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되고 싶었던 것 2
* * *
"닐스라는 자가 있었어. 처음엔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시민들에게 권리를 돌려주겠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순식간에 지금의 루트 공화국의 영토를 점거했지. 하지만 그건 기습으로 인한 일시적인 효과였을 뿐이었고, 제국의 본대가 오면 진압당할 운명이었어."
"오호... 슬슬 흥미로워지네요!"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필리아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닐스는 제국의 본대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어. 그는 제국민에 대한 대학살을 단행했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래곤들은 깜짝 놀라 중재에 들어갔어. 그들은 유불리를 따지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평화를 밀어붙였고, 제국은 손도 쓰지 못하고 점령지를 닐스 왕국에 내줬어. 하지만 학살로 인한 반동으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닐스 왕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어. 그리고 그 땅엔 루트 공화국이 설립되었지."
"드래곤들은 왜 나선 건가요?"
"그건..."
"이 세상의 균형을 수호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에, 대학살로 인해 당시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지켜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이계의 방문자여."
"앗!?"
불현듯 나를 대신해 답변하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파란 머리의 남성이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
아무 말없이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무릎을 굽히더니...
"흐음... 어딜 봐도 여자애같이 생겼군."
내 턱을 짚고 이리저리 옮기면서 제멋대로 감상을 해댔다!
"아... 뭐야!? 이거 놔!"
"무슨 짓이에요! 당장 물러나세요!"
반발하는 날 감싸며 잽싸게 일어난 라이디는, 검을 빼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히 손으로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난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가 늦었군. 인퀴지터 알자스라고 한다."
"크리스, 제 뒤로...! ...하앗!"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라이디가 그를 향해 쇄도한다.
"..."
"크윽...!"
잽싸게 목을 겨누고 위협하려던 그녀였지만...
알자스의 손짓에 보이지 않는 막에 막힌 것 마냥 튕겨 나가버렸다.
"윽... 아..으...?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틸라의 창을 지닌 아이여, 나는 저자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알자스는 그렇게 말하며, 언제 꺼냈는지 모를 붉게 빛나는 창을 라이디를 향해 내던졌다.
"하으... 흐읏...!"
라이디의 앞에 창이 떨어지자, 그녀는 나직이 신음을 냈다.
...
긴박한 상황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조금 그렇지만...
야릇하게 들리는 건... 내 착각인가...?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 정도의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나를 보고 말하는...
아니, 내 옆을 보고 말하는 알자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
......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천천히, 흐릿하다가 점점 또렷해지는 테사가 보였다.
"쳇, 젠장..."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드는 테사.
마지막으로 필리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길래 라이디를 손쉽게 격퇴하고, 테사의 마법까지 간파해 내는 거지?
"누구도 해칠 생각은 없다. 이자를 매지션즈로 잡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잠깐 대화를 하고 물러갈 뿐이니 자리를 비켜주길 바란다."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하는 알자스.
그를 피할 방도는 없어 보이니,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 제게 뭘 묻고 싶으신 거죠?"
여관에 딸린 식당.
옆 테이블에서 감시하는 동료들을 두고, 나는 따로 테이블을 잡아 푸른 머리의 남자 인퀴지터... 알자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매지션즈에서 탈출한 이유는 뭔가?"
"어... 그... 그러니까..."
다짜고짜 말하기 부끄러운 부분을 짚어와서,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내용인가 보군. 하지만 진실만을 얘기해줬으면 한다. 더욱이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싶은 거라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게다, 크리스."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네가 모든 답변을 마치면, 내게 질문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후...
어설프게 돌려 말하면 들킬 것만 같은 냉랭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매지션즈에 들어간 건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였어요."
"마법을 배워서?"
"능력 있고 멋지고 인기 있는 상남자가 돼서 예쁜 여인들을 꼬시며 살아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강제로 낭자애가 되어서 탈출한 거예요."
"지금도 그 생각은...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건가?"
"네..."
모두가 듣고 있는 상황이라 부끄러웠지만, 최대한 사실대로 말했다.
불순한 의도가 있었어도 남자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까 당당한 부분도 있다.
"너는 저 아이를 좋아하고 있는가?"
알자스가 라이디를 가리키며 말하기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리고 저 아이도 널 좋아하고 있는 거겠지?"
"아마..."
라이디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내 입으로 말하려니 괜히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레 끄덕였다.
"저 아이를 만난 건 분명 매지션즈를 탈출한 이후겠지. 그렇다면 저 아이는 지금의 너의 외모를, 여성스러운 외모를 보고 좋아하게 된 것일 테고. 저 아이는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성 인간이고, 다른 동료들도 아름다운 여인들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너는 예쁜 여인들을 꾄다는 목표를 이루지 않았나? 굳이 남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그건 맞아요. 하지만, 라이디가 남자인 저를... 그러니까... 진정한 모습의 저를 좋아했으면 해서... 남자가 되고 싶어요."
"그녀가 남자가 된 널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나?"
"..."
라이디가 남자가 된 나를 좋아할까?
남자로서의 모습을 되찾아 그녀의 앞에 서는 건 줄곧 상상해왔지만, 그 이후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하니 입이 쉬이 벌어지질 않았다.
"반대로, 남자가 되길 포기하고 진정한 낭자애가 된다면 여전히 널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
"..."
이것도 답을 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라이디니까 싫어하진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답은 나온 것 같군. 더 물어볼 것은 없다. 흥미 본위의 질문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약속대로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내게 궁금한 게 있는가?"
"당신은 누구죠?"
"알자스, 인퀴지터다."
"하하... 그렇군요..."
설마, 이걸 개그라고 친 건가?
...
후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본격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봤다.
"인퀴지터인데, 왜 절 잡아가지 않는 거죠?"
"잡아갔으면 하는가?"
"아...!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닌데요...!"
"매지션즈에 집어넣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수고하지 않아도 제 발로 스스로 걸어가게 될 테니까."
...
미쳤나?
그럴 일은 절대, 죽어도 없다!
"다만, 몸은 이미 낭자애가 되어버렸으면서 마음으론 남자이기를 꿈꾸는 태도의 괴리가 거슬릴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해서 제 앞에 나타난 건가요?"
"받아들여라."
"...네?"
"그 변태 엘프에게 붙잡힌 것도, 내 눈에 띈 것도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지만, 이게 네 삶이다. 낭자애가 되었다는 걸 이젠 받아들였으면 한다."
"아앗!!! 그 망할 아줌마, 누군지 알고 계신가요!?"
'변태 엘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 자기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잔뜩 꼬실 수 있을 거라고, 매지션즈로 가자고 유혹했던 나의 원수...
금발에 뾰족한 귀를 지녔다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지만...
우연히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나의 '복수'를 도와줄 사람이 나타난 것 같다.
"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내 마음이 동하면 알려주도록 하지. 오늘은 이쯤 하고 물러가도록 하겠다. 필요하면 날 찾거라.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어디에나 있을 테니."
"..."
말을 마친 알자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답을 듣지도 않고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일행과 저녁을 먹으며 알자스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의논했다.
당장 잡아가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 우선 관망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마저 고민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
그래서 방에 들어온 나는 침대에 누워서, 오늘의 일들을 떠올리며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퀴지터의 등장...
나를 매지션즈에 집어넣었던 엘프...
게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짚어내기 어렵지만,
알자스를 만나고 난 후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조금씩 드는 것만 같다.
...
뭐, 피곤한 하루를 보내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