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7)

<프레데리카는 너를 원해 1-2권(완결합본)>

<-- 1. 전쟁이 끝났다 -->

                                                            

용사 비올렌 코카네스의 오래된 친구이며, 대(對)마왕군의 두뇌라고 불리는 현자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마왕의 손에 들어간 건,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다들 제 눈앞으로 달려드는 마수를 물리치기 위해, 그리하여 용사 비올렌이 마왕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피가 흐르고 살점이 터지는 전장 한복판에,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일이 없던 프레데리카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녀의 손에는 검도 없었다. 옷도 평소 군영에서 입고 있던 가벼운 차림 그대로였다. 검과 활, 창이 난무하는 그 수라장을 맨몸으로 걸으면서도 프레데리카는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마왕만을 향한 채였다.

적의 책사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왕 또한 프레데리카를 향한 채 서 있었다.

순간 어떤 조화가 있던 걸까. 프레데리카는 나풀나풀 한 마리 나비처럼 마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껏 본 적 없던 황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마왕이 흡족한 듯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신호라도 된 양 마수들이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어들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현자님이 위험해!”

“막아! 막으라고!”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 방향으로 향했다.

마수들이 곧장 프레데리카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부러트릴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오히려 그것들은 인간의 책사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주변을 감쌌다. 이어 프레데리카를 구하러 달려오는 병사들을 물어 뜯어댔다.

죽어 나자빠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프레데리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몸 주변에 어른대는 어두운 기운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현혹 마법이다!”

“현자님이, 현혹에 걸린 거야?”

“말도 안 돼……!”

그것을 목격한 비올렌은 주저 없이 곧장 프레데리카를 향해 뛰었다.

마왕의 수하들이 날카로운 이와 칼날 같은 손톱을 세우고 저희들의 가장 강대한 적의 목덜미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을 검으로 후려치듯 베어내며 비올렌은 뛰어나갔다. 그를 붙잡는 사람들의 비명이 등에 달라붙었지만, 비올렌은 막무가내였다.

가쁜 숨 사이로 어렵게 제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프레데리카!”

그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돌아보고 답하는 프레데리카였다. 하지만 비올렌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뒤통수뿐이었다.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저 멀리에 선 커다란 형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프레데리카를 소리높여 부른 비올렌은 이를 바득 갈았다.

‘홀린 사람처럼’이 아니지.

그는 프레데리카가 진짜로 마왕에게 홀렸음을 깨달았다. 마왕의 현혹 마법은 이토록 위험했다. 그는 새삼 어제 저녁, 프레데리카가 은밀히 자신을 찾아와서 건넸던 말을 되새겼다.

‘레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나를 믿어.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야 해.’

배신.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현혹에 걸려 저렇게나 거침없이 그의 곁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비올렌은 그녀가 배신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의 현자였다. 용사의 길을 열어주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프레데리카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적에게 가고 있었다.

너를 이렇게 마왕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비올렌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든 마법을 풀고 프레데리카를 되찾아야 했다. 프레데리카가 서 있을 자리는, 마왕의 옆이 아니라 용사 비올렌의 옆이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한편 다른 이들도 이 사태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대로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손에 들어가면 곤란했다. 전력상으로도,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심각한 일이었다.

이 초유의 사태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에 어떤 자들이 현자를 마왕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프레데리카의 등에 대고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비올렌이 쏘지 말라고 악을 썼지만 그건 그들의 귀까지 들리지도 않았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김없이 가녀린 등을 향해 쏘아져 갔다. 화살촉이 거의 프레데리카의 등에 닿을 것처럼 보이던 순간이었다.

저편에서 마왕이 손짓하자, 프레데리카의 등 뒤로 보랏빛의 마법이 펼쳐졌다. 마법에 부딪힌 화살들이 파스스 재가 되어 사라졌다. 프레데리카는 마왕의 보호 아래에 안전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정말로 현자가, 저대로 마왕에게 넘어가고 마는 건가.

각다귀 떼처럼 달려드는 마수들 때문에 비올렌은 더 이상 프레데리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검을 휘두르며 그는 연신 프레데리카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지, 그녀는 도통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부름만으로도 금방 비올렌을 알아채던 그녀였는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항상 비올렌만 바라보던 프레데리카였는데.

비올렌은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거의 마왕의 앞에 도달한 프레데리카가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비올렌은 분명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아니, 느낀 게 아니었다. 분명 프레데리카는 비올렌을 보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변한 그녀의 눈은 여전히 비올렌에게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목소리가 닿길 바라며 비올렌이 목이 터지라고 소리쳤다.

“프레데리카, 안 돼! 돌아와!”

피를 토하는 듯한 친구의 부름에도 프레데리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그녀가 마왕에게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마왕과 마주했다.

프레데리카가 꼬마 아이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마왕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 얼굴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나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 건,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한 프레데리카가, 손을 뻗어 마왕의 가슴에 손을 댔다. 차갑고 단단한 바위 같은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린 프레데리카가 그를 향해 무어라 속삭였다.

그 말이 무언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유일한 청자인 마왕만은 그것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마왕이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의 커다랗고 칠흑 같은 망토가, 조그마한 여자를 순식간에 감싸 안았다.

순간 보랏빛 연기가 된 마왕이 프레데리카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수들도 마왕이 사라지자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비올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현자를 잃은 두려움으로 마수의 뒤를 쫓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비올렌만 악을 쓰며 마수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곧 그를 뒤쫓아 온 동료들의 제지에 막히고 말았다.

“정신 차려, 비올렌!”

“프레데리카, 프레데리카가!”

“되찾을 방법은 후방에 가서 생각하라고. 여기에서 네가 쫓아가 봐야 무슨 수가 있어! 네가 이러면 다른 이들이 모두 동요한다고!”

그의 멱살을 잡고 냉정하게 생각하라며 성기사 레지어스가 무섭게 을러댔다.

레지어스 역시 프레데리카를 향해 돌진하면서 마수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였다. 순백의 성기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검붉고 끈끈한 것들에 잔뜩 뒤덮인 모습이 악귀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손을 뿌리치며, 비올렌은 되려 성을 냈다.

“알 게 뭐야! 프레데리카가 마왕에게 끌려갔는데!”

“비올렌, 이러지 말아요, 제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마법사 아르칸드가 그의 손목을 잡고 늘어졌다.

프레데리카가 마왕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부터 후방에 있던 아르칸드는 미친 듯이 현혹을 해제하기 위해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마왕의 현혹을 풀어내지 못했다. 그에게 대마법사의 칭호가 있음에도, 아르칸드 또한 이 상황에 무력하기만 했다. 오히려 마나를 바닥까지 닥닥 긁어 사용한 탓에, 얼굴이 희게 질려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더 날뛸 것만 같던 비올렌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창백해진 아르칸드를 보고는 그제야 멈춰섰다.

그는 거칠게 마법사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신의 검을 땅에 내던졌다.

“으아아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올렌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프레데리카는 돌아올 것이다. 비올렌은 알았다. 지난 날에 한 약속이 그저 해본 말일 리가 없다. 프레데리카는 단 한 차례도, 허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대로 정말 마왕의 곁에 영원히 머무를 리가 없었다.

그는 프레데리카를 믿었다.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굳게 믿으면서도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왕에게 무방비하게 스스로를 노출 시킨 프레데리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저 눈에 보이는 사실은 이것뿐이었다. 프레데리카는 마왕의 손에 넘어갔다. 아니, 그녀가 직접 마왕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흉측한 두 개의 뿔이 달린, 마왕의 품에 안겼다.

가슴 한편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손이 차가워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프레데리카가 “뭐해, 왜 바보 같이 그러고 있어?” 하며 나타나 그의 등을 철썩 내려칠 것만 같았다.

‘나를 믿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너를 믿어, 프레데리카. 비올렌은 목 놓아 울었다.

다만 친구를 잃은 슬픔도 아니었다. 현자를 잃은 아쉬움도 아니었다. 비올렌의 슬픔은, 그런 것들과 결을 달리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하필 비올렌은 어리석게도 이 순간에, 제 마음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건 비올렌만이 아니었다. 성기사 레지어스도, 마법사 아르칸드도 그녀의 빈 자리를 느끼는 순간 자신들의 가슴에 커다란 공백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한순간도 프레데리카가 그들의 가슴 속에서 ‘그런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왜 이런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건지.

프레데리카가 건넨 말 한마디와 웃음 한 조각이 자꾸만 그들의 가슴 속에서 덜그덕댔다. 인간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쏟아붓던 그 작은 사람이, 현자나 책사가 아니라 어느새 한 여인으로서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라고 슬퍼했다.

마왕과 사라져 버린 프레데리카를 당장 되찾을 길은 만무했다.

그대로 퇴각한 인간 연합군은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마왕과의 싸움을 지속해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를 두고 피 터지게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마왕과 그 수하들은 인간을 괴멸시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게 분명했다. 몸을 사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지만,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전력을 상대하려면 프레데리카의 머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부는 그녀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사살할 것을 주장했지만, 비올렌이 격하게 반대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따로 언질한 것이 있다며, 이는 반드시 무슨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레데리카를 적으로 돌리는 자는 자신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으르렁댔다.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레지어스나 아르칸드 역시 비올렌의 말에 동조하는 듯했다.

그들이 말을 다투는 사이, 놀랍게도 마왕군은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 고요함을 불안해했다.

마계와의 전쟁 8년 차, 인간 연합군의 모사인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마왕의 현혹 마법에 걸려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장 한복판에 선 마왕의 옆이었다.

프레데리카의 능력이 인간의 목숨을 향하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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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마족이 싸우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마계에는 마족들이 모여 살고, 인간계에는 인간이 모여 살았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맞닿았지만 닿지 않았다. 인간과 마족이 서로의 세계로 넘어가려면 일정한 통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세계에 단 세 곳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항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괴상하게 생긴 마족을 두려워했다. 마족이란 호칭도 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간은 그들을 적대하면서도 직접 상대하기는 버거웠기에 마족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한편 마족은 연약한 인간을 우습게 여겼다. 인간의 두려움은 그들을 고양시켰지만, 그것이 마족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니었다. 딱히 인간을 괴롭혀 얻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을 이어갔다.

두 존재는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며 눈을 돌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둘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한 건, ‘마족은 신의 뜻을 거스른 존재들’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가진 어느 종교 때문이었다. 그 종교는 신이 미워해 이 세상에서 쫓겨나 괴물의 형태로 살고 있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던 그 종교는, 인간계에 기근과 홍수가 번갈아 나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약해진 틈에 성장했다. 시간이 지나자 신전이 곳곳에 세워졌고, 아예 그 종교를 온 나라가 믿는 곳도 생길 정도였다.

어느새 신전은 민중만이 아니라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그들은 슬슬 마족들을 물리치고 신의 뜻을 온 세상에 고루 퍼트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족에 대한 두려움은 오래되었고 또 워낙 큰지라 어느 나라도 쉬이 신전의 주장에 동참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신탁’이 내려오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신탁을 받은 건 어느 평범한 여자 신관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예배를 보기 직전 제단을 닦던 중 갑자기 처음 듣는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이 신이라 주장하며, 그의 뜻에 따라 마족을 몰살시키라 명했다. 신탁을 전한 신관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는, 다시 눈 뜨지 못했다.

신탁이 내린 걸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신전에 관계된 이들만이 아니라 예배를 보러 온 보통 사람들까지 신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의 음성을 들었다.

마족을 몰살하라는 신의 명령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인간들은 각자 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힘을 합하기로 했다. 각 나라의 왕들은 군대를 차출해 연합군에 보냈고, 신전도 성기사단을 내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이 내린 무기를 들고 한 남자가 전장에 나타났다. 그는 곁에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를 대동한 채로 마족들을 수수깡처럼 베어 넘겼다. 그가 앞장선 전투에서 인간은 지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이 내린 용사라 불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비올렌 코카네스. 누구도 모르는 코카네스라는 작은 영지의 반쯤 몰락해가는 백작의 아들이었다. 그는 신을 만났고, 그 신이 내려준 검으로 마족을 물리치라는 명을 받았다 했다.

놀랍게도 그 검에는 신성한 힘이 있어서 검에 닿은 마족은 살이 썩어들어가고 잿가루로 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힘과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비올렌의 힘만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가 함께 대동한 작은 여자 또한,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프레데리카 르데트. 그녀는 약간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 외에는 전투와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전장에 서기만 해도 곧 죽을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진짜 능력은 다른 것이었다.

그녀가 세우는 전략은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프레데리카가 지시하는 대로 군을 움직이면, 그들은 반드시 이겼다.

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신이 마족을 멸하기 위해 우리에게 보낸 신의 사도라며 그들을 떠받들었다.

거기에 무궁무진한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 레지어스 오르히넨과, 불세출의 대마법사 아르칸드 호브까지.

그 네 사람이 대(對)마왕군의 핵심이었다.

네 사람이 군의 핵심이 되면서부터 그들은 그 능력만큼이나 끈끈한 유대관계를 만들어갔다. 그들은 신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졌다. 그것을 못마땅해하는 왕과 귀족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네 사람을 쳐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없으면, 인간은 단숨에 마왕의 발 아래 짓밟힐 게 뻔했다.

급작스럽게 시작된 전쟁은 8년에 접어들어 갔다. 전선이 길게 퍼지지 않고, 후방까지 넘어오는 법이 없었지만 긴 전쟁은 모두를 지치게 했고 자원을 고갈시켰다. 하지만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고 믿으며, 누구도 전선을 이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네 영웅이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에 놀랍게도 군의 두뇌인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모든 인간군이 패닉에 빠지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마왕은 지난 밤에 자신에게 날아들었던 마법 나비를 떠올렸다.

붉은 빛을 띤 그 조그마한 전령은 전장을 가로질러 날아와 카이온의 손등에 안착했다.

[프레데리카 르데트입니다. 지금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용만 들어보면, 어디 산책이라도 가자는 듯한 말투였다. 카이온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나비를 손아귀에 쥐어 부숴버렸다. 나비는 부서지는 소리도 없이 분홍빛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고는 마치 마왕에게 따라오라는 듯, 어디론가 흘러나갔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함정인가. 카이온은 적의 책사가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저 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카이온의 발은 그 꽃 같은 연기를 따르고 있었다.

시체와 피가 어둠 속에 모조리 감추어진 전장의 한복판에 다다른 카이온은, 그곳에서 단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발견했다. 새까만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던 그자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면 잠깐 눈길이 머물 법한,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담담한 표정으로 마왕을 맞이했다.

‘마왕 카이온, 나와줘서 고마워요.’

‘무슨 속셈으로 불러낸 건지 모르겠지만…….’

‘부탁이 있어요.’

마왕의 말허리를 잘라낸 프레데리카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에게 부탁했다.

‘내게 현혹 마법을 걸어줘요.’

‘뭐?’

카이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자신의 대적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현혹 마법이라니. 그 말인 즉, 인간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가 마왕군으로 투항하겠다는 뜻 아닌가?

어이없는 제안에 카이온은 이를 드러내며 코웃음 쳤다.

‘당신이 저들을 모조리 부숴버릴 수 있게 해 줄게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려고 나를 불렀나?’

‘왜요? 당신에게는 나쁠 것 하나도 없는 제안 아닌가요?’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고?’

‘그러니 현혹 마법을 걸어서 당신을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어줘요.’

순식간에 마왕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금세 프레데리카의 코앞에 나타났다. 커다란 손이 가녀린 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흑,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프레데리카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냉랭한 얼굴이 된 카이온이 그런 프레데리카를 비웃었다.

‘내게 장난치지 마라, 인간.’

‘장난…… 아닌데…….’

‘어디에 뭘 숨겨두고 이딴 소릴 지껄이지?’

‘지금이, 이라도…… 걸면 되, 잖아요…… 마법, 크윽.’

제 목을 조르는 마왕의 손목을 바르작대며 붙들고서도, 프레데리카는 제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이온은 감각을 넓게 해서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놀랍게도 정말 프레데리카 외에 어떤 인간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살짝 손을 느슨하게 하고는 프레데리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프레데리카는 시뻘게진 얼굴에 어렵게 미소를 띠며 또다시 조잘댔다.

‘어서, 지금 해버려.’

‘대체 뭐 하는 작자인지.’

‘그게 뭐가, 중요해?’

그녀의 말대로였다. 프레데리카가 제 손에 들어온다면, 이 지긋지긋한 인간과의 전쟁도 금세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진정 그렇다면.’

‘흐으…….’

‘나를 거부하지 않겠지.’

마왕의 손이 프레데리카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억지로 목을 꺾어 제 편한 대로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돌린 카이온은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 덮쳤다. 미지근하다 못해 차가운 마왕의 입술이 닿자, 이것까진 예상치 못했던 때문인지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얼굴이 재미있으면서도 기분이 묘하게 나빠서 카이온은 꼭 다문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프레데리카는 순순히 입을 열지 않았다.

‘입 벌려.’

그의 명령하자 그제야 프레데리카는 제 입을 열어 마왕을 맞이했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난폭한 입맞춤에 목을 조이는 손이 고통스러웠다. 마왕의 혀가 프레데리카의 혀를 억지로 얽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숨이 막히는지 몸을 뒤틀고 마왕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하지만 마왕은 오히려 웃기다는 듯 코를 울리며 웃었다.

잠시 두 입술이 떨어진 틈에 프레데리카는 온 힘을 다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카이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완전히 밀착하고 그 숨결을 사납게 탐했다. 호흡곤란으로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흐려져 갔다. 고통에 눈가에 맺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카이온의 가슴을 때리던 손도 점차 기운이 빠져나갔다.

재미있네, 재미있어. 카이온은 바르작대다 점점 사그라져 가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술을 떼고 숨쉬기를 허락했다. 아직도 목이 조여 완전히 숨을 쉴 순 없었지만, 소중한 공기가 다시 폐로 흘러 들어갔다. 프레데리카는 힉힉 대며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나를 보아라.’

꽤 괴롭혔다 생각했건만, 눈물에 젖어 얼룩진 프레데리카의 눈에는 반항적인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통이 어른대는 눈에서는 놀랍게도 분노 대신에 기대감이 느껴졌다.

카이온은 이 세계에 존재한 이후로 처음 인간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뱃속이 짜르르했다.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발기고 이 자리에서 취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마족을 모조리 멸살하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우는 듯 보이던 인간의 현자가, 지금은 그의 권속이 되고 싶다고 조른다.

‘네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카이온의 마법이 프레데리카를 지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지로 반짝이던 눈이 몽롱해지더니, 곧 탁한 보랏빛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감 넘치던 얼굴은 조금 맹하니 얼이 빠진 듯 보였다.

‘프레데리카 르데트.’

‘네, 나의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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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완벽하게 걸렸음을 카이온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금세 얼 빠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왕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당장이라도 그의 발에 입 맞출 기세였다.

그 얼굴이 귀여웠다. 카이온은 허리를 굽혀 프레데리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애완견이라도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것이 기쁜지 프레데리카는 눈을 감고 그 손길을 음미했다.

‘너는 다시 인간들에게로 돌아갔다가, 내일 전투가 치러지는 중간에 나를 찾아오라.’

‘분부대로, 나의 주인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하도록.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프레데리카는 땅에 박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와 같은 걸음걸이로 인간의 군영을 향해 걸어갔다.

너무나도 쉽게 적의 핵심 인물을 손에 넣은 카이온은 어쩐지 허탈해졌다. 그의 명에 따라 멀어져가는 프레데리카를 보다가, 그는 등을 돌려 제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음날 전투가 벌어지던 백중에 프레데리카는 그 붉은 나비처럼 가볍게 마왕의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마왕의 품에 안겨 전장을 떠난 프레데리카가 다시 눈을 뜬 건, 오로지 회색조로 이루어진 커다란 방이었다. 커다랗고 조금 미지근한 체온을 가진 마왕의 가슴에 볼을 기댄 기억이 끝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을 내려다보던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들어 높은 단 위에 앉은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맞은 순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기쁨에 활짝 웃고 말았다. 프레데리카가 어제 보았던, 그녀의 주인이라 부른 마왕이 그 자리에 있었다.

소녀처럼 보이는 얼굴을 환히 빛내며 웃는 인간의 현자 때문에, 마왕 카이온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근 8년여를 이어온 이 개싸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저 여자였다. 프레데리카의 기재는 마왕군의 큰 골칫거리였다. 어떻게든 죽여보려 시도한 게 수십, 아니 수백 차례였다. 하지만 번번이 그 옆을 지키는 충실한 세 개새끼들-비올렌, 레지어스, 아르칸드-의 손에 저지되곤 했다.

그랬는데 놀랍게도 프레데리카가 제 발로 순순히, 마왕의 손에 들어왔다. 이게 진짜 일어난 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프레데리카는 깊이 머리를 조아려 다시 인사를 올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순진한 낯에는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디부터 시작할까요, 주인님?”

“무엇을?”

“저기, 당신께 대적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야 하지 않겠어요?”

조금 전까지 제가 지키고 있던 이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마왕은 그것이 흡족해서 크게 웃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그 다음날부터 마왕의 군대는 인간을 파죽지세로 몰아쳤다. 인간이 아무리 온 힘을 다해 저항해 보아도, 도무지 마족의 기세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프레데리카가 선봉에 선 마왕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인간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전장을 이탈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등을 보인 인간은 모조리 마족의 손에 죽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비올렌은 싸울 힘도, 의지도 잃은 듯 보였다. 레지어스와 아르칸드가 힘을 내어 보았지만, 그들 역시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전의를 잃었다.

인간은 이대로, 몰살당할 것만 같았다.

연합군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밀리고 밀려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지점 즈음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여기에서 무너지면 정말로 모두 죽는다는 의식을 공유했을 때, 비올렌도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왕을 격퇴해서 프레데리카를 되찾아오겠다 맹세했다. 그에 레지어스와 아르칸드도 호응했다.

마지막 결전의 날이 밝았다. 광활한 평야에 인간의 군대와 마왕의 군대가 마주했다. 마족들의 기세는 흉흉했고 당장이라도 인간 모두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인간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는 듯 얼굴에 결연함이 넘쳐 흘렀다.

비올렌은 저 멀리에 보이는 마왕과, 그 옆에 선 자신의 친우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는 프레데리카를 잘 알았다. 서른이 넘은 그가 열 살 남짓부터 알아온 프레데리카였다. 가장 깊은 속내를 나누었고, 슬픈 순간과 기쁜 순간을 모조리 함께했다. 그녀는 비올렌이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순수했으며 강인하고 정의로웠다.

이 고통스럽지만 의로운 전쟁에 비올렌이 참전하기를 응원한 것도 프레데리카였다.

코카네스 영지를 떠나기 전날 밤, 신전에 홀로 앉아 기도를 올리는 비올렌을 찾아온 프레데리카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었다. 비올렌의 손에 제 이마를 대고 경건히 기도하듯, 프레데리카는 속삭였다.

‘네가 그곳에 간다면, 나는 언제나 함께 할 거야. 네가 승리하도록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울 거야.’

이 작은 영지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 불리던 프레데리카였다. 은근하게 퍼진 소문에 프레데리카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이도, 자신의 영지나, 나라로 데려가려는 이도 수없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현자라 불렀지만, 프레데리카는 그 호칭을 거절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는 네 친구인 프레데리카 르데트인 쪽이 더 좋은걸.’이라고 했었다.

비올렌은 그녀에게 인간이 승리하고 나면 꼭 같이 영지로 돌아가 자신이 숨겨둔 오래 묵은 좋은 술을 함께 마시자고 약속했다. 프레데리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가 마왕에게 현혹당하여 인간을 죽이고 있었다. 비록 마법에 걸렸을지언정 사실을 알게 되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그녀의 마법을 풀고, 꽉 끌어안아 주리라.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니라, 저 사악한 마왕의 잘못이라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속삭일 테다. 비올렌은 이를 갈며 검을 바투 쥐었다.

양 진영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뛰쳐나왔다. 양쪽에서 마법이 터져 나오고, 곧 대지에 피가 넘쳐 흘렀다. 사람도, 마족도 생명이 사라진 눈을 부릅뜬 채 땅에 쓰러졌다.

카이온의 옆에 선 프레데리카는 생각했다. 이런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건 더 많은 생명이 사라지길 원하는 거겠지.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마족들이 움직일 때마다, 또 마법이 꽂힐 때마다 인간에는 더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그녀는 인간 연합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조리 아는 듯 보였다. 카이온은 이 전투가 매우 흡족했다.

하지만 낙엽처럼 스러져가는 인간과 마족을 제치고 비올렌은 충실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흰 갑옷이 붉게 물든 레지어스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콩알만 하게 보이던 마왕의 모습은 어느새 눈코입이 식별 가능한 정도가 되어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그들의 모습은 마왕 못지않게 악귀처럼 보였다.

“프레데리카!”

비올렌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으라는 듯 노호성을 내질렀다. 프레데리카의 눈이 잠시 그를 향했다가, 다시 카이온에게로 돌아갔다.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이름을 부른 자의 얼굴을 잠시 보았다가 바람 새는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맥박이 요동치는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맑게 웃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지금은 모르는 편이 낫겠지. 마왕은 만족스러움에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온은 이 전투가 모두 끝나 인간이 더 이상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되었을 때 이 맹랑한 여자에게 걸린 마법도 풀어줘야겠다 마음먹었다. 제 손으로 몰살시킨 인간을 보면 과연 이 조그마한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게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다며 웃을까, 아니면 그녀가 상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울부짖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쓸모를 다 하면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가느다란 목을 제 손으로 비틀어버릴 작정이었다.

그의 이가 팔목을 꽤 세게 물었지만, 프레데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여전히 얌전히 웃고만 있었다.

“네가 생각한 대로 전황이 돌아가고 있나?”

“네, 주인님. 물론입니다.”

프레데리카가 공손히 대꾸하는 걸 보고 카이온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살짝 고개 숙여 보인 그녀는 저 멀리에서 제 이름을 외치는 비올렌을 흘끔 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마치 자신은 모르는 이인 양.

싸움은 결판이 나는 듯 보였다. 인간의 군대는 3분의 2가 쓰러졌다. 실상 비올렌과 레지어스, 아르칸드가 멱살 잡고 억지로 끌고 가는 중이었다. 마왕의 수하들도 많은 수가 쓰러졌지만, 인간에 비하자면 양호한 수준이었다.

문득 카이온은 비올렌과 레지어스가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고 느꼈다. 달음박질을 치면 금방 제 코앞까지 다다를 위치에서 비올렌과 레지어스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프레데리카가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아르칸드가 부린 마법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이 두 사람의 숨통을 트여주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듯 보였다.

인간의 수는 둘, 달려드는 마족은 기백이었다.

“저들이 죽는 건 시간문제겠군.”

카이온은 만족스러움에 목을 울렸다.

“그러게요.”

그의 뒤에서 프레데리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친구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라 이르기 위해 카이온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마왕과 프레데리카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청명한 청록색이었다.

신록을 닮은 그 눈을 알아챈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고통이 엄습했다. 어느새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품에 폭 파묻혀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인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저 사람들은 죽으면 곤란해서요.”

“너……!”

카이온이 우악스럽게 프레데리카를 밀쳐내자, 그녀는 헝겊 인형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이온은 고통이 몰려오는 심장을 움켜쥔 채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벌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작은 단검이 꽂혀 있었다. 카이온이 그것을 뽑으려 손을 댔지만, 사나운 불꽃이 튀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카이온은 꺽꺽대며 헐떡이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기운이 그 검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노에 휩싸여 프레데리카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향해 꽃처럼 웃던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마치 차가운 돌덩어리처럼 보였다. 마왕을 쳐다보는 프레데리카는 입 모양만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놀랐어요?’

마치 이 상황이 장난이라는 것처럼. 카이온은 들끓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프레데리카를 죽이려 달려들고자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몸을 일으켜 한 발 뒤로 물러난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왕의 사나운 손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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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힘을 잃자 마족들도 순식간에 기운을 잃어갔다. 지금까지 흉포하게 인간을 향해 달려들던 마족들은 하나씩 둘씩 허공에 흩어져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당황한 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던 비올렌과 레지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사라지는 마족들을 보다가 프레데리카와 카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담담한 얼굴로 마왕을 내려다보는 프레데리카가 있었다.

그 앞에 창백하게 질린 채 바닥을 긁으며 이를 가는 카이온도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비올렌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프레데리카…….”

그 목소리가 닿기라도 한 걸까. 천천히 그녀의 고개가 비올렌 쪽을 향해 돌아갔다.

프레데리카는 담담한 얼굴에 예쁜 미소를 걸치고는 비올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나의 용사님.”

비올렌의 걸음이 급해졌다. 순식간의 그녀의 앞까지 뛰어간 비올렌은 곧 죽을 것 같은 마왕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검을 내던지고는 프레데리카를 끌어안았다. 으스러지게 자신을 끌어안는 비올렌의 품 안에서 프레데리카는 신음을 흘렸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카이온은 레지어스가 검을 들이대고 지키고 섰다. 그 역시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긴 마찬가지인 듯, 검은 마왕의 목에 대고 있었지만 눈은 프레데리카를 향해 있었다.

비올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네가 약속했잖아.”

“약속이라니…….”

“네가 이기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돕겠다고. 날 믿으라고 했잖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해맑게 웃는 프레데리카를 보며 비올렌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걱정했어.”

“난 아무렇지도 않아.”

“저 마왕이 혹시 네게 무슨…….”

“아무 일도 없었어. 비올렌,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었어.”

네가 이겼어, 비올렌 코카네스. 마왕을 쓰러트린 현자는 용사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비올렌은 상황도 잊고 안도와 허탈함에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프레데리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프레데리카는 난감하다는 듯한 웃음을 띤 채 비올렌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는 레지어스에게는 봐 달라는 듯 한눈을 찡긋 해 보였다. 레지어스는 허탈하게 웃고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현자 프레데리카의 기지로 붙잡힌 마왕은 그대로 가까운 신전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심장에 꽂힌 검은 날은 남겨둔 채 자루만 잘려나갔다. 프레데리카의 설명에 따르면 그 검이 마왕의 힘을 봉인한 것이라 했다. 검의 손잡이 부분은 프레데리카가 따로 보관했다.

마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은 꺾여 보기 흉하게 부러졌다. 그 뿔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었다.

신성력이 가득 담긴 사슬로 칭칭 묶인 그는 그대로 신전의 제단에 올려진 채 감시당했다.

각 나라들은 서로 마왕을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신전 또한 그랬다. 마왕을 처단하는 건 신의 대리자인 신전이어야 한다는 뜻을 은근하게 비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선뜻 먼저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전투에서 모든 나라와 신전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프레데리카의 수에 그들은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인간은 신의 뜻을 받들어 마족과 싸운 끝에 승리했으되, 그들의 손에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마왕의 처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왕들과 고위 사제들이 모인 자리에 프레데리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맡겨놓은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왕의 신병은 제게 맡겼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프레데리카의 기지로 마왕을 잡았지만, 그녀가 마법에 걸린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나라들과 신전은 반발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마왕의 힘을 봉인하는 방법을 알아낸 건 저예요. 저렇게 잡아놓은 것도 저고요. 그에 따른 부수적 피해에 대해서 죄를 묻는 건 부당합니다. 이 연합군의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마왕과 그를 따르는 마족의 격퇴 아니었습니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맹세하고 나선 것 아니었나요?”

그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한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모두가 입을 다문 게 마음에 들었는지 프레데리카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여러분이 마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방법도 있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요.”

프레데리카가 요요한 웃음을 지으며 모두를 둘러 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저는 인간의 대표로서 마왕을 죽일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든 마왕을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갖추는 분이 나타나신다면 언제든 그를 내어드리지요. 그 전까진, 제가 마왕을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누구든 알았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서로에게 마왕의 처단권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의 목을 쳐서 이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고 싶은 건 공통된 희망이었다. 그 일을 해내고 나면 이 세계에서 그 나라든, 신전이든 무시할 수 있는 집단은 한동안 없을 것이었다. 마왕의 처단을 이유 삼아서 제법 무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전장에서 마왕의 목을 치리라 생각했고, 이 긴 전쟁 동안 가장 많은 공을 쌓은 비올렌 코카네스는 마왕의 처분을 프레데리카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프레데리카의 억지는, 그렇게 해서 억지로 통했다.

그녀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누구든 최대한 빨리 제 거처로 와 주시기를, 고대하겠습니다.”라고 회의실을 나갔다.

각 나라의 수장들과 신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나라로 날 듯 돌아갔다. 누구보다도 먼저 저 마왕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프레데리카는 곧장 신전의 제단으로 향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그녀의 전리품을 가지러 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돌아본 곳에는, 평소와 같이 수줍은 얼굴을 한 아르칸드가 서 있었다.

“아르칸드 님.”

“……프레데리카 님. 곧장 마왕을 데리고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마탑의 대표로서 참여했던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가 회의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슨 논의를 했는지,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잊고 말았다.

그녀가 현혹에서 풀려나 돌아온 뒤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걱정했건만, 안부를 물을 새도 없었다는 사실이 아르칸드에게는 항상 마음의 빚처럼 남아 있었다.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현혹에 붙들려 사라졌을 때, 그는 상황을 막지 못한 자신을 죽도록 후회했다. 대마법사라는 호칭 따위, 마탑의 주인이라는 이름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손에 넘어가는 걸 지키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어떻게 한 건지, 그녀가 스스로 마법을 풀고 심지어 마왕까지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아르칸드는 전율했다.

그녀는 그냥 현자라는 수식어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르칸드는 그녀에게 어떻게 마법을 푼 건지, 무슨 수로 마왕을 제압한 건지 묻고 싶었다. 왜 혼자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뛰어든 건지도 묻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괜찮으세요?”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프레데리카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알고 싶었다.

아르칸드의 질문을 받은 프레데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싱그럽게 웃었다.

“당연히 괜찮지요.”

“그래도…….”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르칸드의 걱정을 물리쳤다. 그러더니만 슬쩍 아르칸드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맞잡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동안…… 8년 동안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르칸드 님.”

“…….”

“건강하세요.”

그것은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어떤 교류가 없을 것이라는 확언처럼 들렸다.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대로 떠나려 하는 프레데리카의 손을 급히 잡은 아르칸드 때문에,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의아하다는 듯 프레데리카가 그를 바라보았다.

맞잡은 손이 너무 뜨거워. 아르칸드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제가, 어, 서신을 드리거나…… 종종 찾아 뵈어도 될까요?”

“네, 그럼요.”

산뜻하게 대답한 프레데리카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단호하게 손을 떼어냈다. 고개 숙여 인사해 보인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아르칸드에게서 멀어져갔다.

머뭇거림 한번 없이 제게서 떠나가는 프레데리카의 뒷모습을 아르칸드는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 계속, 계속 바라보았다.

신전의 제단에 다다른 프레데리카는 단단히 구속당한 채로 무릎 꿇은 마왕과, 그 옆에 선 순백의 성기사를 보았다.

마치 체스판의 말 같네. 그녀는 둘의 색 대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프레데리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카이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그 발소리의 주인이 저를 기만한 자라는 걸 아는 것처럼 으르렁댔다. 하지만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저주의 말 따위는 퍼붓지 못했다.

짐승처럼 사나운 기색을 보이는 카이온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던 레지어스가 곧 프레데리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정한 웃음을 띤 채 제단을 떠나 프레데리카에게로 다가왔다. 레지어스는 그녀의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왼편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대신관에게나 할 법한 인사에 프레데리카는 당황한 얼굴로 그의 팔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뭐하시는 거예요.”

“신의 대적자인 저 마왕을 제압한 분이니, 마땅한 예를 올린 것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전처럼 대해주세요. 불편한걸요.”

“당신께서는 경배받아 마땅하십니다.”

“레지어스 경……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요.”

몇 번이고 거듭 사양하자, 그제야 레지어스는 프레데리카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프레데리카에게 공손한 태도였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것이 봉인되었다 한들 여전히 위험합니다.”

“음, 사실은요. 제가 마왕을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네?”

“아무래도 마왕의 처분을 결정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도 같고……. 개인적으로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프레데리카의 말에 레지어스는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현자도 마법사처럼 괴이한 실험의 욕구가 있나? 레지어스는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가 얼른 지워버리고는 고개를 저어 반대했다.

“위험한 것입니다. 이동부터 시작해서…….”

“저는 마왕의 현혹 마법도 깨트렸잖아요. 음, 이렇게 말하면 레지어스 경이 불쾌하실지도 모르지만…… 저 마왕을 상대로는 제가 제일 강하지 않을까요?”

농담처럼 말하며 싱긋 웃는 프레데리카를 보며, 레지어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구도 꺾지 못한 마왕을 무릎 꿇린 게 프레데리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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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군요.”

“그래서, 데리러 왔어요.”

“잠깐, 지금 바로 가시는 겁니까?”

“음, 네. 굳이 지체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마차라든가, 호송할 인원이 필요할 텐데요.”

레지어스의 근심이 깊어지는 걸 보며 프레데리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간단한 이동 마법 정도는 저도 할 줄 알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것이 순순히 프레데리카 님을 따라가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사제가 회의의 결론을 알리기 위해 레지어스를 찾아왔다. 정말로 프레데리카가 마왕을 데려가기로 결정 났다는 사실을 들은 레지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들이신지. 프레데리카 님도,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 위험한 걸 정말 데려가려는 작정이신 겁니까?”

“별 것 아니에요. 아무 문제도 없을 거고요. 아, 신관님! 가지 마시고 마왕을 묶은 사슬 좀 풀어주세요. 저걸로 묶어놓으면 아예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제가 들고 갈 수는 없어서.”

사제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왕의 근처도 가기가 두려운지 주춤거렸다. 프레데리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지어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미 결정이 다 난 사항에 일개 성기사인 자신이 어깃장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제의 목덜미를 잡고 가서 마왕의 사슬을 풀어냈다. 사슬은 풀렸지만 여전히 손에 채운 구속구는 그대로였다.

“감사해요, 레지어스 경. 사제님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으음, 이렇게 할까요.”

프레데리카는 불쑥 카이온에게 다가가서는, 그의 눈에 둘러진 두툼하고 긴 끈을 풀어버렸다.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지자, 카이온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홱 고개를 쳐들었다. 악에 받친 눈이 프레데리카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 만났네요.”

“……! ……!!”

“이야기는 나중에 저희 집에 가서 들을게요.”

자자, 일어나세요. 노인이라도 어르는 듯 프레데리카가 중얼거리면서 카이온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웠다. 힘을 주어 일으키려 했지만, 거대한 마왕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프레데리카가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마왕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항하는 카이온을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던 레지어스가 뚜벅뚜벅 그 앞으로 다가와 섰다.

“잠깐 물러나 서 계시겠습니까?”

“네? 왜…….”

이유를 들을 새도 없이, 프레데리카는 레지어스의 손에 살짝 밀려 카이온을 놓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적정한 거리에 떨어져 서자, 레지어스는 곧장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 째로 풀어내 세차게 휘둘렀다.

빠악, 하고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프레데리카는 갑작스러운 폭력에 흠칫 놀라 움찔거렸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냉랭한 레지어스의 눈과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카이온의 눈이 맞부딪쳤다.

“주제도 모르고, 당장 네 목이 날아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라.”

레지어스의 말이 우습다는 듯 카이온은 코웃음을 쳤다. 그 건방진 태도에 성기사는 어금니를 악 물고 다시 한 번 검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그만 하세요.”

막 카이온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레지어스는 이유를 묻는 듯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냥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가 얘기할게요.”

“하지만…….”

“제가 얘기할 테니, 레지어스 경은 물러나 주세요.”

단호한 태도로 막아서는 그녀를 레지어스는 약간 불만스러운 듯 바라보았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프레데리카는 사제도 멀찌감치 물리고는 카이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카이온은 지금쯤 프레데리카를 수백 수천 번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그런 카이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피가 흐르는 그의 이마며 뺨을 손으로 훑었다. 손이 시커먼 마왕의 피로 물드는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레지어스가 놀라 뛰어오려 했지만,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젓는 바람에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손을 무릎 위에 올리자, 연한 하늘빛의 천에 핏물이 금방 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오로지 마왕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나랑 안 갈 거예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쏘아보기만 하는 카이온을 어떻게 할까, 하고 바라보던 그녀는 살짝 몸을 일으켜 카이온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귀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프레데리카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왕이 몸을 경직시켰다. 그걸 보고 뒤에서 레지어스가 움찔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프레데리카의 정신은 오직, 카이온 하나에만 쏠려 있었다.

“내가 약속할게요.”

그리고 숨이 새는 듯 작게 속살거리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를 갈던 카이온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다가, 금세 다시 사나워졌다. 다시 제 눈앞에 정자세로 앉은 프레데리카를 향해 윽윽 대며 뭐라 지껄이려 드는 카이온을, 프레데리카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라고 하고 싶은 거죠? 알아요. 그래도 믿어요, 나를.”

그리고 어차피 당신의 신병은 나한테 넘어온걸요. 거부권은 없어요. 생긋 웃으며 하는 소리에 카이온은 기가 차다는 듯 프레데리카를 훑어보았다.

대충 이야기가 끝났다 생각한 건지, 프레데리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점심이라도 같이 먹지 않겠느냐는 듯한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뭐, 여기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는 편이 좋다면야, 말리지 않겠어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프레데리카가 웃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녀의 눈이 묻고 있었다. 카이온은 한참동안 그녀를 쏘아보더니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산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카이온의 등 뒤,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이 카이온의 온몸을 물들였다. 그 빛을 등진 마왕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카이온의 눈만은 형형히 빛났다.

마왕의 흉흉한 기세에 뒤로 물러나 있던 레지어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힘을 봉인 당하고 손발도 구속당한 마왕이 무슨 짓도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카이온 앞의 프레데리카는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겨우 카이온의 가슴 언저리까지밖에 키가 닿지 않는 프레데리카는 그런 마왕을 보고서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말에 따라주는 카이온이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으음, 이동하려면 손을 잡아야 하는데…….”

프레데리카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레지어스를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이것도 마저 풀어주면 안 되나요?”

그녀의 손가락이 마왕의 손목과 발몪에 묶인 구속구를 가리켰다. 레지어스는 도리질을 쳤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무리 제 힘을 못 쓰는 마왕이라 해도 신체능력으로 따지자면 프레데리카 당신이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으음……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못마땅한 얼굴로 로브를 뒤적거리던 프레데리카의 손에 어느새 두툼한 가죽으로 된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말이 목걸이지, 개의 목줄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손짓을 하며 부탁했다.

“고개 좀 숙여 봐요.”

카이온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래도 그의 키가 워낙 커서, 프레데리카는 까치발을 한 끝에 그의 목에 가죽 목걸이를 채울 수 있었다.

“자, 이제 구속구는 풀어주셔도 돼요.”

“겨우 그 목걸이 하나만 믿고 어떻게…….”

“제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목을 조르는 물건이니까요. 괜찮아요.”

몇 번이나 프레데리카가 안심시켰지만, 레지어스는 통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숨을 푹 쉰 그녀는 결국 실제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이 짤막하게 명령을 내뱉었다.

“조여.”

순간, 목걸이가 마왕의 목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갑자기 숨통이 조이는 바람에 카이온은 컥,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곧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한 무릎이 바닥에 처박혔다.

꺽꺽대는 카이온을 그대로 둔 채, 프레데리카가 웃으며 레지어스를 바라보았다.

“됐죠? 그러니 이제 풀어주세요. 아, 풀어.”

그녀의 말에 따라 마왕의 목을 조르던 목걸이가 다시 느슨해졌다. 카이온은 재갈을 문 입가에 침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러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프레데리카가 얼른 그의 몸을 힘껏 받쳤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요, 라고 속삭이는 걸 카이온은 분명히 들었다.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레지어스는 결국 프레데리카의 뜻에 따라 카이온의 손발을 묶은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프레데리카가 혼자 낑낑대며 카이온을 일으켜 세우려는 걸 보다 못한 레지어스가 결국 대신 그를 일으켜줬다. 마왕의 몸에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레지어스는 불쾌한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그럼 이제 저는 가 볼게요.”

“……제가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 안 돼요.”

웃으며 레지어스의 청을 거절한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손을 끌어다 꽉 잡았다. 프레데리카가 인사를 하고, 노래하듯 주문을 외웠다. 조그마한 여자와 거대한 남자의 발밑에 복잡한 문양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휑해진 제단을 바라보던 레지어스가 한숨을 내뱉고는 몸을 돌릴 때였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예배당의 문이 세차게 열렸다.

거기에는 뛰어온 기색이 역력한 비올렌이 벌개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레지어스!”

“비올렌? 무슨 일인가?”

“프레데리카는?”

“그녀라면…… 방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뭐? 왜 붙잡지 않았어!”

씩씩대며 뛰쳐 들어온 비올렌이 거칠게 항의했다. 레지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회의에서 마왕의 신병을 프레데리카 님에게 인도한다고 결론이 났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게 거짓이었나?”

“그게 아니야! 그런 결론을 냈다고 해서 그냥 그녀를 그 괴물과 함께 보내면 어떡해!”

“잠깐, 넌 그 자리에 없었나?”

“난…….”

비올렌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프레데리카가 그에게 ‘마왕의 처분에 관한 회의에 네가 굳이 참여할 필요 없다’고 한 게 이런 뜻인 줄은 몰랐다.

자신은 그저 음흉한 늙은이들 사이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괴로웠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 때문에 마음 고생한 대신에, 그 피곤한 장소에는 자신이 대신 참석하겠다’고 해서 그냥…….

자신이 너무 안일하고 어리석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프레데리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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