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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 매지션즈-50화 (50/114)

〈 50화 〉 벨마 (하) ­ 3

* * *

"라이디! 괜찮아?"

"..."

내 발이 훨씬 느렸지만, 다행히도 라이디는 멀리 도망가진 않아서 겨우겨우 쫓아갈 수 있었다.

저택 끝의 골목에 주저앉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벨마가 마법을 쓰지 않아서, 반칙을 쓰고 이겨서 화난 거야?"

"그렇지 않아요. 그건 정정당당한 승부였고, 분명히 제가 일방적으로 패배한 거예요. 그저, 역시 마녀들은 대단한 존재들이었다는걸 실감했을 뿐이에요. "

"라이디..."

"미셸에게 몰래 크리스를 납치당했지만, 그때 눈치채고 싸웠다고 해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전투능력이 없는 테사조차도 전 막을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

"하물며 마법을 쓰지도 않은 꼬마 마녀에게도 지는데, 전 인퀴지터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정신이 팔렸었고... 한심하고, 안타깝고, 두렵고..."

"..."

"제가 크리스를 지킬 수 없는 거라면... 크리스를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라이디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하지만, 덕분에 어떻게 해야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섰다.

그저 나도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거다.

"그거 알아? 나도 라이디를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나 항상 걱정하고 있어."

"왜죠? 저보다는 크리스가 훨씬 위험한 상황인걸요?"

"아냐. 오히려 실질적으로 위험한 일은 라이디가 도맡고 있잖아? 저번에도 도적들과 싸울 때 라이디 고군분투했었고."

"그건 그렇지만..."

"나도 라이디를 지킬 능력이 없어서 한심하고, 안타깝고, 두려워."

"아니에요, 크리스는 누구보다도 내면이 훨씬 강해요.

"그렇지 않다는 거 알잖아. 하지만, 다행히도 좋은 동료들이 있어. 납치당했을 때도, 필리아와 테사가 도와줘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잖아?"

"그 둘은 정말 대단해요."

"라이디까지 셋이지. 나는 지금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고, 그러니 같은 위기가 찾아오면 나도 돕고 싶은 마음이야. 지금으로선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힘을 기르려고, 마법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니까.

"크리스..."

라이디의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는다.

...

이거...

키스 각...인가...?

맞는 것 같은데??

핫, 이럴 때 남자는 망설이면 안 되는 법이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입을...

"맞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벨마?"

"사실, 마법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어. 멍청하게 공격을 내질렀으면 크게 얻어맞았겠지만, 네 몸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움츠린 거겠지. 육감이 뛰어난 건 칭찬할 만해."

쳇...

눈치 없게도 벨마가 끼어들고 말았다.

"문제는 그 전에 있어. 멍청하게도 마녀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는 점이야. 시작하기도 전에 진 거라고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뜻이죠?"

"여기 스승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전투 준비를 마친 마녀를 이길 방법은 없어. 그 녀석들은 일반인들은 부릴 수 없는, 마법이라는 사기를 치는 거라구? 그러니까 절대 여유 부리지 마.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기습해서 죽여버리던가, 아니면 여럿이서 힘을 합쳐 괴롭히던가."

"그건 너무 비겁한 거 아냐?"

"..."

분위기를 보아하니, 묵묵히 듣고만 있는 라이디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비겁하다니? 당연한 거지. 얼마 전에 세계를 정복할 뻔한 레이븐즈의 마녀 프레이도, 날고 긴다는 기사나 마녀들을 끌어모아도 막을 방도가 없어서 결국 암살하려고 했잖아? 뭐, 지금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가볍게 찍어누를 수 있었겠지만 말이야."

벨마는 이쪽으로 다가와, 라이디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이어갔다.

"일어나. 비겁한 게 싫다면,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스승에게서 받은 게 많으니까, 식후 운동 정도는 같이 해줄게. 스승을 위해, 널 이길 수 있는 마녀는 이 벨님 뿐이게 만들어 줄 테니까 도시락 빼먹지 말고 챙겨와."

"벨마 님... 알겠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젠장!

감동은 온데간데없고, 벨마와 라이디의 화해 무드가 되어버렸다.

내 키스가!

오랜만에 찾아온 라이디와의 키스가 날아가 버렸잖아!!!

"맞아, 스승. 그리고 오는 길에 생각해 봤는데, 역시 스승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게 낫겠어."

"하아... 아침 식사? 난 점심을 간단하게 먹는 게 더 나은데..."

"바보 스승, 비유하는 거잖아? 간단한 걸 익히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분명 잘하게 될 거야. 하지만 도리어 고급 요리, 그러니까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의 퀄리티가 떨어질지도 몰라. 그러니 스승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연습하는 거로 실력을 쌓는 게 좋겠어."

마법 얘기였구나...

하긴, 생뚱맞게 아침 식사 얘기가 나올 타이밍이 아닌데...

정말 바보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내일부턴 그 바위 부수는 걸 집중적으로 연습할 거니까. 그... 이름이 뭐였더라?"

"..."

"이름 없어? 아무튼 그걸 발전시켜 보자. 물론 그동안 스승은 가진 경험 모두를 벨마에게 내놓아야 하고. 그러니까 내일은 아침 일찍 와. 알았지?"

필리아 버스트를 연습하자라...

...

뭐, 마법 사사에 관해선 벨마가 하자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지만...

딱히 '필리아 버스트'라고 외치지 않아도, 필리아는 모르겠지?

아마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며칠 간의 사사를 마쳤다.

이젠 각자 연습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서, 라이디와 나는 벨마의 저택 입구에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다.

당연히 테사는 부르지 않았다.

"스승 덕분에 앞으로 뭘 해야 슬럼프를 넘을 수 있을지 감이 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대마녀가 되면, 특별히 스승을 제자로 받아 줄게. 기대하고 있으라구?"

여전히 건방진 녀석이다.

그래도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보답은 해야겠지.

"그럼 가기 전에, 흐... 하앗!"

사람 키의 세 배는 될 법한 거대한 피규어가 솟아났다.

"10년 후 대마녀가 된 벨마의 모습이야. 어때?"

"흐... 흥, 내 멋진 모습이라기엔 흉측하고 조악하네. 무식하게 크면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스승의 선물이니 받아는 둘게."

말로는 별로라고 흉을 보고 있지만, 겉으론 실실 웃고 있어서 전혀 진심으로 느껴지질 않는다.

특히 가슴 부근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마 라이디만큼 크게 만들어 준 게 마음에 든 것 같다.

"그럼 나도 스승한테 선물 줄래. 이리 와봐."

벨마가 손짓하기에, 그녀의 옆으로 갔다.

"무릎 굽혀봐."

얌전히 무릎을 굽혔다.

쪽­!

"이건 10년 뒤에 절세미녀가 될 대마녀의 선물이니, 감사하라구!"

"훗, 고마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게."

벨마가 내 볼에 입을 맞춰서, 감사를 표했다.

아직은 절세미녀라기보다는 성격 나쁘지만 귀여운 여동생 같은 느낌이지만...

언젠간 저 정도로 대단한 미녀가 될 수 있으려나?

아마 그때쯤이면 라이디와 맺어진 지 한참일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감상은 속으로 삼키고, 벨마에게는 키스를 받아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 그럼 우린 갈게. 건강하게 잘 지내!"

"흥, 본인 걱정이나 하지 그래? 잠깐, 그보다 이거 너무 크잖아? 어떻게 집 안에 넣으라는 거야!? 스승!!!"

절규하는 벨마를 뒤로한 채, 우린 발걸음을 재촉했다.

­­­

"기다려 줘서 고마워."

"사소한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크리스 일행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벨마의 뒤에 푸른 머리의 남성이 나타났다.

"스승을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로레인... 아니, 지금은 알자스였지?"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조금은 기분전환이 될까 싶었지만, 너무나 질리니까. 남성으로서의 삶도, 인퀴지터로서의 삶도."

"그럴 거면 스승은 내버려 두고 돌아가지 그래?"

"그건 본능이 허락하지 않는다."

벨마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알자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뭐, 니들 머리는 '균형'이라는 단어만으로 가득 차 있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스승을 너무 험하게 다루진 말아 줘."

"그가 마음에 드는가?"

"아... 아니아니, 이 우아하고 고결한 천재 마녀 벨마님이 스... 스승 따위를? 여장 변태를 좋... 아 한다고? 흐... 하, 어림도 어... 없어!"

공허한 눈빛으로 벨마를 바라보던 알자스가 말을 이어갔다.

"부럽구나. 다만 그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인 사소한 문제니까."

"알았어. 그보다 떠나기 전에 이거, 정원으로 옮겨주지 않을래?"

"..."

살짝 고개를 끄덕인 알자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크리스가 만들어 준 벨마의 피규어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벨마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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