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심유정 =========================================================================
10.
철썩! 철썩!
“이년 완전히 맛이 갔네.”
“쌤통이다.”
얼이 빠진 유정의 뺨을 박종진이 사정없이 돌렸지만, 유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죽기 직전의 엄마만 바라봤다.
“뺨은 참아도 앞뒤구멍이 다 뚫리면 아파 죽는다고 울겠지? 흐흐흐흐~”
“야이 개새끼야! 혼자서 구멍 두 개 다 뚫는 게 어디 있어? 하나는 남겨둬.”
“네가 지난번에 그렇게 하자고 말했잖아. 기억 안 나?”
“에이 X팔! 입을 꿰매든지 해야지...”
“흐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지은 박종진의 손이 유정의 옷을 벗기려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쒸우웅~
퍽!
“커억!”
박종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우측으로 1m나 날아가 꼬꾸라졌다. 좌측에서 날아온 화살이 머리를 뚫고도 추력이 남아 박종진의 무거운 몸을 부웅~ 날아가게 했다.
쒸우웅~
“으아악!”
두 번째 날아온 화살이 전강수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으며 견갑골과 쇄골을 동시에 부서뜨렸다.
박종진의 죽음에 놀란 전강수가 급히 몸을 틀며 운 좋게 목숨은 구했지만,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굴렀다.
쒸우웅~
타앙!
“크윽!”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을 최동일이 몸을 뒤로 빼며 칼로 쳐냈다. 그러나 힘을 잔뜩 머금은 화살을 완벽히 쳐내지 못해 방향만 살짝 틀어지며 왼쪽 허벅지에 꽂혔다.
퍽!
“으아아악~”
꼬리를 물고 날아온 화살이 오른쪽 허벅지에 꽂히자 최동일이 비명을 지르며 벌러덩 쓰러졌다.
동시에 쏘아진 것처럼 화살 4발이 연속으로 날아들자 박종진은 즉사, 전강수와 최동일은 반병신이 되어 고통의 비명을 질러댔다.
무기를 투탕카멘의 빛나는 망고슈로 바꾸고 최동일과 전강수에게 다가가 양쪽 다른 다리 인대를 잘랐다.
“아아아악~”
“크아아악~”
인대를 끊자 둘 다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바로 죽일까 하다가 주머니는 털고 죽이는 게 이익이라 잠시 목숨을 살려뒀다.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전강수와 박종진이 유정이 서로 겁탈하겠다고 말다툼을 할 때였다.
귀여운 유정이를 강간하겠다는 말에 불같이 화가 솟구쳐 있는 힘껏 화살을 날려 놈들을 응징했다.
귀엽고 예쁜 소녀를 아끼고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짐승처럼 다루려 한 놈들의 행동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성폭행은 판게아에서 아주 흔한 일로 화젯거리도 안 됐다. 힘이 법인 세상에서 나약한 여성이 몸을 지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길드의 힘을 빌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늑대를 피해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과 같은 꼴이었다.
길드는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성한 이익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평등의 수평 구조가 아닌 군대와 같은 상명하복의 수직 구조로 하부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심한 차별에 시달렸고, 힘없는 여성들은 먹잇감이 되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했다.
여성이 몸을 지키는 방법은 힘을 키워 스스로 지키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여성이 강자가 되기는 쉽지 않아 많은 여성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지금은 판게아의 문이 열린 지 4개월밖에 안 돼 성폭행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아직 절대적인 힘을 갖춘 사람이 없어 서로 눈치를 봐야 해 최동일, 전강수, 박종진처럼 몰래 숨어서 나쁜 짓을 했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갖춘 강자들이 등장하는 1년 후부터는 도시에서도 성폭행이 버젓이 일어났다.
먼저 들어와 힘을 키운 놈들은 신입생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보았다. 이들의 옷을 빼앗고, 귀중품을 빼앗고, 시간을 빼앗고, 몸을 빼앗고 마지막엔 목숨까지 빼앗았다.
“유정아! 유정아! 나 기억 못하겠어? 부산행 KTX 열차에서 통로 옆에 앉았던 만수 오빠야.”
“네? 누구요?”
“네가 이름이 이상하다고 놀렸던 만수 오빠라고.”
“만수 오빠요? 이렇게 젊지 않았는데.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니? 지금 널 구해주고 있잖아.”
“그래요?”
박종진이 죽고 최동일과 전강수가 쓰러지자 혼백이 반쯤 달아났던 유정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 해 말을 걸어도 엉뚱한 말만 했다. 유정을 버려두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의술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20년간 판게아에서 구르며 수도 없이 다쳤고, 죽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보자 다친 상태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가슴과 등에 난 상처는 치명적이라 상급 포션이 아니면 살릴 수 없었다. 하급 포션은 먹여봐야 잠깐 상처를 지연시키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에 전부였다.
먹여봐야 낭비였지만,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네준 유정에게 엄마와 작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하급 포션의 마개를 따서 상처에 골고루 뿌리고 나머지는 입에 넣어주었다.
“하아~ 하아~ 유정아! 유정아!”
“엄마! 엄마! 흑흑흑~”
아주머니가 정신을 차리자 유정이 품에 매달려 엄마를 부르며 아기처럼 펑펑 울었다.
유정과 아주머니의 애틋한 모습을 보자 판게아로 떠나기 이틀 전 엄마 옆에서 꼭 붙어서 잤던 일이 기억났다.
루시퍼의 시간 역행 마법으로 서울로 다시 돌아오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돼 엄마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
꿈이 아니라 진실이란 걸 알고도 전화로 안부만 물었다. 간절히 보고 싶었지만, 찾아가면 엄마가 불편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엄마는 5년 후 재혼해 다른 남자의 아내이자 딸을 가진 엄마가 됐다.
그 후로 한집에서 같이 살 수도, 품에 안겨 잠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엄마를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간 홀로 키워준 것만 해도 감사했다. 5년간 홀로 자식을 키우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썽을 부리진 않았지만, 죽은 남편 생각과 불안한 미래, 외로움, 허망한 삶 등 슬픔으로 점철된 5년은 50년처럼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길 바랐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편 있었다고 해도 그건 과거일 뿐이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안아줄 수도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엄마에겐 힘들 때 보듬어 안아줄 남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분과 재혼하라고 말씀드리고 지방 대학 기숙사로 들어간 후 발길을 끊었다.
20년 만에 간신히 지구에 돌아갔다 또다시 떠나야 할 상황이 되자 엄마가 불편해도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옆에서 손이라도 잡고 자고 싶어 괴롭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찾아갔고, 엄마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남들은 한 번인데 나는 두 번이나 사라져 속을 두 배로 썩히네. 하아~“
“유정아! 엄마 괜찮아! 울지 마.”
“저.정말 괜찮아?”
“그래.”
“엄마! 만수 오빠가 엄마를 구했어. 나도 구해주고.”
“만수 오빠?”
“열차에서 내 통로 옆에 앉았던 오빠 있잖아. 기억 안 나? 등산 점퍼 입고 있었잖아.”
“아~ 기억난다. 네가 회사 잘렸다고 했던 그 아저씨 맞지?”
“응!”
나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가 아저씨라고 부르자 욱해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화를 낼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모습이 많이 바뀌었네요. 10년은 젊어 보여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유정이를 구해주고 이렇게 말할 시간도 줬으니까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요.”
아주머니는 자신이 죽을 거란 걸 알고 있는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모습에 아주머니가 달라 보였다.
“유정아! 어머니와 얘기 나누고 있어. 나는 저놈들 처리하고 올게.”
“네!”
유정이에게 엄마와 마지막 말을 나눌 시간을 주고 바닥을 박박 기고 있는 최동일과 전강수에게 다가갔다.
“옛정을 생각해서 생을 정리하라고 시간까지 줬으니까, 죽을 준비됐지?”
“옛정이라니요?”
“몰라도 돼. 그런 게 있어.”
최동일와 전강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옛날 생각이 나 말실수를 했다. 나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나쁜 감정이 조금은 희석되는지 나도 모르게 옛정이라는 말을 썼다.
‘이용만 실컷 당했는데, 옛정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사.사.살려주십시오. 원하시는 건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종이라도 되겠습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한다고?”
“네!”
“그럼 스티그마부터 내놔.”
“어.어.없습니다.”
“거짓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열 개를 자르고도 계속 거짓말을 하면 발가락 열 개도 자를 거야.”
“이.이.있습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너는?”
“저.저도 있습니다.”
“있으면 말만 하지 말고 빨리 꺼내. 나 바쁜 사람이야. 또다시 뭉그적거리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알았어?”
“네에~”
살벌한 협박에 최동일과 전강수가 다급히 스티그마를 꺼냈다. 스티그마는 장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이름을 3번 부르고 해제하고 하면 가슴에서 튀어나왔다
스티그마 밤에 우는 하얀 여우(1/1,000)
스티그마 야수의 움직임(1/1,000)
최동일은 구하기 힘든 소환수 스티그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 거창할 뿐 펜리르와 비교하면 소환수라는 이름이 아까운 놈이었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환하면 크기가 1m로 뿔 토끼밖에 잡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소환수는 교란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 상점에 팔지 않고 모아두는 게 현명했다.
야수의 움직임은 공격속도와 이동속도를 동시에 소폭 올려주는 스티그마로, 이 역시 옵션만 거창했지 투자한 시간에 비해 효과는 미미했다.
스티그마는 장비 아이템처럼 등급이 없었다. 그러나 옵션만 봐도 좋고 나쁨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상점에서 가격을 물어보면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스티그마는 가격이 모두 달라 십대 소환수 중 하나인 펜리르는 무려 300년이었고, 고블린 족장 포키가 준 무식한 돌격은 1년밖에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