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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 매지션즈-97화 (97/114)

〈 97화 〉 블레어 ­ 1

* * *

그 후, 리사와 '앤'이라고 불리던 아가씨, 디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처음엔 무진장 어색했다. 눈 앞에서 격하게 섹스를 하던 사람과, 그걸 도운 사람과, 그걸 보며 자위하던 사람의 조합이라니...

그러나 리사가 중간에서 대화를 잘 이끌기도 했고, 한없이 착한 요조숙녀같은 디앤의 반전 매력에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결국 리사가 디앤을 부를 때만 쓰는 '디디'라는 별명을 나도 쓸 정도로 친해졌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후우...

얼굴을 붉히며 오후에 마저 할 거라는 디디의 모습을 보며 그 전까지의 야한 장면들이 떠올랐고, 조금은 진정되었던 몸이 다시금 달아올라 당장 라이디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뿐더러 집에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한참 남았을테고, 그렇다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그래서 성적 욕망을 꾹 참으며... 시장 조사도 하고, 괜찮은 마녀인 것 같으면 제자로 받아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할 겸 마법 아이템 상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

흐음... '블레어의 가게'라...

아담한 크기의 건물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단순한 이름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잡화상점으로 오해할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미심쩍은 가게지만, 아무래도 대도시인 루이스와 가까워서 그런지 테레즈에는 마법 아이템 상점이 딱 하나뿐이라서 다른 선택지는 없다.

"저기, 실례합니다..."

"..."

카운터에는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없이, 그저 날 응시하고 있을 뿐인 초록 단발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주눅들어 있을 필요는 없지.

그래서 나도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랑 동갑 정도로 보이는 묘령의 여성.

꽤나 지쳤는지 게슴츠레 뜬 눈 밑에는 살짝 다크서클이 져있는 것 같았고, 꾸미는 데엔 관심이 없다는 듯 군데군데 헤진 옷을 대충 둘러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단점들이 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상당했기에 쉽사리 가려지지 않았다. 바르게 자리잡은 이목구비에 적당히 솟아 있는 가슴을 필두로 전체적으로 옷 테가 살아 있어서 좋은 실루엣을 가졌다는 게 티가 났으니까.

무엇보다도 마치 에메랄드를 보는 것만 같은 푸른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저..."

"..."

알바는 아닌 것 같다. 알바가 손님을 기쁘게 맞아주기는커녕 째려볼 리는 없잖아?

아마도 점장이겠지. 그리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마녀일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 또한 점잖게 무시하며 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음...

이건 심각한데...

이름이나 설명... 심지어 가격조차 적혀 있지 않은 채 그저 널부러져 있는 물건들...

품질이나 성능같은걸 따질 수준이 아니잖아? 고객 응대나 판매 전략이 영 꽝인데?

...

하지만, 역으로 마녀로선 왠지 고수의 느낌이 풀풀 난다.

네가 사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쿨한 태도.

장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물건을 준비해 둔 건 사실이고, 먼지가 쌓여 있긴 하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꽤 정교하게 만들었다는게 티가 났다.

...

이 사람한테서 기술만 잘 빼먹고, 직접 가게를 차리면 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저... 실은..."

"..."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관심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조금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호오."

카운터 뒤쪽의 방으로 가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줍더니, 몇 개를 골라 내게 건넸다.

그것은 작고 동그란 고리 모양에, 그 안은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건 뭐죠?"

"아, 의뢰를 받아 제작 중이던 피임 도구의 프로토타입이야."

"피임도구!?"

"콘돔? 이라고 부르는 페니스에 끼워 쓰는 타입이라더라. 마침 테스트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네. 그거 끼고 몇 발 싸볼래? 그럼 제자로 받아 줄게."

에???

뭐야!? 내가 남자라는 걸 어떻게 안거지???

아니, 아니다. 리사도, 디디도, 그 누구도 내 모습을 보고 단번에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이걸 다른 남자랑 써보고 오라는 거겠지? 그런 뜻이겠지??

"저...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전 여자인데다 남자랑 하는 것도 조금...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건 다른 분께 부탁하심이?"

"거짓말. 아닌거 다 알아. 저기 문 옆에 있는 구슬 보이지?"

"어... 저 파란 구슬 말인가요?"

"그래. 그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이 남자면 파란색, 여자면 빨간색으로 빛나는 아이템이야. 어릴 적에 연습용으로 만든 건데, 막상 만들고 보니 아무 쓸모가 없어서 장식용으로 쓰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도움이 됐네."

"에... 에?"

"테레즈에 여장남자가 돌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나름 신선한걸? 수제자로 받아주라는 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걸테고, 그렇다면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재빠르게 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대로 나가버리면 검은 생머리의 마법사가 돌아다닌다고 소문을 퍼트릴거야."

...

젠장!!!

이래저래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도서관에 돌아갈 걸! 그냥 자존심 굽히고 벨마한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래, 잘 생각했어. 문 잠그고 여기로 돌아오도록 해."

하아...

소동을 일으켰다가 인퀴지터에게 쫓겨... 최악의 경우 매지션즈에 끌려갈 지도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블레어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기로 했다.

"오늘 내로 딱 다섯 발만 싸줘. 그럼 입을 다무는 거에 더해 제자로 받아줄 테니까."

"저 혼자 다섯 번 사정하라구요?"

"어."

"그... 그건 불가능해요..."

"그럼 네 번."

"불가능하다니까요! 세 번 이상부턴 생리적으로 무리예요!"

"해본 적 있어?"

"어... 아뇨...?"

"남자들에 대해선 잘 모르는 편이지만, 해보기도 전에 안된다고 하는 건 믿지 않아."

"하아..."

오늘 밤은 라이디와 불태우고 싶어서, 이런 데서 자위하는 걸로 성욕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지만

설령 한다 치더라도, 어떻게 오늘 내로 네 번이나 싸라는 거야? 너무 막무가내잖아!?

"알았어, 정말 불가능한 거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되는 데까지 해보고, 내일 마저 하는 걸로 하자. 괜찮지?"

"...집에 돌아가서 써보고 와도 될까요?"

"아니, 내가 보는 앞에서 해. 무언가 꼼수를 쓸 지도 모르니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 그런..."

"자, 빠져나갈 방법 따윈 없으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시작해."

...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블레어의 요구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지만, 마법사인 걸 인퀴지터에게 들켜 매지션즈로 끌려갈 위험을 피하는 것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장사이긴 하니까...

"...방에 들어가서 할게요."

"그래."

나는 카운터로 들어가,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무심하게 답하는 블레어를 뒤로한 채

그녀가 '콘돔'을 꺼냈던 그 방으로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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