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되고 싶었던 것 1
* * *
테사의 방해로 인해 라이디와의 거사를 치르지 못한 뒤의 저녁.
이미 꽤 늦은 시간이 되었기에 내일 출발하기로 하고, 라이디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여관의 뒷마당에서 그녀와 가볍게 합을 나누는 훈련...
이었어야 했지만, 약간 버겁다.
벨마와의 대련에서의 충격 때문인지 라이디의 공격이 평소보다 무겁고 날카롭게 들어오고 있어서다.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휴, 수고했어요. 조금 쉬도록 해요."
그것만 제외하면, 라이디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반라를 보고, 가슴으로 쥐어짜이고, 딥키스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다.
"후우... 검도 좋지만, 역시 창이 그립네요."
"...창?"
"아, 이야기한 적 없었던가요? 제 주력 무기는 창이에요."
"그런데 왜 검을 쓰는 거야?"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고, 기사가 되려면 검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아아..."
창이라...
한번 만들어볼까? 어차피 연습도 해야 하고...
벨마와의 마법 수련 중, '장난감'을 만드는 마법에 관해서도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복잡한 이론 같은 것들이 잔뜩 등장했었지만 기억나는 건 별로 없고...
요약하자면 바위를 창조해 내는 마법인데, 거기에 날아가는 기능까지 억지로 붙이니 잘 안되는 거라고 벨마는 분석했다.
거기에 더하여, 같은 '만드는' 마법인 피규어 소환과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장난감을 만드는 건 상상하는 결과물을 즉시 도출해내는 마법이다.
반면 피규어를 만드는 건, 기본적으로 바위를 솟아오르게 하는 마법에 모양을 변화시키는 마법적 요소를 추가한 것이다.
두 마법 사이에는 개념적 차이가 있고, 그 간극은 무척 크기에 정교한 피규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내가, 원하는 모양의 장난감을 만들어내긴 어려웠던 것이었다.
마법을 익힐 때, 그 마법의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시작하긴 어렵다.
그래서 정형화된 방법으로 마법을 익힌 후 조금씩 다양하게 응용하는 방법을 시도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정석을 밟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벨마는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낫다고 선을 그어버렸고,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마법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삼게 되었다.
"라이디, 평소에 어떤 모양의 창을 썼어?"
"음... 제 키보다 조금 작고 끝에는 날붙이가 달린, 특별한 구석은 없는 평범한 거예요. 왜요?"
"흐응... 그렇구나. 아무것도 아냐."
만들어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가 괜히 실패하면 부끄러우니, 조용히 시도해 볼까 싶다.
라이디가 시선을 돌리길 기다렸다가, 그녀가 설명해 준 창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내 손의 위에 마법을 시전했다.
파츠즈—
작은 노란 빛이 손끝에서 퍼져나가고...
길다란 형체가 점차 생겨나더니...
"으핫?!"
이윽고 손에 들린 바위 창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해서, 순간 균형을 잃을 뻔했다.
"앗? 크리스, 괜찮아요?... 그건...?"
"라이디를 위해 마법으로 만들어봤어."
"오오! 들어봐도 되죠? 어디보자... 흠... 투박하고 무겁네요."
"...별로야?"
"하지만 연습용으론 딱 좋아요. 이걸로 모의전이나 해볼까요?"
"왜 맨날 나야? 이번엔 테사랑 해봐."
라이디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쓸만한 수준의 마법을 익힐 때까지 검술을 익히고 있지만...
그런 역할을 나에게만 기대하고 있으면 역으로 부담감이 심해진다.
물론 마검사의 간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남자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누구나 추구하는 로망이니까, 아무튼 노카운트다!
"테사는 스스로 잘 숨기만 해도 1인분은 하는 거니까요."
"...그거 결국 0인분 아냐?"
"우리의 히든카드라고 생각하세요. 자, 불평은 접어두고 어서 검을 쥐어요!"
내 쪽을 겨누며 자세를 바로잡는 라이디. 창을 꼬나들고 있는 모습이 짐짓 새롭다.
검으로 취하는 자세와는 확연히 달라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처음이니까, 창의 끝부분에 집중하고 피한다고 생각하고 해보세요. 자, 갈게요!"
챙! 챵!
검과 바위가 부닥치는데도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 상대해보는 무기지만, 오히려 검보다 대응하기 쉽게 느껴진다.
길이가 길어서 그런가 베어오는 궤적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굳이 검을 가져다 대지 않고, 익숙해진 이후엔 몸을 움직여서 피했다.
...
실력이 늘었나? 지금의 나, 엄청나게 멋있게 보이는 거 아냐?
게다가 이 정도라면 할 만하겠는데?
"그럼 조금 더 빠듯하게 가볼게요. 이번엔 마법도 써서 막아보세요."
거리를 벌리고, 등 뒤로 창을 넘긴 채 천천히 다가오는 라이디.
"후후... 봐주지 않을 거야? ...하앗!"
자신감이 붙은 나는 선제공격에 나섰다.
라이디 근처에 피규어를 소환하고 폭파시켰다.
“필리아 버스트!”
물론, 스킬명을 외치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흡...!"
파편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망토를 펼쳐 파편을 막아낸 것 같았다.
라이디라면 충분히 대처할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 피해도 주지 못할 줄이야!
"하앗!"
챙! 채챙—!
그리고,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라이디와 근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베는 공격이 위주인 건 변함이 없지만, 가끔 창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이 더해졌을 뿐인데...
모든 공격이 매섭게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막는 게 어렵지 않았던 베는 공격이, 찌르는 공격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들어오고 있다.
"큭... 흐앗!"
슬슬 막아내는 게 버거워서, 나는 왼쪽에 두 개의 피규어를 붙여 소환해 몸을 가렸다.
"핫, 좋은 전략... 흣! ...인데요?"
덕분에 공격의 방향을 정면과 우측으로 제한시킬 수 있었다.
다만, 분명 라이디는 봐주고 있다.
진심을 다할 때의 그녀는 피규어를 부숴버리고 공격해 올 수 있는 괴력을 지녔으니까...
이건 실전이 아니기에 가능한 편법일 뿐이다.
"윽... 크윽...!"
잠깐 정신을 팔았다가 창의 자루에 오른손을 맞아, 검을 쥐는 힘이 풀려버렸다.
허점을 놓치지 않고 들어오는 매서운 공격...
평소와는 다르다. 엄청난 살기가 느껴진다!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잠식한다.
라이디가...
아니,
저 창이 분명히 나를 찌른다!!!
"으악!!!"
겁에 질린 나는, 왼팔을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자각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반칙이에요, 크리스."
"미안..."
라이디가 손을 뒤집자, 모래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무의식적으로 필리아 버스트를 사용해 바위 창을 부숴버린 거였다.
"그래도 실력이 꽤 늘었네요, 크리스. 열심히 연습한 것 같은걸요?"
"헤헤..."
반칙을 쓴 벌로, 라이디에게 안겨 칭찬을 받았다.
어째 벌이라고 내리는 것들이 하나같이 포상이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벨마와 마법 연습을 하면서도 틈틈이 검술 훈련을 거르지 않은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이게 다 라이디 덕분이야. 그보다도 슬슬 배고픈데, 이대로 조금만 쉬었다가 밥 먹으러 가자."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나 마법 알려줘."
"응?"
소리가 들리는 위를 올려다보니, 테사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꼬맹이에게서 나한테 알려줄 거 대신 배워 오라 했잖아."
"아... 미안, 까먹었어."
"하아... 그래, 크리스에게는 기대도 안 했었어."
한숨을 푹 쉬는 테사.
벨마와의 훈련에 집중하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금 미안하네...
"그래서 루트 공화국으로 향하려는 거니까."
"테사 님, 거긴 어떤 곳인가요?"
실눈을 뜬 채 내가 ‘필리아 버스트!’를 외치는지 감시하던 필리아가 물었다.
"선거제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고... 무역이... 뭐, 그런 재미없는 것보다는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살인죄에 민감해서 법률과 의료체계가 발전한 곳으로 유명하지"
"살인죄에 민감하다구요? 왜 그런 건가요?"
"크리스, 난 귀찮으니 너가 설명해라."
"에휴... 알았어."
나도 귀찮았지만...
부탁을 까먹은 거에 대해 사죄를 한다 치고 잠자코 받아들였다.
"세계 대부분을 정복한 라디안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은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잖아? 그 장대한 분열의 시작이 바로 루트 공화국... 아니, 닐스 왕국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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