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206화
지혜와 놀이공원을 다녀오고 다음 날 아침, 지왕은 그때까지도 계속 자고 있었다. 정확히 7시가 되자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눌려지고 현관문이 열렸다. 전날 아침밥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지혜가 온 것이었다.
“아직도 자?”
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깬 지왕은 눈만 겨우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응... 피곤해...”
“어휴, 잠꾸러기. 어제 저녁은 먹었어?”
“아니...”
“밥 하는데 1시간도 안 걸릴 거야. 씻고 준비해.”
“어...”
그러나 지왕은 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쿠울...”
지혜는 지왕을 막 흔들어 깨워 씻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밥이 완성되는 시간만 늦어질 것 같아서 그냥 잔소리만 하고 부엌으로 갔다.
“어휴, 말도 안 들어.”
아침밥이지만 지왕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지왕이 제일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은 그냥 미역국이면 되겠지?”
왠지 제육볶음엔 부드럽고 입에 착 감기는 미역국이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미역은 오래 끓여야 깊은 맛이 나기 때문에 먼저 가스렌지에 앉혀놓고 이어서 밥도 전기밥솥에 앉혔다. 그리고 제육볶음을 만들기 시작하여 완성하자 밥과 미역국도 거의 준비가 다 되었다. 지왕은 그때까지도 침대에 퍼져 자고 있었다.
“음냐... 쿠울...”
“어휴, 정말. 야! 일어나!”
지혜는 그러면서 지왕의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지왕은 움찔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엇? 아이, 뭐야?”
“밥 다 됐어. 세수라도 해.”
“아이 귀찮게. 아직 밥 안 차렸잖아? 다 차려지면 말해.”
“밥 다 됐다고. 퍼 담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퍼 담고 나면 얘기하라고.”
“어휴! 정말!”
지혜는 또 그러면서 지왕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지왕은 잠결에 신경질을 냈다.
“아이씨! 알았어, 일어나면 될 거 아냐. 담부턴 오게 하나 봐라.”
“뭐? 기껏 밥해주려고 왔더니, 그게 할 소리냐?”
지혜는 서운해서 쏘아붙였지만 한편으로 살짝 쫄았다.
‘말이 너무 심했나? 기껏 점수 따놨는데...’
지금 너무 극성스럽게 굴어서 어제 호텔에서 지왕에게 결혼 약속을 받은 게 물거품이 될까 겁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표정을 바꿔 지왕의 옆에 꼭 붙어앉아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너 배고플까봐 그러지. 오랬동안 공복이면 위에도 안 좋아.”
“알았으니까 밥이나 차려.”
“응...”
지혜는 지왕의 맘이 변할까봐 얼른 식탁에 밥을 차렸다. 그리고 지왕이 제일 좋아하는 제욕볶음 냄새가 얼른 집안에 퍼지라고 막 요란하게 휘저으며 퍼담았다.
“냄새 좋지? 너 좋아하는 제육볶음했어.”
지혜의 기대대로 지왕은 신경질이 났던 게 조금 풀렸다.
“알았어.”
그러더니 화장실에 가서 대충 세수는 하고 나왔다. 그러자 지혜가 바로 수건을 대령하며 아부를 떨었다.
“그러게 이렇게 세수하니까 말끔해 보이고 좋잖아?”
지왕은 어느 새 화가 다 풀려 있었다.
“잔소리쟁이.”
“잔소리는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야. 어머니도 그러셨을 거 아냐?”
“그래서 내 엄마 되게?”
“아니~, 엄마 같은 아내.”
“난 그런 여자 필요 없어. 그냥 여우 같은 아내만 해.”
“칫.”
지왕이 식탁에 앉자 지혜는 얼른 지왕의 밥에다 제육볶음을 한 젓가락 얹어주며 눈치를 살폈다.
“먹어 봐. 아주 맛있게 만들어졌어.”
지왕은 못 이기는 척 한숟갈 먹었다. 지혜의 말대로 샛별이나 엄마가 만든 거 뺨치게 맛이 있었다. 그러나 지왕은 기왕 분위기 잡은 거 지혜의 기도 확실히 죽일 겸 일부러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뭐 샛별이가 한 거랑 비슷하네.”
지혜는 못내 섭섭해서 입을 삐죽거렸다.
“칫, 꼭 말을 해도. 그냥 맛있다고만 해주면 어디 덧나냐?”
“어, 덧나.”
“씨잉, 미워.”
“훗.”
지왕이 피식 웃자 지혜는 마음은 좀 섭섭했어도 지왕이 화가 풀렸나 싶어 내심 안도했다. 그래서 자기도 수저를 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미역국도 먹어 봐. 속이 확 풀릴 거야.”
“어.”
지왕은 속으로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내가 결혼 얘기한 거 말 바꿀까봐 아주 쩔쩔 매네? 이거 계속 이 분위기를 가는 것도 괜찮겠는걸? 후후.’
“아~, 잘 먹었다.”
“한 그릇 더 줄까?”
“아냐, 됐어. 충분해. 물 좀.”
“응. 여기.”
“땡큐.”
물을 마신 지왕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그럼 또 자볼까?”
지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야!”
“어? 또 소리 지르네?”
“아니 그게... 그래두 이건 너무 심하잖아?”
“알았어. 그냥 누워만 있을게.”
“그러다 자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훗~.”
“칫. 살 좀 빼. 그러다 오래 못 살아.”
“하긴 너보단 오래 살아야 할 텐데.”
“뭐? 너 정말...!”
“큭큭. 설거지는 나둬. 특별히 내가 해줄게.”
“됐어. 또 묵혀놨다가 하려고? 그럼 집에 냄새 배서 안 돼. 안 그래도 여름인데.”
“에어컨 틀어놔서 괜찮아.”
“어휴, 게으름뱅이. 씻기나 해.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그럼 기왕 그릇 씻는 김에 내 몸도 씻겨줘.”
지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러나 얼굴엔 배싯배싯 웃음이 번졌다. 심지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콧노래까지 불렀다. 지왕은 침대에 누운 채로 지혜가 설거지를 하면서 엉덩이까지 씰룩대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훗 역시. 고추 만지게 해준다니까 좋아하네? 단순한 녀석.’
그때 지혜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폰에 톡이 왔다.
“뭐지?”
샛별이로부터 온 것이었다.
- 점심 때 리나랑 지왕이네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언니 그때 시간 어떻게 돼요?
지혜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지금 지왕이네 집이야.”
목소리가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왕에게 단독 결혼 약속을 받은 본처’라는 착각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샛별이는 살짝 당황했다. 샛별이의 귀에도 지혜의 목소리가 뭔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샛별이 또한 지왕에게 ‘너랑만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때문인지 지혜가 지왕의 집에 말없이 혼자 가 있는 일이 처음이 아니고 자주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것처럼 불편한 감정이 저도 모르게 생겨났다. 하지만 일단 애써 티내지 않으며 대꾸했다.
“일찍부터 와 있네요? 지왕이가 불렀어요?”
“어. 어제 아침밥 해주러 온다고 약속했었거든.”
“아... 그럼 알바는...”
“오늘은 12시부터야. 언제 올 건데?”
“그럼 11시 쯤에 갈게요.”
“그래, 그렇게 해. 얼굴이라도 보게.”
“네, 그럼 지왕이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어. 그때 봐.”
“네.”
그렇게 둘은 통화를 끊었다. 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는 샛별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했다.
‘어제 같이 놀이공원 다녀오는 길에 말이 나와서 와 있게 된 걸 거야. 그래, 지왕인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언니가 있으니까 부른 거라구. 그게 아니었으면 최소한 나한테도 같이 연락을 했을 거야.’
반면 지혜는 지금 혼자 지왕과 아침밥을 먹고 함께 있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지왕에게 말했다.
“샛별이랑 리나 11시 쯤에 온대.”
“통화 다 들었어.”
“그럼 걔들 오기 전에 내가 깨끗이 씻겨줄게. 잠깐 기다려~.”
“11시 되려면 아직 시간 있잖아? 좀 있다가 할래. 소화 좀 시키고.”
“안 돼~. 그럼...”
지혜는 그러다 갑자기 쑥스러워하며 뺨을 발그레 붉혔다. 지왕은 그런 지혜의 속이 훤히 다 보였다.
“그럼 뭐? 섹스할 시간 없다고?”
지혜는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응... 헤헤.”
그러나 지왕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어제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해.”
지혜는 입이 댓발 나왔다.
“왜애? 그건 벌써 하루도 넘게 지났잖아? 잠도 푹 잤고.”
“그래도 피곤해.”
“씨잉, 설마 많이 했다고 벌써 질린 건 아니지?”
지왕은 피식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응? 그러고 보니 그런 건가?”
“뭐?! 야!”
“하하! 농담농담. 아무튼 지금은 배불러서 귀찮아. 그리고 넌 나랑 1박2일 놀다 온 거지만 난 샛별이까지 2박 4일을 놀았다고. 운전도 하고. 그리고 내일은 리나랑 워터파크도 가야돼. 그러니 좀 쉬게 해 줘. 내가 몸살 나서 한 보름 독수공방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지혜는 지왕의 말이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좀 서운했다. 그래서 입이 여전히 쑥 나온 채로 툴툴댔다.
“아니... 알았어. 그럼 그냥 샤워만 시켜줄게.”
지왕은 픽 웃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나 참, 알았어. 한번은 해줄게.”
그러자 지혜는 대번에 얼굴이 밝아져서 지왕을 쳐다봤다.
“정말? 정말이지?”
“그래!”
“야호~! 취소하면 너 고자 되라고 평생 저주할 거야!”
“그럼 그냥 고자할까? 너한테 안 시달려도 되게.”
“뭐? 안 돼!”
“그럼 저주하지 마.”
“칫. 아무튼 거짓말하면 나 울어버릴 거야.”
“난 우는 여자랑 하는 거 좋아해. 왠지 정복하는 기분이 들거든.”
“씨잉! 그럼 웃어버릴 거야!”
“음... 그건 좀 그렇네. 정신병자 같잖아?”
지혜는 그제야 좀 이긴 것 같아 기분이 풀렸다.
“흥! 무섭지?”
“아니, 그냥 기분 더러운 거지. 너 나한테 기분 더러운 여자 되고 싶어?”
지왕에게 반박을 당한 지혜는 다시 얼굴이 벌개졌다.
“씨이! 몰라! 아무튼 쫌만 기다려. 설거지 거의 다 끝났으니까!”
“네~, 네~.”
“칫.”
하지만 싱크대로 가는 지혜는 얼굴은 완전 싱글벙글이었다.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