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타오르는 열사의 사막 =========================================================================
57.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이네요. 이러다 길 잃으면 어쩌죠?”
“정말 소희 말처럼 길 잃을 수도 있겠어요. 사방이 모두 모래 언덕이잖아요.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돼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비게이션을 가져왔으니까.”
“내비게이션이요? 판게아에도 길을 찾아주는 그런 장치가 있어요?”
“여기 있잖아.”
“이게 내비게이션이에요? 제 눈에는 그냥 가죽으로 보이는데요.”
“소희야! 가죽을 다 펼쳐봐. 그럼 이상한 게 보일 거야.”
“헉! 이게 뭐예요?”
“지도야. 우리가 지나온 곳을 알아서 그려주는.”
“아! 이거 게임에서 봤어요. 돌아다니면 어두운 부분이 사라져 지도가 완성되는 거. 그거 맞죠.”
“맞아. 이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아니요.”
“전장의 안개라고 하는 거야. 가보지 않은 곳은 안개처럼 보이지 않게 해놓은 거지.”
“게임에서 맵핵을 사용해 안개를 걷어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것도 할 수 있어요?”
“미안하지만, 그런 기능은 없어. 모르지. 대마법사라면 가능할지.”
소희의 손에 들린 건 이방인들 사이에서 내비게이션이라고 불렸던 지도로 가본 곳에 한해 자동으로 지도를 그려 주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우리가 흔히 게임에서 보던 모습과 같은 지도로 차이가 있다면 지도를 가진 사람이 걸어간 길만 나와 전체적인 지형 파악이 안 됐다.
이뿐만 아니라 지도 한 장에 던전 하나밖에 사용할 수 있었고, 가격도 무려 100년으로 가난한 이방인은 꿈꿀 수도 없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래도 던전에 들어와 지도를 활성화하고 입구 주위를 돌아 정확히 표시한 후 움직이면 자신이 입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종일 해가 중천에 떠 있자 유정과 소희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해 무척 힘들어했다.
거기다 사막답게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어 옷 속엔 모래가 가득했고, 덥고 건조해 잠깐만 움직여도 기운이 쪽 빠져 3일이 지나자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어! 저기 동굴 있다. 오늘은 저기서 하루 쉬자.”
“동굴보고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그늘이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정말 몰랐어요. 아 시원해!”
“매트리스 깔아줄게. 일어나.”
“힘들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냥 누워있을래요.”
“저도요. 힘이 하나도 없어요.”
동굴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다. 시간회귀 전에 사냥하다 지치면 잠깐씩 쉬러 오던 곳이었다.
경험이 쌓이자 혼자 사냥할 때는 석실형 던전보다 환상 던전을 애용했다. 환상 던전은 대부분 크기가 엄청나게 커 암습 당하는 일이 매우 희박했다.
타오르는 열사의 사막만 해도 넓이가 남한보다 커 수천 명이 들어와도 입구 근처만 아니면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적으로 뒤치기만 다니는 인간 사냥꾼들도 환상 던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필드와 일반 던전은 몇 시간만 돌아다니면 맛 좋은 먹잇감을 구할 수 있지만, 환상 던전은 온종일 돌아다녀도 발자국 구경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서늘한 동굴에 들어오자 유정과 소희 둘 다 금세 잠이 들었다. 바닥이 고운 모래라 등이 배기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한기가 올라와 그냥 두면 몸 상태가 나빠질 수 있었다.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눕힌 후 얇은 이불을 덮어줬다. 열 명이 누워도 될 만큼 넓은 동굴은 밤 12시가 되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낮 시간은 시원하지만, 밤 시간엔 한기를 느낄 만큼 차가워 이불을 덮어줘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어하는데 인제 그만 놈을 잡으러 갈까? 아니야! 힘들어도 며칠 더 굴려야겠어. 그래야 이보다 더 힘든 저주받은 대지에서 버틸 수 있어.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저주받은 대지에서 하루도 버틸 수 없어. 당장은 죽을 것처럼 힘들겠지만, 이겨내야 살아남을 수 있어.’
반역자 맬로우는 사막의 검은 이리 부족 족장 검은 모래바람 라길루아랑 함께 있을 게 분명했다.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지 오래전일 수도 있었지만, 놈이 죽었다는 표식만 피타스 성주에게 가져다주면 임무완수였다.
걸어서 간다면 놈을 찾는데 최소 일주일은 걸렸다. 사막의 검은 이리 부족은 호드 종족답게 한곳에 정착해 살지 않고 열사의 사막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찾는데 한 달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펜리르가 있었다. 펜리르를 타고 바람처럼 달리면 하루면 놈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유정과 소희를 박박 굴리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해온 훈련과 사냥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은 적응 훈련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훈련으로 모레네가 해준 따뜻한 음식과 부드러운 침대, 귀여운 귀와 꼬리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지만, 유정과 소희는 그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물로 평생 데리고 살려면 한계의 끝을 보여줘야 했다.
끝을 보지 않는 자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야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헉헉헉헉~”
“우엑~.”
“뭐 하고 있어? 왼쪽에 늑대인간 다섯 마리 졸라게 뛰어오는 거 안 보여? 누워서 싸울 거야?”
“헥! 헥! 가요”
“저.. 저... 저도 가요.”
하룻밤 동굴에서 달콤한 휴식을 끝으로 7일간 하루 4시간만 자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계속 몬스터를 사냥하게 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잡아 돌리자 귀엽던 젖살까지 쪽 빠져 볼은 홀쭉해줬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눈 밑은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한계가 지난 지 이미 오래전으로 체력이 아닌 정신력, 깡다구로 간신히 버티며 늑대인간을 상대했다.
그러나 한계는 한 번 두 번 쓰러진다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백 번 천 번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는 일을 반복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신줄을 놓고 쓰러져야 올까 말까 한 게 진짜 한계였다.
그런 힘든 일을 이겨내야 진짜 한계를 돌파하고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관문을 쉽게 돌파할 수 없게 악마의 달콤한 음료 하급 포션을 한 모금씩 마시게 해 살짝 기운을 차리게 했다.
처음에는 은총(?)인 줄 알고 고마워했지만,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일이란 걸 안 다음부터는 포션을 거부했다.
그러면 물과 음식에 섞어 먹이는 더욱 사악한 짓으로 한계의 끝을 조금씩 연장해 둘 다 지옥을 구경하게 했다.
“유정아! 힘들면 말해. 하급 포션 많이 남았어.”
“싫어요. 안 마실 거예요.”
“소희야! 시원하게 한 모금 해. 이거 마시고 힘내서 싸워야지.”
“아.아니요. 저 기운 남아 있어요.”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 공짜야! 흐흐흐흐~”
“.......”
사악함의 끝을 보여주며 7일을 쉼 없이 몰아붙이자 둘 다 구토, 설사, 복통, 신경 쇠약으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55년 만에 만난 유정과 소희는 우주를 줘도 바꿀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은 사랑이었다.
손등에 작은 상처만 생겨도 내 손발이 잘리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눈물 콧물 다 짜며 토악질을 해대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참아야 한다.
그래야 천 년 만 년 해로(偕老)할 수 있었다.
유정과 소희도 그것을 알기에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늑대인간을 사냥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며 싸우던 유정과 소희가 흉포하게 날뛰던 늑대인간 다섯 마리를 모두 잡자 허물어지듯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재빨리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심한 탈진으로 인한 기절로 맥박도 불규칙하고 하혈까지 해 아랫도리가 피범벅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로 급히 중급 포션을 한 병씩 먹인 후 펜리르에 태워 휴식을 취했던 동굴로 돌아왔다.
다급한 내 마음을 안 펜리르가 전속력으로 달리자 주변 사물이 바람 소리를 내며 휙휙 지나갔다.
“아아...”
“이제 정신이 들어?”
“네!”
“몸은 어때?”
“어? 아픈 곳이 한 곳도 없어요. 쌩쌩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또 사냥 가야 하는데. 히잉~”
“하하하하~”
“가요.”
“어디를 가?”
“몸도 쌩쌩하니 사냥하러 가야죠.”
“이번 훈련 그저께 쓰러져 잠든 순간 끝났어.”
“그저께요?”
“40시간 내리 잤어.”
“아... 그래서 몸이 이렇게 개운해진 거구나? 그렇죠?”
“그것도 있고 중급 포션 한 병 원샷한 것도 있고.”
“한 병에 100년이나 하는 비싼 중급 포션을 한 병을 통째로 마셨다고요?”
“응.”
“미쳤어요? 그냥 자고 나면 좋아질 텐데 뭐하려고 비싼 중급 포션을 먹여요. 먹이려면 하급을 먹여야죠. 이래서 남자들에게 살림 맡기면 안 된다는 거였구나. 과소비가 너무 심해.”
스태미나를 20% 회복시켜주고, 자잘한 상처 치료를 즉시 치료해주는 최하급 포션을 상점에서 사려면 한 병에 1년을 줘야 했다.
스태미나를 100% 회복시켜주고, 위급한 상처도 즉시 치료해주는 상급 포션은 500년이나 했고, 죽어가던 사람도 살린다는 최상급 포션은 무려 5,000년이나 했다.
그러나 우리가 상점에 파는 가격은 5분의 1로 폭리가 엄청나게 심해 상점에 포션을 파는 멍청이는 없었다.
“나는 너희가 잠들어 있는 동안 상급 포션 먹이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는데, 중급 포션 가지고 그러니까 얼굴을 못 들겠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오빠가 우리 잘되라고 훈련시킨 거 아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었다는 말을 한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리와. 꼭 안아보자.”
“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유정이 촉새처럼 떠들어대자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가끔은 시끄럽다고 느낄 때도 있었고, 철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젠 그것마저 예쁘게 보였다.
이게 정말 사랑하는 것으로 상대의 단점도 좋아 보이면 그때가 진짜 사랑하는 것이었다.
유정이 깨어나고 한 시간도 안 돼 소희도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둘 다 열흘 사이에 많이 말랐지만, 중급 포션과 이틀간 푹 잔 덕분에 컨디션을 회복해 바로 사냥을 나가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한계를 맛본 유정과 소희는 쉴 자격이 충분했고, 고된 훈련 뒤에는 휴식과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포상은 당연히 몸으로 하는 포상이 최고로, 열흘 넘게 훈련하며 생긴 스트레스를 확실하게 풀어줘야 했다.
‘덤으로 열흘 넘게 독수공방한 내 고추도 좁고 미끈거리는 동굴 속을 구경 좀 하자. 아주 야들야들 살이 그리워 미칠 것 같다. 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