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채찍 =========================================================================
52. 채찍
“소희야! 베는 건 소용없다고 했잖아. 팔이든 다리든 목이든 한 방에 잘라.”
“네!”
“유정아! 머리와 심장 아니면 맞춰봐야 화살 낭비라고 했잖아. 똑바로 쏴!”
“죄송해요.”
철무동을 고문하며 생긴 더러운 기분을 유정과 소희에게 풀며 달려드는 아이스 트롤 창병과 늑대를 탄 아이스 트롤 기사를 잡았다.
아이스 트롤은 유정과 소희가 지금껏 상대했던 몬스터보다 최소 두 배는 강력했고, 상처만으론 타격을 줄 수 없어 평소보다 배는 힘든 전투가 됐다.
그러나 아이스 트롤은 시작에 불과했다. 저주받은 대지에 발을 들여놓으면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몬스터가 땅속과 하늘에서 수시로 나타났다.
저주받은 대지에 가장 많은 몬스터는 호드 종족이지만, 괴물의 숫자도 호드 종족만큼 많았다.
놈들은 고급 난이도 던전의 보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력했고, 크기도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호드 종족도 고급 난이도 지역에서 만나는 놈들과 저주받은 대지에서 만나는 놈들은 차원이 달랐다.
고급 난이도 지역에 나오는 놈들은 싸움에 밀린 약한 부족들로 부족장이 고급 난이도 던전의 보스급에 불과했지만, 저주받은 대지에서 만나는 호드 종족 우두머리 중엔 영웅과 신화급 보스 몬스터도 수두룩했다.
또한, 영웅과 신화급 보스 곁에 있는 몬스터들은 더욱 강력해 유정과 소희의 현재 능력으로 저주받은 대지에 발을 들여놓으면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700년씩 줄 테니까 스탯에 100년씩 투자해. 힘은 가지고 있는 시간에서 50년씩 투자하고, 200년은 오늘 구한 스티그마에 투자해.”
“고마워요, 오빠!”
“감사합니다.”
이름 : 심유정
칭호 : 없음
시간 : 025:200:20:20:20
운 : 241.0+82 =323.0
힘 : 433.0+174 =607.0
체력 : 613.0+210 =823.0
민첩 : 493.0+479 =972.0
지력 : 241.0+105 =346.0
스티그마 하늘에서 내리는 비(1/1,000) : 화살 3발로 늘어남
이름 : 권소희
칭호 : 없음
시간 : 036:015:20:31:33
운 : 241.0+80 =321.0
힘 : 433.0+215 =648.0
체력 : 493.0+155 =648.0
민첩 : 613.0+280 =893.0
지력 : 241.0+50 =291.0
스티그마 까치독사(1/1,000) : 지력 곱하기 2의 독 데미지와 마비확률 3%
“유정이는 데스나이트로 놈을 공격하며 놈이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화살로 계속 끊어줘.”
“네!”
“소희는 데스나이트가 놈과 대치하면 은신으로 다가가 신체 부위를 확실하게 절단해. 보스의 치유력과 재생력은 부하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나 살짝 도려내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크게 잘라내야 놈을 잡을 수 있어.”
“알았어요.”
얼음 성채의 서리 법사 카라이진은 빙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법사로 원뿔 모양의 얼음조각으로 적을 공격하는 콘 오브 아이스와 아이스 미사일의 거대화 버전인 아이스 니들, 습기를 이용해 얼음 안개를 만들어 이동속도를 떨어뜨리는 아이스 포그, 얼음 장벽을 만들어 상대를 가두는 월 오브 아이스, 얼음의 폭풍 아이스 스톰 마법을 주로 사용했다.
히이이잉~
데스나이트를 태운 검은 흑마가 앞발을 높이 들어 크게 울부짖으며 서리 법사 카라이진을 향해 돌격하자 특수 효과를 연출하듯 하얀 안개가 커다란 홀(hall)을 빠르게 잠식했다.
아이스 포그가 홀을 가득 메우자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며 방어구에 하얀 서리가 앉았다.
‘안개가 흘러나온 지 30초도 안 돼서 영하 10도로 떨어져? 이러다 큰일 나겠다. 펜리르! 화염 브레스로 안개를 걷어내.’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자 순식간에 입이 얼어붙고, 눈썹까지 달라붙어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급히 손목에 찬 디지털시계를 확인하자 영하 10도를 가리켰다. 이대로 두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쿠아아아하~
펜리르가 입을 크게 벌리고 공중에 화염을 뿜어내자 안개가 타들어 가듯 녹아내리며 홀에 가득 찼던 희뿌연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어구가 뽀송뽀송할 때까지 화염을 뿜어내자 카라이진이 황당한 눈으로 펜리르를 바라봤다.
쒸우웅~
놈이 한눈을 팔자 데스나이트가 커다란 대검을 휘둘러 암흑투기를 날렸다. 그러나 노련한 마법사답게 투명 보호막을 사용해 암흑투기를 튕겨내고 아이스 니들로 데스나이트를 공격했다.
쾅!
얼음기둥을 암흑투기로 쳐낸 데스나이트가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카라이진을 압박했다.
캉캉캉캉~
그러나 보호막에 막혀 칼이 모두 튕겨 나왔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보호막으로 막으며 카라이진이 콘 오브 아이스를 만들어 보호막 안에 가득 띄웠다.
피웅피웅!
데스나이트와 거리를 벌린 카라이진이 보호막을 열고 서른 개도 넘는 원뿔 모양의 얼음송곳을 발사하려는 찰나 유정이 쏜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와 카라이진의 얼굴을 노렸다.
아이스 트롤답게 힘과 체력이 모두 뛰어난 카라이진이 가볍게 화살을 피하고, 다시 콘 오브 아이스를 데스나이트에게 조준했다.
은신 스킬로 몸을 숨긴 채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던 소희가 카라이진이 마법봉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망고슈로 있는 힘껏 손목을 내리쳤다.
싹둑!
“크아악~”
데스나이트와 유정에게 정신이 팔려 소희의 존재를 까맣고 잊고 있던 카라이진은 충분한 거리를 벌렸다는 생각에 방심하다 어이없게 오른손을 잘리고 말았다.
“ÆijłĦÐÞijÐÆØℓД
카라이진이 급히 보호막을 치고 뒤로 물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 주문을 크게 영창 하자 잘린 부위에서 멀쩡한 손이 서서히 튀어나왔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달려들어서 보호막을 깨!”
“아? 네.네!”
“정신 차려!!!”
카라이진의 재생 마법에 놀란 유정과 소희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소리를 질러 놈을 공격하게 했다.
잘린 손을 멀쩡히 재생하는 능력은 충분히 놀랄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놀라는 건 전투가 끝난 다음 할 일이었지 전투 중에 정신을 파는 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유정과 소희가 정신을 놓지 않았다면 카라이진은 손을 재생하는데, 엄청난 마력을 사용해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카라이진이 침착하게 다친 손목을 재생하는 동안 전투경험이 일천한 유정과 소희는 먼 산 불구경하는 듯 딴짓을 해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둘 다 볼기짝 백 대씩 맞을 각오해. 전투가 애들 장난이야?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열이 뻗쳐 카라이진의 보호막을 두들기는 유정과 소희 뒤통수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도 싸움이 끝나고 혼을 내는 게 옳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짓을 하자 흥분해 참을 수가 없었다.
성난 목소리에 군기가 바짝 든 유정과 소희, 데스나이트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보호막을 두드리자 쩍쩍 금이 가며 보호막이 깨지려 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 빨리!”
보호막이 깨지려 하자 카라이진 주위로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칼날 같은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또한, 놈을 중심으로 20m 이내만 온도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아 월 오브 아이스로 가두고 아이스 스톰으로 유정과 소희를 끝장내려는 게 분명했다.
흥분한 유정과 소희는 보호막에 금이 가자 다시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보호막만 두드려댔다.
“펜리르! 화염 브레스!”
대기하고 있던 펜리르가 껑충 다가가 화염 브레스를 발사하자 보호막이 눈 녹듯 사라지며 하얀 불꽃이 카라이진을 집어삼켰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야. 둘 다 뭘 잘못했는지 깊이 반성한 다음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와.”
“네.”
“알았어요.”
풀이 죽은 유정과 소희에게 찬바람이 불만큼 매몰차게 돌아서 재가 된 카라이진에게 다가가 아이템을 수거했다.
서리 법사 카라이진의 빛나는 얼음 목걸이 : 운+10 힘+40 지력+50
스티그마 얼음의 차가운 향기(1/1,000)
얼어붙은 돌(5%) : 얼음 속성 공격력, 방어력 5% 향상
중급 포션 1개
“주려면 10%짜리를 주든지 5%가 뭐야? 이럴 거면 강화석을 하나 주지. 젠장 할 새끼!”
유정과 소희를 힘들게 한 카라이진은 고급 난이도 던전에 어울리지 않게 유니크 아이템은 달랑 하나만 줬고, 속성석도 5%짜리를 주고 사라졌다.
그러나 속성석은 같은 계열은 합칠 수 있어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속성석은 합치기가 가능한 유일한 아이템으로 %에 상관없이 합칠 수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아이템으로 언제 또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합치기가 가능해도 손해 보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쓸만한 게 하나 있었다. 스티그마 얼음의 차가운 향기로 무기에 얼음 데미지를 실어 공격하며, 상대의 공격속도와 이동속도도 동시에 떨어뜨리는 매우 뛰어난 스티그마였다.
100년을 투자하면 지력 곱하기 1의 얼음 데미지와 상대의 이속·공속이 1% 저하됐고, 200년 곱하기 2와 3%, 300년 곱하기 3과 5%, 400년 곱하기 5와 7%, 500년 곱하기 7과 10%, 600년 곱하기 9와 15%, 700년 곱하기 12와 20%, 800년 곱하기 15와 30%, 900년 곱하기 20과 40%, 1,000년 곱하기 25와 50%까지 효과가 향상했다.
“작은 힘이 생기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행동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할게요.”
“저도 유정이와 마찬가지로 작은 힘에 취해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었어요. 깊이 반성하고 오늘 같은 일이 다신 없도록 노력할게요.”
“둘 다 그게 전부야?”
“네?”
“어떻게 바꾸겠다는 내용도 없고,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지적도 없고... 1시간 동안 생각한 게 고작 그것밖에 없어?”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아?”
“아니요.”
“그러면 1시간 동안 대체 뭐한 거야? 그냥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어? 내가 그러라고 깊이 생각하라고 한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가 잘 안 돼서...”
“그럼 다시 벽보고 앉아서 어떻게 말해야 맞는 건지 구체적으로 생각해서 저녁 먹기 전까지 말해. 그때까지도 못하면 내가 정말 화난 모습이 어떤 건지 보게 될 거야. 알았어?”
“네.”
한껏 풀이 죽은 유정과 소희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각자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고승처럼 벽을 바라보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
사실 책임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한 내게 있었다. 똑똑한 아이들이니 잘할 것이라 무턱대고 믿고 있던 내게 모든 책임이 있었다.
똑똑한 것과 현명한 것은 전혀 달랐다. 똑똑한 것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다는 뜻이었지 어질고 사리가 밝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경멸했던 동태눈깔 어른이 돼버린 것인지 똑똑하니까 잘할 거야, 똑똑하니까 착할 거야, 똑똑하니까 바를 거라는 허무맹랑한 어른들의 생각에 나도 물들고 말았다.
‘오늘 기분 진짜 X같네. 아으 열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