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점심 때 지왕은 샛별이가 하고 싶다는 말에 같이 자신의 자취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편의점을 발견한 샛별이가 지왕에게 말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사갈까?”
지왕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
샛별이가 가려는 편의점이 바로 지혜가 알바를 하는 편의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샛별이는 어리둥절해하며 지왕을 쳐다봤다.
“왜?”
“응? 아, 아냐. 가자.”
지왕은 엉겁결에 그렇게 말해놓고 샛별이를 따라가면서 고민에 빠졌다.
‘괜한 짓을 했나? 흐음...’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지왕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던 지혜는 지왕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또 오셨네요? 주... 어?”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애교를 부리려고 하다 지왕을 따라 들어오던 샛별이를 보고 멈칫한 것이었다. 샛별이도 지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당신은...”
지난 번 지왕의 원룸에 점심을 만들어주러 찬거리를 사 갖고 가는 길에 마주쳤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혜는 편의점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 댓바람부터 지왕의 원룸에 쳐들어가 아프다는 핑계로 조금만 자고 가게 해 달라 보챈 뒤 은근슬쩍 지왕의 위에 올라타 섹스를 하고 지왕의 품에 안겨서 자다가 샛별이가 온다는 말에 바로 쫓겨났었다.
그러다 원룸 바로 앞에서 샛별이랑 마주쳤었는데, 그때 지혜는 상대가 샛별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시치미를 뗀 채 우연히 부딪힌 척 하며 대화를 나눴었다. 물론 지왕도 그 광경을 창밖으로 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와 샛별이가 지금 이런 반응들을 보이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어떡하지? 쌩까야 하나? 그치만 저 녀석(지혜)이 분명 아는 척을 하면...’
지왕은 지혜한터 어떡할 거냐고 막 눈빛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혜는 처음에 좀 놀라는 듯하다가 지왕의 눈빛을 보고는 이내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샛별이한테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지왕이 여친이었어요?”
샛별이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지왕이를 알아요?”
“물론이죠. 겉에서부터 속까지 모르는 게 없죠. 후후.”
샛별이는 얼떨떨했다.
“겉에서부터 속까지라니, 그게 무슨...”
그리고 시선이 자동으로 지왕 쪽으로 향했다. 샛별이와 눈이 마주친 지왕은 움찔 했다.
“아, 아니 그게... 아! 이웃사촌이야, 이웃사촌!”
“이웃사촌?”
“어. 어렸을 때부터 죽 옆집에 살았었거든.”
“그래?”
“응. 그치?”
지왕은 그러면서 막 지혜한테 텔리파시를 보냈다.
‘그렇다고 해! 빨리!’
당황한 지왕을 본 지혜는 재밌어 죽으려고 했다.
‘큭큭. 완전 당황했네? 어디 좀 놀려줘볼까?’
그러더니 샛별이의 귀에다 대고 지왕에게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지왕이 고추 엄청 크죠?”
샛별이는 깜짝 놀랐다.
“네?!”
그리고 곧바로 지왕을 쳐다봤다. 지왕은 펄쩍 뛰었다.
“야! 그게 뭔 소리야! 오해하잖아!”
그러나 지혜는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오해는 무슨. 너 크잖아? 안 커?”
“야! 그게 아니라! ... 어휴... 샛별아, 오해야! 얘 그냥 우리 놀리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나 샛별이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치만 너 진짜 크잖아? 흑...”
지왕은 덜컥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야...”
크긴 크지.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나 샛별이는 지왕이 뭐라 할 새도 없이 팩 토라져서 편의점을 뛰쳐나가 버렸다.
“흑.”
지왕은 화들짝 놀라 샛별이를 쫓아가려다... 멈칫하며 지혜를 쏘아봤다.
“야! 너 쟤 다시 데려올 테니까 사실대로, 아니 오해 안하게 농담이었다고 말해! 알았어?”
지혜는 심통이 나 입을 삐죽거렸다.
“칫.”
지왕은 열이 확 뻗쳐 카운터를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버럭 쏘아붙였다.
“알았냐고!”
쾅!
지혜는 깜짝 놀랐다. 지왕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잘못했다간 주먹으로 진짜로 쳐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결국 지혜는 껌뻑 주눅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그러면 되잖아...”
지왕은 그제야 성질을 내며 홱 돌아서서 샛별이를 잡으러 갔다.
“샛별아!”
다행히 샛별이는 멀리 못 가고 길모퉁이에 숨어 훌쩍대고 있었다.
“흑...”
지왕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샛별이를 달랬다.
“휴우~... 샛별아, 오해야.”
그러나 샛별이는 지왕이 제 어깨에 얹는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바람둥이! 흑...”
지왕을 노려보는 샛별이의 눈망울에 서러움과 원망이 눈물과 섞여 가득 얼룩져 있었다. 지왕은 샛별이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설득했다.
“가자. 지혜가 잘못했다고 사과한대.”
그러나 샛별이는 여전히 서러운 표정으로 지왕을 쏘아붙였다.
“뭘? 니 거기 본 거?”
“아니. 농담한 거 사과한다고. 그거 다 농담이야. 나 놀리려고 그런 거라고.”
“거짓말. 흑.”
“거짓말 아냐.”
“그런데 니 거기 큰 걸 어떻게 알아?”
“그야...”
에잇! 모르겠다!
“딱 봐도 크게 생겼잖아?”
지왕은 그러면서 한번 보라는 듯이 제 사타구니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지왕 말대로 지왕의 자지는 바지를 입은 채로도 그 윤곽이 제법 묵직해 보였다. 샛별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지왕은 이때다 싶어 얼른 샛별이를 다시 달랬다.
“그치?”
“그야...”
“그러니까 걔도 대충 넘겨짚어서 놀린 거라고.”
샛별이는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가자. 지혜가 사과한대.”
“칫...”
하지만 샛별이는 그러면서 못 이기는 척 지왕에게 손이 잡혀 터덜터덜 끌려갔다. 그러다 편의점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딱 멈춰 섰다.
“잠깐만.”
지왕은 얼떨떨했다.
“왜?”
설마 마음이 바뀌었나?
그러나 샛별이는 도망가거나 하지 않고 가방에서 휴지와 거울을 꺼내 얼굴에 범벅된 눈물을 닦았다. 지왕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난 또 뭐라고. 훗.’
분명 지혜한테 눈물 자국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여자들끼린 그런 걸로도 자존심이 상하곤 하니까.
샛별이는 눈물을 다 닦고 얼굴이며 머리며 여기저기 체크를 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다 됐어. 들어가.”
“어.”
지왕은 샛별이한테 편의점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면서 샛별이 몰래 지혜에게 막 눈으로 레이저를 발사했다.
‘똑바로 해라. 안 그럼 정말 죽는다.’
지혜는 그런 지왕을 보고 심통이 나 입을 삐죽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거짓말은 지가 해놓구선.’
그렇지만 샛별이를 보고는 지왕이 시킨 대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냥 장난기가 발동해서 놀려봤어요.”
샛별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지혜에게 보란 듯이 옆에 있는 지왕한테 꼭 달라붙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러곤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친하면 그럴 수도 있죠. 저야말로 너무 오버해서 죄송해요.”
지혜는 지왕에게 보란듯이 달라붙는 샛별이가 눈꼴이 시었다.
‘흥, 지금 나한테 도발하는 거지?’
그렇지만 지왕이 눈을 부라리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할래요?”
샛별이는 깜짝 놀라 지헤를 쳐다봤다.
“네?”
지왕 또한 깜짝 놀라 버벅거렸다.
“야, 친구는 무슨. 됐어. 샛별아, 가자.”
그러나 샛별이는 팔짱을 끼고 있던 지왕의 팔을 꽉 붙잡았다. 지왕은 얼떨떨해하며 샛별이를 쳐다봤다.
“샛별아?”
샛별이는 마치 자기도 그러길 바랬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지혜한테 대꾸했다.
“네, 그렇게 해요. 지왕이의 친구는 저의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지혜는 씽긋 웃었다.
“그래요.”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엄청 스파크가 튀었다. 지왕은 둘의 기싸움에 쫄아서 끼어들 엄두를 못 냈다. 샛별이가 지혜한테 물었다.
“그런데 나이가...”
지혜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왕이보다 한 살 많아요. 지랑이랑 동갑이죠?”
“네. 그럼 언니라고 부를게요.”
그러자 지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반말로 대꾸했다.
“그래, 앞으로 친하게 지내.”
샛별이 또한 지지(?)않고 깍듯이 대꾸했다.
“네, 언니.”
지왕은 그제야 둘의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끼어들었다.
“그, 그럼 갈까?”
그런데 샛별이는 또 자길 끌고 나가려는 지왕의 팔을 붙들었다.
“아직 먹을 거 못 샀잖아?”
그러더니 이번엔 지혜한테도 보란듯이 말했다.
“점심을 못 먹어서 여기서 간단한 거 사 갖고 얘네 원룸 가서 먹으려구요.”
그리구 지왕한테 사랑도 받을 거구요.
지혜는 샛별이가 그렇게 말하는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흥분하면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별 관심없다는 듯이, 하지만 말에 뼈를 담아 대꾸했다.
“그래요. 거긴 작지만 식탁도 있고 하니까 여기보단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샛별이는 움찔 했다. 지혜가 지왕의 원룸 구조를 알고 있다는 건 거기 가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지만 지왕은 이미 좌불안석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야, 빨리 계산해.”
그러나 지혜는 일부러 천천히 계산하고 천천히 봉지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나 따로 챙겨두었던 삼각주먹밥도 하나 꺼내서 생색을 내며 담아주었다.
“이건 서비스예요.”
샛별이는 역시나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고마워요, 언니. ‘지왕이’랑 잘 먹을게요.”
지혜는 속으로 흥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앙큼한 년. 순진하게 생겨갖곤 보통이 아니네?’
그러면서 샛별이한테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지왕이 먼저 확 낚아챘다.
“그럼 간다.”
지혜는 일부러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잘 가~.”
샛별이 또한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언니, 다음에 또 봐요.”
“그래, 너도 잘 가.”
“네.”
그리고 마침내 편의점에서 나왔다. 지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아니 십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내내 지왕에게 꼭 붙어서 팔짱을 끼고 있던 샛별이가 돌연 팔짱을 풀었다. 지왕은 그런 샛별이가 신경이 쓰였지만 일부러 내색하진 않았다. 샛별이는 지왕과 나란히 걸어가며 물었다.
“근데 너 언니한테 반말하네?”
“어? 아... 어쩌다 보니. 뭐 한 살 차이는 차이도 아니잖아?”
“하긴, 남녀 사이에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지왕은 뜨끔했다.
“야, 아직도 삐진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안 삐졌어.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지왕은 지은 죄가 있어 뭐라 하지도 못하고 속만 끓였다.
‘어휴, 정말. 지혜 이 자식 두고 보자.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둘은 마침내 원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