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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4 주아 (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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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주아

“그동안 아주 바쁘게 지낸 모양이군?”

“살아남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죠.”

“이방인들은 참 재미있어. 1분 1초도 아까워 가만있지를 못해. 그에 비하면 판게아 사람들은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일을 시켜도 천하태평이지. 그래서인지 성취도도 떨어지고 일에 대한 의욕도 높지 않아.”

“지구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행성이라 다들 몸에 배어 그럴 겁니다. 그리고 판게아에 왔을 때 시간도 넉넉하지 못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겁니다.”

“다른 이방인은 그렇다 치고 자네는 왜 그렇게 시간에 집착하나? 수준도 다른 이방인보다 한참 높으면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자리해야죠. 그러려면 부지런히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람직한 생각이군. 아주 좋아. 그런데 자네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군. 판게아에 대해 나만큼 많이 안다는 생각!”

“모레네와 모리아가 알려준 것도 많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보니 이것저것 알게 됐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알고자 노력하는 자는 남보다 많은 것을 알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주 훌륭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가 금을 33kg이나 팔았다고 하던데, 그것도 기차에 내리자마자 바로 가게로 달려가 팔았다... 누군지 알고 있나?”

“제가 팔았습니다. 가지고 있으면 뺏길 것 같아 가장 먼저 눈에 띈 모레네 가게에 들어가 팔았습니다.”

“금은 왜 가져왔나?”

“일 때문에 가져가던 중 판게아로 넘어오게 됐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자넨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생각할수록 특이하고.”

피타스 성주가 내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대응했다.

상대가 의심할 때 허둥대는 건 켕기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그건 자신이 범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너무 침착해도 의심하겠지? 그렇다고 일부러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더욱 의심만 늘 뿐이야. 오늘만 침착한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면 끝까지 같은 모습으로 밀고 나가는 게 좋아.’

피타스 성주의 의심은 다른 도시에서 보낸 첩자나 72군주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는 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뒷조사로 내가 4차로 이스트 성에 들어온 이방인이란 걸 알고 있어 그런 요상한 의심을 하진 않았다. 

아주 특이한 놈이 이방인 중에 끼어 있다는 생각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지 의심이라고 까진 할 수 없었다.

피타스 성주를 인질로 잡아 이스트 성을 내 멋대로 조종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주를 알현하러 내성에 들어갈 때는 가벼운 차림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무기와 방어구, 액세서리는 모두 집에 두고 가든지 마법 지갑에 넣고 들어가야 했고, 알현실엔 중무장한 기사 10명이 방패와 창, 칼을 들고 있어 성주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고슴도치가 됐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물음에 대답만 해야 해 피타스 성주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피타스 성주를 잡아 봐야 성주가 되고 싶은 놈들이 주변에 득실대 인질이 되는 순간 효용가치가 없었다.

또한, 레나의 말처럼 피타스 성주의 전투력이 이스트 성 근위기사 전체를 합친 것보다 높다면 덤비는 순간 명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었다.

“이제 슬슬 저주받은 대지로 진출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영웅과 신화급 보스만 피해 다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높이 평가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안 됩니다.”

“여자들의 수준이 아직 낮아서 그런가?”

“제가 못 나서 그렇습니다.”

“지극정성이군. 자네만 그렇게 여자를 아끼는 건가? 아니면 지구인은 다 자네처럼 행동하는 건가?”

“특별히 아끼는 건 아닙니다.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다른 남자들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의무를 다한다... 재미있는 대답이군. 물어보는 김에 하나만 더 물어보지. 모레네와 모리아는 어디가 마음에 든 건가? 이스트 성에선 가장 못생긴 축에 속하는데, 얼굴과 몸매가 마음에 든 건 아닐 테고.”

“저는 인물보다 마음을 봅니다.”

“마음이라... 그거 아주 멋진 대답이군.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사랑받으면 남자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확실히 다르긴 할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대하겠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니 당연히 그러겠지. 하하하하~ 정말 유익한 정보였어.”

“감사합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동물이었다. 피타스 성주도 내가 말한 내용을 자기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 들었다.

아니라고 말해 봐야 성주의 기분만 흐리는 것이었고,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상대에게 설명해 봐야 알아듣지도 못해 성주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저주받은 대지긴 하지만 우리 영역 바로 밖이니 위험하진 않을 거네. 붉은 피 타우렌 부족의 붉은 가시덤불 던전 너머에 붉은 초원이 있네. 그곳에 식인 몬스터 파리지옥을 잡고 놈의 끈끈이 1,000개와 파리대왕의 독침 1,000개, 붉은 백합꽃 열매 1,000개를 구해오게.”

“흐음...”

“너무 무리한 임무인가?”

“아직 저주받은 대지로 나갈 만한 실력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지 말게. 보기 안 좋으니까. 그리고 자네 실력이면 딸린 식구들의 안전도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네. 안 그런가?”

“생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과신하는 순간 하나뿐인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피타스 성주가 말한 임무는 거절할 만큼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거절한 건 붉은 초원 지하에 사는 나가(Naga) 때문이었다.

반은 인간 반은 뱀인 나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여자 요마 라미아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사(半人半蛇)의 반신적 존재였다.

그러나 판게아에선 신도 휴머노이드도 아닌 몬스터로 나가로카(Nāgaloka)라는 지하 왕국에 살았다.

세 명의 왕 세샤(Seṣa), 바수키(Vāsuki), 탁샤카(Takṣaka)는 모두 신화급 몬스터로 나카로카에 머물려 땅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급 나가들이 붉은 초원을 비롯한 저주받은 대지 곳곳에 나타나 몬스터와 호드를 잡아먹어 유정과 소희가 위험했다.

“생명만큼 소중한 건 없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안전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아이템도 필요한 법. 임무를 수행하면 이걸 주겠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스티그마 검은 유니콘(1/1,000) : 상처 치료, 독 정화]

피타스 성주가 임무의 대가로 제시한 스티그마는 우리가 흔히 아는 순결과 청순의 상징 하얀 유니콘이 아닌 칠흑같이 검은 유니콘을 소환하는 스티그마였다.

그렇다고 검은 유니콘이 하얀 유니콘보다 못하진 않았다. 상처 치료와 독을 정화하는 능력은 같았고, 공격력은 더 우수했다.

단, 매혹 능력은 없었다. 대신 정찰 능력이 매우 우수해 기습당할 확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급한 일이라도 있나?”

“네!”

“석 달이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피타스 성주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건 붉은 초원으로 가기 전 유정과 소희의 실력을 키우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늘 저녁 판게아에 도착할 주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주아가 도착할 날이 다가왔다. 갈피를 잡지 못하다 오늘 아침이 돼서야 무작정 부딪쳐보기로 했다.

시간 회귀 전처럼 주아와 좋은 관계로 발전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내가 과거와 너무도 크게 달라진 상태라 주아를 만날 수도 없었다.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지난달 판게아로 들어왔다. 시간 회귀 전이라면 지금쯤 같이 사냥을 다니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냥은커녕 녀석은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렇듯 미래가 엉망이 된 상황이라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건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꼴과 같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혀 호감을 사든 아니면 억지로 내 것을 만들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건 가져가게.”

“아직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주나 나중에 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왕이면 먼저 주고 생색도 내고, 부담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잘 쓰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게.”

“안녕히 계십시오.”

피타스 성주가 내실로 들어간 다음에야 1시간 넘게 딱딱한 바닥과 입을 맞춘 무릎과 하얀 대리석 바닥만 죽어라 쳐다보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사람 심리가 참 오묘해. 숨기면 숨길수록 호기심이 생긴단 말이야. 어떻게 생긴 낯짝인지 정말 궁금하다.’   

성주를 만나고 돌아와 유정과 소희를 옥상으로 불렀다. 주아에 대해 얘기할 순 없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주아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피타스 성주가 저주받은 대지에서 식물형 몬스터와 곤충형 몬스터를 잡고 재료를 구해오라는 임무를 줬어.”

“저주받은 대지요?”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해! 그래서 거절했어. 거절하자 이걸 줬어.”

검은 유니콘 스티그마를 보여주자 소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표는 내지 않았지만, 소희만 제대로 된 소환수가 없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검은 유니콘이 데스나이트보다 공격력은 한참 아래지만, 치료 능력과 정화 능력이 있어 성능은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모든 소환수가 공격형인 건 팀을 꾸리는데 바람직하지 않았다. 근접형이 있으면 원거리형도 있고, 지원형인 버퍼형과 치료형도 있어야 제대로 된 팀이 됐다.

“보상이 크다는 건 임무도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잖아요. 구하기 어려운 소환수 스티그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안쪽엔 들어가지 않을 거야. 경계지점에서 사냥하면 큰 위험은 없어.”

“정말요?”

“어.”

경계지점에서 사냥한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스트 성 영역과 저주받은 대지를 나누는 경계 따윈 없었다.

지형과 환경이 바뀌어 나누는 것이지 남북을 나눈 38선처럼 말뚝과 철조망을 치고 내 땅 네 땅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주받은 대지의 몬스터가 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진 않았다. 그건 경비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지역을 차지한 몬스터의 공격을 두려워해서였다.

성과 72군주만 영역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고블린도 자기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매일 싸웠다.

던전 역시 이와 같은 개념으로 원주민, 악마, 몬스터 모두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다.     

“이건 소희가 써.”

“그래도 돼요?”

“싫어?”

“아니요. 저 주세요. 저 정말 갖고 싶어요.”

“하하하하~”

스티그마를 받아 쥐고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는 소희의 모습에 밑밥이 제대로 깔렸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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