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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 매지션즈-23화 (23/114)

〈 23화 〉 서큐버스 필리아 ­ 5

* * *

크리스의 걱정과는 달리, 라이디는 장난을 칠 생각이 없었다.

테사를 확실히 넘어서기 전에는 혹시라도 미움받을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는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가 향했던 방향으로 찾으러 가봤지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크리스는 어디로 간 걸까요?"

"그거 써서 찾아보자."

"네?"

"조금 전에 산 거 있잖아."

"아! 맞아, 이게 있었죠?"

팔을 테사에게 내미는 라이디.

테사는 크리스의 목걸이에 달린 것과 동일한,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팔찌에 손을 가져다 댄다.

이내 옅은 빛을 내뿜으며 떠오르기 시작한 팔찌는 산기슭 쪽으로 라이디의 팔을 이끈다.

"저쪽인가 보네."

"분명 크리스에겐 필요할 줄 알았어요."

"녀석, 보이는 것만큼 덜렁이니까."

라이디가 크리스에게 사준 것은, 마력을 주입하면 서로를 찾아가는 악세사리였다.

커플용으로 맞추고 싶기도 했지만, 거금을 들여서라도 사줘야겠다는 결심이 선 건 라이디가 느끼기에도 크리스가 못 미더운 구석이 있어서였다.

크리스는 평소엔 꽤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여성에게 한없이 약하다.

지나가던 미녀가 살랑살랑 꼬리치면 정신줄 놓고 실실 웃으며 따라갈 게 분명해 보였다.

"자, 어서 크리스를 찾으러 가요!"

"다리 아픈데 천천히 가자. 위험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며?"

"하지만..."

"걱정 마. 설마 잡아먹기라도 하겠어?"

"아니, 왠지 잡아먹힐 것 같단 말이에요!"

별일 없을 거라며 미적거리는 테사를 보고 더욱 조급해진 라이디.

결국 테사를 옆구리에 낀 채 달리기 시작했다.

­­­

"헉... 허억... 크리스, 크리스!"

"으악! ...라이디?"

필리아와 차를 홀짝이다가, 어깨로 문을 부수고 들어온 라이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벌써... 잡아먹어 버린 건가요?... 크리스가... 나만의 크리스가..."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라이디.

다시 만나서 정말 다행이긴 한데... 저 반응은 뭐지?

영문을 모르겠다.

"뭐야, 잘 있었네?"

뒤늦게 테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응. 찾으러 와 줘서 고마워."

"라이디는 잡아먹는다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별일 없었구만."

"필리아는 크리스 님을 잡아먹지 않았는걸요?"

"...그게 정말인가요?"

"다만 기절해 있을 때 야한 꿈을 꾸게 도와주고, 그 대가를 조금..."

검을 뽑아 필리아를 겨누는 라이디.

"그래서, 크리스랑 한 거예요?"

"아뇨, 필리아는 조금만 먹었어요. 많이 남겨 놨으니까 필요하면 드세요."

"크리스의 것은 나도 아직인데!!!"

"잠깐, 라이디!"

검을 휘두르려 하길래 몸으로 막아섰다.

겨우 필리아를 진정시켰더니, 이번에는 라이디가 문제다.

"라이디, 난 괜찮아. 상황을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진정해."

"하지만 저 요물이 크리스를..."

"라이디!"

"......별 일 아니면 즉시 베어버리겠어요."

"일단 차 한 잔 내려줄 테니까, 얌전히 앉아 있어."

라이디의 검이 다시 검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물을 끓이러 갔다.

이 정도로 화난 그녀는 처음 본다.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는지라 걱정이 들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쁜 마음이 앞섰다.

나를 이렇게나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에 사뭇 행복해진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해칠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역시 외모도 나를 사랑해주는 마음씨도 라이디가 최고야!

동정을 지키질 잘했어. 내 굳게 지켜온 처음은 그대에게 바치리­

­­­

"그러니까 이세계에서 피난 왔다. 정액 먹고 살아가는 서큐버스라는 존재다. 배고파서 크리스랑 거사를 치렀다. 끝?"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서로 자기소개를 한 후 작금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물론... 입으로 했던 건 조용히 넘겨버렸다.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비슷하긴 하지만, 마지막은 틀렸어. 안 했다니까?"

"진짜?"

수상하다는 듯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테사.

"진짜 안 했다고!"

완전한 사실이다.

필리아의 논리를 따른다면 말이지.

"밥을 먹은 게 죄라면 달게 받을게요. 어차피 모로 가나 죽을 운명... 필리아, 여한은 없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정액을 주식으로 삼는다니, 그걸 증명할 수는 있는 건가요?"

매섭게 쏘아붙이는 라이디.

그러나, 필리아는 당황하지 않은 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필리아는 당신의 것도 먹어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정도면 설득이 될까요?"

"흐익! 그... 그건 어떻게..."

"필리아는 성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요. 라이디님이 후타나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이..."

"아... 아무튼! 정말 그런 거라면 이번엔 특별히 넘어가 주겠어요. 하지만 다음번은 절대 없어요!"

쾅!

차를 후루룩 마셔버린 라이디는 찻잔을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자, 크리스, 테사.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요."

"하지만... 필리아도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

"크리스!"

"죽을 것 같다는데 이대로 모른 체 할 순 없잖아? 끝이 좋지 않더라도, 일단은 최선을 다해 지켜보자. 어때?"

"지켜 주실 건가요? 필리아, 삶에 대한 희망을 품어도 될까요?"

"뭐, 크리스가 사고만 안 친다면 너 하나 정도야."

조금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말하긴 하는데, 아무튼 테사가 내 의견을 거들어준다.

이종족이건 뭐건 간에 이런 미녀를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범우주적 낭비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야한 행위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계획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절대, 그녀의 짜릿한 펠라치오 테크닉을 잊지 못해서는 아니다!

"안 돼요, 크리스는 내 거에요. 저런 보랏빛 치녀한테 뺏길 순 없어요!"

그렇게 말하곤 라이디는 나를 끌어안았다.

극상의 부드러움이 양쪽에서 덮쳐 온다.

아아...

솔직히, 이걸 맘껏 만져댈 수 있게만 해주면 날 뺏길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이 가슴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걸 다 포기하래도 할 수 있어!

"크리스 님의 것도 맛있지만, 혹시 기회를 주신다면 필리아는 라이디 님의 걸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도 당연히 안 돼요. 전 크리스 거니까요!"

그쪽은 필리아 줘도 괜찮은데...

목 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삼킨다.

그보다, 나도 라이디도 안 된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럼 테사가 있잖아?"

...

......

뭐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셋은 입을 다문 채 날 지긋이 쳐다본다.

"왜, 내가 뭐 잘못 말했어?"

"난 여자잖아, 멍청아."

"필리아는 정액이 필요한걸요?"

"갑자기 테사 얘기는 왜 꺼내시나요?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아요. 아무리 사정해도 안 되는 건 안되는 거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한눈에 성별을 파악할 수 있다는 필리아까지도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지?

정말 반박하고 싶지만, 이미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화제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젠장...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됐잖아?

언젠가 저 낭자애의 비밀을 제대로 밝히고 말 거야!

"으음... 그럼 이건 어때요? 크리스 님, 그리고 테사 님은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거죠?"

테사가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길래,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필리아는 마법을 쓸 줄 모르지만, 마법에 대한 비밀은 알고 있어요. 필리아가 정기를 받아 갈 때마다 조금씩 알려드릴게요."

"비밀?"

관심이 생겼는지, 이번엔 테사가 찻잔을 내려놓고 답했다.

"이 세상에서는 마법을 7개의 속성에 따라 나누고 있죠? 그 외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극소수를 이레귤러라고 부르고 있고요."

"그건 다 아는 거잖아."

"실질적으로는 이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 알고 계시는가요?"

"뭐?"

소스라치게 놀라는 테사.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필리아의 발언은 나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접근이다.

7속성 외의 마법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7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전혀 익힐 수가 없었다.

반면 '이레귤러'라고 불리는 이런 제약을 넘어선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역으로 7속성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법들을 나누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불가능과 가능의 영역이 확연하게 나뉘어 있으니까.

"드래곤들은, 아니, 하물며 엘프마저도 다양한 마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요. 왜 그런 걸까요? 그건 이쪽 세계의 기원에 대해 알아야 해요. 여기엔 각 속성에 대응하는 일곱 신이 있잖아요? 그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서... 다음에 정기를 받으면 필리아가 마저 얘기해 드릴게요!"

"야, 벗어!"

테사가 돌연 내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미쳤어? 이거 놔!"

"빨리 싸버려. 더 듣고 싶단 말야!"

"싫어! 저리 가!"

속바지를 내리려는 테사를 어떻게든 밀어냈다.

다시 덤벼오는 그를 필리아가 붙잡았다.

"오늘 필리아의 수업은 끝이에요. 테사 님, 오늘 크리스 님을 쥐어짜도 다음에 알려드릴 거니까요."

"쳇..."

다행히도 미친 게이 낭자애가 발작을 멈췄다.

"...무슨 얘기를 하신 건가요?"

"라이디, 난 얘 무조건 살려서 데려갈 거야. 이건 끝까지 들어야겠어."

"하아..."

필리아의 마법에 관한 얘기를 라이디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나 보다.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테사까지도 완전히 필리아의 편으로 돌아서자 고민하기 시작하는 라이디.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절대 직접 잡아먹는 건 금지, 2주마다 1회 몽정으로 가져갈 것. 그 이상으론 협상 불가에요!"

"난 매일 가져가도 상관없는데..."

"크리스!"

정말 상관없는데... 오히려 좋은데...

라이디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결론을 내려버렸다.

어쩌겠어. 와이프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러면... 필리아는 괴로운데..."

몸을 배배 꼬는 필리아.

"하지만 오래 참을수록 더욱 만족스럽다는 걸 오늘 깨달았어요. 그렇게라도 크리스 님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아요!"

그렇게 말한 필리아는 돌연 붉은 빛의 구로 변해, 내 목걸이에 들어가 버렸다.

"앗! 어떻게 한 거야?"

"별거 아니에요. 눈에 띄는 것도 있지만, 사실 필리아는 나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무튼, 필리아가 끌려가기 전까지 잘 부탁해요, 크리스 님!"

필리아의 목소리가 가슴께에서 울려 퍼진다.

분명 목걸이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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