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대행(1)
오랜만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속옷 가게 앞을 지나다 걸음이 멈췄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속옷을 보니
왠지 내가 입으면 예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나 속옷 사야 되는데.
지난 번 아버님 친구들이 다녀간 후에
내가 아끼던 속옷들이 없어졌다.
그들 중 범인이 있을 거라 심증은 가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버님이 아는 것도 창피하고,
괜히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다 없어진 속옷이 생각나면
짜증이 나고 불쾌했다.
나를 떠올리며 내 속옷을 더럽힐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 솜털까지 곤두 섰다.
마음에 드는 걸 본 김에 구입해야지 하는 찰라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기름을 잔뜩 발라 넘긴 머리가 왠지 낯이 익었다.
나 모르겠어?
전에 집에도 놀러 갔잖아.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보자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아~ 아버님 친구분.
몰라봐서 죄송해요.
제가 그 날 아버님 친구분들이라 너무 어려워 얼굴도 제대로 못 봤지 뭐에요.
어르신들 모시고 대접한게 그 때가 처음이라 정신 없고 긴장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고맙게도 날 알아봐주긴 했네.
내 외모가 여자들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기는 해.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 같지 않아?
나는 스티븐 시걸이 누군지 모르지만
영감님 처럼 생겼다면 엄청 비호감일 거 같았다.
접대 멘트로라도 호응을 해주면 좋겠지만
불쾌했던 기억이 떠올라 말을 돌렸다.
그 날 저 대신 상도 꺼내 주셨는데 기억 못하면 안 되죠.
그와 웃으며 이야기 하곤 있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술취해 잠든 내 가슴을 희롱하며 낄낄대던 그가
지금도 내 몸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 때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모르는척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데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봐.
볼이 빨개지니까 더 귀여운데.
저 속옷 입으면 잘 어울리겠다.
들어와 내가 하나 사줄게.
아니에요.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겠어요.
다음에 아버님이랑 또 놀러 오세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아버님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게 건냈다.
아버님이 내게 주는 선물인가 싶어 들뜬 마음으로 물었다.
아버님, 이게 뭐에요?
저 주시는 거에요?
저번에 우리 집에 왔던 금씨 알지?
네?
왜 있잖아. 내가 금은방 한다고 했던 동생.
금은방이요?
기억 못 하나 보네.
생각 안 나?
머리 올백하고,
목에 금목걸이 했었는데.
아. 그 분이요.
그 동생이 너 갔다주라던데.
뭔지 좀 보게 얼른 풀어봐.
내용물이 짐작이 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지금요?
왜?
내가 알면 안 되는 거라도 든 거야?
아...아니요. 저도 몰라요.
그냥, 저한테 왜 이런 걸 주셨나 의아해서요.
나는 포장을 벗겨냈고 상자 안에는 아까 내가 찜해둔 그 속옷세트가 들어 있었다.
나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사려고 했는데
마네킹이 착용하고 있던 가터벨트와 스타킹까지 모두 포함된 풀셋이었다.
그 놈도 참 엉뚱하네.
너한테 왜 이런 걸 보냈을까.
그...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지나가다 니 생각나서 하나 샀나 보지.
그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긴 해.
이거 요 아래 속옷가게 마네킹이 입고 있던 거지?
나도 이걸 보고 니가 입으면 참 잘 어울리겠다 생각했는데
그놈도 니 생각나서 하나 샀나 보다.
갖고 싶은 속옷이었지만
금목걸이 영감님이 선물했단 이유로
받고 싶지 않았다.
이걸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까봐 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돌려드려야겠어요.
제가 이런 거 받을 이유도 없고 불편해서요.
괜찮으니까 그냥 입어.
원래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받는 게 예의야.
입은 거 보고 싶으니까 어서 입어 봐.
안 맞으면 바꿔야 되잖아.
보고 싶다는 아버님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기대에 찬 그의 표정을 보니
이 속옷을 입으면 오랜만에 날 안아 줄 거 같아서였다.
전 같으면 부끄러워 방에서 입고 나왔겠지만
오늘은 아버님을 확실히 유혹하고 싶어서
그의 앞에서 천천히 갈아 입었다.
그는 쇼파에 편한 자세로 앉아 그윽한 눈빛으로 날 지켜봤다.
가터벨트까지 스타킹에 연결 한 뒤 아버님 앞으로 다가 갔다.
역시,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야.
마음에 드세요?
들다 마다.
넌 어때?
마음에 들어?
저야 뭐 아버님 마음에 들면 그만이죠.
치수도 제가 입는 거랑 같아서 몸에 딱 맞아요.
그 놈이 눈썰미가 있나봐.
어떻게 니 치수 까지 딱 맞춰서 선물했을까.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짐작이 가는 데가 있었다.
그가 내 속옷을 훔쳐갔다면 치수를 아는 건 어려운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이 훔쳐서 알려줬을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정말 눈썰미가 있으신가봐요.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아버님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내 모습을 찍었다.
이번엔 뒤로 돌아 봐. 얼굴은 여길 봐야지.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포즈를 취해줬다.
괜히 싫다고 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몇 장을 찍은 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지
한참을 휴대폰만 만지작 거렸다.
나는 뻘쭘하게 서서 그가 빨리 휴대폰을 내려 놓고 날 안아주기만 기다렸다.
이 놈, 사진 보내주니까 좋단다.
나는 깜짝 놀라 아버님의 휴대폰을 뺏었다.
카톡 화면의 내 사진 밑으로
혓바닥과 눈알이 튀어나온 이모티콘이
답글로 와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아버님에게 짜증을 냈다.
이런 사진은 혼자만 보셔야지 다른 사람한테 보내면 어떡해요.
발가 벗은 것도 아닌데 어때서 그래.
추하고 뚱뚱한 년들은 자신 없고 창피해서 그런다지만
넌 예쁘면서 뭘 그래.
왠만한 잡지에 나오는 모델보다 니가 훨씬 예쁘니까
부끄러워할 거 없어.
예쁘다는 칭찬은 기분 좋았지만
금목걸이 영감님이 내 모습을 보고 있다 생각하니
미칠 거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한테 미리 말씀 하셨어야죠.
선물 받은 거 몸에 잘 맞고 잘 어울린다고
알려주려고 보낸거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어.
너는 생긴 건 되게 서구적이고 개방적일 거 같이 생겼는데
하는 거 보면 나보다 더 늙은이 같은 거 알아.
그 때 내가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고
아버님은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 채 전화를 받았다.
그래.
사진 잘 봤다고 전화까지 한거야?
…
당연하지.
실물로 보면 더 예뻐
. …
옆에 있긴 한데 바꿔 달라고?
나는 다급하게 손사레를 쳤다.
뭐해?
얼른 받아.
선물 고맙다고 얘기 해야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건내 받은 나는 애써 목소리를 밝게하며 통화를 했다.
얼굴 보고 고맙다고 하는 것 보다 차라리 전화 통화로 끝내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생각지도 못 했는데 선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엔 딱 며느님 거던데 어때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고맙게 잘 입을게요.
고마워?
그럼요. 고맙죠.
그럼 내일 나랑 바람 쐬러 갈래?
네?
그의 갑작스런 요구에 당황스러웠다.
매일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거 아니야.
내일 내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드라이브도 시켜줄게.
아버님에게 섭섭하고 화가 나있던 나는 그를 도발해 질투심을 유발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날 안아주지 않는 그에게
내가 얼마나 인기 있고 남자들이 날 얼마나 원하는지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잠시만요.
아버님, 이 분이 내일 저랑 바람 쐬러 가자는데요.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버님이 전화기를 낚아 채
어디 남의 귀한 며느리에게 수작이냐며
화를 내는 거였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날 당황시켰다.
그래?
안 그래도 너 맨날 집에만 있는 거 보기 그랬는데 바람 쐬고 오면 좋겠네.
전화기 좀 이리 줘봐.
아버님은 전화기를 낚아 채더니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바람 쐬러 간다고?
니 놈 돈 많으니까 우리 애기 맛 난거 많이 사줘라.
경치 좋은 데 가서 드라이브도 좀 시켜 주고.
…
언제 데리러 가면 되냐고?
아버님의 반응은 오히려 나를 도발시켰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뺏은 뒤
큰 소리로 통화했다.
내일 10시 어떠세요?
괜찮으시다고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되죠?
…
아. 네.
집 앞으로 데리러 오신다구요.
그럼 시간 맞춰서 준비 하고 있을 게요.
우리 내일 재밌게 놀아요.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아버님 손에 쥐어 줬다.
아버님은 내가 화난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지
방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그 놈 진짜 돈 많으니까 벗길 수 있을 만큼 벗겨 먹어.
니가 조금만 여우짓하면 명품백 같은 건 그냥 사 줄 거야.
나는 밤 새 뒤척였다.
욱 하는 마음에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으며
아무렇지 않게 허락한 아버님이 미워서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침이 되니 마음이 좀 풀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감님에게 맛있는 거 얻어 먹고
시간 때우다 오면 되는 거라 생각하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그 영감님과 단 둘이 있어야 한다는게 불안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 영감님이 이상한 사람이면
아버님이 날 혼자 보내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늘 아침을 먹자 마자 나가시던 아버님이
금은방 영감님을 보고 간다며 집에 있었다.
혹시 아버님이 후회하고 있나 싶어 슬쩍 물어 봤다.
저 오늘 약속 취소할까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피곤하기도 하고, 준비해서 나가려니 귀찮아서요.
아버님도 저 안 나가는 게 좋지 않아요?
준비할 게 뭐 있어.
귀찮으면 비빈가 뭔가 그것만 발라.
그것만 발라도 예쁘기만 하더만.
그리고 니가 나가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말 상관 없어요?
그렇다니까.
가서 재밌게 놀다 와.
그가 다시 나를 도발했다.
나는 아버님이 질투가 나서 못 배기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엄연한 데이트인데 대충할 수 있나요.
같이 다니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야죠.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빨리 준비해야겠다.
잠을 못자 피곤했지만 샤워를 하고,
평소보다 과할 정도로 색기 넘치게 화장을 한 뒤
아버님 앞을 슬쩍 지나갔다.
아버님은 날 보더니 질투는 커녕 이렇게 말했다.
이야~ 금가 놈이 좋아하겠다.
기왕이면 그놈이 사준 속옷 입고 가라.
지가 사준 거 입고 왔다 그러면 좋아할 거야.
안 그래도 그럴려구요.
아버님이 얄미워 미칠 거 같았다.
나는 선물 받은 속옷을 입고 다시 아버님에게 갔다.
자, 입었어요.
날씨가 더워서 스타킹이란 가터 벨트는 뺏는데 그래도 예쁘죠?
그래. 예쁘네.
가서 그 놈 한테 입고 왔다고 꼭 말해.
보여달라면 슬쩍 보여줘도 좋고.
다른 남자에게 속옷을 보여주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건가.
그러려면, 치마 입어야겠네요.
짧고 팔랑거리는 걸로요.
위에는 가슴이 좀 파인 게 좋겠죠?
나는 라운드가 깊게 파인 쫄티와 짧은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그 앞에 다시 섰다.
대충 입어 봤는데 어떠세요?
아버님이 오케이 하면 지금 그대로 나갈게요.
나는 그가 너무 과하다고 말해주길 바라며 그렇게 입었다.
솔직히 치마가 짧은 것도 문제였지만 쫄티가 더 심각했다.
착 달라 붙어 가슴 윤곽이 적나라한 것도 모자라
라운드가 깊게 파여 가슴골이 심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건 대 놓고 남자를 꼬실 때나 입는 옷 이었다.
이야~ 대단한데.
여지껏 본 것 중 제일 화끈하다.
선물이 좋긴 좋구나.
너 나한테도 이런 모습 보여준 적 없잖아.
오늘 금가 놈 입 찢어지겠다.
입이 귀에 걸려서 명품백은 기본이고 옷도 몇 벌 사주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렇게 입어요?
아님 갈아 입어요?
입어.
다른 사람은 그렇게 입고 싶어도 못 입어.
너니까 입을 수 있는 거야.
호통을 원했는데 칭찬을 들으니 참 난감했다.
다른 것도 입어 볼까요?
그래도 이 옷은 아니지 싶어 나름 꾀를 내려는데
아버님의 전화가 울렸다.
뭐야. 벌써 온 거야?
아직 시간 안 됐잖아.
… 준비?
준비는 다 했지.
신발만 신고 나가면 돼.
… 알았어 금방 내려 보낼게.
아버님이 전화를 끊자 나는 다급해졌다.
벌써 오신거에요?
저 아직 준비 못 했는데.
옷도 다 입었고 가방만 챙겨서 나가면 되잖아.
금가 녀석, 너랑 빨리 놀러가고 싶어서 안달이다.
어른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다.
빨리 가방 챙겨.
그럼 다른 옷 딱 한 번만 입어 볼게요.
그럴 필요없어.
지금 너무 완벽하고,
어차피 금가 놈이 새 옷 몇 벌 사줄 거니까 그 때 갈아 입어도 된다.
내가 금가 놈 한테 은근슬쩍 언질을 줄게.
결국 난 그 모습 그대로 영감님 앞에 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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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은 운전을 하면서 틈만나면 내 몸을 훔쳐 봤다.
정말이야?
형님 말이 맞아?
정말로 나 만나러 가려고 직접 골라 입은 거야?
벌써 몇 번 째 묻는 건지 모르겠다.
네.
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예쁘게 보이면 좋죠.
바쁘신데 저 때문에 시간 내주셨잖아요.
나 하나도 안 바뻐.
가게는 직원들이 보거든.
나는 저녁 때 가서 정산만 하면 되고.
그래도 사업하시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하셔도 신경 많이 쓰시는 거 알아요.
하긴 내가 조금만 소홀히 해도 매출이 개판 되거든.
사업이 장난인가?
하하
그렇게 불편하고 싫은 남자 앞에서
나도 모르게 여우짓 하고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이것도
여자의 본능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분 좋게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고
강을 따라 드라이브를 한 뒤
쇼핑을 하기로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버님이 뭐라고 했는지 꼭 옷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옆에서 힐끔거리는게 불편했지만
오랜만에 하는 드라이브라 그런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우리 집에 온 후로
남편과 데이트 한 기억이 없었다.
남편이 바빠진 것도 이유지만 나 역시 남편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
전에는 남편이 바쁘면 내가 회사로 찾아가 같이 저녁이라도 먹었었는데.
나는 어쩌다 아버님 또래의 남자와 자유로를 달리고 있는 걸까.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또래 남자와 바람피는 건 아니니까
하며 핑계를 대본다.
오늘은 그냥 아버님 친구분이 드라이브 시켜주시는 것 뿐이야.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게 없는데 뭐가 걱정이람.
오랜만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니 잡다한 생각들이 같이 흘러갔다.
파주에 있는 모 백화점 프리미엄 아울렛에 도착했다.
영감님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더니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운전하는 동안에도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한테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말이지 부탁할 게 있어서야.
무슨 부탁이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별거 아니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어려울 수도 있는 건데...
괜찮으니까 말씀해 보세요.
뭔지 들어 봐야 제가 할 수 있을지 알 거 같은데요.
좀 민망한 부탁이라 말 꺼내기가 쉽지 않네.
민망한 부탁이란게 뭘까.
쉽게 말 못하는 걸 보면 일반적인 부탁이 아닌 거 같은데.
설마 여기서 속옷을 보여달라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게 맞다면 어떡해야 하지.
주위를 둘러 보니 저 멀리 주차요원 하나가 보일 뿐
주변에는 주차된 차들뿐이었다.
내가 왜 주위를 살피는걸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건지
아님 누가 올까봐 걱정되서인지
나조차 헤깔렸다.
범법행위 같은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런거.
에잇, 모르겠다.
실은, 내가 친구 놈과 내기를 했거든.
내기요?
그래 내기.
친구 놈이 자기보다 스무 살 어린 여자랑 만난다고 자랑을 하는거야.
근데 이 놈이 나보다 잘난 게 손톱 만큼도 없는 놈이거든.
어찌나 뻐기던지 벨이 꼬여서 못 봐주겠는거 있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
나는 서른 살도 넘게 어린 여자랑 사귄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 놈이 뻥치지 말라면서 진짜면 자기 눈 앞에 데려 오라는 거 있지.
진짜로 데려오면 자기가 나한테 백만원을 주고,
못 데려 오면 내가 백만원을 주라는 거야.
내가 돈 백만원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이건 사나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
그래서 말인데.
저더러 애인인척 해달란 말씀인거죠?
그렇지.
나이살 먹고 주책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만 내 애인인 척 해주면 안 될까?
나는 음침한 이 곳에서 추행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겨우 애인인척 해달라는 말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뜸을 드렸나 싶었다.
그래요.
해드릴게요.
별로 어려울 거 같진 않은데요.
약속하는거지?
절대 딴 소리 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요.
딴 소리 안 할게요.
좋았어.
그럼 일단 호칭부터 정하자고.
날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글쎄요.
어떻게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많이 민망하겠지만 오빠라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영감님을 오빠라고 부르라니 생각만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
오빠요?
너무 버릇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버릇없어 보이고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야.
원래 연애하면 그러지않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사자들끼리만 좋으면 되는 거잖아.
그건 진짜 서로 좋아할 때 얘기지
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겨우 내려갔다.
그래서 정말 오빠라고 부르라구요?
민망해서 그런가 본데 혹시 이 동네에 아는 사람 있어?
아니요. 없어요.
그럼 됐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고 또 볼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진짜도 아니고 어차피 다 연기하는 건데
기왕이면 내가 듣고 싶은 걸로 해줘.
다른 사람 앞에서 오빠라고 해주면 내가 샤넬가방 사줄게.
그것도 제일 신상으로다.
알았어요. 해드릴게요.
가방 때문에 해 준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동네니
잠깐 창피하고 말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고
빨리 음침한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밀폐된 차 안에 영감님과 있는 것이 날 자꾸불안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는 애인이 되는 거야.
네?
이따 친구분 만났을 때만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부터 연습해 놔야 이따가 더 자연스러울 수 있지.
아니요.
그냥 그 때 해도 잘 할 수 있어요.
오빠라고 불러봐.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겨우 입을 떼었다.
오빠~
막상 직접 불러 보니 온 몸이 오글거렸다.
그게 뭐야?
억지로 하는 거 같고 영혼이 없잖아.
이러니까 연습이 필요하다는 거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큰 얼굴을 내 얼굴에 바짝 붙이며 말을 이었다.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거 알아.
어려운 일 해주는 대신 오늘 여기서 뇌물 팍팍 쏠게.
갖고 싶은 거 마음대로 골라.
대신 쇼핑하는 동안 계속 오빠라고 불러.
그리고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 알지?
자연스럽게 잘 부탁해. 알았지?
아, 알았어요.
앞으로 있을 부담보다
그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지금이
더 큰 부담으로 느껴졌다.
나는 얼른 승낙을 했고 그제서야 주차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