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라이디의 정체 1
* * *
다음날, 우리는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인퀴지터가 쫓아 오고 있지도 않고,
내 착각이 아니라면, 나를 좋아하고 있는 최상급 금발 미녀와 함께하는 여행.
이대로만 계속 지낼 수 있다면 행복할 수밖에 없잖아!
...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긴 한데,
"테사, 너 밥 할 줄 아냐?"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테사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아침은 스튜에 빵이었다. 점심도 스튜에 빵이었다.
어제 점심에 라이디의 집에서 먹었고 저녁에 야영하면서 먹었던 것도 스튜에 빵이었다.
물론 스튜는 엄청 맛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불평하는 것도 염치없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계속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아니."
단호하게 부정하는 테사.
이 녀석이 진짜 요리를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할 줄 알아도 나서서 해줄 것 같진 않다.
"스튜 질림? 매지션즈 급식보단 맛있는 거 같은데."
"아니, 그건 아니고..."
모처럼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은 거지.
라이디가 눈치챌 것 같으니, 답하지 않고 그냥 말을 흐렸다.
조용히 요리책이라도 하나 사서 시도해 봐야 하려나?
평생 요리라곤 해본 적이 없는데,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라이디에게 점수 딸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럼 크리스의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이런, 라이디가 들었나 보다.
"불평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라이디."
"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요. 첫 여행에 들뜬 나머지 야영 훈련하는 기분을 너무 내버렸네요."
"크리스가 눈치 없는 거지."
오늘도 내 험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테사.
반면 라이디한테 쓴소리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왜 맨날 나한테만 그러는 건지, 이쯤 되면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정도다.
"다음 마을에서 이것저것 사서 맛있는 거 해줄게요. 대신 크리스가 만든 것도 가끔 먹을 수 있을까요?"
"정말? 시도는 해볼게. 고마워!"
싱긋 웃어 보이는 라이디가 마냥 예쁘게만 보인다.
그보다... 내가 만든 요리를 생각하는데 얼굴은 왜 붉히는 거야?
"꺄아아악!"
별안간 언덕 너머에서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라이디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달려갔다.
나도 라이디를 뒤따라 달려 언덕을 넘어갔다.
비명의 근원으로 보이는 여인은 넘어져 있었고, 주변을 서넛의 도적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거기! 멈추세요!"
라이디가 검을 뽑아 돌진한다.
그 모습을 본 도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세요!"
라이디가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여인은 화를 내곤 길을 따라 급히 가버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뒤늦게 따라온 테사가 상황을 묻는다.
"구해줬더니 우리더러 돌아가라는데?"
"인퀴지터가 크리스 잡아가려고 벼르고 있을 텐데, 페르낭드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맞아요. 다른 길은 없어요."
라이디의 말대로, 다른 길은 없다.
페르낭드에서는 세 갈래로 길이 나뉜다. 이쪽으로 향하는 게 매지션즈에서 정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는 길이기도 하고, 루이스 연합 공국을 관통하며 나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다만 페르낭드부터 연합 공국의 맹주국인 루이스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외길이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위험하진 않을까?"
"딱히. 지나가던 사람이 가지 말랬다고 안 갈 거냐?"
"그렇긴 한데..."
"제 생각에도 일단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을 알아야 대처를 하죠."
"라이디가 그렇다면야. 그럼 출발하자."
그 여인이 왜 화를 냈는지, 돌아가라고 한 건지 걱정이 든다.
하지만 믿음직한 라이디가 있으니까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야, 너 내 말은 안 듣고 라이디 말만 고분고분 듣는 거 같은데 착각이냐? 착각 아니지? 야!!!"
테사가 당치도 않은 태클을 건다.
꼬우면 마음씨를 좋게 쓰던가, 아니면 여자애로 태어나든가!
성격 더러운 낭자애의 외침은 한 귀로 흘리면서, 라이디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우리는 도라 마을에 들어섰다.
한적한 마을이다. 제도 힐베르트에서 루트 공화국으로 향하는 주요 육로의 길목에 있어 지리적 이점이 뛰어나지만, 별다른 이점이 없는 곳이다.
마을의 위아래에 있는 올리비에나 페르낭드가 호수와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입지가 훨씬 좋다.
게다가 두 도시의 거리가 강행하면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보니, 도라 마을은 그저 지나가는 마을 이상의 의미를 지니질 못한다.
그렇기에 조용하고 한적한 게 당연한 마을이지만...
마을 중앙의 공터에 다다를 때까지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아무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죠?"
"그런 거 같네."
라이디와 테사가 경계 태세를 갖춘다.
그러자 골목에서 도적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라이디가 건물 쪽으로 우릴 이끌었다. 건물을 등지고 싸울 심산인 것 같다.
이내 도적들이 덤벼와, 라이디가 나서 응수했다.
"하앗!"
"컥!"
"크윽..."
순식간에 둘을 쓰러트리는 라이디.
하나는 절도 있게 폼멜으로 손목을 가격하고 발로 밀어 쓰러트렸다. 다른 하나는 베어오는 공격을 흘리고 몸으로 부딪쳐 넘어트렸다.
이 정도면, 몇 명이 덤비더라도 라이디의 상대가 되진 않겠는데?
"크리스, 테사, 도망가야 해요."
"왜? 우리가 이기는 거 아냐?"
"저쪽 건물들 안에 궁수들이 있어요. 자칫하면 지킬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게 손을 내미는 라이디.
확실히, 궁수들까지 있다면 나와 라이디만으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 지리도 잘 모르는데, 셋이서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변수가 남아 있다.
혹시 테사의 마법으로 해결할 순 없는 걸까?
"테사, 네 마법으로... 테사?"
테사를, 아니, '테사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테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설마 우릴 버리고 벌써 도망친 거야!?
"오히려 잘됐네요. 크리스, 어서 가요."
라이디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을 피해 마을의 골목을 달렸다.
처음엔 발이 느린 나 때문에 쉬이 도망가진 못했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들을 라이디가 쓰러트리고, 라이디가 나를 허리에 끼고 들고 달려서 겨우 따돌릴 수 있었다.
저항도 못 한 채 여성에게 들려서... 하…
미친 듯이 부끄러웠지만,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헉... 허억... 하아아..."
"라이디, 괜찮아?"
라이디에게도 나를 들고 뛰는 건 힘든 일이었나보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이내 골목에 쌓여 있는 상자 사이의 공간을 발견한 라이디는 그곳에 몸을 숨겼다.
그리곤 나를 내려놓고, 양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두 개의 감촉. 아아
빵보다도 부드럽다. 설탕보다도 감미롭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 말캉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감동이 밀려온다. 양쪽에서 두 배로 밀려온다.
그리고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하고... 이질적인...
......
...?
"저...... 저기, 라이디...?"
"하아... 하아... 하앗... 크리스......"
고개를 들어 라이디의 상태를 확인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야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라이디가 보인다.
혼란스럽다.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라이디, 잠깐... 진정해!"
"크리스... 저, 더이상은..."
라이디가 양팔로 내 몸을 더욱더 강하게 조여온다.
목덜미에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싱그러운 땀의 냄새가, 향기로운 체취가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당장 라이디와 입술을 포개고 싶어!
덜컥
"빨리 들어오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