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홀로 남겨지는 것! =========================================================================
11. 홀로 남겨지는 것!
“팔 걷어봐.”
“파.파.팔은 왜...”
“몰라서 물어? 너희 남의 시간 많이 뺏어봤잖아.”
“저.저희는 그런 적이 없어서... 으아악~”
“너도 없어?”
“이.이.있습니다.”
“그럼 팔 걷어.”
“네!”
최동일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자르자 겁먹은 전강수가 떨리는 손으로 왼쪽 팔목에 감긴 천을 풀었다.
032:145:13:22:17
“새끼! 많이도 빼앗았네.”
“저도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다 보니 그만...”
“지랄하고 있네. 네 목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물을 때만 대답해. 묻지도 않는데 주둥아리 놀리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알았어?”
“네!”
“너는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검지도 잘라줄까?”
“아.아.아닙니다. 풀겠습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엄지를 놓은 최동일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팔에 찬 토시를 벗었다.
058:193:17:19:33
‘이럴 줄 알았으면 박종진도 죽이지 않는 건데. 젠장!’
시간 거래는 특수한 마법진이 새겨진 기계에 시간이 표시된 손목을 대거나, 서로 손을 맞잡은 상태서 쌍방이 거래를 승인하면 넘겨주고 넘겨받을 수 있었다.
단,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주고 싶을 때는 상대의 동의가 없어도 시간을 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은 거래 승인 절차를 밟을 수 없어 1,000년이 있든, 10,000년이 있든 사용할 수 없었다.
“몇 년 줄 거야?”
“.......”
“잔대가리 굴리지 마. 열 받게 하면 잘근잘근 토막 쳐서 죽인다.”
“저.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네 목숨값이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실망인데. 안 되겠다. 손가락 자르고 다시 얘기하자.”
“사.사.삼십년 드리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손잡아.”
“네.”
전강수의 왼손을 맞잡자 30년이 5초 만에 들어왔다. 머뭇거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망고슈를 흔들자 거래 요청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049:150:13:25:30
고개를 끄덕여 잘 들어왔다는 표시를 하고 최동일을 쏘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푹 숙인 최동일이 전강수와 같은 30년을 보냈다.
“장난해?”
“네?”
“전강수는 2년 남기고 보냈어. 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같은 삼십 년이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한 번만 더 실망시키면 그때는 머리와 몸통, 왼팔만 남기고 자근자근 포를 뜰 거야. 두 번은 없어.”
“네.네.네.네...”
전강수 - 002:145:13:21:30
최동일 - 002:193:17:19:09
박만수 - 105:150:13:25:10
“마법 배낭도 넘겨.”
“쓸만한 게 없습니다. 모두 잡동사니뿐입니다.”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잡동사니든 쓰레기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했잖아. 돌대가리야!”
“으아아악~”
망고슈를 휘둘러 최동일의 오른손 손가락을 모두 자르자 물총을 발사하듯 피가 쭉 뿜어져 나갔다.
고통에 벌벌 떠는 최동일에게서 넘겨받은 마법 가방의 주인을 나로 바꾸고 놈들이 착용한 방어구, 무기, 액세서리를 모두 빼앗아 마법 가방에 쑤셔 넣었다.
대충 훑어봐도 일반 아니면 매직 아이템들로 쓸만한 게 없어 상점에 모두 팔아야 할 것 같았다.
“얌전히 있어. 움직이면 죽는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최동일과 전강수를 잠시 버려두고 급히 유정이 곁으로 다가갔다. 떠날 시간이 됐는지 아주머니의 숨이 차분해지며 얼굴이 평온해졌다.
이런 모습은 해가 지기 직전 잠깐 하늘이 밝아지는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현상이었다.
“만수씨!”
“네!”
“미안하지만, 어려운 부탁 하나만 할게요.”
“말씀하십시오.”
“우리 유정이! 험난한 판게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조금만 돌봐주세요. 평생 돌봐달라는 말 아니에요. 1년만 아니 6개월이라도 좋아요. 그것도 아니면 만수씨가 질릴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 주세요.”
“.......”
“유정이에게 말해뒀어요. 만수씨를 남편 그 이상으로 생각하며 받들라고. 아직 철이 없지만, 똑똑한 아이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제 딸이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요리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하고, 말도 정말 예쁘게 해요. 자식이 딸 하나라 애지중지했지만, 어디 가서 욕먹지 않게 정말 바르게 키웠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유정이를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나 봐요. 제 눈에는 만수씨가 우리와는 다르게 보이네요.”
“흐음...”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요. 부탁합니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고 유정이의 따뜻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유정아! 엄마 말 잊지 말고 그대로 해야 한다. 알았지?”
“흐흐흑~”
“아가야! 울지 마!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래도 엄마는 참 행복하단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 우리 딸에게 다하고 갈 수 있어서.”
“흑흑흑~”
“엄마가 한 말 잊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하늘나라에서 우리 딸 잘사는지 끝까지 지켜볼게.”
흐느끼는 유정의 손을 아주머니가 슬며시 잡았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죽어가는 부모가 남겨진 자식을 걱정해 마지막 남은 생명을 주고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 아주머니가 밝게 웃었다. 그 모습에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도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딸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는지 울고 있는 유정의 얼굴을 들어 뚫어지게 바라봤다.
“사랑하는 딸 유정아! 씩씩하게 살아야 해! 안녕!”
“엄마! 엄마! 엄마~”
안녕이란 말을 남기고 아주머니는 11시간 15분 14초를 유정에게 보내고 눈을 감았다.
000:000:22:30:28
최동일과 전강수, 박종진은 모녀의 시간을 하루도 남기지 않고 빼앗아 유정과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놈들을 따라 사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넘겨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협박과 고문 앞에서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달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 판게아에 혼자 떨어졌다면 협박과 고문을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있는 사람은 협박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99.99%는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간을 넘겨줬다.
‘나 때문인가? 미래가 바뀌었어.’
타임슬립 전 유정과 아주머니를 도시 밖으로 내몬 놈들은 최동일과 전강수, 박종진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라 100% 믿을 순 없지만, 20대 남자 9명이 조직한 독사 길드가 유정과 아주머니를 핍박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방법은 최동일 패거리와 같아도 가해자가 바뀐 건 엄청난 변화로 내가 알고 있던 미래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미래가 바뀌고 있어. 좀 더 서둘러야겠어. 이러다 던전을 빼앗길 수도 있어. 그런데 미래가 바뀌면 주아와는 만날 수 있는 건가?’
“도저히 안 되겠다.”
“네?”
“너희가 유정이와 아주머니에게 남겨준 시간을 보니까 2년 넘게 남겨준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같아. 1시간 남기고 모두 보내.”
“그.그..그러면 저희 죽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개가 되라고 하면 개가 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지금 줄래 아니면 손발 다 잘리고 줄래? 3초 준다.”
“드.드리겠습니다.”
박만수 - 110:124:18:06:01
최동일 - 000:000:00:59:49
전강수 - 000:000:00:59:59
최동일과 전강수의 시간을 1시간만 남기고 모두 빼앗았다. 정상적인 상태면 1시간이면 이스트 성에 2~3번을 가고도 남았다.
그러나 최동일은 양쪽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인대도 모두 끊겨 일어설 수 없었고, 오른쪽 어깨가 박살 난 전강수는 살짝만 흔들려도 엄청난 통증에 까무러칠 지경이라 인대가 멀쩡해도 걸을 수 없었다.
1시간을 남겨준 건 죽음의 공포에 떨다 죽으라는 뜻이었다. 박종진처럼 편안한 죽음을 내리기엔 유정의 원한이 하늘에 닿아있었다.
“유정아! 그만 일어나. 어머니 묻어드려야지.”
“안 돼요!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흐흐흑~”
“네가 이러면 네 걱정에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시질 못해. 좋은 곳에 가실 수 있게 도와드리자.”
“지구가 아닌 판게아에서도 좋은 곳에 갈 수 있나요?”
“나는 무교라서 종교적으로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어. 하지만 내가 아는 상식으로 말한다면 돌아가신 곳이 어디든 좋은 곳은 한 곳이라 모두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해.”
“알았어요. 대신 엄마와 작별할 수 있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그래!”
아주머니를 좋은 곳에 보내드리자고 하자 유정이 슬픔을 억제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만, 엄마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아주머니도 딸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며 참아낼 수 있었다.
깜깜한 동굴만큼 두려운 판게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맞잡아줄 손이 있어서였다.
그렇게 모녀는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그러나 이제 아주머니가 하늘나라로 가며, 유정이만 홀로 남겨졌다.
홀로 남겨진다는 건 세상에 버려지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