤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날 쳐다본다.

“인사드려. 여긴 어쩌다가 모인 떨거지들이시고.”

“야! 우리가 왜 떨거지냐! 우리가 메인이지!”

“맞아요!”

“그러게!”

“하여튼!.”

“크크. 이 사람은 제 와이프요. 이름은 한신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와. 그렇게 여자 소개시켜준다고 말을 해도 귓등으로 듣던 이유가 있었네! 김선배 제수씨 진짜 예쁘지 않아요?”

“그러니까. 와”

“자기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며!”

“응? 하하하. 내 눈엔 자기가 제일 예쁘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크크”

“객관적으로 봤을 땐?!”

“자기가 제일 예쁘지.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식사 아직이죠. 같이 먹어요.”

“자자. 먼저 먹은 사람들은 오늘 할 일이 많아요! 먹을 사람은 먹고 나머지는 빨리 가서 일 합시다! 일!”

김선배의 주도로 세 커플 중 김선배 커플과 신이의 미모를 극찬하던 강씨 커플이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고는 먼저 일어났다. 쭈삣거리며 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신이를 한선배 커플이 의자로 인도를 한다.

“환영해요.”

“네?.네.”

“보육원은 처음이죠?”

리더겪인 김선배보다 나이가 많은 한 선배, 그리고 신이를 자리에 앉히며 부드럽게 환영하는 한 선배의 형수는 나와 가장 사이가 좋은 커플이다. 나이는 많지만 생각하는 이념과 사상도 나와 비슷했고 거기에 형제가 없다며 날 더 잘 챙겨주는 한선배의 친근감이 더 사이를 좋게 했었다. 

셋째 주 보육원에 모인 우리는 가슴속 상처들이 있는 커플들로, 공감대가 있지만 그 공감대 속에 서로의 치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과도 같은 보이지 않는 룰 속에 밖에선 연락도 잘 안하는 사이였지만 한선배 커플과는 아주 가끔 저녁도 같이 먹은 사이였다.

“.네.”

“저흰 이 보육원에만 3년째 다니고 있어요.”

“.”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그냥 놀아주다가 간다고 생각해요.” 

“.네.”

“다 먹었어? 그럼 우리도 나가지.”

“네. 태규씨가 꼴찌니까. 오늘 설거지 부탁해요.”

“아. 이럴 줄 알고 항상 제일 먼저 왔었는데.”

“그러니까요 오늘 설거지는 태규씨 몫이에요. 호호호.”

“맛있지? 좀 팍팍 먹어라. 그게 뭐냐?”

식당에 둘 만 남게 된 후 난 신이에게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훈계하듯 타박하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신이의 굳은 표정에 그런 행동을 했고 이 공간에서의 신이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다 생각했기에 오버하듯 잔소리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먹으면 들어오던 복도 다 나가겠다! 여기선 무조건 팍팍 퍼 먹어야 돼. 안 그러면 원장님한테 혼난다고.”

“절. 왜 여기로 데리고 왔어요?”

“.응?”

“뭘. 보여주려고요?”

“뭘 보여주다니?”

“난. 이혼하고 이렇게 살았다? 너같이 더럽고. 지저분하게 살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여길 데려온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그럼요? 도대체 왜 절.”

“오늘 오는 날이라서 온 것뿐인데.”

“.네?”

“매달 셋째 주엔 이렇게 모여. 그리고 오늘이 셋째 주 토요일이고.”

“.”

“사실 오늘은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내 마음대로 하라며 그러니까 하던 일은 하려고. 그런데 보육원 일은 몰랐나? 한상이 놈이 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놈이라면 모를 리가 없잖아. 박미지란 여자 일도 다 알고 있던 놈이 말이야. 넌 몰랐어?”

“.입양이라도 하게요?”

“.뭐?”

“아이로 제 마음이라도 흔드시려고요?”

“.”

“왜 이렇게 어리석어요! 이런 거 보여준다고 제가 흔들릴 여자로 보여요? 아니. 흔들리기엔 너무 많이 온 여자라.”

“너 입양이 쉬운 줄 아니?”

“.네?”

“어쭙잖은 동정심이 아이들에게 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거 혹시 아냐고. 그리고 입양이란 거. 유기견보호센터에 있는 강아지들 중에 마음에 든다고 데리고 와서 함부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절 왜 데리고 왔어요?”

“얘기했잖아. 오늘이 셋째 주 토요일이라고. 그런데 한상이 놈이 아무 말도 안 해 줬냐?” 

“.네.”

“흠. 이상하네. 난 당신이 알고 있는데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줄 알. 어! 혜빈아!. 아고 이 아저씨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그래 뭐 해주까? 비행기 태워주까?”

설거지를 하라는 제스처로 턱을 신이에게 까딱거리곤 혜빈을 안고 식당을 나간다. 

보육원 방문은 어쩌면 자기만족이고 자기방어일지도 모른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신이에게 말 한대로 어쭙잖은 동정심을 정작 내가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를 몇 번이나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이 방문을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런 잡념은 아이들의 웃음을 보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한 달에 한 번하는 청소와 빨래, 그리고 같이 놀아주는 게 전부일지 모르지만 그런 도움마저도 이 아이들에겐 절실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찾아온 후로는 매 달 셋째 주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번거롭다고, 귀찮다고 너무나 가식적이라고 나도 생각했던 일들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좀 찬 아이들은 이런 만남조차 지겹다는 시선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 것마저 아이들의 상처들이라 생각해본다면 그 시선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예상대로 신이는 설거지 이후 계속 겉돌고 있다.

그건 신이의 성격이나 지금의 상황,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들과 게임이란 저질스러운 행동에서 온 죄책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도 저랬다. 

첫 방문 날. 아이들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고 어울려서 일을 하는 커플들을 바라보며 겉돌기만 했었으니 신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아이로 인해 겪은 고통이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신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난 신이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입장이란 게 중요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들도 중요한 게 아니었고 말이다. 그냥 묵묵히 모임 사람들이 하는 빨래를 도와주고 청소를 하며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진짜 누구야?”

“와이프라니까요.”

“진짜?”

“그럼 가짜 와이프도 있어요?”

“혹시 오피스 와이프는 아니고?”

“이이가! 태규씨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김선배의 짓궂은 질문에 김선배의 형수가 그런 선배를 타박한다.

하지만 형수조차 신이의 정체를 정말 궁금해 하는 눈치였고 선배를 타박하면서도 시선은 조용히 옆쪽 계단에서 홀로 빗자루 질을 하고 있는 신이를 연신 훔쳐보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내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한 선배와 원장님만이 알 고 있었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말을 안 했을 뿐인데 그냥 각자의 상상으로 날 평가한 게 분명했다.

형수의 물음에도 묵묵히 빨래들만 널고 있는 내 모습에 결국 형수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말 와이프야?”

“.”

“와. 모델같이 이쁘시네. 그래서 그렇게 꽁꽁 숨겨놨구나”

“숨겨놓긴 뭘 숨겨놔요. 선배도 참.”

“1년 동안 한 번 도 안 데리고 왔으면 그게 숨겨놓은 거지. 이 친구 은근히 음흉한 면이 있네.”

“.”

리더라고 자칭하는 김선배의 이런 면이 싫어서 사실 모임 후 뒤풀이에도 잘 참석을 안했었다. 내가 듣기론 몇 번이나 바람을 피우다 형수한테 걸려서 아작이났었고 또 그 짓을 반복하는 정형적인 난봉꾼 스타일이 이 김선배란 사람이었다. 

말로는 리더라고 하지만 사실 이 모임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도 먼저 2년 동안 봉사를 시작한 형수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참가했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뭐라고 할까. 귀찮은 건 진짜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사람들 위에 나서는 건 좋아하는 스타일? 하여튼 첫 인상부터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진짜 볼수록 장난이 아니시네. 와”

“김선배 일 하시죠! 일!”

“응? 허 이친구가. 그런데 자네 능력도 좋네.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절 어떻게 보셨는데요?”

“응? 아니 그냥. 평범. 하다고 생각했지. 하하하하하하하.”

“신이는 평범하지 않아 보입니까?”

“신이? 아 제수씨!? 하하.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평범한 건 아니지! 저 몸매가 아주. 슴가가 하고 엉덩이를 어떻게 평범하게 볼 수 있. 하하하하하.”

무섭게 노려보는 내 시선에 말꼬리를 흐리는 김선배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를 삭이게 된다. 

“태규씨. 저 뭐하면 되요?”

“응?. 그냥 쉬어.”

“아니에요. 계단은 다 청소했는데. 빨래 어디서 해요?”

“거기 가 봐야 시끄럽기만 하지 일도 제대로 못 해!. 여기서 빨래나 같이 널자고.”

“네?.네.”

신이의 표정이 계속 어둡다.

아이들을 향한 시선을 일부러 피하려는지 차라리 일을 찾는 모습으로 내게 긴 빗자루를 들고 걸어왔다. 그리곤 다음 일을 찾아 조용히 말을 하지만 나보다 먼저 김선배가 신이를 붙잡았다.

“빨래가 보통 많은 게 아니야. 애들 옷은 매일매일 해결하는데 이불 같은 큰 빨래거리는 이렇게 이 주일에 한 번씩은 빨래를 해줘야 한다니까. 그래서 내가 전담하자고 먼저 제안을 했다는 거 아니냐. 이거 우리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하지도 않아요!”

“.네.”

“수건만 100장이 넘으니까 그거부터 널자고.”

“.”

“제가 널게요.”

“자넨 이불 널어야지. 힘 뒀다 뭐해!?”

“.”

생각지도 못했던 골칫거리가 생긴 이 순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골똘히 생각에 잠겨 몸을 혹사시키려는 신이의 행동을 훔쳐보기 시작한 김선배의 행동에 더 그랬다. 정작 수건을 털기 시작한 신이는 김선배의 시선도 모른 체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듯 수건만 힘껏 털기 시작했다.

그 행동은 신이의 타이트한 티셔츠로 인해 더 자극적으로 보여졌다.

왜 저 옷을 입혔는지, 왜 매장에서 옷을 안 사 왔는 질 후회하며 덜렁거리며 출렁이는 신이의 가슴에 시선을 완전히 뺏긴 김선배에게 걸어간다.

“김선배!”

“으.응.응!? 왜.왜?”

“이불 다 널었습니다. 청소하러 가시죠.”

“청소?. 난 수건 털어야 되는데.”

“신이보고 하라고 하세요.”

“이 많은 걸 어떻게 혼자하나. 나라도 도와야지.”

“괜찮지?”

“네?.네.”

“괜찮다내요. 가시죠.”

“허. 이거 다 털고 널면 팔 떨어질 텐데.”

“괜찮다잖아요. 같이 가요.”

“허.”

내게 끌려오듯 뒤쫓아 오는 김선배의 시선은 아직도 신이의 모습을 향해 있었고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진짜 와이프야?”

“.”

“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주부가 아닌데!”

“그만 하시죠.”

“응? 내가 뭘?”

“.”

“오늘 모임 끝나고 회식에 갈 거지?”

“아니요. 평소처럼 그냥 갈 겁니다.”

“오늘은 꼭 참석해야 돼!”

“.왜요?”

“한선배가 이번 달까지만 나오시고 못 나오신다잖아. 송별회라고 오늘이.”

“.송별회요? 한선배가 왜요?”

“중국에 2년 동안 해외 발령이 나셨다고 하던데.”

“그거 보류 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갈 사람이 없어서 한선배가 자청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오늘 뒤풀이엔 꼭 참가해야 돼. 자네랑 한선배가 사이가 제일 좋잖아!”

“.”

“태.규씨.”

하필 왜 오늘. 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내 등 뒤에서 신이의 작은 목소리가 날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려 수건을 널고 있는 신이를 쳐다보는데. 혜빈이가 신이의 가디건을 잡고는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에 신이가 종말 곤란한 표정으로 날 부른 것이다.

“우리 혜빈이 왜 울어? 넘어졌어?”

“.”

말 없이 훌쩍거리는 아이를 보며 좀 더 다가가자 아이가 신이의 뒤로 더 숨어버렸다.

“얘가. 왜 이러지. 혜빈.”

“아. 알.았어요. 이 언.니랑 같이 가요.”

“응? 어딜?”

신이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혜빈을 번쩍 안아 들고는 뒤쪽 건물로 걸어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내게 조용히 속삭이며 물어본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저쪽 뒤에. 안쪽 화장실은 청소중이라서 뒤쪽 이용해야 될 걸. 뒤 쪽은 구식이라서.”

“원장님은요? 어디 계세요?”

“응? 지금은. 같이 빨래하고 계실걸.”

“.알았어요.”

나중에야 혜빈이가 오줌을 지린 걸 알게 된 나였다. 

대청소로 바쁜 이곳에서 낯가림이 심한 혜빈은 참다 참다 결국 그대로 실례를 한 모양이었고 혼자 남아 수건을 털고 있는 신이에게 매달린 듯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 대신에 수건을 털고 있는 내게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혜빈과 그런 혜빈의 손을 꼭 잡고 돌아온 신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꼭 맞잡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구석의 가장 안쪽이 아련해지고 먹먹한 답답함을 느끼게 된 나였다.

“아줌마 힘들겠다. 이 아저씨랑 놀러 갈까?”

“.”

역시 대답이 없는 혜빈은 고개만 가로 젓는다.

“아줌마랑 같이 꽃 보러 갈까?”

혜빈이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가자. 그런데 이름이 뭐야? 아줌마도 이름 알고 싶은데.”

“.”

“말하기 싫어? 음. 그럼 아저씨가 말한 혜빈이가 맞아? 아줌마도 혜빈이라고 불러도 돼?”

날 한 번 쳐다보고는 수줍은 듯 신이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혜빈이다. 그리곤 맞잡은 두 손을 풀지 않고 둘은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몸을 열심히 혹사시켰는지 벌써 허기가 진다. 둘이 나간 입구를 멍하니 쳐다보던 난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걸 확인했고 그때 보유원으로 돌아오는 혜빈이와 신이를 볼 수 있었다. 혜빈이를 품에 안고 신이가 천천히 걸어온다. 등을 토닥이며 걸어오는 신이의 모습에 또 아련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시야를 흐릿하게 물들였다.

“어디까지 갔다가 왔.”

“쉿.”

“.”

“방금 전에 잠들었어요.”

“낯가림이 심한데. 당신을 잘 따르네.”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벌써 아가씨네요.” 

“아가씨?”

“.네.”

“안 힘들어? 내가 안을까?”

“아뇨. 제가. 안고 있을게요.”

그늘진 벤치로 걸어간 신이가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아 연신 혜빈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뭐라고 소곤거린다. 조용한 보유원의 마당에서 아주 작게 들리는 신이의 자장가 소리가 내 마음처럼 촉촉이 젖은 빨래들을 따뜻하게 말리는 듯 느껴졌다.

일을 바쁘게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보유원의 하루는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청소를 끝내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우리들과 달리 신이는 혜빈과의 시간만을 보냈고, 그런 신이를 이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나였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나만이 아니었다.

“너무 정 주지 말라고 말해줘.”

“네?.네.”

“혜빈이. 좋은 엄마 아빠한테 갈 수 있을 거 같아.”

“엄마 아빠요?”

“응. 입양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 망설이고 있지만 곧 결정을 할 거 같아.”

“그.렇군요.”

“이번엔 정말 상처받지 말아야 되는데.”

“.”

보유원에서 입양절차를 정식으로 받고 아이를 데리고 간 부모 중에서도 다시 돌려보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누구보다 상처받는 건 버려지듯 다시 돌려보내진 아이들이었다. 그나마 보유원이나 입양시설로 고충을 토로하며 포기를 하는 경우는 나은 편이었다. 

데리고 가선 아무 말도 없이 버리는. 그런 인간말종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임을 알 게 된 후 엄청난 분노를 느꼈지만.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정작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혜빈이도 한 번의 입양과 돌려보내짐을 겪은 아이였다. 

시간이 흘러 6시가 다 되었을 때 우리는 아이들과 오늘도 여지없는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게 된다. 이 시간이 괴롭다 느껴질 때도 있지만. 다음 달에 꼭 다시 온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태규씨.”

“.왜?”

“혜빈이가.”

나도 처음 왔을 때 아이들과의 헤어짐이 가장 힘들었는데 신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예상했던 일이라 생각을 하며 신이를 향해 걸어간다. 

“혜빈아. 다음 달에 꼭 올게. 아저씨 알잖아.”

“.”

혜빈이가 고개를 크게 가로 젓는다.

신이의 가디건을 쥔 손을 더 꽉 쥐며 아예 다리에 달라붙는 혜빈이었다.

“어허! 장혜빈! 떼쓰면 원장엄마가 혼난다고 했지!”

“훌쩍.훌.쭉.”

“혜빈아. 아줌마 아저씨도 집에 가야지. 다음 달에 또 보면 되잖아.”

“.”

혜빈이가 또 고개를 가로 젓는다.

“혜빈아. 이 아줌마가. 다음 달에도 또 올게. 응? 우리 약속할까?”

“시러.”

“.”

“가지.마. 시러.”

처음으로 혜빈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7개월이란 시간동안 많이 신경을 쓴 아이라 생각했고 보유원에서 가장 친해진 아이라고 생각했던 혜빈이었지만 정작 혜빈의 목소리는 오늘 처음 듣게 된다.

“아줌마가. 꼭 다시 올게. 자. 약속!”

“시다고!”

“장혜빈! 원장아줌마한테 혼난다!”

“시러! 시다고! 시러! 으앙. 시.러. 앙앙.”

“얘가 오늘 왜 이래. 이리 와!”

울음보를 터트린 혜빈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당황하며 그런 혜빈을 안으려던 신이에게서 원장님이 억지로 때어놓는다. 이런 일은 사실 어린 아이들에겐 많이 발생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닫았다 생각했던 혜빈이의 이런 돌발행동은 나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기에 먹먹히 젖은 가슴으로 신이와 혜빈, 그리고 원장님만을 바라만 보게 된다.

혜빈을 힘을 떨어트린 원장님은 우리에게 얼른 가라며 손짓을 했고 난 혜빈을 바라보며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신이의 팔을 잡고 도망치듯 주차장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게 된다.

“에고. 혜빈이가 신이씨를 많이 따르네. 신이씨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아이들이 엄마 생각나서 그런 거니까. 마음 아프겠지만 다음에 오면 또 언제 그랬냐면서 웃어줘요.”

“.네.”

한선배의 형수가 신이를 위로하지만 신이는 힘없이 대답을 하곤 우리 차로 발걸음을 옮긴다.

“잔인.하네요.”

“.”

“이럴 거면. 왜 절 데리고 왔어요?”

걸어가는 동안 신이가 날 원망스럽다는 듯 작게 속삭인다.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오늘 일정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계산적인 게 아니었다. 그냥 내 삶을 신이에게 거짓 없이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행동했었고 부작용을 각오하고 신이를 데리고 왔지만. 이런 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다. 아니. 내 생각이 짧았다는 걸 이제 와서 후회하게 된다.

“미안. 혜빈이가 이렇게 빨리 당신한테 마음을 열 줄은 몰랐어.”

“.”

“너무. 마음 주지 마. 잔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혜빈이도 조만간 좋은 부모한테 입양 간데.”

“입양이요?”

“.응.”

“.”

“왜?”

“당신. 진짜 잔인해요.”

“.”

신이가 소리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 팔을 뿌리치고 차로 걸어간다. 

“태규씨!”

“.네.”

신이의 뒷모습에 쓰린 가슴을 애써 억누르는데 뒤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내로 가자고. 거기 한우고기집으로 전부 모이기로 했다.”

“김선배. 오늘은 그냥 갈게요. 신이 기분도.”

“한선배 마지막이라니까! 그냥 보낼 거야!?”

“.”

“먼저 출발 할 테니까 제수씨 좀 잘 다독여서 쫓아오라고! 한선배도 괜히 부르지 말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지!”

“.”

차에 탔을 때 신이가 훌쩍이던 눈물을 훔치며 창밖으로 보육원 건물을 바라본다.

“저기. 한선배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해외출장을 간다고 해서. 송별회를 하려고 하는데.”

“송별회요?”

“응. 송별회라고 해봐야 고기나 좀 먹으면서 수다나 떠는 게 다야. 몇 번 참석해봤는데 다 차를 가지고 와서 술도 거의 못 먹거든.”

“.”

“어떻게 할까? 그냥 집으로 갈까?”

“가요. 언젠 제 의사가 중요했어요?”

“.”

“혜빈이는. 누가 데리고 간데요?”

“응? 혜빈이?. 글쎄. 원장님이 좋은 분들이라고 하셨으니까. 이번엔 걱정 없을 거야.”

“.이번에? 그럼 벌써 입양을 갔었다고요?”

“.”

“입양을 간 아이가 왜 방금 전에 갔던 보육원에 있어요?”

“그게. 많이 복잡해. 사람들마다 각각 사정이 다 있잖아. 정말 아이가 필요해서 데리고 갔는데. 막상 데리고 가선 적응을 못 하는 집도 있고. 아이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부모들도 있고. 그래서 다시 돌려보내는 일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그게 말이 되요?”

“응?”

“한 번 거둔 자식을. 자기 사정이 있다고 다시 돌려보내다니요? 그럼 혜빈이. 저 어린 것이 한 번도 아니고.”

“.”

“차 돌려요.”

“.뭐?”

“차 돌리라고요!”

갑자기 신이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처음으로.

다시 신이를 만나고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화를 내며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신이야.”

“가서 우리가 데리고 와요! 그럼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당신 감정이 격해. 억!”

‘끼이익!’

죽을 뻔 했다.

아니. 사고가 날 뻔했다.

신이가 갑자기 자신의 방향으로 핸들을 잡고 흔들었기에 중심을 잃고 차가 비틀거렸으며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가 급정거 하게 된다.

“미.미쳤어!”

“돌아가자고요!”

“신이야!”

“저 어린 것을. 어떻게.”

신이가 울먹인다.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어떻게 품에 안은 아이를 버릴 생각을 해요? 그게 사람이에요!?”

만난이후 처음으로 신이가 서럽게 울며 감정을 온 얼굴로 드러낸다.

내 질타와 비아냥거림에도 이런 표정을 짓지 않던 신이가 나도 그 사람들과 만찬가지처럼 노려보듯 쳐다봤고 노려보는 그 두 눈으로 소리 없는 한 줄기의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우린. 입양 못 해.”

“.왜요?”

“입양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당신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하는데. 입양이라는 것도 절차가 있고 법이 있더라. 이혼한. 제대로 된 가정이 아닌 우리한테 아이를 줄만큼 법이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

“.”

“혜빈이는. 좋은 부모 만나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특히나 다시 돌아온 아이는. 심사 때 더 철저히 본다고 하더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차라리. 봉사 같은 걸 하지 마요.”

“신이야. 그 봉사라는 게. 그래서 더 해야 돼.”

“.”

“나도. 아이들과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송곳으로 찢는 듯 아픈데. 그런 고통 때문에 안 간다면. 아이들이 덜 괴로워할까? 자기만족이라고 그냥 한 달에 한 두 번 가는 게 아니야. 우리마저 안가면. 우리가 저 보육원을 후원하지 않는다면 국가보조금만으로 보육원이 제대로 운영이 될까? 나도 처음 저 보육원을 갔다가. 후회를 엄청 많이 했어. 너랑. 헤어지고 나서 핸드폰을 정리하다가 이게 뭔가?.하고. 그냥 끊어야지 라고 생각했다가. 아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혼이나 치유하자는 생각으로 갔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나올 땐 더 괴롭고 힘들더라.”

“치유요?”

“응. 사실 엉뚱한 생각까지 했어. 우리가 헤어진 게. 아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더라.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그래서 이런 뜨내기 같은 방문자한테는 정도 잘 안주려고 하더라고. 그냥 놀아주는 아저씨?. 그런데도 막상 나올 땐. 다시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눈에 밟히더라.”

“.”

“지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새끼가. 동정심이랍시고. 그런데 말이야. 말은 안 해도 조용히 와서 안아주는 혜빈이를 보고 있으면. 내가 동정을 받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도 알아봤어. 입양을 할 수 있는지. 비록 내 자식이 아니지만 서로 배워가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양절차를 알아보고. 입양을 할 수 있는 지 알아보고.”

“.그런데요?”

“이 좆같은 대한민국은 뭔 놈의 조건이 그렇게 많고 까다로운 지 처음 알았지. 가족관계증명서. 건강진단서. 입양적격추천서. 자녀양육계획서. 아니. 서류가 문제가 아니더라. 독신이라도 입양을 할 순 있지만.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이란 게.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이란 걸 알았다고 해야 하나?.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을 건사할 능력이란 게 없다는 걸. 말이야. 거기다가 이혼전적도 마이너스가 되더라고. 그리고 재산도. 양자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 있는데.”

“그걸. 다 알아봤다고요?”

“응. 가족사진까지 제출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웃기도 했다니까.크크크.”

말을 하면서도 다 잊었다 생각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된 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일만 최선을. 마음을 담아서 하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닐까?”

“할 수 있는 일이라뇨?”

“깨끗하게 씻겨주고,, 빨래해주고, 놀아주고. 매주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매주 가면. 정말 범죄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범죄자라뇨?”

“납치!. 예쁜 혜빈이를 납치할 지도 모르잖아. 당신도 방금 살인미수였어! 운전 방해는 고의적인 살인 미수라고.크”

“.”

“당신이 그 정돈데. 난 어떻겠냐. 하지만 다 그렇게 살잖아.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참고. 법 잘 지키고. 쥐 죽은 듯이. 그리고 열심히.”

“.다.시. 다시 결혼해서. 다른 좋은 여자랑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왜 안했겠냐! 나도 남자고 사람인데!”

“.”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잖아 결혼생활이 행복했던 사람일수록 재혼도 빨리 한다고. 반대로 불행했던 사람은. 결혼이라는 말만 나와도 진절머리를 친다고. 그런데 나 같은 놈은 어떨까?”

“나.같은 놈이라뇨?”

“결혼 생활은 정말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혼을 했잖아. 조금만 더 참을 걸, 당신이 왜 그렇게 노이로제 걸린 여자처럼. 꼭 미친 여자처럼 행동했던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고. 생각부터 했으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후회를 몇 번이나.”

“그만.해요.”

“.”

“어차피 지난 일이에요. 이미 떨어져서 뭉그러진 감은. 주워 담는다고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잖아요.” 

신이의 말에 낮에 봤던 감나무 아래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나무에서 떨어진 감들을 쓸어버리며 아깝다는 생각만을 했었는데. 신이의 기분만큼이나 차안은 다시 고요함으로 채워져 간간히 차안에 울려 퍼진 요철의 둔탁함만이 귀를 간질인다.

차를 돌려 그냥 집으로 방향을 바꿀까를 몇 번이나 고민하게 되지만 이대로 집에 간다 해도 신이의 기분이 좋아질리 없다는 생각에 결국 한선배의 송별회가 있을 한우식당으로 직진하게 된다. 김선배란 놈의 존재가 마음속에 계속 걸림돌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형수도 있는 마당에 무슨 짓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확신과 한선배에게 느꼈던 인간애를 신이도 느낄 수 있도록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잡념을 버리고 운전에만 집중을 한다.

신이와 얘길 나누며 천천히 운전을 했기에 도착한 한우고깃집 안은 이미 모임의 인원들로 시끌벅적하게 변해 있었고 뒤늦게 합류하게 된 우린 가장 가장자리에 자리를 트고 앉게 되었다. 차안에서 망설이던 신이도 보육원을 나오며 마지막 위로를 했던 한선배에 형수의 자상함과 그 한선배가 해외출장을 가는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내말에 힘겹게 차에서 내려 내 뒤를 따라왔다.

여느 모임들과 마찬가지로 네 커플인 8명의 남녀가 둘러앉은 테이블은 공통된 주제로의 대화가 아닌 서로간의 짝을 지은 대화가 주를 이루는 듯 보였다. 나와 신이가 도착한 모습을 조금 늦게 확인한 김선배가 나서기 좋아하는 버릇처럼 맥주로 보이는 액체가 담긴 컵을 들고 건배를 제안한다.

“자자 이제 다 모인 거 같으니까. 우리 건배해야죠! 그동안 가장 맏형으로서 저희를 보듬어주신 한선배의 작별과 오지에서의 건강을 위해서 건배!”

“지화자 건배”

침울함에 빠져 힘겹게 든 잔을 애써 더 들어 오리면서도 내키지 않은 듯 굳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신이 혼자였다.

당연한 모습이었지만. 그런 신이의 모습은 마지막 건배를 크게 외친 김선배와 그리고 그 건배에 호응하던 우리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난 팔꿈치로 신이의 팔뚝을 ‘툭’하고 살짝 밀친다.

“하하하 우리 제수씨가 아직 이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하시는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이라도 잘 놀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저기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김선배의 얘길 자르고 들어온다.

한선배였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5년이 넘은 분들도 계시고. 적게는 1년도 채 안된 분들도 계시지만. 모든 분들이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 자리엔 없지만 공구진씨하고 오씨. 그리고 김씨의 제수씨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 시작 한 모임이었는데. 어느새 스물 한 쌍이 넘는 커플들이 동참을 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게 되었네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좋은 취지로 시작된 모임이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주신 분들에겐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는 게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가 떠나더라도. 이 모임은 계속 유지해 주셨으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몇 안 될지도 모를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게 말이죠.” 

한선배는 잠시 목을 축이며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연설과도 같은 소감을 시작하는데. 한선배의 형수가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와 앉아선 신이에게 맥주잔을 건넨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신이는 건네받은 맥주잔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데. 형수가 급구 다시 목을 축이라 권했고 결국 작은 목 넘김으로 형수의 권유에 응하게 된다.

“오늘 많이 힘들었죠?”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구먼. 한동안은 혜빈이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을 거예요. 그래서 더 힘들 테고. 아이 때문에 이혼했다고 하던데.”

“.”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살아온 이 아줌마의 주제넘은 푸념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우리도 아이가 없어요. 태규씨랑 다르게 저흰 제가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못 가졌는데. 뭐 운명이라고 받아드리고 같이 열심히 살고 있죠.”

“.”

“사실. 6년 전 그 보육원에서 한 아이를 데리고 왔었는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린 건지.”

“그럼.”

“에고고. 제가 약간 취했나보네요. 괜한 헛소리만 늘어놓고.”

“아니에요.”

“그런데 신이씨. 신이씨랑 태규씨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라는 얘길 해주고 싶이서 이렇게 주제넘게 왔어요. 이혼을 하고 다시 이곳까지 같이 동행을 한 이유를 전 모르지만. 만약에, 만약에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만나기 시작한 거라면. 믿으세요. 태규씨란 남자 몇 개월밖에 못 봤지만 진국이라는 걸 저도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아마 신이씨도 너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비밀인데. 저이랑 나도 한 번 이혼했었거든요. 그러니까 경험자로서 얘기 해주는 거니까.”

담담한 어투의 형수에 얘기가 이상하리만큼 시끄러운 이 홀 안에서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쩌면 형식적인 위로의 얘기일 수 있는 형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신이는 작게 코를 훌쩍거렸고 그 훌쩍임을 가리려는 듯 남은 맥주를 조금씩 다 마신다.

그리곤 빈 잔을 형수 앞에 두 손으로 모아 내밀며 배시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언니.”

“네?”

“저 한 잔 더 마셔도 될까요?”

“그럼요! 이런 날엔 술만큼 좋은 약이 없죠! 자! 이 언니가 한 잔 더 따라줄게요.”

“에이 형수님 너무 하시네.”

“네? 김씨는 또 얼마나 마신거야! 내가 술 좀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

“하하하 운전해주는 마누라가 있는데 이런 날 안마시면 언제 마십니까! 형수가 자꾸 그러시면 저 정말 섭섭합니다!”

불쑥 들어온 김선배의 입에선 이미 알코올의 쩌든 내가 풀풀 풍겨오고 있었다. 그 냄새에 형수도, 그리고 신이도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빼게 된다.

“그나저나 진짜 넘하시넹! 우리 이쁘니 제수씨를 형수 혼자 독점하셨나!”

“독점하긴 누가 독점을 해요. 그리고 김씨는 술 취했으면 차에라도 가서 누워요. 피곤한데 술 많이 마시면 더 빨리 취하는 거 몰라요?”

“어라! 지금 형수가 내 걱정 해주는 겨!? 우왕 기분 좋네 하하하하.”

“네네. 제가 걱정해주지 누가 걱정해줘요. 알았으니까. 그만 마시고,. 저 구석에 가서 좀 누워요.”

“푸하. 저 안 취했는데요. 누가 취했데요! 누가!?”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섭하네. 왜 우리 이쁘니 제수씨를 형수 혼자 독점하십니까!”

“에고고. 김씨 많이 취했네. 부영씨 얼른 와서 서방님부터 챙겨야지 뭐해.”

“네? 아유. 이 사림이 또. 여기서 뭐해요!”

“어! 이거 놔라!”

“놓긴 뭘 놔! 엄한데 가서 주정부리지 말고 얼른 자리로 돌아와요! 에휴. 죄송해요 형님. 이 이가 한선배님이 가신다고 많이 속상했나 봐요.”

“죄송하긴. 우리가 고맙지. 얼른 김씨부터 챙겨.”

“신이씨 미안. 이이가 주정이 좀 있어. 이해해줘.”

“.아니에요.”

역시나 진상은 마지막까지 진상이란 생각을 확인시켜주며 김선배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로 끌려가듯 돌아가 버렸다.

예상대로 김선배의 주정이 조금 있긴 했지만 송별회는 무사히 끝이 났다.

아쉬움에 서로를 포옹하는 모습으로 시간을 마무리했고 남은 사람들은 다음 달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나갔다. 나와 신이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선배와 한선배의 와이프에게 인사를 했으며 한선배에게 한국을 떠나기 전에 식사나 한 번 하자는 말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보육원의 방문은 매달 참석했던 내게도 작은 변화를 주었지만 그것보다 신이의 변화가 더 눈에 도드라졌다.

토요일 저녁은 신이만큼 나도 피곤했기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누워 잠에 취했고, 단 두 잔의 맥주에 알딸딸해진 신이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우리 둘은 일요일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에 눈을 비비며 일어날 수 있었다.

“.”

“.배고 파.”

“풋.크크”

일어나자마자 대뜸 배부터 고프다는 내 얼굴을 보곤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신이가 웃음을 짓는다. 어제의 먹먹함에 고기는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그건 신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미소를 짓고는 이내 그 먹먹함을 기억하는 지 날 멀뚱히 쳐다보며 양반다리로 앉은 내 다리에 발가락을 원을 그리듯 신이가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벌떡 일어난다.

“뭐 먹고 싶어요!?”

“응.응? 뭐. 먹지?”

“골뱅이 된장국?”

“골뱅이 된장국? 집에 골뱅이가 없잖아.”

“슈퍼에 가면 널린 게 골뱅이통조림인데. 우선 씻어요. 눈곱도 좀 떼고. 내가 금방 사올게요.”

“응.”

어제 복장 그대로 일어난 신이는 다시 가디건을 몸에 걸치곤 집을 나선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이의 얼굴빛이 한층 밝아진 듯 느껴졌기에 나도 기분 좋게 일어나 욕실로 가벼운 발걸음을 나서게 된다. 

골뱅이 해장국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소라나 조개를 넣고 끓이는 게 보통인 된장국에 실수로 사온 골뱅이통조림을 보며 난감해 하던 그때의 신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된장국을 떠먹게 된다.

“왜 웃어요?”

“응? 그냥.”

“근데. 보육원에 용품 같은 거 보내도 되요?”

“용품? 무슨 용품?”

“뭐. 이것저것.”

“상관은 없는데. 먹거리도 아니고 용품 같은 건 애들한테 다 보내려면 돈이 만만치 않을 텐데.”

“다 보내야 되요?”

“그럼. 누군 주구 누군 안 주냐?”

“.아. 그것도 그렇구나. 생각이 짧았네.”

“혜빈이가 계속 밟히지? 나도 그랬어. 한동안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게. 꿈까지 꾸게 되더라고. 그런데 익숙해져야 돼. 매달 찾아갈 때마다 그런 모습 보면서 매일을 힘들어하면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의욕까지도 꺾이게 되더라고. 아프지만. 참아야지. 능력이 안 되니까 더 참고 더 노력해야지. 우리 780년 초 세대가 참는 거 하난 무지 잘하잖아.”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이 변했네요.”

“응? 내가?”

“.네.”

“변하긴. 그냥 생각하기 싫어서 몸을 막 굴리고 살았던 것뿐인데. 운동도 열심히 하고. 뭐. 이것저것.”

“그럼 도우미는요?”

“.도우미라니?”

“최근에도 자주 갔어요?”

“어딜?.아”

신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던 난 그때 박항구와 함께 하며 얘길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최근이란 단어에 창구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요즘 내가 갈 시간이 있냐? 참나. 그리고 당신 은근히 뒤끝 장렬이네! 와.”

“.”

‘당신도 강한상이란 놈하고 신나게 놀아났잖아!’ 라고 목까지 차오르던 말을 되삼키며 변명과도 같은 농담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돌싱이지 고자냐!? 건장한 30대 남자가 놀다보면 여자 끼고 놀 수도 있는 거지! 어디 감히 서방님 하시는 일에 왈가왈부를.”

“.”

“그나저나 오늘은 뭐 할까?”

“그냥 집에서 쉴까요?”

“집에서?”

“예. 나간다고 특별할 것도 없고,, 청소도 좀 하고.”

“어제 그렇게 청소를 하고 또 청소를 하자고?”

“어제에 비하면 여긴 껌! 이죠!”

“껌 같은 소리하네. 싫어! 오늘은 그냥 뒹굴 거야. 나도 뒹굴 권리가 있다 이 말이야!”

“아 네. 그럼 당신은 뒹굴 거려요. 청소는 제가 할게요.”

“그게 말이냐 밥이냐? 매일 뒹굴 거리라면서 귀찮게 만드는 게 누군데!”

“피 누가 귀찮게 했다고. 청소를 하는데 옆에서 계속 걸리적거리니까 그렇지.”

“와 안방에 누워있으면 안방 이불 턴다고 그러고! 거실에서 티비라도 좀 보려면 청소기 돌리면서 하나도 못 보게 하면서.”

“내가 언제요! 그리고 남자가 힘쓰는 일 좀 도와주면 안 되나!?”

“하여튼 무조건! 싫어! 청소기만 돌려봐! 아주 차단기부터 내려버릴테니까!”

“.”

“아 배부르니까 눈이 또 감긴다. 난 낮잠이나 한 방 때릴 란다.”

“그러시든가.”

“.청소기 꺼내지마! 집도 깨끗하구만.” 

이런 투정어린 부부싸움이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안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입 꼬릴 올리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런 게 현실이고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일 텐데. 묘한 평온함에 침대에 대자로 눕자마자 눈을 감게 되었고 잠시 동안의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몇 시간 후면. 신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지금 순간을 만끽하며 즐기자는 생각만을 머릿속에 곱씹으며 어제의 신이 모습을 떠올려본다. 신이에게 악이 될 지도 모를 예상치 못했던 보육원이란 곳의 방문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두 눈을 감는데.

‘위윙윙윙윙’

거실의 창문부터 조용히 전부 열고는 다짜고짜 청소기부터 돌리는 신이의 행동은 내 그런 기억의 음미에 찬물을 끼얹는 행도이었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작은 거실 구석까지 청소기를 밀어대는 신이의 행동을 쳐다보며 잔뜩 볼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신이는 내 표정조차 쳐다보지 않고 엎드려선 텔레비전 다이의 아래까지 청소기헤드를 바꿔 밀어 넣는데. 그 모습에 묘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어제부터 계속 입고 있는 타이트한 청바지와 흰색 티셔츠.

아마도 갈아입기 귀찮아 청소를 다 끝낸 후에 갈아입을 작정인 듯 신이는 그 복장 그대로 무릎 굻고 엎드려 구석의 숨겨진 먼지들까지 뒤집어쓰며 청소를 시작하는데 실룩거리며 좌우를 번갈아 움직이는 동그란 엉덩이와 브래지어에 가려졌지만 중력에 의해 더 커 보이는 흰색의 볼록한 덩어리들을 그리며 더 커 보이는 신이의 가슴을 감상하듯 문턱에 서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다가 내 하반신을 내려다보게 된다.

“어제의 감흥은 감흥이고. 이건 이거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청소에 열중하고 있는 신이의 뒤로 발소리 죽여 다가간다.

청소기의 소음에 내 인기척조차 못 느끼는 듯 여전히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낑낑대며 거실 구석까지 움직이는 신이의 바로 뒤로 다가간 난 조심스럽게 입고 있던 팬티를 내리고 더 가까이 걸어간다.

“악! 무.뭐 하는 거예요!”

신이에게 바짝 다가가선 팔을 둘러 스판 청바지의 후크와 지퍼를 단숨에 풀어버리곤 잘 내려가지 않는 청바지를 있는 힘껏 끌어내리는데. 신이가 깜짝 놀라 엉덩이를 돌려 빼려고 하지만 이미 탐스러운 엉덩이의 한쪽이 내 손에 꽉 움켜 잡혀있었기에 옆으로 쓰러지듯 눕게 된 신이였다.

그런데. 이 스판 청바지라는 게 이렇게 벗기기가 어려운 지를 처음 알게 된 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입은 건지. 라는 생각을 하며 신이의 바지를 힘으로 끌어내리며 낑낑대는데.

“아악. 아.아프다고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씨. 이게 왜.”

“악!.”

‘퍽!’

“욱.하.하필 거길.”

바동거리며 자기가 벗겠다는 말을 하던 신이의 모습에도 벗기는 건 내 몫이란 듯 힘을 더 주기 시작한 나였는데. 고통을 못 이기곤 신이가 바동거리다가 무릎으로 내 거시기를 차버렸다.

“어! 괘.괜찮아요?”

“으욱. 지.진짜. 아파.”

“풋.큭큭큭. 고거 쌤통이다!”

“진짜 아프다고! 웃음이 나오냐! 아윽. 터진 거 아닌가.” 

“터져? 터졌어요?!”

“아윽.”

식은땀까지 흘리게 된 내 모습을 발견한 신이의 얼굴이 웃음기가 싹 사라진 표정으로 다급히 새우처럼 쪼그리고 옆으로 누운 내게 달려왔다.

“아악! 마.만지지 마!”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괜찮은 가 봐야죠.”

“윽.”

런닝구에 검은색 양말만을 신고 있는. 그런데 내가 왜 양말은 안 벗었지?. 라는 생각을 그 와중에 했고, 신이가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내 허벅지를 벌리곤 개구리 자세처럼 만들어 내 자지가 괜찮은지 여기저기를 살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엄청난 고통에 언제 발기를 했냐는 듯 추욱 쳐져버린 내 자지를 들고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흔들어대는 신이는 급기야 자지를 배꼽 쪽으로 젖히고는 불알을 만지작거린다.

당연히. 자지의 본성대로 욕구를 찾아 위로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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