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레나 =========================================================================
62. 레나
“유정아! 여기 피난시설 맞지?”
“크기로 봐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이스트 성 인구에 비해서 너무 커. 이방인을 모두 수용해도 절반도 안 차겠어.”
“그렇게 커?”
“응. 20만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어. 이스트 성도 마찬가지야. 이방인들을 수용하고도 성벽 쪽으로 남아도는 공간이 아직 많잖아.”
“루시퍼가 20만 명 규모로 성을 지어줬다는 뜻이야?”
“그런 것 같아.”
“왜?”
“다른 성을 가보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 개를 지었다면 크기를 3~4가지로 제한했겠지. 모양도 그렇고.”
“그럼 이스트 성은 서울로 치면 아파트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내 예상이니까 틀릴 수도 있어.”
판게아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성은 이스트, 웨스트, 사우스, 노스 성이었다. 네 곳 모두 루시퍼가 결계를 숨긴 도시로 공교롭게도 인구가 가장 적었다.
인구가 적은 만큼 마법 문명도 가장 낙후한 성으로 이스트 성에서 300km 떨어진 가장 가까운 하크 성만 해도 인구가 20만 명으로 이스트 성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발달한 도시였다.
그리고 1,000km 떨어진 아이작 성은 인구가 50만으로 하크 성보다 더욱 발달해 이스트 성은 시골 읍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원의 틈새를 여는 결계 장치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지하 10층이나 그 아래에 있을 게 확실하니... 보기는 틀렸네. 젠장!’
피타스 성주가 괴물 쥐 스플린터를 잡아오라고 했을 때 차원의 틈새를 통로로 바꿔주는 결계 장치를 볼 기회가 왔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4개 중 하나를 파괴한다고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고, 파괴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결계 장치가 어떤 것인지, 누가 지키고 있는지 알면 향후 결계 장치를 파괴하는데 도움이 돼 꼭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꿈은 피타스 성주가 보낸 시종을 만나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시종이 건네준 마법 지도는 괴물 쥐 스플린터가 활동하는 지하 1층이 전부였다.
이스트 성 지하는 총 10층으로 내려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했다. 층마다 문이 있어 열쇠 없이는 내려갈 수 없었다.
문은 루시퍼가 만든 것으로 5층까지는 피타스 성주가 가지고 있었고, 그 이하는 전쟁의 신전 대주교가 보관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열쇠를 훔치든, 열쇠 없이 문을 깰 힘을 키우든, 그것도 아니면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든 하면 돼. 이스트 성 지하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걸 알아낸 것만 해도 성과가 작지 않아. 실망할 거 없어.’
“오빠! 여기도 놈이 다녀간 흔적이 없어요. 아까 길이 갈라진 곳으로 올라가 이번에는 우측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러자.”
“갈라지는 길이 너무 많아 걸어 다니며 찾으면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펜리르가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지 몰랐네요.”
“그동안 우리가 펜리르에 너무 의존했어. 없을 때를 대비한 훈련이라 생각하자.”
“네!”
정찰 갔던 소희가 돌아와 앞쪽 길이 막혀 있단 사실과 그 길에는 괴물 쥐 스플린터가 다녀간 흔적이 없다고 알려줬다.
지하도는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실제 이스트 성 직선 길이 2km보다 몇 배는 길이었고, 100m마다 교차로가 등장해 스플린터가 꼭꼭 숨으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펜리르를 소환할 수 있다면 등에 타고 바람처럼 쌩하니 달리며 찾을 수 있지만, 길이가 10m에 달해 소환하면 통로에 꽉 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아 뒤에 타고 다닐 수 있지만, 탈 수 있는 인원이 1명밖에 안 됐고, 말안장 뒤에 타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서 오래 탈 수도 없었다.
“쥐새끼가 흔적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그리고 이곳은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것도 이상해요.”
“아직 4분의 1도 못 봤어. 좀 더 찾다 보면 이유를 알게 되겠지.”
어두운 지하도에 갇혀 있자 유정과 소희의 인내심이 급격히 소진돼 지하도에 들어온 지 5시간도 안 돼 조바심을 냈다.
주위가 확 트인 곳이나 하늘이 잘 보이는 곳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덜했다. 반대로 어둡고 좁은 곳은 막연한 두려움과 답답함에 참을성이 좋은 사람도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
‘인내심 테스트나 해볼까? 아니야! 나부터 짜증이 나서 안 돼. 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며칠 있으면 폐소 공포증 걸리기 딱 알맞은 곳이야.’
괴물 쥐 스플린터를 찾은 건 다음 날 정오였다. 놈은 우리가 들어온 북쪽의 정반대인 남쪽 끝에 살았다.
그곳은 이스트 성의 하수가 지하로 흘러드는 곳으로 스플린터는 벽에 구멍을 뚫어 하수도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찍찍찍찍! 날 이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목숨까지 노려? 배은망덕한 놈!”
“배은망덕한 놈은 누구야?”
“누구겠어? 네놈들을 여기로 보낸 그놈이지.”
“피타스 성주?”
“그래. 성주가 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남자는 다 거짓말쟁이야. 사랑한다고 속삭여 놓고 욕심을 다 채우면 헌신짝 버리듯 여자를 버리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군지 말 안 한 것 보면 그래도 양심은 조금 남아 있었나 보네? 아니지. 내 입을 영원히 막으려고 한 것이니 파렴치한이라고 해야겠지.”
“당신이 누군데 그래?”
“제이브 성주의 첫째 딸 레나가 바로 나야. 피타스가 성주가 될 수 있게 음으로 양으로 도운 사람이 나라고.”
“그 말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말이네?”
“아버지?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아버지야? 권력에만 눈이 멀어 아내와 자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악마야.”
“어쨌든 아버지를 배신하고 피타스에게 붙은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
피난처로 보이는 넓은 석실에서 만난 괴물 쥐 스플린터는 우리를 발견하고도 놀라지도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정작 놀란 건 우리로 쥐가 사람보다 더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고, 신분도 쥐가 아닌 전임 성주 제이브의 첫째 딸이란 사실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모습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피타스가 준 저주받은 목걸이 때문에 이렇게 됐어. 이 빌어먹을 목걸이는 목에 달라붙어 떼어낼 수도 없어.”
“그럼 피타스를 잡아 목걸이를 빼낼 방법을 알아내면 되잖아?”
“피타스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피타스의 힘은 이스트 성 기사들이 전부 덤벼도 한주먹 거리도 안 될 만큼 강해. 아빠도 놈에겐 상대가 안 됐어.”
“그런 놈이 전임 성주를 1,500년이나 보필해?”
“피타스를 거둔 게 아빠였어. 죽어가던 놈을 아빠가 구해주고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가르쳤지. 덕분에 충성심이 남달랐어. 그래도 세월엔 장사 없다고 변심하게 됐지만.”
“혹시... 그 변심. 너 때문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느낌이 너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단지 피타스가 고생한 것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만 했을 뿐이야.”
“한 번? 아닌 것 같은데. 못해도 백만 번은 한 것 같은데.”
“아빠를 쫓아내라고 한 적은 없었어. 오래 하셨으니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라는 말만 했어.”
“아버지를 죽이고 네가 성주가 되려고 했지?”
“아니야. 나는 피타스를 도와주는 역할이면 만족했어. 피타스가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어.”
“거짓말하고 있네. 너는 분명 피타스를 이용해 성주가 되려 했을 거야. 그래서 피타스에게 접근한 거야. 피타스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피타스를 허수아비 성주로 만들고 네 마음대로 이스트 성을 주무르고 싶었겠지. 내 말이 맞지?”
“그렇지 않아. 나는 피타스를 도와 이스트 성을 판게아 최고의 성으로 만들고 싶었어. 그게 전부야.”
레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플린터는 타오르는 열사의 사막에서 죽은 맬로우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역겨운 거짓말이었지만, 서울에 있을 때도 수시로 듣던 말이라 그런지 시큰둥하기만 했다.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대표, 야당대표, 국회의원 할 거 없이 입만 열면 모두 국민을 찾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대부분 표와 지지도를 얻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국민을 들먹였다.
그렇게 얻은 표와 지지도는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동원됐고, 어리석은 국민은 속을 걸 알면서도 찍고 또 찍어줬다.
‘세상 어디나 사는 건 다 똑같아. 모양만 다를 뿐 다른 게 하나도 없어.’
“자기만 옳다고 떠드는 얘기 신물 나서 들어서 더는 못 듣겠다. 저승 가서 네 아버지나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이나 해.”
“아빠가 돌아가셨어?”
“응! 내가 죽였어.”
“이 원수!”
“웃기고 있네. 네 아버지의 진짜 원수는 죽인 내가 아니라 쫓아낸 너야. 이 미친년아! 너 때문에 네 아버지가 1,000년 넘게 어두운 동굴에 숨어 살다 돌아가신 거야. 이 제정신 아닌 년아!”
“헛소리하지 마. 네놈이 죽였으니 원수는 너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아빠의 원한을 갚겠어. 죽음의 병균 페스트!”
레나가 주문을 외우며 기다란 나무지팡이로 나를 가리키자 검은 연기가 뿜어져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페스트는 중세 유럽을 지옥으로 만든 흑사병으로 저주와 독 마법이 특기인 레나가 강력한 전염병으로 나를 죽이려 했다.
‘죽음의 날개!’
검은 연기를 태우기 위해 까마귀를 불러냈다. 그러나 연기와 부딪쳐도 폭발하지 않고 연기 속을 뚫고 들어갔다.
재빨리 방향을 바꿔 레나를 공격했다. 그러자 검은손이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와 까마귀를 움켜잡았다.
쾅
까마귀가 폭발하자 검은손도 충격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물처럼 퍼진 검은 연기를 피해 우측으로 움직이자 검은 연기 페스트도 방향을 바꿔 따라왔다.
“겨우 까마귀를 믿고 덤비다니 어리석은 놈! 땅의 저주 무거운 발걸음!”
또다시 저주 주문을 영창 하자 어깨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느려지며 몸이 만근은 된 것처럼 움직이는데 힘이 들었다.
‘제이브보다 더 강한데?’
더블 캐스팅을 우습게 해대는 레나의 저주를 피해 연속으로 블링크를 사용했다. 레나가 사용하는 저주 마법은 범위 마법이 아닌 표적 마법으로 표적이 사라지면 마법 효과도 사라졌다.
“그 신발 아빠가 루시퍼님께 받은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의 찬란한 부츠지?”
“미워하면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알고 보니 효녀였네.”
“사로잡아 1,000년 동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마.”
“나는 바로 죽일 건데 미안해서 어쩌지.”
“개놈의 자식! 피타스에게 당한 상처를 네놈에게 풀겠다. 어둠의 저주 망령의 손!”
까마귀를 붙잡았던 손이 허공에 불쑥 튀어나와 나를 잡으려 했다. 재빨리 블링크로 위치를 바꾸자 망령의 손도 블링크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며 나를 잡으려 했다.
‘영웅급 이상이네. 하긴 그런 능력이 있으니 아버지를 밀어내고 자신이 성주가 되고 싶었겠지.’
따라붙는 망령의 손을 피해 블링크를 더욱 빠르게 사용하며 레나의 옆으로 다가갈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레나의 몸 주위로 검은 망령들이 휘돌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도 칼을 휘두르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실력이 한참 멀었어. 어깨에 힘 좀 주나 했는데, 제이브의 딸도 마음대로 요리하지 못하네. 어쩔 수 없지. 펜리르를 불러낼 수밖에.’
펜리르에 기대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펜리르는 내 소환수였고, 내가 없으면 녀석도 없었다.
그리고 소환수를 이용해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당연한 것으로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소환수를 이용하는 것이 창피하다면 손에 든 +5 블러드 나이트 호칸의 빛나는 짧은 칼과 +5 붉은 십자군 대장 록시의 빛나는 짧은 칼도 버려야 했다.
+8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의 찬란한 부츠는 물론 흉갑과 건틀릿, 벨트, 토시, 목걸이, 반지도 다 벗고 레나를 상대해야 했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칼과 총을 든 남자는 모두 비겁자였다.
---강철 심장 수정했습니다.---
스티그마 강철 심장(1/1,000)
강철 심장은 상대에게 받는 데미지를 감소시키는 스티그마로 100년을 투자하면 1% 감소, 200년 3%, 300년 5%, 400년 7%, 500년 10%, 600년 15%, 700년 20%, 800년 30%, 900년 40%, 1,000년 50%까지 데미지를 감소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