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주아 =========================================================================
65.
“오늘 중으로 10번째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 이번에는 꼭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구해야 해. 벌써 두 번이나 허탕 쳐서 더는 시간을 늦출 수 없어.”
“우리끼리 해도 되지 않아요? 이스트 성을 떠날 때는 모레네와 모리아도 합류하잖아요.”
“저도 유정이와 같은 생각이에요. 다섯 명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지금은 우리끼리도 충분해. 하지만 저주받은 대지로 나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몬스터가 수도 없이 많을 거야. 그때 후회해 봐야 늦어. 미리미리 준비해야 때늦은 후회를 피할 수 있어.”
“처음부터 멀리 나가진 않을 거잖아요?”
“물론 그렇지. 그러나 저주받은 대지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몰라. 우리의 안전을 위해선 유능한 사람이 필요해.”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실력이 검증된 사람에서 골라야 하지 않나요? 신입생들은 선발할 만한 기준이 없잖아요.”
유정이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신입생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고른다는 것은 겉모습만 보고 뽑겠다는 말과 같았다.
서울에서 직원을 뽑을 때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라도 있지만, 판게아에서 그런 것도 없었다. 있다고 해도 몬스터와 사람을 잘 죽인다고 자신을 소개할 사람도 없었다.
운동선수와 특수부대 출신 군인을 뽑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절대 기준은 아니었다.
운동을 잘한다고 사람을 잘 죽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생사를 겨루는 데스 매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특수부대 출신 역시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지 수십 년이 지나 사람을 죽여 본 군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날고 기는 파이터를 뽑아도 엇나가면 없는 것만 못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해도 내 말을 잘 따르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함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현재 머릿속에 있지도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유능하고 뛰어난 팀원을 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주아를 자연스럽게 팀에 끌어들이려 이러는 것이었다. 유정과 소희에게 하는 말은 모두 주아를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밑밥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즉시 전력감을 뽑는다면 유정이 네 말이 백번 옳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대형 길드 소속이라 회유가 어려워. 그리고 판게아 시스템에 물든 사람을 영입하는 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하는 짓이야.”
“저도 그게 걸리긴 했어요.”
“유정이와 소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 그래도 실력보다는 인성이 바르고 우리말을 잘 따를 사람을 선발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해.”
“오빠 말을 듣고 보니 저희 생각이 짧았던 것 같네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건 누구나 불편한 일이야. 거부감이 드는 거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안전을 위해선 감수해야 하는 일이야. 이해할 수 있지?”
“네에~”
유정과 소희에게 거짓과 진실이 뒤범벅된 어정쩡한 말로 주아를 받아들일 준비를 맞췄다.
사람이 늘어나는 건 분명 안전도 높아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입 목적이 안전이 아닌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로 유정과 소희를 속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시간 회귀 전 함께한 여자라고 말할 순 없잖아. 부디 내 고충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미안!’
8차는 대구 지하철로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들어왔고, 9차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상공에 차원의 틈새가 열리며 고속버스 68대가 빨려 들어와 1,500명 넘는 사람이 판게아로 끌려왔다.
매달 이방인이 들어오자 피타스 성주는 3일간 경비대를 동원해 신입생들을 보호하던 일을 중지시켰다.
신입생들을 보호하지 않아도 이방인의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 더는 몬스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 때문에 10차로 들어온 신입생들부터는 곧바로 굶주린 승냥이들이 달라붙어 피를 빨아대 피해가 극심했다.
저녁 6시 57분 남쪽 하늘에 시커먼 차원의 틈새가 열리자 100여 대가 넘는 버스와 승용차가 경주하듯 튀어나왔다.
오전 11시 30분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라오스에 이어 9번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판게아로 넘어왔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틈새를 빠져나온 버스와 승용차는 황무지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지며 부서지고 찌그러지고 불타올랐다.
폭발하듯 불타오르는 차량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서지고 찌그러진 차량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이 터져 나오자 남문 앞 공터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준비하고 있던 이스트 성 경비대 500명이 재빨리 다가가 부서진 차량에서 다친 이방인들을 끌어냈다.
사경을 헤매는 중상자들은 왼쪽으로 데려가 최하급 포션으로 응급조치만 했고, 피를 질질 흘리는 가벼운(?) 경상자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오른쪽으로 분리만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자 불을 끄고 부서진 차들을 절벽으로 끌고 가 유령 동굴 입구에 모두 떨어뜨렸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차에서 끌어내지도 않아 부서진 차량과 함께 유령 동굴에 모두 버려졌다.
남문 공터에 차, 기차, 배, 비행기들이 쌓이며 새로 들어온 이방인들의 안전을 위협하자 피타스 성주는 유령 동굴에 모두 버리게 했다.
지구에서 넘어온 차량과 배, 비행기엔 쓸만한 물건이 많았고, 금속은 녹여 재활용하면 큰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피타스 성주가 보기에 지구의 금속과 생필품은 모두 쓰레기였는지 들어오는 족족 모두 유령 동굴에 버리게 했다.
“그래도 구조는 해주네.”
“너는 저게 구조로 보이니? 나는 살아있는 사람과 버릴 쓰레기를 분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물건 빼앗으려고 기웃거리는 양아치들보다는 백배는 낫다.”
“아우 창피해.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게 말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판게아까지 와서 나라 망신 다 시킨다.”
“저건 망신이 아니라 악마의 행동이야. 모두 미쳤어!”
유정이의 한탄과 소희의 악마란 표현대로 많은 사람이 경비대가 물러가기만 바라며 굶주린 승냥이처럼 신입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날부터 신입생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자 영웅, 환인, 고구려 3대 길드는 물론 중소 길드들도 신입생들의 시간과 물건을 빼앗으려 몰려들며 남문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주아!’
우람한 경비대의 품에 안겨 구겨진 버스에서 내린 주아는 살짝 넋이 나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버스가 뒹굴며 날카로운 곳에 긁혔는지 왼쪽 뺨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흘렀고, 팔과 다리에도 심한 타박상을 입었는지 움직이질 못했다.
판게아에 도착하면 모두 주아처럼 행동했다. 고막이 터질 것처럼 울리는 우웅 소리에 머리는 부서질 것처럼 아팠고, 공중에서 떨어지며 생긴 충격에 정신은 몸을 떠난 지 오래였다.
주변은 온통 살려달라는 비명과 끈적끈적한 피, 매캐한 매연으로 지옥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낯선 괴물(경비대)과 처음 보는 건물들로 인해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바로 나서면 안 돼. 사람들이 당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게 해 판게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게 한 후 천천히 접근해야 해. 무턱대고 접근하면 경계심만 커져 다가가기도 어려워질 수 있어.’
무턱대고 도와주면 호감보다 의심받을 가능성이 컸다.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사람은 극도로 예민해져 평소보다 몇 배는 경계심이 커졌다.
이때는 사심 없이 도와줘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준비가 안 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지구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그래도 경계심이 조금은 덜하겠지만, 이곳은 낯선 판게아였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겁에 질린 사람 중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내민 승냥이들에게 매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가 자신을 해코지하기 위해 그런다는 것을 알고도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과 비슷한 현상으로 일부 매 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나타냈다.
승냥이들은 이점을 노리고 군침을 흘리며 이스트 성 경비대가 어서 빨리 철수하기만을 애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주목! 주목~”
“지금부터 경비대 한슨 대장님이 너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씀해주실 것이다. 딴짓하지 말고 집중해서 들어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반갑다. 경비대 대장 한슨이다. 지금부터 간단한 규칙을 알려주겠다. 이곳은 판게아 행성 판게아 대륙 동쪽에 위치한 이스트 성이다.”
웅성웅성
“모두 조용히 해! 한 번만 더 말을 끊으면 이곳에서 지켜야 할 기초적인 내용도 알려주지 않고 저기 너희를 기다리는 도적떼에게 넘겨주고 갈 것이다.”
“.......”
“왼팔에 보면 숫자가 있을 것이다. 왼쪽부터 년, 월, 일, 시간, 분, 초다. 1년이 조금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판게아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다. 사냥해서 시간을 채우든 남의 시간을 빼앗아 연명하든 알아서 살아남아라. 그러나 성내에선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마라. 성내에서 싸우다 걸리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겠다. 싸우고 싶으면 성 밖에서 싸우든 경비병에게 걸리지 않고 몰래 싸워라. 그래야 하찮은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앞으로 너희가 지낼 곳은 이스트 성의 코리아타운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사는 곳에 들어가서 죽지 말고 잘 기억해둬라. 이동은 뒤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너희 선배들이 도와줄 것이다. 궁금한 것도 먼저 들어온 고국의 선배들에게 물어보도록. 이상! 해산!”
경비대 조장이 해산을 외치자 신입생들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대가 포위를 풀고 뒤로 물러나 대오를 맞춰 남문으로 들어갔다.
“시작이네요. 오빠! 내려가실 거예요?”
“소희가 내려갔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잠시 구경하자.”
“네!”
경비대가 빠지자 영웅 길드 길마 김영웅과 환인 길드 길마 최민순, 고구려 길드 길마 이용호가 앞으로 나섰다.
“권울헌이 우물에 독개구리 넣으려다 죽은 거 소문이 쫙 퍼졌는데, 김영웅은 무슨 염치로 이 자리에 나타난 거죠?”
“염치가 없으니까 나타났겠지.”
“정말 염치없는 놈이네요. 하긴 그러니까 자기가 무사시 길드 길마 오노 준이치를 죽였다고 떠들어대겠죠.”
“흥분하지 마. 정신 건강에 해로워.”
“일본 놈들 생각할 때보다 영웅, 환인, 고구려 길드 생각할 때 화가 더 나요. 아니 참을 수가 없어요. 저놈들은 악의 축이자 암세포에요. 사람들 괴롭힐 때는 맨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싸울 때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유정아!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어. 참자!”
“복이 오기 전에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아요.”
“어디 하늘 같은 남편 앞에서 쓰러진다는 소리를 해? 혼날래?”
“죄송해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밤새 자빠뜨릴 줄 알아. 알았어?”
“네에?”
“흐흐흐흐~”
“오빠는 매일 그것만 생각하죠? 24시간 내내.”
“남자 머릿속에 섹스가 사라지면 그날로 인생 쫑이야.”
“남자는 섹스가 인생의 전부에요?”
“아니. 99.9%!”
“컥!”
귀엽게 황당한 표정을 짓는 유정을 품에 안고 김영웅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유정과 있는 곳은 남문 문루로 경비병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의자에 앉아 주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소희는 미리 주아 근처로 잠입시켜 놓았다. 주아를 보호하라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주아 근처가 적당하다는 말로 등산 점퍼와 바지, 모자로 변장하고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