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화
해가 질 무렵 선발대에 이어 온다고 했던 애들은 다 MT 장소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MT라고 해봐야 90%는 술 먹고 노는 게 다 이기 때문에 일단 밥부터 먹고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주로 남녀로 나뉘어 남자애들은 술과 버너, 고기 등을 세팅하고 여자애들은 쌀과 야채를 씻는 등 반찬 준비를 했다.
지왕도 자연스럽게 애들 틈에 섞여 버너를 세팅했고, 샛별이도 다른 여자애들과 함께 싱크대와 수돗가에서 쌀과 야채를 씻으며 밥과 반찬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지혜와 과에서 샛별이 다음 가는 퀸카로 인정받고 있는 채리나만은 달랐다.
우선 지혜는 여자애들이 아닌 남자애들 틈에 섞여, 아니 지왕에게 꼭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며 놀고 있었고 리나는 자기를 따라다니는 남자애들과 몇몇 추종녀들과 함께 탱자탱자 놀며 수다를 떨고 또 이쁜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지왕과 샛별이 쪽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지왕은 자기에게 달라붙는 지혜를 귀찮아하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애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또 샛별이가 신경을 쓸까봐 일부러 귀찮은 척 하며 구박했다.
“야, 저리 가.”
그러나 지혜는 아예 팔짱까지 끼고 껌딱지처럼 굴었다.
“왜?”
“귀찮으니까 그렇지. 저기 가서 쌀이나 씻어.”
“싫어. 여기 있을래.”
“너 그러다 여자애들한테 밥맛없다고 찍힌다? 그럼 쫓겨날 지도 몰라.”
“칫. 알았어.”
한편 샛별이 옆에서 같이 저녁 준비를 하던 여자애들은 지왕의 옆에서 끼를 부리는 지혜를 보고 샛별이에게 수군거렸다.
“저 지왕이 사촌 언니란 사람 지왕이한테 너무 달라붙는 거 아냐? 괜찮아?”
샛별이는 이미 지혜와 지왕을 공유하는 생활을 한 달 넘게 해 왔었고 또 별 마찰 없이 잘 지내왔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아 하며 미리 마련한 알리바이대로 대꾸했다.
“괜찮아. 어렸을 때부터 이웃에 살아서 친해서 그래. 그리고 나한테도 저래. 원래 성격이야.”
“그래? 뭐 니가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그래도 너무 끼부린다. 마치 숨겨 놓은 애인 같아.”
그 말에 샛별이는 지레 찔려서 움찔했다. 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다시 묵묵히 쌀을 씻었다.
“...”
그러나 그 말을 엿들은 리나가 이때다 싶어 얼른 샛별이와 지왕, 그리고 지혜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떠벌떠벌 말했다.
“거참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저런 못생긴 애가 뭐가 좋다고 저런 취급당하면서까지 참는대? 나 같으면 당장 끼 부리지 말라고 하겠다. 무슨 근친도 아니고.”
그 말에 샛별이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리나를 쳐다봤다. 지왕과 지혜도 놀란 눈으로 리나를 쳐다봤다. 둘은 샛별이가 한 말은 미처 못 들었지만 ‘못생긴’이란 말과 ‘끼부리지 말라’는 말, 그리고 ‘근친’이라는 말에 자기들을 가리켜서 한 말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지혜는 생각 같아선 당장 달려가 리나의 귀싸대기를 확 올려붙이고 싶었다.
‘저년이!’
그러나 사실 끼부린 게 맞기도 했고 외부인이었기에 혹시나 팔이 안으로 굽어서 다른 애들이 너무 나댄다고 하며 리나 편을 들어 지왕과 샛별이마저 같은 처지로 몰릴까봐 걱정이 돼 꾹 참았다.
‘씨이!’
지왕도 리나가 갑자기 대놓고 도발을 하자 당황한 나머지 선뜻 어찌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
그때 갑자기 샛별이가 탁탁탁 발소리를 내며 리나에게로 다가갔다. 리나를 노려보는 샛별이의 눈이 도끼처럼 확 치켜 올라가 있었다.
당사자인 리나는 물론 지왕과 지혜, 그리고 다른 애들까지도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착하고 순둥순둥하기만 한 샛별이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건 일찍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나는 당황해 버벅댔다.
“뭐, 뭐...”
리나 앞에 우뚝 멈춰선 샛별이는 불같이 화난 목소리로 버럭 쏘아붙였다.
“사과해!”
“뭐, 뭘?”
“지왕이 보고 못생겼다고 하고 언니한테 근친 어쩌구 한 거 사과하란 말이야!”
“내가 왜?”
샛별이는 덜컥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분노를 더 확 치솟게 만들어 저도 모르게 리나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철썩!
리나는 휘청하며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꺅!”
정신이 얼얼했다. 여자가 아니라 솥뚜껑만한 손을 가진 남자한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 컸다. 리나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떨렸다.
“뭐...”
그러다 곧 아픔이 확 밀려오자 발끈해 벌떡 일어나서 샛별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막 흔들었다.
“이 년이!”
샛별이도 지지 않고 리나의 머리끄덩이를 콱 붙잡았다.
“꺅!”
그리고 둘은 마치 씨름을 하듯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서 밀치고 당기고 하다 급기야는 바닥에 콰당 엎어져 같이 뒹굴었다.
“꺅! 이거 놔! 꺅! 꺅!”
“너야말로 놔! 사과하라고! 꺅! 꺅!”
애들은 놀라 미처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과에서, 아니 어쩌면 학교 전체에서 넘버 원투를 다투는 애들이 머리채를 붙잡고 뒹구는 것도 놀라웠지만, 샛별이한테 저런 면이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지왕과 지혜마저 너무 놀라 미처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샛별이와 리나를 뜯어말렸다.
“야! 그만해!”
“놔! 놓으라고!”
그러나 둘은 마치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아니 머리를 뜯어먹고야 말겠다는 듯이 눈을 무섭게 치켜뜬 채 머리채를 마구 잡아당기고 있었다.
“꺅! 꺅!”
“꺅! 꺅!”
결국 다른 애들까지 십 수 명이 달려들어 뜯어말리고 나서야 둘은 겨우 떨어졌다. 하지만 둘은 그러고 나서도 계속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씩! 씩!”
특히 리나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막 발버둥을 치며 다시 샛별이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저 년 죽여 버릴 거야! 악! 악!”
어찌나 힘이 셌는지 남자애들이 여럿 달려들고서도 쩔쩔 맬 정도였다.
“가만 좀 있어!”
“참아! 참으라고!”
지왕과 지혜는 얼른 샛별이가 다친 데라도 있는지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 없고?”
“어쩜 좋아. 얼굴에 상처 났어.”
지혜 말대로 샛별이의 얼굴엔 리나가 손톱으로 할퀸 생체기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막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곧 피가 스며나올 것처럼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지혜는 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구 약 없어? 없으면 약국에 좀 갖다 와줄래?”
그러자 샛별이와 친한 여자애들이 나섰다.
“저희들이 다녀올게요.”
“그래, 부탁해. 흉터 안 남는 걸로 사와.”
“네.”
그러곤 여자애들은 후다닥 약국을 찾아서 나갔다.
샛별이는 눈은 여전히 리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눈동자의 독기는 어느 새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서러움과 당혹감에 북받친 눈빛이었다. 눈시울엔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그리고 몸도 오한이 든 것처럼 막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란 것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서럽게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지왕은 깜짝 놀라 샛별이를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끝났어. 울지 마. 뚝.”
샛별이는 막 애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흐앵~!”
“뭐가 너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지. 그리고 저 녀석 때문이고.”
지왕은 그러면서 지혜를 찌릿 노려봤다. 지혜는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알았어. 잘못했어. 샛별아, 울지 마. 언니가 잘못했어. 응?”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못난 모습 보여서... 그냥 참으면 되는데... 흑.”
“참긴 왜 참아? 잘 했어. 저런 년은 그냥 머리카락을 다 뜯어놔야 해.”
지혜는 그러면서 리나는 찌릿 째려봤다. 리나는 분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눈만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서 지혜와 샛별이, 그리고 지왕을 번갈아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뭘?”
지혜는 결국 발끈해서 팔을 걷어 부치며 리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저게 정말! 너 죽어 볼래!”
그때 지왕이 지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만 해!”
지혜는 멈칫했다.
“왜? 놔 봐. 저런 년은 아주 버릇을 고쳐놔야 돼.”
“됐으니까 그만 해.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자 리나가 흥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댔다.
“생각은 무슨. 뭐 한 대 치기라도 하게? 쳐 봐! 어디 못생긴 놈한테 한 번 맞아나 보자!”
지왕은 발끈했지만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꾹 참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샛별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
“가자.”
“응...”
지혜도 지왕과 샛별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아주었다.
“여기 눕혀.”
지왕은 샛별이를 눕혀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옆에 같이 누워 등을 두드려주었다.
“좀 자. 너 많이 놀랬어.”
샛별이는 여전히 훌쩍 거리고 있었다.
“미안...”
“아냐, 잘했어. 나야말로 미안.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아냐. 여자들 싸움에 남자는 끼는 거 아냐. 그럼 꼴만 우습게 돼.”
지왕은 그런 샛별이가 너무 귀엽고 안쓰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래서 이마에 쪽 키스를 해주었다. 샛별이는 그 키스에 지금까지의 서러웠던 마음과 놀랐던 마음이 눈 녹듯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가쁘게 콩닥거리던 심장의 박동도 안정되었고 쌕쌕거리던 숨소리도 금방 진정이 되었다.
지혜는 옆에서 말없이 휴지와 물티슈로 눈물로 얼룩진 샛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머리도 빗겨주었다.
“...”
그때 약국에 갔던 여자애들이 돌아와 연고를 전해주었다.
“여기 연고 사왔어요. 흉 안지는 거래요.”
“응, 고마워. 돈은 나중에 줄게.”
“아니에요. 그럼 샛별아 한숨 푹 자.”
“응. 고마워.”
지혜는 애들이 나가자 샛별이의 얼굴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흉지면 안 될 텐데. 내일 피부과 가자.”
“괜찮아요.”
“아냐. 너 얼굴에 흉지면 지왕이가 날 죽이려 들 거야. 그러니 꼭 가야 해.”
지왕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알긴 아냐?”
지혜는 무안함에 입을 삐죽거렸다.
“칫.”
샛별이는 지혜가 지왕에게 구박받는 게 꼭 자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래서 지왕에게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그러나 지왕은 단호했다.
“아냐. 저 녀석은 좀 혼이 나야 해.”
지혜는 미안한 마음에 괜히 툴툴거렸다.
“아, 그만해. 잘못했다니까.”
“흥.”
“샛별아, 좀 자. 자고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네...”
그렇게 지왕과 지혜는 샛별이를 사이에 두고 같이 나란히 누워 아기 재우듯 샛별이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샛별이는 평생 낼 화를 한 번에 다 내서 지쳤는지 금방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혜도 뭘 잘한 게 있다고 같이 쿨쿨 잠들었다. 아마도 편의점에서 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지. 기어코 따라와서는. 쯧.
지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지혜한테도 이불을 꼭 덮어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갤낚시 폰 화면에 리나의 사진을 띄워놓고 이 년을 어떻게 할까 궁리를 했다.
“흐음...”
사진은 지난 번 갤낚시 폰을 처음 얻었을 때 캠퍼스에서 테스트 삼아 여자애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놀다 우연히 찍어놨던 것이었다.
그때 밖에서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지왕은 순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머릿속에 확 떠올랐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샛별이와 지혜가 깨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