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그녀에게 털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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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화 〉그녀에게 털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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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화 〉그녀에게 털어놓다
마음을 굳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가 싫어질지도 몰라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요? 사람 겁나게.”
나는 웃음기를 쫙 뺀 얼굴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임상시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페로몬의 힘을 얻게 된 일,블랙 애로우에 납치된 일, 그리고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진 이야기까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놨다.
“잠깐만요.향기 씨, 나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요.”
총명한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반인보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분야인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이런 종류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에도 출연했던 전력이 있는 그녀였다.
정말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이겠지.
‘괜히 이야기했나?’
나는 그녀의 복잡한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당혹감과 실망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연신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장난이었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내가 한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다.
나는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임상시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페로몬을 얻었다?”
“네.”
“그리고 그 힘은 원래 무기로 개발된 거다?”
“네.”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납치까지 된 거다?”
“네.”
“게다가 그 힘을 이용해서 여자들이랑 놀아나고 모습까지 바꾼 거다?”
“네...”
강윤소는내가 말한 내용을 요약해서 읊으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확인이 거듭될수록 나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당혹감과 실망감으로 가득하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분노로 바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야!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서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
그녀는 내가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별의 핑계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왜 꾸며내겠어요.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을 했겠죠. 제 흠이 드러나지 않게.”
이별하고 싶으면 다른 좋은 핑계도 많다.
굳이 여자들과 뒹군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저 그녀에게 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사실대로 전하고 싶을 뿐이었다.
“...”
그녀는 성을 내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연신 나를 흘깃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다 사실이라는 거네?”
“네.”
“하~~~. 진짜...”
그녀는 살짝 성을 내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고뇌에 빠지는 모습이었다.
“좋아. 그 능력이 거의 만능이라고?”
“네. 요즘에는 남자나 동물도 조종이 되더라고요.”
“우리 연애하기 전에 나에게 쓴 적 있어?”
“네?”
“그 능력을 이용해서 나를 꾄 거냐고?”
나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즉시 답했다.
“아니요. 절대로 쓴 적 없어요. 우리는 그냥 만난 거예요.”
관계를 맺을 때 쾌감을 높이기 위해서 사용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몇 가지 암시를 걸 때도.
하지만 그녀와 내가 느꼈던 끌림과 감정은 페로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
“뭐, 좋아. 그러니까 우리 사이의 감정은 진짜지? 조종한 게 아니고?”
“네. 신께 맹세코.”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누르면서 말했다.
“나랑 만나기 전에도 그 능력으로 여자들이랑 뒹굴었어?”
“네. 그게 여자들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경우가 많아서요. 당시에는 저도 제가 페로몬을 내뿜는 체질이 된 걸 몰랐죠.”
“알게 된 후에도 뒹굴었고?”
“네. 뭐, 급할 때는...”
실제로 최근까지 아는 여자들과 빈번히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강윤소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분위기가 되면 몸을 겹치게 되는 것이었다.
때로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때로는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서.
“...굳이 여자들이랑 잔 이야기는 안 해도 되는 거잖아.”
“그래도 사랑하니까요. 솔직하게 대하고 싶었어요.”
“나라고 너에게 뭐든지 다 이야기하는 건 아니야. 소속사의 선배가 성추행한 이야기, 팬들이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몰래 수음을 한 일 등등. 수치스럽고 힘들었던일도 많았다고. 그런데 너는 어떻게...”
역시나 그녀는 제법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실망감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이야기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페로몬에 관한 이야기 다른 곳에서 한 적 없지?”
“제 입으로 한 적 없어요. 상대가 알아낸 적은 있어도.”
“그래, 앞으로도 철저하게 비밀로 해. 어디 가서 해부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내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은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얼굴에 서려 있던 격한 기운이 누그러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내가 어디 당신이 예뻐서 그런 소리 한 거 같아요? 그냥 불쌍해서 해준 말이라고요.”
“알아요. 고마워요.”
“후,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에요?”
“아무래도 한동안은 정체를 숨기고 힘을 키워야 할 것 같아요.”
“그다음에는?”
“아직 생각 중이에요. 계속 바뀐 신분으로 살아갈지, ‘블랙 애로우’를 붕괴시킬지.”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 좋은데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네. 알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어디 ‘블랙 애로우’를 상대하면서 적당히 할 수 있겠는가?
모 아니면 도고.
먹지 않으면 먹힐 뿐이다.
나와 신지혜가 당한 일을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지금 벌이는 일들은 명백히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신지혜가 계약을 위반했다고 해도 말려든 것에 불과한 나를 죽이거나 잡아가려고 한 것은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걸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회사였다.
그런 회사는 세상에 존속해서는 안 된다.
꼭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는 버러지 같은 회사는 없어지는 쪽이 좋았다.
힘이 없을 때면 몰라도 이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페로몬의 힘이 있고, 돈의 힘이 있다.
가능하다면 세상에 해악이 되는 존재는 없애는 쪽이 좋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나는 모 영웅의 좌우명을 떠올리며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같잖은 영웅심이나 잘난 척이 아니다.
그저 상식의 문제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치운다.
그저 그런 문제다.
불합리와 부도덕 그리고 비윤리를 진리인 것처럼 여기면서 행동하는 놈들에게 진정한 상식을 가르쳐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열 받는데? 나 만나러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아무래도 새로운 캐릭터를 완벽히 정착시키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사업도 벌여야 했고...”
“그게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본격적으로 사업하기 전에 시간 있었잖아?”
그녀의 지적은 타당했다.
새로운 신분을 얻은 시점에서 바로 그녀를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급한 마음에 사업을 서둘렀다.
결과적으로 나 자신이 스스로 목을 조른 셈이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나보다 사업이 더 중요하다 이거죠?”
실망과 분노에 물들었던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약이 오른 소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나에 대한 원망보다는 서운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진짜.”
“흥, 말은 잘하지. 카사노바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진정한 힘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
“저는 진정한 힘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힘이라면 역시 자본. 즉, 돈이죠. 저는 돈에 짓눌리고 싶지 않았어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사업을 꿈꿨어요.”
“그건 누구나 그래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그걸 실제로 일해보고 깨달았죠. 그래서 더 급했던 거 같아요. 기회가 왔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하면 어쩌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때에 따라서는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보다 더한 일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세상에 통용되는 힘일까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일일까요? 아마 아닐 거예요. 자본에 의한 지배도 완벽하고 무결한 것이 아니듯이.”
그렇다.
오히려 자본은 불공평과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이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노력’을 최대한 반영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 불완전한 체제에서 내가 인정받을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사업이었다.
돈과 영향력을 얻고 싶었다.
누구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마음먹고 뛰어든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수많은 우연과 인연을 거쳐서 겨우 도달한 기회였다.
나는 이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강윤소였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자유와 안전’도 필요했다.
“향기 씨도 고민이 많았었나 보네요.”
“기회가 찾아왔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실로 그랬다.
마침 퇴사의 명목으로 주 회장이 50억을 챙겨줬고, 그때 맞춰서 최영훈이 새로운 기술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나에게 펼쳐진 현실.
새로운 신분과 불안한 미래. 넘쳐나는 시간.
그렇다면 나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사업을 하자!
그 단어가 내 머리를 꽉 채울 수밖에 없었다.
“뭐, 좋아요. 페로몬을 얻게 된 것도 자의가 아니니까 이해하고, 여자들이 꼬인 것도 어쩔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그리고 악당들에게 납치당하거나 외모가 변한 것도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하죠.”
“헤헤헤, 그러면 용서를...”
“그래도 확실하게 하나 물어보고 싶어요.”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맞죠?”
“당연하죠.”
나는 바로 답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비로소 그녀는 표정을 풀고는 나에게 안겨 왔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너무 혼란스럽고. 솔직히 어디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게사실이라고 해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나를 받아들여 줬다.
여성 편력도 심하고,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는 나라를 사람을 말이다.
왠지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붉어진 눈시울로 그녀를 쳐다보며 연신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