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140화
일요일 어버이날이 지나가고 월요일 오전. 어쩌다보니 좀 일찍 등교를 하게 된 지왕은 강의실에서 곧 있을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리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지난 번 엠티 때 샛별이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다가 지왕에게 조교를 당한 뒤 순종적으로 변한 그 ‘채리나’였다. 리나는 지왕의 옆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
지왕은 살짝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
리나는 잔뜩 주눅 들게 만든 다음 가끔씩 찔끔찔끔 다정하게 대해줘야 맛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나는 기죽지 않고 안부를 물었다.
“주말 잘 보냈어?”
“어.”
“아, 금요일 날 돈 준 거 정말 고마웠어. 그걸로 부모님 선물 사 드렸더니 많이 좋아하셨어.”
“그래.”
“...”
결국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2시간 후 수업이 끝났다.
지왕은 리나를 신경 쓰지 않고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그러자 리나도 얼른 가방을 챙겨 지왕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샛별이가 강의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왕이 보이자 얼른 다가가 아는 척을 했다.
“지왕아~.”
“어.”
샛별이는 지왕의 뒤를 따라 나온 리나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응, 주말 잘 지냈어?”
“어. 너도 잘 지냈지?”
“응...”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어...”
그렇게 셋은 학교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샛별이는 밥을 먹으며 지왕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어제 지혜 언니 너희 집에 왔었지?”
지왕은 피식 웃었다.
‘녀석, 질투하는구나?’
하지만 정작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질투할 쪽은 지혜임이 틀림없었다. 샛별이는 지혜 몰래 지왕의 본가에 함께 내려가 부모님들에게 눈도장까지 찍고 왔으니까. 그래서인지 샛별이는 지왕의 웃음 속에서 지혜가 어제 자기 없이 지왕과 단둘이 지냈음을 알아채고서도 그닥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살짝 견제용?
지왕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 오후엔 계속 수업이지?”
샛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5시까지.”
“힘들겠네.”
“뭐 오늘만 고생하면 다른 요일들은 널럴하니까. 넌 어떡할 거야? 집에 가 있을 거야?”
“아니, 그냥 도서관에 있으려고. 자율 레포트가 하나 있는데 슬슬 준비해야지.”
샛별인 리나를 보고도 물었다.
“넌? 수업 있어?”
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늘은 끝났어.”
“그래? 좋겠다.”
“대신 다른 요일들은 너보다 빡빡하잖아?”
“하긴, 조삼모사지.”
샛별이는 그러면서 방긋 웃었다. 리나도 덩달아 같이 미소가 지어졌다.
“...”
지왕은 샛별이와 리나가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흐뭇해했다.
‘그나저나 지혜 이 녀석은 언제 그걸 할 생각이지?’
지난 번 지혜에게 샛별이로 하여금 리나를 자신의 세번째 여자로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걸 도와준다면 첩 딱지를 완전히 떼 주겠다고 약속한 걸 생각한 것이었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딱히 샛별이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만약 샛별이가 리나와 지왕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면 둘이 나란히 오후에 수업이 없다는 사실에 긴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샛별이의 얼굴은 전혀 불안해하거나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온 지왕은 갈림길에서 리나와 함께 샛별이를 배웅했다.
“그럼 이따가 봐.”
“응.”
샛별이는 그러면서 리나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너도 내일 봐.”
리나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소심하게 대답을 했다.
“응... 내일 봐...”
그러면서 옆에 있는 지왕 쪽을 저도 모르게 힐끔 쳐다봤다.
‘...’
하지만 지왕은 리나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샛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샛별이가 돌아서 가자 그제야 자기도 도서관으로 향했다. 리나는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지왕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지왕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훗.’
그러더니 선심 쓰는 척 말했다.
“샛별이 수업 끝나기 전엔 가야 돼.”
리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는 건 그전까진 같이 있어도 된다는 얘기?!’
리나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응, 꼭 그렇게 할게.”
그러곤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지왕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헤헷.’
지왕은 그런 리나를 보고 픽 웃었다.
‘바보. 뭐 그래서 좋긴 하지만. 훗.’
지혜는 까칠한 맛에 먹고, 샛별이는 순수한 맛에 먹고, 리나는 막 굴리는 맛에 먹는데, 좀 바보 같아야 막 굴려도 상처 받지 않고 또 삐지지도 않고 오히려 그걸 관심으로 받아들여서 맘 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웬 여자애가 지왕의 눈에 들어왔다.
‘응?’
도서관 앞에 있는 걸로 봐선 같은 학교 애가 분명해 보였는데 행동이 어딘지 이상했다. 생긴 건 샛별이처럼 착하게 생긴 스타일이었는데 하는 행동은 꼭 뭔가에 잔뜩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걱정거리가 한 가득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불안해하는 듯한 표정. 한편으론 뭔가에 쫓기는 듯한 표정 같기도 했다.
‘뭐지?’
그러다 지왕은 그 여자애랑 눈이 딱 마주쳤다.
‘응?’
여자앤 지왕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반색하며 얼른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지왕은 어리둥절해하며 대꾸했다.
“왜요?”
“그게... 네트워크 판매라고 들어보셨어요?”
“네트워크 판매요?”
“네, 그게 뭐냐 하면...”
여자애는 그러더니 막 장황하게 이런 저런 설명을 했다. 지왕은 듣다보니 여자애가 말하는 게 다단계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손사래를 치며 가 버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갤낚시 모텔의 여직원 대쥬리로부터 온 것이었다.
- 여학생에게 시간당 100만원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면서 학교 서문 쪽에 있는 큰 거울이 있는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세요.
지왕은 얼떨떨했다.
‘큰 거울이 있는 차? 뭐지?’
하지만 쥬리나 폰팔이가 이렇게 말할 땐 분명 뭔가 재밌는 일을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100%였기 때문에 지왕은 믿고 여자애에게 말했다.
“저 이러지 말고, 제가 시간당 100만원을 벌 수 있는 알바를 알고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으실래요?”
지왕의 말에 여자애는 자기가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네?”
지왕은 속으로 픽 웃었다.
‘걸렸구나~!’
그래서 얼른 다시 여자애를 꼬셨다.
“멀리 안 가도 돼요. 서문 바로 밖에 있어요.”
여자애는 얼떨떨했지만 곧 지왕의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실은 다단계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지금 엄청난 빚을 지고 있어서 한푼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뭐에 홀린 듯이 대답을 했다.
“그럼...”
지왕은 속으로 씩 웃으며 여자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생각했어요. 가요.”
그러곤 여자의 손을 잡아끌며 갔다. 여자는 얼떨결에 지왕에게 끌려갔다.
“...”
리나도 둘의 뒤를 따라갔다.
‘뭐지? 갑자기...’
가는 도중 지왕의 폰에 사진이 도착했다. 그건 쥬리가 말한 큰 거울이 달린 차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지왕은 그 차의 모양이 왠지 눈에 익었다.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차인데...’
차는 5톤 정도 크기의 탑차처럼 생겼는데 특이 한 건 짐칸 부분의 외벽이 철판이 아니라 거울 같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짐칸 안쪽은 보이지가 않았다.
‘흐음... 뭐 생각이 있겠지.’
차는 서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길 옆에 바로 보였다. 그리고 그 특이한 모양 때문에 길가는 사람들과 지왕의 학교 학생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차 옆에는 벌써 쥬리가 나와서 지왕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어. 그러고 보니 이쪽 세상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네?”
“네. 저도 오래간만이라 무척 즐겁네요.”
리나와 여자애는 얼떨떨했다.
‘이쪽 세상에서 만나는 거라니? 그게 무슨...’
지왕은 리나를 가리키며 쥬리에게 물었다.
“얘도 같이 있어도 돼? 아님 보낼까?”
그 말에 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하지만 쥬리는 리나를 보고 생긋 미소를 짓더니 지왕에게 말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같이 데리고 오세요.”
쥬리는 그러더니 외벽이 거울로 된 탑차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왕은 차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신경 쓰여 얼른 여자애와 리나를 안으로 떠밀었다.
“들어 가.”
리나와 여자애는 얼떨결에 쥬리를 따라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왕도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차 안의 모습을 본 지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러자 쥬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매직 미러 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랬다! 그 차는 다름 아닌 야동에서 많이 봤던, 안에선 밖이 다 보이지만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매직 미러’ 트럭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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