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58 타오르는 열사의 사막 (58/68)

00058  타오르는 열사의 사막  =========================================================================

                                    

58.

“이스트 성 주민들을 위해 피타스는 사라져야 해. 놈은 자기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악마야. 나 같이 참신한 인물이 새로운 성주가 되어 부패한 이스트 성을 개혁하고 세력을 확장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해.”

“네가 참신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어디서 들은 거야?”

“이스트 성 주민들은 모두 나를 원하고 있어. 그것이 증거야.”

“그러니까 누가 그런 거냐고? 구체적으로 이름을 대봐.”

“조엘도 그랬고, 파뷰로도 그랬어.”

“그놈들 혹시 너를 따르다 죽은 경비대 부하나 가족들 아니야?”

“네 놈이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부하와 아들이 아니었어. 진심으로 나를 존경하고 이스트 성을 사랑한 용사들이었어. 너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이스트 성과 주민들을 사랑했단 말이야.”

“너 그거 알아? 나라 팔아먹는 놈 마누라와 자식, 부모는 잘 팔았다고 하지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하지 않아. 왜 그럴 것 같아?”

“그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해하는 거겠지.”

“빙고! 바로 너처럼 생각해서 그래. 자기에게 얼마나 이득이 떨어질까 그것만 궁리하지. 그리고 우리 남편, 아버지, 자식이 했으니 당연히 옳은 일이라고 감싸고. 네 부하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네가 성주가 되면 자기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생각.”

“그렇지 않아. 나는 피타스가 갖고 있지 않은 원대한 포부와 희망찬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했어.”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엔 너만을 위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모두를 위한 일이야.”

“그렇게 모두를 위한 놈이 가족과 부하들을 다 버리고 혼자만 도망쳐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있는 거야? 이게 네가 완벽하게 준비한 포부와 희망이야?”

“.......”

반역자 맬로우는 목과 팔, 다리에 쇠고랑을 찬 채 사막의 검은 이리 부족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검은 모래바람 라길루아는 맬로우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부족원들을 총동원해 이스트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피타스 성주는 맬로우의 반역 사실을 미리 알아내고, 역으로 사막의 검은 이리 부족을 함정에 빠뜨려 괴멸에 가까운 피해흘 줬다.

이에 분노한 라길루아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맬로우를 구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손과 발, 목에 쇠고랑을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코에는 코뚜레를 뚫어 개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맬로우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이 성주가 돼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하긴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겠지. 극한 상황에 몰리면 사람은 주변을 자기 멋대로 미화하기도 하니까.’

나 역시 맬로우와 비슷한 짓을 했었다. 내가 잠든 곳은 언제나 엄마 옆이었고, 사냥이 아니라 직장에 출근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람을 죽여 놓고 집안에 득실대는 징그러운 바퀴벌레를 죽였다고 굳게 믿기도 했었다. 

“놈과 이야기 끝났으면 이제 결판을 내자. 오랜만에 만난 강자인데 원 없이 싸우다 죽어야겠다.”

“네가 내 적수가 된다고 생각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안다고 했다.”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항상 하는 말이지. 그래. 어차피 죽을 거 짧은지 긴지 대보고 죽어. 덤벼!”

“이야야야야악~”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 라길루아가 단검만큼 기다란 손톱을 빠르게 휘둘렀다. 전광석화란 말이 어울릴 만큼 라길루아의 움직임은 한 줄기 빛처럼 빨랐다.

캉캉캉캉캉~

그러나 빠른 몸놀림과 커다란 덩치, 날카로운 열 가닥 손톱에 비해 힘은 크게 떨어져 호칸과 록시의 빛나는 짧은 칼에 막혀 모두 튕겨 나갔다.

심지어 칼과 부딪칠 때마다 손톱이 깎이고 부러져 신나게 공격한 후 뒤로 물러섰을 땐 네일샵에 가서 손톱에 영양주사를 듬뿍 먹여야 할 만큼 성한 손톱이 남아있지 않았다.

“설마 그게 다는 아니겠지?”

“겨우 주먹 몇 번 막았다고 기고만장 하기는... 싸움은 지금부터다. 폭풍처럼 불어라! 검은 회오리바람!”

라길루아가 주문을 외우자 몸 주위로 황금색 고운 모래가 빠르게 몰려들며 강력한 모래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분명 라길루아 몸 주위로 모일 땐 황금 모래였는데, 한 바퀴 돌자 검은색으로 바뀌며 강철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놈을 가운데 두고 순식간에 몸을 불린 회오리가 모래를 뿜어내며 다가오자 작은 쇠구슬이 날아와 방어구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탕탕탕탕~

급히 건틀릿으로 얼굴을 막으며 죽음의 날개를 소환해 라길루아에게 날려 보냈다. 

쾅!

그러나 쇠구슬 같은 강력한 모래에 부딪혀 까마귀가 라길루아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스트 성 던전의 3대 보스라고 한가락 하네.’

라길루아가 정면으로 다가오자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의 부츠에 붙은 특수 옵션 블링크을 사용해 연속으로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했다.

목표물이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며 모습이 사라졌다 나오기를 반복하자 검은 회오리가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대며 움직였다.

‘그렇지.’

9번째 블링크가 검은 회오리의 바로 코앞까지 접근했다. 기회가 오자 발끝으로 땅을 강하게 차며 라길루아의 품으로 맹렬히 뛰어들었다.

탕탕탕탕탕~

마사지하듯 전신을 때리는 검은 모래를 뛰어난 방어구와 근성으로 버티며 라길루아의 목을 노렸다.   

빛나는 칼 두 자루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놀란 라길루아가 부서진 손톱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자세를 낮춰 얼굴을 향해 날아온 손톱을 피하며 목 대신 큰 허점을 드러낸 양 손목을 동시에 잘랐다.

싹둑 

“크아악...”    

양쪽 손목이 동시에 잘리자 라길루아의 주위를 돌던 강력한 모래바람이 급정거한 자동차처럼 순식간에 멈췄다.

서걱

그 순간 라길루아의 목도 검은 회오리바람과 함께 운명을 다하며 모래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맬로우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지 라길루아의 두 눈은 불신을 가득 담은 채 부릅떠져 있었다. 

검은 모래바람 라길루아의 빛나는 사파이어 반지 : 운+10 힘+30 민첩+60

검은 모래바람 라길루아의 빛나는 가죽 벨트 : 운+10 체력+30 민첩+60

스티그마 검은 모래 회오리바람(1/1,000)

스티그마 모래 위를 빨리 달리는 법(1/1,000)

중급 포션 1병

강화석 1개

라길루아가 드롭한 검은 모래바람은 놈이 사용한 용권풍을 몸에 두르는 스티그마였고, 모래 위를 빨리 달리는 법은 민첩과 이동속도를 동시에 올려주는 스티그마였다.

소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빠른 발로 스티그마 모래 위를 달리는 법은 소희에게 돌아갔고, 검은 모래 회오리바람은 필요한 사람이 없어 차후 모레네가 팀에 합류하면 주기로 하고 가방에 챙겼다.

“살려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라길루아가 시킨 일이야. 그래서 피타스 성주님을 배신한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야.”

“무슨 개소리야? 네가 사막의 검은 이리 부족과 검은 모래바람 라길루아를 끌어들였잖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피타스 성주님을 존경해. 그분은 나의 태양이자 생명이셔. 나는 피타스 성주님을 찬양해. 루시퍼가 아닌 피타스 성주님을 숭배해! 그런 내가 라길루아를 끌어들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누가 끌어들였든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만 입 다물어. 빨리 끝내줄 테니까.”

“안 돼! 나는 이스트 성 주민들을 지옥에서 끌어내라는 루시퍼님의 계시를 받은 구원자야. 네놈이 나를 죽이면 루시퍼님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천벌을 받을 거야.”

“얼씨구? 이게 미쳤나?”

“어서 내 몸에 옭아맨 쇠고랑을 풀고 나를 이스트 성의 성주로 영접해! 그래야 너와 네 여자들이 무사할 수 있어.”

“이 새끼 완전히 돌았네.”

“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와 가여운 아내,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착하게 살겠습니다. 다시는 허튼 마음먹지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야!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다중이니?”

“나는 위대한 구원자야! 내가 오기만 기다리는 어린양이 판게아에 수백억이 넘게 있어. 어서 나를 그들에게 인도해. 그들에게 루시퍼님의 은총을 내리겠다.”

“지금껏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TV와 영화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도 있었네. 참나!” 

“라길루아가 저를 꼬드겼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피타스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그러니 살려주십시오.”

“그만해 새끼야. 나까지 정신없어지잖아.”

서걱

“크억!”

“우아~ 애새끼 완전히 맛이 갔네. 돌았어! 살면서 이상한 놈들 많이 봤지만, 이놈처럼 심한 놈은 처음이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이 새끼처럼 정신없이 미치면 주변 사람들도 같이 미칠 거야. 개놈의 새끼! 정신을 쏙 빼놓네!”

마음속에 전혀 다른 세 명을 품고 산 맬로우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모래에 처박혔다. 

맬로우는 라길루아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겨 징표가 될 만한 게 없어 잘린 머리를 보자기로 감싸 마법 배낭에 넣었다.

꼼꼼한 피타스 성주가 라길루아의 머리도 보여 달라고 할 수 있어 놈의 머리도 멜로우 옆에 나란히 모셨다.  

“성격이 정말 변화무쌍하네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죠?”   

“사람은 누구나 다 다중인격자 아니었나?”

“네? 다중인격자라니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잖아. 어떤 사람에겐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굽실대고, 어떤 사람에겐 갑질 못해 난리 치고. 그리고 어느 날은 착한 사람이 돼 사람들을 돕고, 드라마를 보며 울기도 하잖아. 심하든 심하지 않든 사람은 모두 다중인격을 갖고 있어. 맬로우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면 저도 다중인격자네요. 엄마에겐 언제나 짜증을 내고, 아빠에겐 용돈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선생님들에겐 모범생인 척 행동하고, 친구들에겐 머릿속에 엄청나게 많은 지식이 들은 척 거들먹거리고, 오빠에게는 언제나 착한 척, 예쁜 척하잖아요.”

“자책할 거 없어. 누구나 다 그러고 살아. 안 그런 사람 세상에 없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맬로우를 보니 잘못 생각한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해요.”

“나는 더 했어.”

“오빠가요?”

“흐흐흐흐~” 

소희에게 누구나 다 그렇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누구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맬로우처럼 초 단위로 성격이 바뀌진 않지만,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복이 심했다.

사람을 죽일 때와 유정, 소희, 모레네를 대할 때는 3,600도 달랐고, 항상 과거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집착에 몸부림쳤다.

또한, 55년간 모태솔로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자와 섹스에 과도하게 집착했고, 사람을 의심하는 수준이 도를 지나쳐 병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중인격 장애인 해리 장애라고 할 순 없었다. 정도에 지나치긴 했지만, 정상범위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은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 적을 대할 때 마음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나 역시 그런 것이었고, 사람들에게 과거를 말하는 것이 내게 도움될 게 없어 숨기려 노력한 것이었다.

과거의 지질한 삶을 벗어나려 노력하는 건 사람이면 당연히 갖고 있는 심리상태였고, 남자가 예쁜 여자에 집착하고 머릿속에 섹스가 떠나지 않는 건 자연의 법칙이었다.

사람을 의심하는 것 역시 드러내 놓고 할 정도는 아니라서 조목조목 따지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 합치면 매우 심각한 정신질환 상태로 미쳤다고 할 순 없지만, 사이코패스(psychopath)적 기질이 다분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사이코패스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된 혼란기에 사이코패스는 ‘난세의 간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내가 꿈꾸는 하렘 왕국을 건설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단, 지나친 파괴 욕구와 심한 강박증,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심병은 꼭 고쳐야 했다. 

세 가지 병이 지금보다 더욱 악화하면 최악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도 있었다.

‘섹스야! 유일한 돌파구는 섹스밖에 없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과 섹스에 몰두하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파괴 욕구도 현저히 떨어져. 내 치료법은 섹스밖에 없어. 더 많은 섹스를 해야 해.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해. 그것만이 솟구치는 살심을 막는 유일한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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