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서큐버스 필리아 1
* * *
진즉 잠은 깼지만, 일어나진 않았다.
아침 햇살이 기분 좋게 피부를 찔러대고 있으니까.
매지션즈의 동굴 안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선물.
매일 이런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
...
하지만, 자꾸만 찔러대서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오... 무슨 일인데..."
"심심해."
눈을 떠 보니, 쭈그려 앉아 볼을 부풀린 테사가 손가락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한 시간 지났어?"
"몰라."
라이디가 시계를 건네주지 않은 건가?
궁금해서 쳐다보니, 침낭에 틀어박혀 꿀잠을 자고 있었다.
피곤하겠지. 사실상 날밤을 새운 거나 다름없으니까.
착하고 고마운 사람. 그래서 더욱더 사랑스러운 사람...
그녀를 위해 오늘은 내가 더 힘을 내야겠다.
"라이디는 자고 있으니까, 우리가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자."
"일어나 있는데?"
"응?"
다시 보니 어느새 침낭 위에 앉아 있는 라이디. 언제 일어난 거지?
그보다 저걸 일어난 거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질 않고 있다.
"라이디, 일어난 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디.
"졸리면 더 자는 게 어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라이디.
"그럼 아침 준비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누워 있어."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도리도리 흔드는 라이디.
...
이건...
귀엽다!
게다가 헝클어져 부스스한 머리가 귀여움을 잔뜩 더하고 있어!
아침에 약한 건가?
하지만, 어제 아침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저 잠이 부족해서 일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자주 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일 지도 모른다!
"뭐하냐? 밥 준다며."
"하지만, 라이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느릿느릿 침낭을 개는 라이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데다 졸린 기색이 역력하다.
"라이디, 아침 준비할까 하는데 먹을 거야?"
한 손으론 먹는 시늉을 하면서, 다른 한 손은 앞뒤로 흔드는 라이디.
"먹고 가지 말고 걸어가면서 대충 때우자고 하네. 그보다 귀엽지 않냐?"
"......뭐?"
"귀엽지 않냐고."
"라이디?"
"응!"
"미안하지만 레즈는 아니라서."
퉁명스럽게 답하는 테사.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남자임을 포기하고 낭자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저게 귀엽지가 않다고?
설마, 이젠 남자 외에는 끌리지 않을 정도로 선을 넘은 건가?
전에 자기가 '여자'라고 한 건 그런 뜻인가?
...
그렇다면...
혹시...
...
...내 정조가 위험한 건 아닐까?
테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옆으로 이동했다.
"야, 너 왜 수상하게 움직이는 거야?"
"나? 내가 뭘?"
"지금도 조금 물러섰잖아. 설마 날 피한 거냐? 피한 거 맞지? 야!!"
테사가 몸을 던져, 내 팔에 달라붙었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피할 수도 없었다.
"으악!"
몰캉한 느낌이 오른팔을 양쪽에서 감싸온다.
남자 가슴이 어떻게 이런 느낌을 내는 거야?!
항상 과다노출의 원피스의 너머로 가슴골이 훤히 보이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보기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두 손에 아담하게 들어오는, 보기도 좋고 만질 부분도 없진 않은 미유라고 부를 만 한 크기.
하지만 낭자애의 가슴 따윈 아무리 좋아봤자 논외의 요소다.
아니, 혐오스럽다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다.
"라이디 말곤 눈에 안 들어와? 금발 왕가슴이 그리 좋더냐?"
"미쳤어? 이거 놔!"
"싫어. 절대 안 놓을 거야! 둔탱이 크리스!!!"
텁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진다. 등 뒤로 푹신함이 다가온다.
뒤이어 한없이 여성스러운 냄새가 풍겨온다.
"뭐야?"
"라이디?"
라이디가 우리 둘을 뒤에서 껴안았던 거였다.
답하지 않고 조용히 한 손을 뻗는 라이디. 그녀의 손가락 끝은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른 가자고?"
어깨 쪽을 바라봤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디가 보인다.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결국 테사는 더 캐묻지 않고 짐을 싸러 가버렸다.
귀찮은 녀석. 낭자애라고 차별하는 게 꼬우면 여자애로 태어났어야지!
다음 목적지, 올리비에는 생각보다도 가까워서 이른 점심시간 정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리비에, 근처에 있는 동명의 작은 호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소도시.
그래서 라이디가 자는 동안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다.
정말 오랫동안 참아왔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욕구를 넘어설 정도로.
생각보다 야영하고 걷는 것은 엄청 힘들다. 걷는 것도 힘들지만, 특히 잠자리가 불편해서 고생이다.
또한 요리를 하더라도 집에서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챙겨 먹기 어려우니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진다.
게다가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걸 테사 녀석때매 하루를 낭비한지라 여러모로 꼬여서 더욱 피곤했다.
그래서 일단 여관에 가서 한숨 자고, 저녁을 먹고 시내에 나왔다.
"저기, 옷 보러 가자."
"마법 아이템 상점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급히 나오느라 여벌 옷이 없잖아. 나랑 테사는 며칠째 같은 옷인걸?"
"맞는 말이긴 하네요."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지가 사고 싶다!
매지션즈에 들어간 이후로 여성복만 입었기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슬슬 여성스러움은 벗어던지고 싶다.
최소한 중성적인 느낌으로라도 가고 싶다.
그리고 여자들도 바지 입잖아?
굳이 치마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왕이면 바지를 입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라."
평소에도 눈치가 빠르지만, 이럴 땐 귀신같이 촉이 좋은 테사. 아침의 일로 더 퉁명스러워진 것만 같다.
게다가 저 녀석 앞에서 괜히 둘러 말하면 될 것도 안될 게 뻔하다.
이실직고해야지 뭐.
"바지 사고 싶어."
"치마도 잘 어울리는걸요?"
"그치만 남자가 치마 입는 거 이상하잖아."
"그럼 벗으면 되지. 속바지 입고 다녀."
"진심이냐?"
몸에 딱 들러붙어서 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속바지만 입고 있으라고?
뒤에서 보면 노출증, 앞에서 보면 여장 오카마 변태 새끼로 오해받기 딱이다.
"뭐, 말릴 이유는 없지만 정 사고 싶으면 네 돈으로 사라. 그리고 여기서 맛있는 거 맘껏 사주겠다는 거 잊지 않았으니까, 알지?"
"나 돈 없는 거 알잖아..."
"그건 니사정이고."
매지션즈에선 돈을 직접 관리할 수가 없다.
은행처럼 각자의 계좌가 있고, 필요한 것들은 요청하면 알아서 구해 준다.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건 조금의 생활비뿐.
그러다 보니 도망칠 때 가져온 돈도 한 줌의 푼돈에 불과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이런 소중한 비상금을 옷 사는데 낭비할 수는 없다.
여기서 제일 부자인 사람이 완고히 거절하니 다음 사람에게 부탁해 본다.
"라이디..."
"속바지 입고 있는 거 보여주면 빌려줄게요."
"방에서?"
"당연히 여기서, 오늘 하루 동안 치마 벗고 있기!"
"..."
하아...
라이디도 내 편을 들어주질 않는다.
어디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든가 해야지, 억울해서 원...
"아니면 원피스 입어볼래? 어차피 여자애처럼 생겼으니까 아무도 의심 안 할걸?"
"그거라면 몇 벌이라도 사 줄게요!"
"미쳤어? 절대 싫어!"
극구 거부함에도 굳이 내 앞에서 자기 옷을 자랑하는 테사.
스커트도 입을 게 없어서 억지로 입고 있는데, 저런 여성여성한 옷을 입으면 내 정체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저 녀석처럼 잘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오전에도 느꼈지만 테사의 가슴 크기는 낭자애의 한계치를 넘어섰다.
물론 여자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작다고 할 정도지만…
대체 무슨 인체 개조를 한 건지 몰라도 부끄럽지도 않나? 자주 만지면 커진다던가 그런 건 아닐 거고...
아니면 낭자애가 되어가는 과정의 종착지가...
…
설마 나도...?
끔찍한 상상을 애써 치워버린다.
이른 시일 내에 테사의 가슴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야겠다. 저런 몸이 될 바에는 차라리 마법을 포기하고 남자가 되고 말지.
그것도 어렵다면 차라리 여자가 되는 게 낫다. 뭘 선택하더라도 가슴 큰 낭자애 같은 변태력 최종테크를 찍고 싶진 않다.
"자, 들어가요. 크리스."
"에?"
잠깐 딴생각을 하며 걸었더니, 벌써 도착했나 보다.
내 오른팔을 붙잡는 라이디.
"옷 사고 싶다며?"
내 왼팔을 붙잡는 테사.
눈앞에 어른거리는 하늘하늘하고 발랄한 원피스들...
"남성복 매장에 가고 싶다고!"
"테사, 꽉 잡고 있어요!"
"너나 잘해!"
양쪽에서 날 잡고 끌어가기에 맹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질질 끌려갔다. 테사야 별거 아니지만, 라이디의 팔 힘을 이기질 못하겠다!
"아, 진짜! ...하앗!"
쿵!
나는 바위 피규어를 소환해 가게 입구를 막아버렸다.
두 개의 바위가 맞물리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라이디, 부숴버려!"
"싫어! 끌고 가면 가게 안에다가 잔뜩 야한 피규어 만들어서 민폐 끼칠 거야! 진짜 할 거니까!!!"
"하아... 어쩔 수 없네요."
양팔이 자유로워졌다.
처음으로 이놈의 무쓸모 마법이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장하다 내 아이들아.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정말 잘 어울릴 건데, 왜 거부하는 걸까요?"
"몰라. 지가 남자앤 줄 아나 봐."
"남자 맞거든? 나는 절대 안 들어갈 거니까 마음대로 해."
"야, 저 피규어들은 어떻게 할 건데?"
"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서 마법 아이템 상점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