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카이온 -->
연참(2/3)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종종걸음으로 쓰러진 하인에게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기묘하게 꺾인 하인의 목을 이리저리 살피고 쓰다듬건 프레데리카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카이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반항기 가득한 새끼 개 같아서, 카이온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말 곤란해요. 고치기가 얼마나 귀찮고 힘든데.”
“너, 대체 어디에서 뭘 하다가 나타나서는……!”
“일이 좀 있었어요. 아휴.”
프레데리카는 하인의 목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러더니 아예 본격적으로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하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카이온은 그저 지켜보았다.
한참 그러고 있던 프레데리카가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더니만 있는 힘껏 머리를 홱 돌렸다.
빠각, 하고 하인에게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만족스러운지 프레데리카가 씩 웃었다.
놀랍게도, 죽었던 하인은 눈을 다시 깜빡이고 숨을 내쉬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마왕인 카이온의 눈마저 크게 떠졌다.
하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프레데리카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는 문을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방에는 얼어붙은 카이온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한 얼굴의 프레데리카만이 남았다.
꼼짝 않고 서 있는 카이온을 내버려 두고 그녀 혼자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녀는 찻주전자를 집어 들고는 두 개의 잔에 차례로 찻물을 따랐다. 하나를 맞은편으로 밀어놓으며 프레데리카가 물었다.
“안 앉을 건가요?”
“…….”
“차가 식어요. 아니, 이미 좀 식었겠다. 어쨌든, 빨리 앉아 봐요.”
재촉하듯 프레데리카가 테이블을 손으로 탁탁 몇 번 치자, 카이온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앞에 앉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앉게 되자, 그제야 프레데리카가 싱긋 웃었다.
“잘 쉬었어요?”
“너 같으면 쉴 수 있었겠나?”
“쉬라고 일부러 내버려 뒀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신 그녀의 얼굴의 일그러졌다.
“윽, 써라. 그 사이에 너무 우러났네.”
“…….”
“그러게 왜 하인 목은 꺾고 그래요.”
“넌 대체 뭐지? 그리고 어떻게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린 거지?”
카이온의 질문에 프레데리카는 차분히 답을 내어주었다.
“저는 프레데리카 르데트고요. 사람들은 저를 현자라고 부르죠. 지금은 마왕의 신병을 보호하는 중이고요. 그리고 죽은 인간을 살린 적 없어요.”
“그럼 아까 그건 뭐지?”
“그건 인형이에요. 고장 난 물건 안 고쳐봤어요?”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냐고 타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프레데리카가 또다시 차를 마셨다. 쓰다고 투덜대놓고는 열심히도 마셔댔다.
“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랑 하녀 전부 인형이에요. 첫날 보았던 루시도 포함해서요.”
“괴상한 취미를 가졌군.”
“뭐, 개인 사정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참, 왜 일주일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쉬질 못해요? 뭐 불편한 게 있었어요?”
“너라면 개처럼 끌려와 놓고는 주는 밥 받아먹으며 속 편하게 지낼 수 있겠나?”
“손님 대접 열심히 했더니만…….”
또다시 토라진 얼굴이 된 프레데리카를 보며 카이온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가죽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대로 대접할 생각이라면, 이거부터 풀어.”
“그건 좀 봐서.”
“개 취급하면서 손님이라고 하다니, 제멋대로군.”
“원래 이렇게 호의를 잘 못 받아들이나요?”
“뒤통수 친 인간 계집의 호의를 내가 왜 받아들여야 하지?”
아하. 그 부분이 문제구나. 프레데리카는 작게 속삭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점은, 사과할게요.”
“하. 사과.”
“당신이 꼭 필요했는데, 그냥 부탁해서는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좀 거친 방법이었죠?”
그때 테이블 너머에서 팔이 쑥 뻗어 나와 프레데리카의 목을 잡아챘다. 그녀가 무슨 소리 한 번 내 보기도 전에, 마왕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카이온은 그대로 프레데리카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기세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까 그 하인처럼, 프레데리카의 몸뚱이도 축 늘어져서는 나뒹굴었다. 단숨에 숨이 끊어져 버린 몸은 마치 헝겊인형처럼 보였다.
분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카이온이 시신을 걷어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옆으로 엎어져 있던 프레데리카가 삐걱대며 몸을 일으켰다.
카이온은 그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추어선 채 그 괴상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야야…….”
천천히 팔로 지탱해 상체를 일으킨 프레데리카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리와 목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꺾였던 부분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불쾌함이 넘실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항의했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 줄래요.”
“대체…… 너…….”
“안 죽는다 해서 안 아픈 건 아니니까, 주의해 줘요.”
이제 완전히 두 발로 일어선 프레데리카는 치마를 툭툭 털고는 의자를 세워서는 다시 앉았다. 목이 꺾이기 전까지는 고상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더니, 이제는 그냥 대충 잔을 손으로 쥐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 인간이 아니군.”
“인간이거든요. 일단은.”
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꽤 거칠어서, 찻잔과 받침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프레데리카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카이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성미가 고약해요. 약속했잖아요. 당신의 힘을 돌려주겠다고. 심장에 박힌 검도 빼 줄 거라고.”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다시 원상복귀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뭘 보고 믿지?”
“못 믿을 건 뭐예요?”
“그럼 지금 당장 내 힘을 돌려놓아라. 당장!”
“조건이 있어요.”
“하!”
카이온의 눈에는 프레데리카의 하는 꼴이 못마땅하고 우스웠다. 죽지 않는 몸을 가졌다고 멋대로 나불대고, 나댄다.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약속을 해놓고는, 마왕에게 거래를 요구한다.
인간의 현자라더니, 하는 짓은 현자는커녕 협잡꾼이라 해도 될 법했다.
“못 믿겠으면, 뭐…… 계약서라도 쓸까요?”
“계약서? 웃기는군.”
“내가 뭐라 해도 안 믿을 거 같긴 한데……. 일단 들어보기나 하죠? 딱히 선택권이 있진 않지만.”
그러면서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목을 손으로 콕콕 찔러 보였다. 그건 카이온의 목에 걸린 속박을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마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프레데리카의 말을 듣겠다는 뜻이라, 그녀는 만족스러워 웃었다.
“당신에게 해가 되진 않을 거예요.”
“짖어 봐.”
“나랑 자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것만 같던 카이온의 얼굴이 더 심하게 일그러지자, 프레데리카는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렸다. 저러다가는 잘생긴 얼굴이 손도 쓸 수 없게 못생겨지고 말겠다 싶었다.
하지만 계속 웃기만 하다가는 카이온이 기분이 상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헛기침까지 해가며 웃음을 억지로 그치고 난 뒤, 그녀는 손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왜요, 어려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릴 하는 거냐? 내가 왜 너 같은 거랑……!”
“딱히 안 좋을 게 있어요? 남자들은 다들, 하는 거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이봐, 너.”
“근데 아까 얘기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카이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데리카가 테이블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빙긋빙긋 잘 웃기만 하더니, 어째서인지 프레데리카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랑 자요. 그리고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요.”
작은 손이 카이온의 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벌레라도 붙은 것처럼, 카이온이 매몰차게 그 손을 쳐냈다.
활활 불타는 마왕의 새까만 눈이 혐오와 경멸을 가득 담고 프레데리카를 노려보았다.
“너 같은 걸 안느니 차라리 이대로 소멸하고 말지.”
“그건 안 돼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쉰 프레데리카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싫은가요?”
“당연한 소릴.”
“……할 수 없네, 뭐.”
어째서인지 산뜻하게 뒤로 물러난 프레데리카는 잠시 카이온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더니만 “나중에 봐요.”하고 인사를 남기고는 바람처럼 방을 나가버렸다.
저건 현자가 아니라 미친년이었던가.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손이 닿았던 뺨을 몇 번이고 문질러 닦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미지근한 체온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족은 잠을 자지 않는 생명체였다. 마왕 또한 마족이었으니 당연히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는다 해서 내내 서거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방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카이온은 침대에 드러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눈동자는 천장의 한 지점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이 기묘한 집. 저를 데려온 프레데리카조차 카이온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만 했을 뿐, 어떤 종류의 강제도, 겁박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거절한 뒤에 카이온의 신상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오늘 저녁도 하녀가 와서 이부자리와 목욕물을 봐 주고 나간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을 빠져나갈까.
미친 현자의 집에서 도망친다면, 과연 나에게 승산은 있는가. 카이온은 잠시 속으로 셈을 해 보았다. 심장에 힘을 봉인하는 검이 박혀 있는 상태의 그는 힘이 센 편인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고, 인간 이상의 괴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면 추격당할 가능성은 10할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자신의 영토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충분하지가 못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제 머리에 남은 뿔의 밑둥을 어루만졌다. 억지로 부러트린 바람에 단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했다. 카이온은 그 감촉으로 자신의 굴욕을 되새겼다.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 치욕을 안긴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말 텐데.
순간, 프레데리카가 제단에 꿇어앉아 있던 자신에게 속삭였던 비밀스러운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당신의 힘을 모두 돌려줄게요. 심장에 꽂힌 검도 빼 줄 거고요. 당신은 나와 함께 가기만 하면 돼요. 내 집에서 충분히 회복하고, 온전해진 다음에 당신 멋대로 굴어도 좋아요. 날 죽여도 되고, 다른 사람들을 죽여도 되고, 세상을 멸망시켜도 되고.’
그것은 잔혹한 속삭임이었다. 또한 카이온으로서는 믿을 수 없으면서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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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3/3)
마왕을 배신한 자가, 이번에는 인간을 배신하고 마왕을 도우려 한다니. 누가 듣는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느냐며 비웃을 법했다.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 조그마한 현자 계집은 더더욱. 카이온은 몸을 일으켰다.
프레데리카 말고 그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자가 세상에 하나 더 없을 리 없었다.
그는 결연하게 창문을 열고,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소리 없이 풀밭에 사뿐히 착지한 마왕은 그대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택 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맨발로 밟는 풀밭은 부드러웠다. 발목과 발등을 간질이는 손질이 잘 된 잔디는 카이온의 발걸음을 막아서지 않았다. 너무 쉽게 일이 풀리는 게 아닌가, 라는 고민을 했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쉽게 풀리면 좋은 거 아닌가. 애초에 감시 하나 없이 저를 둔 프레데리카가 멍청한 거다.
거구의 마왕은 보폭도 컸다. 순식간에 정원을 가로질러 외부와 프레데리카의 땅을 가르는 정원수들이 잔뜩 심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그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저택은 카이온의 부재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한 걸음 내딛으려던 카이온은,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설마 주변을 도는 보초가 있었나? 어떤 인간이든 다가오기만 하면 쓰러트릴 생각 만만으로 그는 한껏, 경계했다.
하지만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바람에 카이온은 제 목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점점 세게 조여오는 목걸이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목에 감긴 가죽줄을 뜯어내려 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목을 조이는 힘만 거세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는 꺽꺽대며 무너져 풀밭을 뒹굴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한들, 힘 하나 제대로 못 쓰는 그는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발목까지 오는 하얀 잠옷 차림의 프레데리카가 덤덤한 얼굴로 바닥을 뒹구는 카이온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옆에 살짝 쪼그려 앉았다.
“도망가면 안 되지.”
“꺼억…… 끅…….”
“편히 쉬라 했지, 누가 도망가랬어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풀어, 라고 속삭이자 겨우 숨이 깔딱깔딱 쉬어질 정도로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카이온은 다급하게 제 폐를 채우는 산소를 느꼈다. 하지만 한참 숨이 막혔던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풀밭에 완전히 늘어진 카이온을 바라보고 있던 프레데리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만, 그의 배 위에 올라와 앉았다.
그녀는 다정한 얼굴을 한 채 카이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가 그렇게 싫었나요?”
“이런…… 미친…… 년…….”
“알아요, 나도 내가 미친 것 정도는.”
순순히 본인의 정신상태 이상을 밝힌 프레데리카는 헐떡이는 카이온의 입에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그가 급히 그것을 뱉어내려 했지만, 프레데리카의 입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자신의 입술로 카이온의 입을 막아버린 프레데리카는, 곧장 제 혀를 그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의 반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끝끝내 쫓아가 카이온의 혀를 얽었다. 두 사람의 타액이 뒤섞이는 속에서 무언가 미묘한 맛이 느껴졌다. 부릅뜬 카이온의 눈에 담긴 분노를 보고서도 프레데리카는 웃기만 했다.
결국 카이온은 프레데리카가 제 입에 쳐넣은 알 수 없는 것을 모조리 삼키고 말았다. 그는 팔을 들어 있는 힘껏 프레데리카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몸속에서 치솟는 열기가 그것을 방해했다. 카이온은 그녀를 밀어내는 대신에 그 두 팔을 꽉 붙들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얌전해진 마왕을 눈치챈 프레데리카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유 모를 자조가 어려 있었다.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카이온은 그 두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애꿎은 풀을 쥐어뜯었다.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약을 먹이길 잘한 것 같았다. 점차 흥분해가는 기색이 역력해지는 카이온을 보며 프레데리카는 번들거리는 자신의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달빛을 받은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묘한 기운을 안은 채 빛났다.
그녀는 손으로 천천히 카이온의 뺨을, 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마치 솜털 같았다. 카이온은 살과 살이 맞닿는 부분마다 간지러움을 느꼈다.
프레데리카는 곧 가느다란 검지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있는 목걸이와, 쇄골을 덧그렸다. 제 손가락 가는 길을 응시하면서 프레데리카가 물었다.
“내가 했던 제안에는 거부권이 없다고 했잖아요. 잊었어요?”
“……꺼, 져. 내 위에서…….”
“처음은 좀 분위기 있게 하려 했는데, 아쉽네.”
프레데리카가 천천히 뒤로 움직이더니만, 제 손을 카이온의 중심부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이 닿고 나서야 카이온은 제 물건이 성이 날 만큼 성 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일갈하기도 전에, 프레데리카의 손이 바지춤 안으로 쑥 들어왔다.
차가운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남자의 기둥을 꽉 틀어쥐자, 카이온의 입에서 처음으로 쾌감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프레데리카가 속살거렸다.
“혹시 처음?”
“흐으…… 아앗, 닥, 닥쳐…….”
“아, 아니려나. 그래도 꽤 오래 살았는데 동정이면 이상하겠지……. 나는 처음이니까, 부드럽게 하자고요.”
솜씨도 좋게 카이온의 바지춤을 내리자, 커다란 살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예상한 것보다…… 좀 컸다. 아니, 많이 컸다. 거의 어린 아이 팔뚝만한 좆이 고조되는 흥분에 따라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잠시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곧 두 손으로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손아귀 힘이 조금 셌는지 카이온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가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프레데리카는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조금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좀 크네……. 잘 되려나.”
“그만…… 저리 비켜!”
“말했잖아요. 나랑 자자고. 그게 내 조건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 헉…….”
“거부권이 없다고도 말했고요.”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의 페니스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의 하얀 잠옷이 두 사람이 접한 부분을 사뿐히 덮어 가렸다. 카이온은 그녀의 하반신이 닿고 나서야, 프레데리카가 애초부터 속옷을 입고 나오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챘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카이온은 이를 갈며 비아냥댔다.
“인간의, 현자라는 것이…… 발정이 나다 못해서 마왕의 몸까지 탐하는 걸 알면 다들, 좋아라 하겠군 그래?”
“뭐, 그러라고 해요. 관심 없어. 난 지금 당신 좆에만 관심 있어서.”
그녀는 카이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였다. 살짝 갈라진 다리 사이 틈으로 카이온의 발기한 페니스를 슬슬 문질러댔다. 카이온에게 강제로 먹인 약을 프레데리카도 입을 맞추며 일부 흡수한 탓에 그녀도 흥분이 고조된 터였다.
어느새 질척해진 아랫입으로 불끈 선 남자의 것을 문지르고 있자니, 그녀 역시 뱃속이 짜릿짜릿해졌다. 그녀는 조금 더 그 쾌감을 고조시킬 생각으로 몸을 기울이고 조금 더 세게 카이온을 짓눌렀다.
“흐읏…….”
음핵이 부벼질 때마다 짜르르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점차 프레데리카의 볼에도 홍조가 떠올랐다. 살짝 멀어진 입에선 따뜻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제 아래에 깔린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프레데리카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생리적인 쾌감은 어쩔 수 없는지 흥분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정도면 충분하지. 프레데리카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품이 넓은 잠옷의 아랫단으로 그의 손을 밀어넣어서는 제 가슴 위에 얹었다.
마왕의 커다란 손은 프레데리카의 가슴을 감싸고도 남았다. 그녀는 카이온의 손을 제 가슴에 얹고 꾹 누르며 속삭였다.
“빨리, 만져줘요. 어서.”
“이게 무슨…… 당장 내 손, 놔……!”
“싫다고 빼기는. 여기, 마왕님의 좆은 좋아서 껄떡대잖아요.”
한 번 더 엉덩이에 힘을 주어 카이온의 페니스를 짓뭉개자, 그가 신음을 흘리며 프레데리카의 젖을 꽉 쥐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워하며 마왕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뗐다.
그러고는 치맛속으로 손을 꼬물꼬물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음경이 닿자, 그것을 손으로 감쌌다. 첨단을 손끝으로 어루만지자, 카이온이 허리를 들썩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말, 라고!”
“이렇게 세워놓고 이제 와서……. 벌써 이렇게, 흘러나오고 있잖아요.”
마왕님의 씨물 말이에요. 프레데리카가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한 손은 여전히 카이온의 살기둥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한 손은 꺼내 보였다. 손에 묻은 남자의 흥분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프레데리카는 천천히 그것을 혀로 핥았다.
카이온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고 숨을 멈췄다. 제 몸에서 나온 액체를 프레데리카가 핥아먹는 모습이 끔찍하게도 음란했다. 인간의 짓거리가 역겨운 것 이상으로, 당장이라도 이 작은 몸 안에 자신의 것을 밀어넣고 마구 박아대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그런 카이온의 속내를 읽은 듯, 프레데리카가 천천히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그녀는 마치 무도회에 나선 소녀처럼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렸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그 천자락 밑으로,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밀지가 언뜻 드러났다.
“넣고 싶어요. 응?”
카이온은 대답하는 대신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귓가에 프레데리카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시선을 맞추지 않는 카이온을 보며 프레데리카가 입술을 핥았다. 이 커다랗고 무서운 마왕님이 이렇게 참아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마족이 아닌가. 스스로의 욕구에 충실하다는 점이 마족의 미덕 아니었나.
그래도 인간이나 마족이나 신체의 반응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미 그의 커다란 자지는 당장이라도 프레데리카의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싶어서 단단해진 채 꺼덕대고 있었다.
그쪽에서 안 하겠다면야 뭐……. 프레데리카는 손으로 카이온의 것을 잡아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을 그에 딱 맞춰 내렸다. 귀두 끝에 닿아오는 축축하고 말랑한 살을 느낀 카이온이 화들짝 놀라서는 프레데리카의 허리를 잡고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가 좀 더 빨랐다.
“흐윽……. 너무 커서…….”
잘 안 들어가, 라고 하는 말은 작아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카이온도 프레데리카도 서로의 몸이 맞아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몸에 평균보다 훨씬 큰 카이온의 페니스를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이 남자를 가질 거야. 먹어치워 버릴 거야. 이 몸을 맛 볼 수 있는 만큼 맛보고, 탐할 수 있을 만큼 탐할 거야. 그게 내 목표였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응원했다. 힘내, 프레데리카. 넌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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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입니다(1/2)
마침내 완전히 끝까지 안으로 밀어넣은 순간,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속에 완벽하게 채워넣은 뜨거운 체온에 감탄했다. 만족감이 잔뜩 담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각할 새도 없이 허리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둥글게 허리를 돌리자, 카이온은 이를 악물고 프레데리카의 골반을 꽉 붙들었다.
“젠장, 빌어먹을!”
“욕하지 말아요, 읏, 움직이지 말아봐…….”
“허억…….”
“내, 내 생각보다…… 너무 크단, 말이야…….”
살짝 울먹이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이온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거세게 허리를 쳐올리자, 프레데리카가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뒤로 꺾었다. 바들바들 떨며 도망가려는 그녀를 단단히 붙든 채 카이온은 연달아 그녀의 안에 제 몸을 처박았다.
젖은 살끼리 맞부딪치는 음란한 소리가 고요한 정원을 울렸다. 프레데리카는 자꾸 치받치는 몸이 그대로 쓰러질 거 같아서 결국 카이온의 배를 짚었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근육이 느껴졌다. 속절없이 흔들리며 프레데리카는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에 짓이겨지는 풀들이 그녀의 흰 잠옷에 풀물을 들였다.
거칠게 흔들린 탓에 잠옷이 흘러내리자 어깨와 윗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프레데리카는 미처 그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먼저 도발하며 시작했지만, 이렇게나 자극이 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이온의 커다란 음경이 그녀의 질 안에 깊이 들어와 안을 때릴 때마다, 검은 밤하늘에 없어야 할 별이 튀었다. 막을 새도 없이 입에서 새된 교성이 터졌다.
“흐앙, 하, 아앗! 살, 살살…… 흐응!”
“이제, 와서 무슨, 그런 소릴.”
“아흑, 안 돼, 아, 앗!”
카이온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프레데리카가 그대로 땅에 누웠다. 헐렁한 잠옷이 가슴까지 쭉 밀려 올라갔다. 그녀의 오른다리를 들고 안으로 페니스를 힘껏 밀어넣었다. 카이온의 뜨거운 기둥이 밀려들 때마다 프레데리카의 질은 그것을 반기기라도 하듯 잔뜩 조이며 꿈틀거렸다.
분명 처음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카이온은 가슴을 반쯤 덮은 옷자락을 확 밀어올리며 그녀의 가슴에 이를 박아넣었다.
“흐읍……!”
프레데리카의 두 손이 뻗어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동시에 여전히 조이고 있던 목걸이가 완전히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온몸을 밀착한 채, 둘은 짐승처럼 흘레붙었다. 넓디 넓은 정원에 울려퍼지는 것이라고는 열락에 가득 찬 둘의 거친 호흡과 살이 질퍽거리며 맞부딪쳤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음란한 소리뿐이었다.
이를 갈면서도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몸 안에 제 몸을 더 깊이 묻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 나는 이 계집의 얼굴을 보고서도 지금 아랫도리를 놀리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건, 다 저 여자가 자신에게 먹인 약 때문이었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두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렸다. 허릿짓이 격해지자 프레데리카가 더 이상 교성을 참지 못하고 멋대로 내지르기 시작했다. 누가 들을까,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이라는 여자에게는 무리가 될 법도 한 자세였지만, 카이온은 그딴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가느다랗고 하얀 목을 깨물면서도, 어째서인지 카이온은 그녀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 여자가 자신의 힘을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아주 미약한 희망 때문인 걸까. 어느 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프레데리카의 몸이 너무나도, 달콤하다는 그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점점 카이온의 숨이 빠르고 거칠어졌다.
거의 몸이 반쯤 접힌 상태에서 고통스러울 법도 했지만, 프레데리카의 아랫입은 열정적으로 카이온의 것을 오물거렸다. 흐트러진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인간의 현자의 얼굴에, 카이온은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침을 뱉는 대신,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 삼켰다.
그에 응하는 프레데리카 역시 마왕의 입술을 갈망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치 전투라도 치르는 것처럼 둘의 키스는 격렬했다. 서로가 서로를 도망가지 못하게 완전히 꽉 붙들어 맨 채로, 마침내 절정이 몰려왔다. 카이온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프레데리카의 하반신에 자신의 것을 단단히 밀착시켰다.
고통을 참는 듯한, 하지만 어딘가 후련한 듯한 신음을 들으며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팡팡 터지는 듯했다. 그녀는 자의로 몇 번이나 아래를 조였다. 그때마다 카이온은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마침내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안에 자신의 정액을 모두 흩뿌리는 순간, 프레데리카도 만족스러운 듯 콧소리를 냈다. 끙끙대며 그녀의 안에서 절정을 맞이한 카이온은 흥분이 점차 가라앉아 가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한지 알아차렸다.
자신에 대한 혐오가 물밀 듯 밀려 왔다. 그는 급히 제 것을 빼내고 싶었지만, 여전히 표피에 남아 있는 감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 느껴지는 쾌감 때문에 이를 악물고 프레데리카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카이온이 재미있다는 듯 프레데리카가 코를 울리며 웃었다.
타의로 시작했건 자의로 시작했건, 관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카이온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했다. 이 여자의 곁에 드러누울 순 없었다. 그때 프레데리카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조여.”
기운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상태의 카이온은 속절없이 그대로 무너졌다. 또다시 숨이 막혀오자, 그는 제 목을 죄어 오는 가죽목걸이를 손톱으로 쥐어뜯었다. 아랫도리를 추스를 새도 없이 잔디를 뒹굴며 꺽꺽대는 남자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건 프레데리카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숨이 모자라 깔딱대며 입가에 침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마왕을 곁에 두고 프레데리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제 가슴에 남은 카이온의 잇자국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옷자락을 추슬렀다.
젖은 다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자, 프레데리카가 추위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어슴프레한 달빛에 비치는 제 잠옷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엉망진창이었다. 두 남녀의 체액에 풀물 그리고 약간의 피얼룩까지.
프레데리카의 완벽한 첫경험이네. 그녀는 속으로 비죽대며 야유했다.
“카이온, 나는 들어가요.”
그녀가 말했지만 카이온은 답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 정신을 놓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프레데리카는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저를 노려보는 마왕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나중에 알아서 잘 들어올 수 있죠? 목을 조이는 건,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풀릴 거예요. 참, 이 저택을 벗어나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요. 여기에는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게 되어 있으니까. 나가려 하면 말이죠.”
그녀의 양손이 가슴 앞에서 주먹을 꼭 쥐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더니만 쭉, 만세하듯 펼쳐졌다. 빨간 입술이 나지막하게 펑, 하고 귀여운 효과음을 냈다.
“알았죠? 그러니까 얼른 들어와요. 내일 아침에 봐요.”
휘적휘적 집으로 향하는 프레데리카의 뒷모습을, 실핏줄이 터진 눈을 한 카이온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숨은 부족해졌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다. 귀도 덩달아 먹먹해졌다. 아득해져가는 정신으로도 카이온은 연신 프레데리카를 저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저것이 죽든 죽지 않든 몇 번이고 죽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겠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카이온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온 프레데리카는 불 한 점 없는 계단과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스스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그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턱 끝까지 몸을 담근 채 수면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손이 조심스럼게 자신의 음부를 매만졌다.
꽤 강제적으로 해버린 바람에, 상당히 부어 있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쓰라림이 느껴져서 그녀는 자꾸만 인상을 썼다. 문득 카이온의 정액이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제 안으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밀어 넣어 보았다. 분명 안은 미끈거리고 축축했지만, 그게 자신의 애액인지, 상대의 정액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걸어오는 길에 줄줄 흘리기도 했으니까 아마 없겠지. 프레데리카는 손을 빼내며 코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임신을 할 것도 아닌데 뱃속에 씨물이 남았든 말았든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물이 조금 차다고 느껴질 즈음에 그녀는 욕조에서 나왔다. 카이온이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 결국은 돌아올 것이었다. 프레데리카는 걱정하지 않았다.
가운을 입은 채로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희미한 램프를 앞에 두고 작은 책자를 폈다. 펜을 쥔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줄줄이 써 내려갔다. 거의 한 바닥을 채운 뒤에야 프레데리카는 펜을 놓았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잘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몰려오는 피로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가운을 입은 채로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 그날 밤도 프레데리카는 악몽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하늘이 이제 막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짜증이 난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해가 온전히 뜨고 나서야 프레데리카는 방을 나섰다. 지난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카이온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프레데리카는, 역시나 예상대로 방에 돌아와 있는 카이온을 보고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카이온의 얼굴은 잔뜩 사나워졌지만.
“너……!”
“돌아왔네요.”
프레데리카의 눈이 엉망이 된 카이온의 왼손에 닿았다.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탈출을 감행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카이온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무리 힘을 뺏긴 마왕이라 해도 두려움을 느낄 법도 하건만, 프레데리카는 정말 조금도 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앞에 다다르자마자 다친 손부터 잡아올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아니라 카이온은 아픔 때문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혀를 찬 프레데리카가 물었다.
“가지 말라고 알려줬는데, 결국 경계까지 갔어요?”
“대체 넌 뭐지? 그런 종류의 결계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한 거냐?”
“그게 뭐 중요해요? 손 치료부터 해야겠다. 아프겠네.”
곧 카이온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에 놀라움이 어렸다. 마법을 쓰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는데, 프레데리카의 손에 붙들린 자신의 손이 깨끗하게 나아갔다.
문득 카이온은 이 작은 여자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단 사실에 또다시 놀랐다. 두려워해? 내가? 이 인간 여자를?
그의 감정이 어떤지 썩 관심이 없는 듯, 프레데리카는 치료가 끝나자마자 카이온의 손을 놓고 몸을 홱 돌렸다. 착착 걸어 테이블 앞에 앉은 그녀가 그제야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카이온을 향해 프레데리카가 손짓했다.
“앉아 봐요.”
카이온은 프레데리카가 위험하다고 인정했다. 이미 마왕을 단신으로 무력화시킨 지점부터 범상치 않긴 했지만,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이 여자는 이상했다. 아주 이상해서, 마왕인 그조차도 조금 두렵게 느낄 정도였다.
힘이 없으니, 일단은 프레데리카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계 어린 얼굴로 프레데리카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난밤은 어땠어요?”
“뭐?”
뜬금없는 질문에 카이온이 사납게 되물었다. 어떠하긴 뭐가 어땠단 건가. 프레데리카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좀 더 풀어서 질문했다.
“나랑 했잖아요, 정원에서. 어땠냐고요. 마음에 들었어요?”
뭐 이런 게 다 있지.
카이온은 진짜로 말을 잃었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질문이 ‘반항한 끝에 결국 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어떠하느냐’는 뜻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당연히 아주 거지같은 기분인 걸 왜 묻나 했는데……. 프레데리카가 궁금한 건 그 지점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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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입니다(2/2)
상대가 말이 없자, 프레데리카가 재촉했다.
“대답하기 어려워요? 좋았어요, 싫었어요?”
“그게, 지금 궁금하다고…….”
“좋았으면 지금처럼 쭉 하면 되는 거고, 싫었거나 불만족스러웠으면 그 지점을 좀 보완해 가면서…….”
“……현자 프레데리카라는 인간이 이렇게나 돌아버린 인간인 줄은 꿈에도 몰랐군.”
“이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 아니 그럼, 이왕에 하는 거 기분 좋게 하는 게 좋지.”
카이온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짜 뭔가 잘못 걸려도 크게 잘못 걸린 느낌이었다.
카이온의 기색이 영 좋지 않자, 프레데리카가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영 아닌 거 같아도…… 그냥 한 1년만 참아주면 안 될까요? 그정도면, 아마 당신도 힘을 되찾을 거고 나도…….”
“대체 넌 목적이 뭐지?”
“내 목적이 왜 중요해요? 당신은 당신 힘만 되찾으면 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지 모르겠으니까.”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유를 듣기 전에는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카이온 때문에, 프레데리카는 조금 속이 답답해졌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따지고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 제안 중에 그에게 어디 하나 손해 나는 부분이 있나? 굳이 그녀의 목표를 알 이유가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새침하게 그의 궁금증을 잘라냈다.
“당신에게 해 될 목표는 아니니 궁금해할 필요 없어요.”
“하.”
“어쨌든 거부권은 없다고 이미 얘기했으니까, 앞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잘되면 더 일찍 힘을 돌려줄 수도 있을 거라고요.”
조금도 속내를 드러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프레데리카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슨 목적인지는 천천히 알아봐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 집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누가 이곳에 와서 그를 죽이려 하지도 못한다. 만일 프레데리카의 목적이 그에게 해가 된다면, 그때 가서 행동을 수정해도 상관 없을 테다. 아예 힘을 찾은 뒤에 프레데리카를 죽여버려도 문제없었다.
“좋아. 그럼 네 말대로 하지.”
“아, 그래요. 계약서라도 쓸까요?”
“그런 건 필요 없다.”
“뭐……. 그러시다면야.”
프레데리카가 불쑥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카이온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손을 조금 흔들어 보였다.
“협상 타결했으니, 악수라도 하죠?”
잠시 프레데리카의 작은 손을 바라보던 카이온이 마침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프레데리카의 손이 너무 작아서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의 손처럼 보였다. 프레데리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카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덜컥 테이블 위로 상체가 다 올라온 프레데리카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서는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가락이 땅에 닿을락 말락했다. 남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녀는 물었다.
“왜 이러는데요?”
“어차피 목적이 몸이면, 언제 어느 때 해도 상관없지 않나?”
“네?”
대답을 하는 대신, 카이온은 다른 한 손을 프레데리카의 팔 아래에 넣고 쭉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녀는 테이블을 건너와 카이온의 무릎에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게 되었다.
눈을 깜빡이며 카이온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게, 음, 그러니까…… 또 하자고요?”
“어제 그걸로 성에 안 차서.”
“어…… 음…….”
“어차피 이러려고 날 데려온 거라며?”
하지만 어제 한 것 때문에 아직 아프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카이온의 입술이 프레데리카의 대답을 삼켜버렸다. 단단한 팔 안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갇힌 채로, 프레데리카는 정신없이 카이온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기세에 그녀는 움찔거리며 몇 차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곧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단단하게 받치는 바람에 더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너무 공격적이라서, 프레데리카는 살짝 겁이 났다. 밀려들어온 카이온의 혀가 프레데리카의 입 안 곳곳을 훑었다. 그 기세가 두려워서 도망치려 하면, 단단히 얽어매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겨우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섞을 뿐인데, 그녀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미처 다 넘기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수도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은 즐겁기 짝이 없었다. 어젯밤 제 위에 올라타서 여유롭게 굴던 여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의 품 안에는 어쩔 줄 모르는 미숙한 이만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치욕스럽게 버려두고 가놓고, 혼자서만 괜찮으면 곤란하지. 카이온은 일부러 프레데리카의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아!”
와락 덮쳐드는 아픔에 프레데리카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드디어 입술이 떨어지고 나자, 카이온은 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도로록 떨어져 내렸다.
아주 너덜너덜하게 물어 뜯어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 광경은 썩 보기 좋을 게 아니라서 카이온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겁을 먹은 듯 보이는 프레데리카에게 카이온이 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두려운가?”
“입술, 아프잖아요…….”
“어제 그렇게 나를 범했을 때는, 무언가 대가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나?”
“아니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고…….”
발끈하며 따져 물으려던 프레데리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카이온의 숨통을 죄고, 멋대로 약을 먹인 데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강제로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부분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카이온의 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사과할 필요 없어.”
“?”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프레데리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과받고 싶지 않다면, 그럼 왜 이런단 말인가?
그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우습고 부아가 치밀었다. 카이온은 슬며시 프레데리카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보드라운 살결을 지분거리자, 프레데리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제 팔 안에서 바르작대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카이온이 속삭였다.
“나도 똑같이 할 생각이니까.”
“네? 설마…… 아, 잠깐!”
몸이 불쑥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의 몸은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드레스의 가슴팍에 묶여 있던 리본은 언제 풀었는지, 카이온은 그것을 손에 들고 씩 웃어 보였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서는, 그 끈으로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라 프레데리카는 반항 한 번 못해보고 그의 앞에 제물처럼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할 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는 프레데리카에게 카이온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원한 거잖아, 이런 거.”
“카이온, 저기. 잠깐만 진정하고요…….”
“나는 충분히 진정한 상태인데.”
넌 아닌가 보지? 비웃는 목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프레데리카는 놀란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드레스의 앞섶을 쥐고 뜯어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연녹색 드레스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가릴 수도 없었다. 찬 공기를 맞은 맨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긴장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흥분으로 유두도 동글동글하니 단단하게 뭉쳐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을 튕겨 유두를 건드리자, 프레데리카의 몸이 움찔거렸다. 카이온은 선홍빛의 돌기를 엄지와 검지로 잡더니만, 꽤 힘을 주어 비틀었다.
“아앗……!”
아픔과 함께 믿기지 않는 쾌감이 함께 몰려와서 프레데리카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카이온이 사납게 웃었다.
“어제가 처음이라더니, 몸은 처음은커녕 수십 번도 더 굴러먹은 것처럼 반응하는군?”
“흐윽, 잠깐! 앗! 아파!”
“어젯밤에는 미처 몰랐는데, 민감한 모양이야, 현자님께선.”
그의 커다란 손이 가슴을 한 데 모으더니만, 이로 가슴을 물어버렸다. 단단한 치아에 눌린 젖꼭지가 아리고 아팠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다리 사이가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프레데리카는 당황해서 허리를 뒤틀었지만, 곧 카이온의 하반신이 내리누르는 바람에 더는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묶인 손으로나마 있는 힘껏 카이온의 머리를 이리 밀고 저리 밀어 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이온의 혀와 이는 집요하게 프레데리카의 유두를 괴롭혔다. 아픔이 훨씬 많던 신음이 점차 쾌감 어린 것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흣…… 으흑…… 제발, 그만…….”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만이라니?”
“하앗!”
카이온의 혀가 힘껏 붉게 부어오른 첨단을 핥아내자, 프레데리카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는 자꾸 제 머리를 쥐어 뜯는 여자의 손목을 다시 위로 잡아올려 고정해 버렸다.
프레데리카는 숨을 할딱이며 곧 저를 집어삼키려 드는 카이온을 올려다보았다. 발그레해진 볼 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이 생생하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 안의 혀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입술도 같이 촉촉해졌다. 그녀는 조금 두려웠지만, 그렇다 해서 카이온을 저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건, 프레데리카가 원하던 일이었다.
아무리 나빠 봐야 다치거나, 죽었다 살아나기 밖에 더할까. 그 과정에서 성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 더 반항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얌전하기만 한 프레데리카를 내려다보는 카이온의 눈빛이 조금씩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는 이 맹랑하고 정신 나간 여자의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자신의 성기를 느꼈다.
더 깊은 생각은 뒤로 미루기로 결심이라도 한 건지, 카이온의 손이 불쑥 프레데리카의 드로우즈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애무도 무엇도 건너뛴 채 그의 커다란 중지가 곧장 그녀의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아악……!”
아무리 젖었다 한들 조금의 준비도 없이 불쑥 침입자를 받아들인 내벽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어제 그의 커다란 성기를 어거지로 받아들인 탓에 음부는 상당히 부은 상태였다.
프레데리카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안을 휘젓는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다. 대충 휘적거려 질 안이 넓어지는가 싶은 순간에 또다른 손가락이 하나 더 파고들었다.
프레데리카가 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파…… 흐윽…….”
“그래? 아파? 그런 것치고는 아주 물이 넘치는데?”
카이온의 손이 거침없이 앞뒤로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점점 질척이는 소리가 커졌다. 프레데리카의 비명도 점차 열기를 띠어갔다.
그녀의 발가락이 곱아들고 허리가 뒤틀리는 걸 카이온이 강제로 내리눌렀다. 단단히 박제된 나비처럼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프레데리카는 자꾸만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쾌감에 헐떡였다.
“멋대로 느끼면서 즐기면 곤란하지. 너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닌데.”
“흐으…… 아아, 제발, 그, 그만! 하앙……!
“흥분할 만큼 한 거 같으니까.”
카이온은 그대로 프레데리카를 번쩍 들어서는 테이블 위에 엎었다. 그녀의 다리가 힘없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대충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옆으로 치운 카이온은 두 손으로 드로어즈를 힘 주어 양쪽으로 당겼다. 종잇장처럼 천이 찢어져 버렸다. 엉덩이 사이의 골과 밀지가 찢어진 속옷 사이로 슬며시 보였다.
발로 프레데리카의 양 발을 툭툭 밀어 찬 카이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 잘 벌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원하는 좆, 지금 먹여줄 테니까. 프레데리카 양.”
“흐으, 잠, 깐만……. 아악!”
순식간에 뱃속으로 뚫고 들어온 거대한 살덩어리의 감각에 프레데리카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카이온은 제 하반신이 원하는 대로 마구잡이로 프레데리카 안에 추삽질을 해댔다.
콱콱 박아댈 때마다 테이블이 앞으로 점차 밀렸다. 프레데리카의 양 발 끝이 힘겹게 바닥을 지탱해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허둥대며 고개를 들려는데,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 이제는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는 채,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좆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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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1/2)
“으윽…… 윽……! 카, 이…… 잠…… 깐……!”
“그 입에 내 이름을 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헉, 어억……. 흐아……!”
“기분이 더러워져서 말이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카이온은 정신없이 허리를 놀렸다. 쫀득하게 감겼던 내벽이 그가 성기를 빼낼 때마다 딸려 나왔다 들어갔다. 마치 도구처럼 다루고 있건만, 그녀의 분홍빛 내벽은 그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꽉꽉 조이고 물어댔다.
카이온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고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기분 나쁜 사실이지만, 프레데리카의 몸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어젯밤이야 황망하게 당하는 바람에 그런 걸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가 주도해서 하는 중이었다. 대충 해버리고 말려고 했지만, 만족스러워서, 아니 그 이상이라서, 빠져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그게 기분이 나빠서, 그는 울컥하는 마음에 프레데리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온은 몸을 숙여 그녀의 귀를 물어뜯었다. 붉게 남은 잇자국이 마음에 쏙 들었다.
“현자님은, 생각보다 몸이 음란하네.”
“으흣, 으, 흐아아!”
“이 아래가 너무 열심히 내 것을 씹어대고 있는데? 그렇게 좋아?”
끅끅대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신음을 흘리던 프레데리카가,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읏, 응…… 조, 좋아…….”
“하하…….”
정말 이 미친 여자를 어떡하지. 카이온은 다시 프레데리카의 머리를 테이블에 박아버렸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어댔다.
저 여자랑 말을 더 섞으면 섞을수록 그마저도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안에서 절정이 점점 자라나는 걸 느꼈다. 조금 있으면 완전히 제 몸을 집어삼키고 폭발할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 데도 앞에서 불꽃이 펑펑 터지는 듯 눈이 부셨다.
그녀의 안이 있는 힘껏 카이온의 페니스를 조였다. 그 자극적인 감각에, 카이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윽……!”
급히 프레데리카의 몸에서 제 것을 빼낸 카이온이 어찌 할 새도 없이, 음경의 끝에서 희뿌연 정액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엉망진창인 꼴로 늘어진 프레데리카의 엉덩이와 등에 마구 흩뿌려졌다. 제 살결에 닿는 뜨끈한 점액을 느끼며 프레데리카는 연달아 몸을 때리는 쾌감에 바르르 떨었다. 급히 빠져나간 남자의 육봉이 아쉬운지, 벌어진 그녀의 아래가 꿈틀거렸다.
조금은 아연한 기분으로 카이온은 완전히 늘어진 프레데리카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는 급격히 기분이 저조해졌다. 고통스러우라고, 모멸감을 느끼라고 일부러 더 거칠게 굴었는데. 오히려 자신도 즐기고 프레데리카도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카이온이 막무가내로 구는데도…… 그의 목걸이를 단 한 번도 조이지 않았다.
대체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지.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아주 불쾌했다.
이것을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려야겠다.
몸을 추스를 기운도 없는 프레데리카를, 카이온이 번쩍 집어 들어 옆구리에 꼈다. 한창 달아올라 뜨거운 여자의 체온에 카이온은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프레데리카를 내동댕이쳤다. 엉망진창이 된 꼴로 그녀는 2층 복도에 나뒹굴었다. 끙끙대며 겨우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나 보려 하는데, 사납게 카이온의 방문이 닫혔다.
“하하…….”
프레데리카는 기운 없이 웃었다. 그녀는 제 몸을 살펴보았다. 찢겨나간 옷 하며, 몸에 묻은 정액이 옷에 엉겨 붙어 축축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잘됐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힘겹게 벽을 짚고 일어섰다. 학대당하다시피 한 음부는 후끈거리다 못해 쓰라렸고, 다리는 도저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후들거렸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프레데리카는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혼자 가기는 무리인 거 같네.”
그녀는 키득거리면서 중얼댔다.
“역시 잘한 선택이야. 마왕이라니.”
내가 완전히 망가져 버릴 때까지 이렇게 해주면 좋으련만. 프레데리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내 깔깔거리고 소리 높여 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녀 루시가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는 엉망이 된 프레데리카의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부축해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이끌었을 뿐이었다.
복도에서 프레데리카의 인기척이 사라진 뒤, 카이온의 방문이 잠시 열렸다. 그는 왈칵 일그러진 얼굴로 아무도 없는 복도를 바라보다가, 이내 문을 쾅 닫고 걸어 잠궈 버렸다.
쌍방으로 한 번씩 서로의 몸을 강제로 취한 이후, 카이온은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그 작은 여자에게서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 스스로도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또다시 앞에 나타나서는 제 다리 사이에 있는 물건을 원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자꾸만 치밀어 올랐다.
프레데리카와 섹스를 한다 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놀랍게도 프레데리카는 그 뒤로 사흘 카이온을 찾지 않았다. 또다시 지루한 날들이 이어지나 싶었다. 그러나 사흘 째 저녁, 루시가 카이온의 방을 찾았다.
“주인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자고 합니다.”
“생각 없으니 꺼져.”
“주인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자고 합니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주인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자고 합니다.”
루시는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한 말을 반복했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카이온은 루시의 머리통을 부숴버릴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프레데리카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하녀도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인형일 게 뻔했다. 분에 못 이겨 부숴 봤자 조잡한 장난감 하나 망가뜨린 꼴이 될 거다. 그는 이를 갈며 루시를 향해 다가갔다. 대충 방 밖으로 밀어버리고 문을 닫으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칠게 루시를 밀어내고 복도로 나섰다, 휘청거리던 루시는 곧 자세를 바로잡더니 묵묵히 카이온의 뒤를 따랐다.
식당이 있는 1층은 아주 희미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식당의 열린 문 틈으로는 아주 환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지난 사흘 전의 몰골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한 프레데리카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앉아 있다가 카이온이 온 걸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긋 웃으며 프레데리카는 그가 앉을 곳을 손짓해 보였다.
“어서 와서 앉아요. 식사 안 하는 거 알지만, 그래도 인간의 손님이 되었으니 손님 대접은 받아야죠.”
카이온은 코웃음을 치고 팔짱을 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이냐?”
“장난질이라니요. 먹을 걸로 장난치면 벌 받는데.”
“어차피 네가 나한테 원하는 건 내 몸뿐인데,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있나?”
“사람이 어떻게 씹만 하고 살아요. 밥도 먹어야지.”
프레데리카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았던 험한 말에 카이온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한 번 손짓했다.
“얼른 앉아요. 나 배고파요.”
말을 더 섞었다가는 뭔가 더 심한 말도 나올 것만 같아서, 카이온은 이번에는 잠자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두 사람이 모두 식탁 앞에 앉자, 하녀와 하인들이 재빠르게 음식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송이 감자 스프부터 시작해서, 찰지고 쫀득한 치즈에 토마토와 바질을 얹은 샐러드가 이어 나왔다. 프레데리카는 행복한 얼굴로 그것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뒤이어 나온 버터레몬소스를 얹은 대구살 구이도, 적당한 정도로 구워진 살치살 스테이크과 곁들어진 가니쉬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그 사이에 카이온은 대충 먹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크림 브륄레를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가져간 프레데리카는 곧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카이온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곧 두 사람의 앞에 놓인 마지막 식기까지 모두 치워지고, 남은 건 와인이 든 잔 뿐이었다. 프레데리카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지 몇 모금 마시지 않고 옆에 둔 채였다. 하지만 카이온은 이미 몇 잔이나 연거푸 마신 뒤였다. 그렇지만 취하지는 않았는지 말짱해 보였다.
프레데리카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잔 주둥이를 빙글빙글 쓸었다. 그녀는 카이온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참 자기 잔만 바라보았다. 카이온도 딱히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제 잔이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만 했다.
잔이 완전히 비자마자 카이온이 벌떡 일어섰다. 그가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리려 하는데,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만 앉아 봐요.”
“…….”
“할 얘기가 있으니까요.”
그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쨌든 프레데리카는, 그의 목숨줄을 쥔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카이온을 내버려두고 있다 한들, 언제 어떤 식으로 그녀가 그의 숨통을 조일지 알 수 없었다.
대화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카이온을 흘끔 바라본 프레데리카가 후후 웃었다.
“그렇게 싫어요?”
“내가 이런 치욕을 겪는 건 전부 네년이 날 속인 탓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속인 적 없어요. 나는 당신한테 거짓말 한 게 하나도 없는걸.”
“애초부터 현혹마법에 걸린 척 한게……!”
“난 그때 정말로 마법에 걸려 있었어요.”
두 사람의 눈이 맞부딪쳤다. 활활 불타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카이온이 두렵지도 않은지, 프레데리카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저 당신의 마법이, 내가 깰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을 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인간이 마왕의 마법을 깬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가능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 심장에 검을 찔렀지.”
그녀는 검지로 자신을 한 번, 카이온의 가슴팍을 한 번, 또 다시 자신을 한 번 가리키고는 빙긋 웃었다.
카이온은 열통이 터져 이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인간들이 순번을 정해 제 목을 날리러 오기 전에 성질이 뻗쳐서 죽고 말리라.
부글부글 끓는 카이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프레데리카는 더 예쁘게 웃었다.
“궁금한 거 있다고 했죠?”
“뭐가.”
“내가 왜 이러는지.”
지금까지 자꾸 말을 얼버무리기만 하던 프레데리카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적’을 입에 올리자, 카이온도 눈이 반짝였다.
차라리 이유라도 알고 이 미친 짓거리에 동참하는 편이 그의 정신건강을 위해 좋을 성싶었다.
곧장 경청하는 자세가 된 카이온을 보고 프레데리카가 코를 울리며 웃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할까?”
“궁금해하지 않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그건 그럴지도…….”
그녀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와인잔을 집어들었다.
식사 동안 거의 입에도 대지 않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 프레데리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후, 하고 내뱉는 숨에 포도주 냄새가 훅 풍겼다.
“나는, 말이죠.”
“…….”
“여기 사는 것들이 다 소멸했으면 좋겠어요.”
“…….”
“이 세상도 완전히 망했으면 좋겠고.”
여태껏 인간의 존립을 위해, 인간이 꾸린 군대의 선봉에 서서 마족을 무찔러 온 현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카이온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다시 한 번 읊조렸다.
“다 죽고 망해버렸으면. 그게 내 바람이에요.”
“그거랑 너와 내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 나름 연관이 있다고만 말해둘게요. 하여튼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힘내요. 당신의 힘을 되찾으려면, 나를 많이 만족시키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러면서 웃는 여자의 얼굴은 한 점 티 없이 맑아 보였다. 속을 털어놓은 게 후련한지 아주 활짝 웃으면서, 아예 신이 나서는 와인잔을 채워달라고 하녀에게 요청까지 했다.
이제 카이온은 완벽하게 확신했다.
저 여자, 확실히 미쳤구나. 저런 미친년을 상대로 이 꼴이 된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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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2/2)
겉모습만으로는 상대를 판단하기 어렵다더니……. 카이온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자리를 뜨려 하는데도 프레데리카는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게요?”
“볼 일 다 끝난 거 아닌가?”
“그래요, 가서 푹 쉬세요.”
카이온은 혹시나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붙잡고 옷부터 벗거나, 벗기는 게 아닌가 조금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산뜻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복잡한 기분으로 그녀를 보던 카이온은 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냅다 달아나는 그를 보며 프레데리카는 흐흥, 하고 웃었다.
“누가 잡아먹나.”
그녀는 와인이 남아 있는 잔을 밀어 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깜해진 창 밖으로 눈을 잠시 돌렸다가, 식당을 나섰다. 뒤에서 달그락거리며 그릇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참 평화로우면서도 현실적인 소리였다. 프레데리카는 그 소리가 끔찍해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야말로 누군가가 목덜미를 쥐어 채지 않을까 하는 사람처럼, 급히 발을 옮겼다. 2층까지 순식간에 올라간 그녀는 방문을 거칠게 닫아 걸어 잠궜다. 그 시간 뒤로 프레데리카는 아침이 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허허, 코카네스 후작, 진정하고 좀 앉아 보십시오.”
“진정? 언제까지 진정할까요? 현자 르데트가 지금 마왕에게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알게 뭡니까!”
왕성의 커다란 회의실에서는 비올렌의 노성이 연신 터져 나왔다. 잔뜩 흥분해 소리치는 그를 앞에 둔 재상과 대신들의 얼굴이 난감했다. 젊은 왕은 짜증이 어린 얼굴로 비올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의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올렌이 으르렁댔다.
“당장 르데트의 집으로 군사를 파견하는 데 동의해 주십시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쉬운 일은 뭡니까?”
“마왕의 처리 문제는 우리가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계속되는 도돌이표에 재상이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비올렌은 전혀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시선이 뭐가 문제입니까? 이 나라에 속한, 현자 르데트의 손으로 마왕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그자를 처분할 만한 권한을 주장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이미 르데트 님이 모두의 앞에서 나라 간의 협의를 거쳐 누가 어떤 식으로 마왕을 처분할지 정하라고 한 뒤에, 그자를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요. 우리야말로, 지금 그 발언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마왕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단 말입니다.”
“일단 가서 목을 치고 나면……!”
“그만, 그만.”
짜증과 분노가 어린 왕의 목소리에 대신들과 비올렌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왕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대다가 비올렌을 노려보았다.
“후작은 같은 주제로 언제까지 싸워야 직성이 풀릴 건가?”
“하지만, 전하!”
“신전에서도 마왕의 모가지를 노리기는 마찬가지야! 우리가 멋대로 먼저 처단한다면, 그 후폭풍은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전하…….”
“후작 그대가 모두에게 추앙받는 용사라 불린다 해도, 이런 문제에서 무슨 힘이 된다고!”
왕의 일갈에 비올렌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뭐라 되받아 치려다가, 그는 꾹 눌러 참았다.
왕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비올렌은 모두가 감사히 여기고 우러르는 ‘용사’이긴 했다. 최전선에서 마왕에 맞서 싸운 구세주였다.
하지만 용사의 이름이 빛나는 건 전쟁터뿐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나라와 나라 간의, 세력과 세력 간의 힘 싸움 사이에서 그는 쓸모가 없었다. 그저 상징으로 앉아 있을 뿐.
게다가 비올렌이 막무가내로 프레데리카가 속고 있다느니, 마왕의 목을 당장 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아무 데서나 자꾸 내뱉는 바람에 나라 차원에서도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왕명으로 대외적인 자리에서 이에 관련된 어떤 발언도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진 뒤에 그나마 조금 조용해지긴 했지만, 비올렌은 끊임없이 각료 회의 등에서 자기주장을 계속 펴댔다.
반항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비올렌은, 왕은 괘씸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놈의 힘으로 그나마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내곤 있지만……. 왕은 비올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에 승하한 선왕은 비올렌에게 무한한 감사를 품고 있었지만, 젊은 왕은 아니었다.
민초의 인기에 취해서 할 말 안 할 말 못 가리고, 심지어 왕의 권위도 깔아뭉개는 비올렌이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
왕은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로 비올렌에게 명령했다.
“그대가 현자 르데트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문제를 논하려던 게 아니야! 그러니 후작은 그 이야기 외에 할 것이 없다면 나가보게.”
“전하!”
“이 많은 인원이 언제까지 그 한 가지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가?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란 말이다!”
왕의 축객령에 비올렌은 이를 갈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몸짓에 맺힌 응어리가 다 드러나는 바람에, 왕은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회의장 밖으로 나가는 비올렌의 등 뒤로 왕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자식이……! 비올렌은 그것을 못 들은 척했다. 회의장 문이 닫히고, 복도에 홀로 남은 비올렌은 이를 악물었다.
손에 잡힌 검이 부르르 떨었다. 주인의 의지를 알아들은 건지, 공명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코카네스로 가 보아야겠어.”
비올렌은 걸음을 급히 옮겼다.
사실 비올렌은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을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코카네스로 향한 바 있었다. 이미 아르칸드의 마법으로는 프레데리카의 집에 갈 수 없단 사실을 알아버린 뒤라 말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많은 이들이 그를 찾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프레데리카에 대한 염려로 도저히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고향인 코카네스에 도착한 건 거의 나흘이 지난 뒤였다. 정말 쉬지 않고 말을 달린 탓에,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거품 같은 땀을 흘리는 말을 길가에 대충 버려두고, 비올렌은 프레데리카의 집으로 뛰었다. 심지어 자신이 돌아왔다고 부모님인 코카네스 백작 부부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마법으로 막혀 있다던 프레데리카의 집 주변은 고요했다. 비올렌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집을 바라보다가 곧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관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비올렌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레니……? 여기서 뭐해?”
“프레데리카……!”
커다란 체리나무 아래에 프레데리카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던 그 나무 밑이었다. 비올렌은 홀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을 뗐다. 또 한 걸음, 한 걸음. 그러다 마침내는 달음박질쳐서 그녀에게 다다랐다.
두 팔 가득 프레데리카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프레데리카를 보니 긴장이 탁 풀리는 듯했다.
“세상에, 레니……. 뭐하냐니까, 여기서? 이 몰골은 뭐야?”
“프리카…… 프리카…….”
그는 프레데리카의 어깻죽지에 코를 박고는 부벼댔다. 그녀가 말짱히 살아있음을, 그리고 제정신임을 확인했다. 프레데리카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그가 알던 것이라서, 비올렌은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비올렌 코카네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에 왔어?”
프레데리카가 정색을 하고 물으며 그를 밀어냈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냈다는 사실에 비올렌은 적잖이 충격을 받고 상처 입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는 무서운 얼굴로 프레데리카의 양팔을 잡고 캐물었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마왕을 왜 데려가! 그자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비올렌, 그게 무슨 소리야. 마왕이 뭘 어째?”
“무슨 생각으로 그 자식을 네 집에 데리고 온 거냐고!”
“……너 설마, 그것 때문에 지금 다 팽개치고 여기 온 건 아니지?”
“말해 봐, 프리카. 무슨 생각을 나 대신 회의에 참석해서, 마왕을 네가 데리고 있겠다고 한 거야?”
입이 떡 벌어진 채 비올렌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손을 들어 자신을 붙든 그의 손을 밀어 떼어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
“프레데리카!”
“나는 잠시, 마왕이 필요해. 어차피 마왕의 처리 문제로 다들 지지부진한 토론을 오래 해댈 텐데, 그 사이에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좀 사용하려고 한 것뿐이야.”
“그자는 위험해!”
“내가 이 사실을 몇 명에게 일깨워줘야 하는 걸까…….”
한숨을 폭 내쉰 프레데리카는 비올렌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은 건 나야. 잊지 마, 비올렌.”
“제발, 프레데리카. 마왕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제발…….”
“비올렌, 내 친구.”
그녀는 손을 들어 다정하게 비올렌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얼굴에는 뜻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전부 내 선택이고, 내 필요에 따른 일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네 눈에는 미친 짓으로 보일지 몰라도, 난 아니야.”
순식간에 뺨에 닿아 있던 따뜻한 체온이 물러났다. 비올렌은 급히 프레데리카를 다시 붙들려고 했지만, 그녀는 금방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너야말로 돌아가, 비올렌 코카네스. 네가 있어야 할 장소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왕의 옆이잖아.”
“프레데리카…….”
“다들 널 찾을 거야. 모두의 영웅, 우리의 구원자. 네 자리로 돌아가서 할 일을 해. 여기에 찾아오지 말고.”
그녀는 곧장 등을 돌려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그녀의 태도에 비올렌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달렸다.
팔을 잡아끌자, 프레데리카가 그 힘에 팔랑 뒤로 돌았다. 비올렌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마왕을 가져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
“그게 잘못된 판단이라는 걸 내가 꼭 알게 해 줄 거야.”
“비올렌.”
프레데리카가 웃었다. 놀랍게도 그 웃음에는 약간의 비웃음마저 어려 있었다. 비올렌은 그녀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상처받았다.
“적어도 현자 칭호를 가진 내가, 너보다는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 그만하고 이제 그만 돌아가.”
더 이상 그녀를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비올렌은 그녀를 놓았다. 프레데리카는 그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하늘하늘 나비처럼 점점 멀어져가는 프레데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비올렌은, 끝끝내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 버린 뒤에야, 비올렌은 자신이 프레데리카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대로 침울한 채 있을 수 없었다. 비올렌은 곧장 아르칸드와 연락을 취한 뒤, 다시 말을 달려 그의 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왕을 다시 알현한 날부터 줄곧 프레데리카에게서 마왕을 회수해 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왕과 대소신료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혼자 힘으로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비올렌은 결연하게 다짐하며 코카네스로 떠나기 위한 채비를 하러,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기까지 쓰고는, 지금까지 나온 씬의 수위가 적절한지 고민중입니다.
너무 과한 건 아니겠지요...?
좋은 하루 되세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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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1/2)
끙끙대던 프레데리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이마와 등이 모두 땀으로 축축했다. 마른 세수를 한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납으로 된 추라도 달아놓은 듯 몸이 무거웠다.
이불을 걷어치우자 냉기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손을 더듬거려 협탁에 놓인 촛대에 불을 붙이고, 침대 기둥에 걸어둔 숄을 어깨에 걸쳤다.
“잠은 다 잤네.”
힘없이 중얼거린 프레데리카는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당연하다는 듯 책상으로 향했다.
현자라는 칭호랑 썩 어울리지 않게, 프레데리카의 방에는 책 같은 건 거의 없었고 가구나 집기도 조촐하다 못해 휑할 정도로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노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에 기록한 페이지를 열고 그것을 눈으로 훑던 프레데리카는 한숨을 쉬며 펜을 들었다.
그녀의 손이 빈 페이지에 무언가를 기록해 나갔다. 무료한 듯, 덤덤한 듯, 그런 얼굴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지만,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한참 뭔가 쓰던 그녀는 손을 뚝 멈췄다. 잉크가 종이에 번져 큰 얼룩을 만드는데도, 프레데리카는 손을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펜을 놓았다. 노트도 다시 닫아 꽂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숄을 단단히 여며 쥔 채, 그녀는 방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고요하고 서늘했다. 걸음을 옮기며 프레데리카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세요. 프레데리카의 애정으로 마왕도 변할 거예요. 모두가 프레데리카를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 몸 바칠 테죠.”
마치 노래라도 하듯 흥얼대던 프레데리카는 돌연 싸늘한 얼굴이 되어서는 씹어 뱉듯 말했다.
“어디서 그런 개수작을. 사랑 같은 소리 하네.”
정말 사랑 같은 소리, 였다. 프레데리카는 마구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걸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런 건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프레데리카는 사랑을 하는 대신에, 모두와 함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왕의 방 앞이었다. 노크를 하는 대신에 그녀는 조용히 문 손잡이를 돌렸다. 카이온이 자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마왕이었고, 마족이었다. 마족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인기척을 분명히 들었을 테다.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문을 열고 카이온의 모습을 찾던 프레데리카는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안 잘 줄 알았어요.”
“너는 노크할 줄도 모르나?”
“이미 내가 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프레데리카 때문에 카이온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기로서니,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나?
소문의 프레데리카 르데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고상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아름다운 현자에 대한 소문을 마왕도 들은 적이 있었다. 8년 사이에 있었던 두 차례의 협상에서 먼 발치에서나마 보았던 프레데리카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정말이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상했다.
카이온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네가 그 프레데리카 르데트라는 사실을 영 믿을 수가 없군.”
“그래요? 나도 그래요. 아, 옆에 좀 누울게요.”
그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한 프레데리카는 다짜고짜 카이온의 침대에 누웠다. 카이온은 이제 이마를 짚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싯방싯 웃으며 프레데리카가 조잘댔다.
“중간에 잠이 깼는데, 잠이 다시 오지 않아요.”
“그래서.”
“누가 옆에 있음 잘 잘 거 같아서.”
“내가 겁 나지 않나? 내가 또 네 목이라도 부러뜨리면 어쩌려고?”
“알잖아요. 죽여도 안 죽는 거.”
마왕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내가 네 년의 사지를 모두 뽑아버린대도?”
“아무리 당신이 힘이 세더라도 지금 상태에서는 그런 괴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말해두는데, 목을 날려도 다시 살아나니까 하지마요.”
“뭐…….”
“됐고, 옆에 좀 누워 볼래요? 살끼리 맞닿으면 잠이 올 거 같은데.”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기는 프레데리카의 힘은 정말 보잘 것 없었지만, 카이온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옆에 눕고 말았다.
자꾸만 이 여자에게 말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이온은 당장이라도 프레데리카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과,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자신의 안에서 싸우는 걸 느꼈다.
서로 마주 본 채 누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창 밖의 흐린 달빛이 전부였다. 프레데리카는 웃는 낯으로 카이온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카이온의 콧대를 쓸어내렸다.
“잘생겼네요.”
“…….”
“마왕님을 사모하던 마족이 있다면 아쉬워서 죽으려 하겠네.”
“손 치우고 잠이나 자라.”
“조금만 더 보고요.”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듯, 프레데리카의 손이 카이온의 얼굴을 덧그렸다.
눈썹과 광대, 턱선과 볼과 눈꺼풀을 만지던 손가락이 마침내 입술에 닿았다. 조금 힘을 주어 아랫입술을 누르는 건방진 손가락을 카이온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황홀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마왕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인간이라니. 정말 괴이했다.
카이온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다 망하고 나면, 넌 뭘 할 생각인가?”
“네?”
“네 소원이 그거라 했잖아. 내게 힘을 돌려주면, 나는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텐데. 넌 죽지 않는 몸 아닌가?”
“…….”
“그럼 넌 뭘 할 거냐고.”
마왕의 얼굴에 닿아 있던 손이 움츠러들며 물러나려는 걸, 그가 붙들었다. 카이온은 그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
뾰족한 송곳니로 꽉 깨물자, 프레데리카가 놀라 탄성을 내뱉으며 몸을 움츠렸다.
“대답해.”
“……그거 알아요, 카이온?”
다정스레 마왕의 이름을 읊은 그녀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나를 좋아했어요. 또 내가 한 말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놀라워했죠.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나를 현자라고 불렀어요.”
“…….”
“그런데 나는 공부를 해서 아는 것도 아니고, 통찰력이 있어서 아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알아요. 이 머릿속에, 세상이 흘러갈 방향이 들어있을 뿐이에요.”
미래에 뭘 할 거냐고 물었는데 영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프레데리카를, 카이온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도 예전에는 말이죠, 이렇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나도 평범한 젊은이였죠. 아주 오래전에 말이에요. 사소한 것에 놀라고, 새로운 지식에 목말랐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미래를 꿈꿨어요.”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맞아요. 프레데리카 르데트에게는 미래가 없거든요.”
슬픈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카이온이 무심결에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놀란 프레데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생긋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상냥한 마왕님이시네.”
“자신에게 미래가 없어서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미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네 동료들은…… 당연히 모르겠군.”
뭐 그런 뻔한 소리를 하냐는 듯 프레데리카는 키득거렸다. 그녀는 꼼지락대며 카이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 팔에 한아름 남자의 몸을 끌어안은 그녀는 카이온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부볐다.
마족이라고 해서 체온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인간보다 조금 미적지근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온기가 있었다. 상대방의 체온이 프레데리카는 너무나도 좋았다.
“따뜻하다.”
“넌 내가 본 존재 중에 가장 괴상하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래서인지 기꺼이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군.”
그는 살짝 프레데리카를 떼어놓고는 물었다.
“내 힘은 언제 돌아오지?”
“흠…… 두 번쯤 했으니까. 한 번 스스로 느껴볼래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카이온은 순순히 자신의 몸 안을 타고 도는 기운을 느껴보았다. 금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놀란 기운에 프레데리카는 까르르 웃었다.
“있죠?”
“어떻게…….”
“나랑 할 때마다 아마 조금씩 회복될걸요.”
자신만만한 여자의 목소리가 카이온의 귓가를 때렸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나랑 자자고. 그럼 당신의 힘을 돌려주겠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 힘을 당신이 가져가는 거예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프레데리카가 몸을 움직여 카이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계속 속살거렸다.
“당신에게 힘이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내가 당신의 심장에 꽂아 넣은 검도 점차 삭아 없어질 거예요. 그게 완전히 없어지면, 더 이상 프레데리카의 포로 카이온이 아니라 마왕 카이온이 되는 거고요.”
보드라운 입술과 숨결이 자꾸만 카이온의 입술에 스칠 때마다 그는 심장이 거칠게 뛰는 걸 느꼈다.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아니면 이 괴상한 여자의 살결에 동요되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카이온은 당장이라도 프레데리카의 목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랬으면 애초부터 나와 함께 했으면 되지 않았나? 왜 인간의 편에 선 거지?”
“단순하게 그런 식으론 안 되거든요. 그렇게 쉽게 망가지는 걸 원하지도 않고. 더 많이, 더 심하게 고통받기를 바랐어요.”
“누가…… 인간이?”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서, 당신과의 전쟁을 기획한걸요. 종교에 미친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잘들 헛된 소리에 넘어가곤 하는지.”
그 덕에 세상은 정말 황폐해졌으니 됐어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에 담긴 만족스러움에 카이온은 처음으로 이 여자가 두려워졌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걸까. 그가 아는 한, 세상은 프레데리카 르데트를 우러르고 떠받들었다. 사랑과 증오로 세상의 감정을 나누자면, 그녀는 사랑을 받는 쪽이었다. 그런 이가 더 많은 고통 속에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길 원한다니.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떠한가. 카이온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인간과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몰락하길 바라는 건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에게 안배된 최고의 반쪽인지도 몰랐다.
그의 얼굴에도 곧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과정이야 어쨌든 네 계획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내가 당신에게 굴욕을 안겼어도요?”
“그 점은 아주 개 같지만. 과정이라 여기면 못 참을 것도 없지.”
“마왕님은 마음이 넓으시네.”
까르르 웃던 프레데리카의 웃음은 곧 마왕의 입술에 집어 삼켜졌다.
========== 작품 후기 ==========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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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2/2)
카이온의 키스에 프레데리카도 열정적으로 덤볐다. 마왕의 목을 꽉 끌어안은 프레데리카는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서 뺨과 코와 턱을 지분거리는 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품이 넉넉한 잠옷 자락 아래로 손이 쓱 밀고 들어오자, 프레데리카가 작게 신음을 내며 조잘거렸다.
“자러 왔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날 찾아온 목적이 정말 잠 자는 거였나?”
“진짠데.”
“어차피 나랑 몸 맞추는 게 목적이라 데려온 거니, 지금 한다 해도 불만은 없겠지.”
“목적이라 그러면, 그 말이 맞지만…… 으앗!”
순식간에 훌러덩 잠옷이 머리 위로 벗겨져 나가자, 프레데리카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카이온의 두 손이 그녀의 손을 양쪽으로 벌려 버렸다. 어느새 카이온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뭐하러 가리지.”
“그게…… 부끄러워서?”
“웃기는군.”
카이온의 입이 프레데리카의 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딱딱하게 발기한 유두를 물고 빠는 강렬한 느낌에 프레데리카가 허리를 뒤틀었다. 카이온은 그녀의 가슴을 모아쥐고는, 그 위의 작은 돌기 두 개를 혀로 정성껏 핥았다. 고양이도 아닌데 마왕의 혀는 까끌거려서, 그녀는 혀가 스칠 때마다 짜르르하게 등줄기를 관통하는 쾌감을 느꼈다.
할딱이며 도리질을 치던 프레데리카가 마왕의 얼굴을 붙들고 끌어올리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도리어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 밑가슴을 세게 빨아 붉은 자국을 곳곳에 남긴 그는 홀쭉한 배를 핥았다.
세 번째 정사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카이온은 그녀의 몸에서 묘한 향이 나는 걸 알아챘다. 그건 향수나 비누 따위로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자, 심장이 거칠게 날뛰어댔다. 점점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밀지 근처까지 간 것이 불안한 듯,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거기, 그러지 말고 올라와요.”
“이제 와서 뭘 민망해하는 거지? 약까지 먹여서 덮친 주제에?”
“그건, 당신이 영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아앗!”
속옷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음핵을 꾹 누르자, 프레데리카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명백하게 음욕이 담긴 것이었다. 그 반응이 카이온은 만족스러웠다. 음부를 가린 속옷까지 몽땅 벗겨내자,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앞에 온전히 나신으로 놓였다. 밤의 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그녀는 마왕에게 바쳐진 제물처럼 보였다.
나약하게만 보이는 이 여자를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제 아래에서 울부짖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카이온은 치솟는 욕망에 입술을 핥았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두 손을 각각 그녀 자신의 무릎에 가져다 놓고는 명령했다.
“다리 잡고 벌려.”
“으……. 이런 건…….”
그녀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그사이에 흥분해서 잔뜩 젖은 붉은 꽃잎을 카이온이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프레데리카가 더운 숨을 내뱉었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흥분해서는.”
“흐읏, 한 게 없다니…….”
“경험도 없었다면서 이렇게 잘 적시는 건 애초부터 네 몸이 음탕한 탓인가?”
“그런, 가아…… 하아……. 아, 앗! 잠깐……!”
여유로운 듯 말을 받던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이 제 아랫입에 입을 가져다 대자 놀라 파드득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배를 꽉 눌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혀가 음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애액을 핥아댔다.
프레데리카는 그 질척한 소리가 낯부끄러워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흥분감에 아래는 충실히 피가 몰려 아려왔다. 이렇게 핥는 것 말고, 좀 더 뭔가, 해주었으면…….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그녀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갑작스럽지만 나긋나긋한 침입자는 그 안의 굴곡을 하나도 빠짐없이 탐색하려는 듯 집요하게 핥고 찔러댔다. 프레데리카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자꾸만 다리가 오므라들려 했다.
“흐으…… 흐아아……. 카이, 카이온…… 거기…….”
“다리, 제대로 벌려야지.”
위협적인 낮은 목소리가 다리 사이에서 울렸다. 하지만 도저히 자꾸만 꼬이는 다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비부를 마구 문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순간,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프레데리카는 허벅지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아앗!”
“다리 제대로 벌리고 있으라니까.”
“하지만, 하지만…… 못 참겠어…….”
“안 벌리면 그때는 한 대로 끝나지 않을걸.”
남자의 으르렁대는 위험한 목소리가 울리자 프레데리카는 팔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 벌렸다. 울상이 된 그녀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 본 카이온이 웃음을 흘리며 칭찬했다.
“때려야 말을 잘 듣는군, 현자 나으리는.”
그녀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이번에는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프레데리카는 허리를 휘며 바르르 떨었다. 손가락이 능숙하게 그녀가 느끼는 부분을 찾아 찔러댔다. 커다랗고 굵은 손가락이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손가락들이 프레데리카의 속살을 쑤셔댈 때마다 찌걱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야릇한 소리를 들으며 프레데리카는 점점 더 달아올랐다. 그녀의 내부는 게걸스럽게 자꾸만 카이온의 손가락들을 끌어당겼다. 좀 더, 좀 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자극이 몸을 치받을 때마다 동그란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였다.
잔뜩 흘러내린 애액이 엉덩이를 타고 흘러내려 카이온의 침대 시트를 적셨다. 손가락이며 손바닥까지 야한 향기를 풍기는 액체로 적신 카이온이 어느 순간 손의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쑥 빠져나가는 손가락들이 아쉬워 프레데리카는 허리를 흔들고 그를 졸랐다.
그녀의 허리를 타고 앉은 카이온이 자신의 젖은 손을 프레데리카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보여, 이거? 네 안에서 나온 물이다. 그렇게나 좋았나?”
“으응…… 안 돼 이걸론…….”
“왜, 부족한가?”
프레데리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온의 커다란 페니스가 자신의 안에 박혔으면 하고 바랐다. 지난 두 번의 교합에서처럼, 그녀의 안을 마구 헤집어주길 원했다.
그녀의 바람을 읽은 카이온은 바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젖은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고 웃었다.
“빨아. 네 몸에서 나온 거니 네가 도로 가져가.”
이것을 모두 핥아 삼켜야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카이온의 거래 의사를 프레데리카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니, 순순히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녀는 카이온의 손을 붙들고는 단박에 그 젖은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손을 마치 어린아이가 막대사탕이라도 빨아 먹듯, 그것이 너무나도 달콤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은 프레데리카를 보며 카이온은 크게 웃었다. 프레데리카의 작은 혀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핥아내릴 때마다, 바지 속에 있는 좆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카이온은 그녀를 밀쳐내고는 거칠게 제 바지를 끌어내렸다. 미처 그것을 다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는 다짜고짜 거대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프레데리카의 안에 밀어넣었다.
“……!”
손속 없이 밀려들어온 남자의 살덩어리에 프레데리카는 숨이 막혔다. 윤활액이 잔뜩 있어서 카이온의 것은 어떤 저항도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이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꽉 조여오는 프레데리카의 내벽에 카이온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조이지 마라.”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흐아아!”
“젠장, 끊어질 것, 같단 말이다. 적당히 조여, 좀!”
“아앗, 앙! 하앙! 살, 살, 아아!”
카이온의 뜨거운 숨이 프레데리카의 얼굴로 쏟아졌다. 이를 악물고 추삽질을 하는 카이온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갔다. 프레데리카는 그의 힘에 자꾸만 자꾸만 위로 밀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팔이 단단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완전히 카이온의 품 안에 갇힌 프레데리카는 마음대로 몸조차 뒤틀지 못하고 그의 좆을 받아야만 했다.
쾅쾅 안을 거칠게 박아대는 커다란 살덩어리가 배 깊숙한 곳까지 와 처박힐 때마다 프레데리카는 참지 못하고 교성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좀 더 카이온의 페니스를 원하게 될 뿐이었다. 눈앞에 별이 날아와 번쩍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두 사람의 교합 부위에 거품이 자글자글 끓고, 그녀의 엉덩이 아래에는 실례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물 얼룩이 생겼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와중에, 그녀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통증에 소리를 질렀다.
“아악!”
“제기랄…… 네 안이 너무 비좁아…….”
“아파……!”
“네가 날 괴롭힌 대가야, 참아. 으윽…….”
또 한 번, 이번에는 반대편 어깻죽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피가 났을 거다, 양쪽 모두. 프레데리카는 아픔과, 그것으로는 가릴 수 없는 쾌락에 휩싸여 엉엉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생명수라도 되는 양, 카이온은 그것을 달다는 듯 핥아 올렸다.
그렇게도 쑤셔댔지만 여전히 비좁은 틈을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카이온이 물었다.
“어떻게, 처음인 거지?”
“뭐…… 무슨…… 아아앗!”
“네 주변을 맴돌던, 그 개새끼들이, 널 안 건드렸다니.”
“흐으, 하, 비올, 비올렌, 흐앙! 그, 만!”
“그래, 그것들. 읏…….”
제가 물어놓고 프레데리카가 용사의 이름을 내뱉자, 카이온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의 손이 프레데리카의 코와 입을 덮어 막았다. 예상하지 못하게 숨이 막힌 프레데리카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과 얼굴을 때리고 할퀴었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카이온의 얼굴이 짐승과 같았다. 프레데리카는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아래에서 몸이 꿰뚫리며 숨이 모자라 바르작거리는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의 눈에는 기묘하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몸을, 옆에 두고 그냥 있었다니. 그놈들은 전부 고자인 모양이군.”
점점 프레데리카의 눈이 풀려가는 게 보였다. 조금 있으면 기절하겠다 싶은 순간,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흐아……!”
급히 숨을 들이킨 프레데리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서 카이온의 음경이 불쑥 빠져나왔다.
더는 못하겠다 싶은 순간, 카이온의 손이 우악스럽게 프레데리카의 볼을 움켜쥐었다. 벌어진 입으로 애액 범벅이 되어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카이온의 페니스가 불쑥 들어왔다. 너무나도 커다란 살덩어리가 입안을 가득 채우자, 프레데리카는 또다시 숨이 막혀왔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컥컥대거나 말거나, 카이온은 입에 대고 사정없이 좆질을 해댔다. 이가 기둥을 긁고 지나가는 것조차 날카로운 쾌감이 되어 그를 즐겁게 했다.
꺽꺽대는 프레데리카의 입을 들락거리는 카이온의 것 때문에 그녀의 입 옆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줄줄 흘렀다.
더 이상은, 안 될 거 같아. 프레데리카의 눈이 뒤집히다 못해 서서히 감겨갔다.
그때 카이온이 페니스를 그녀의 입안에서 빼냈다.
“크읏…….”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이를 악물어 참으며, 카이온은 한 손으로 제 것을 꽉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의 몸에서 터져나온 흰 정액이 반쯤 정신을 잃어가는 프레데리카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마구 흩뿌려졌다.
남자의 씨물에서 나는 묘한 냄새를 맡으며,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평안하게 잠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시 세상과 정신을 단절시키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상관없나,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 작품 후기 ==========
이정도 내용은 괜찮다 하시니 그러면 용기를 가지고 더 써보겠습니다!
선추코 모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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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1/2)
다시 깨어난 건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이렇게 길게 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을 끔뻑이다가 손으로 얼굴이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보았다. 어디 한 군데에서도 손에 묻어나는 게 없었다.
분명 카이온의 정액을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잔뜩 묻힌 채 지저분해진 채로 기절했는데, 어떻게 된 걸까?
게다가 그녀가 지금 누운 곳은 본인의 방이 아니라 카이온의 방이었다. 그렇다면 밤새 여기에서 잔 건가? 의아한 기분으로 프레데리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오직 그녀 혼자였다. 카이온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하녀를 부를까 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어쩐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여기저기 아픈 몸도, 조금 아릿한 통증이 남은 아래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기지개를 쭉 폈다가 다시 도롱이 벌레처럼 몸을 움츠렸다.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파묻다 못해 아예 머리까지 쏙 집어넣은 프레데리카는 머리맡의 남는 베개 하나를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베개를 붙잡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엄지손톱이 기묘한 형태로 뭉개져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리고 카이온도 그녀의 손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엄지를 문질문질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불 속에서는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카이온의 체취가 났다. 그 안에서 프레데리카는 다시 한 번 잠을 청했다.
프레데리카가 잠에 빠져들던 그 시각, 카이온은 저택 안을 걷고 있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프레데리카를 험하게 대하는 바람에 그녀를 기절시킨 것에 더해 정액 범벅을 만들었던 밤을 떠올렸다.
그런 정도로 괴팍하게 여자를 깔아뭉개는 취미는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프레데리카가 열에 들뜬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난폭해지고 말았다.
성미에 맞지는 않지만 기절한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은 자신의 체액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처음 해보는 남의 시중에 몇 차례 버벅대긴 했지만 마침내 다시 깔끔해진 여자의 얼굴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프레데리카는 아기처럼 평화로운 얼굴로 쌕쌕 숨을 내쉬며 잘도 잤다. 시작이야 기절이었지만……. 어쨌든 잘 자는 사람을 굳이 깨워서 방으로 돌려보낼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침대를 내준 카이온은 방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밤을 지샜다. 잠을 잘 것도 아니니 딱히 불편한 것도 없었다.
미동도 않고 자는 프레데리카가 혹시 자신의 거친 행위 때문에 사실은 죽은 게 아닌가-안 죽는 건 알았지만!-하고 숨 쉬는지 확인 한 번 해본 것 외에는, 그는 한 번도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씩 하늘에 푸른 기미가 돋을 무렵, 카이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펴 보았다. 손 안에 아주 미약하나마 그의 마나가 맺혔다가 흩어졌다.
프레데리카의 말대로, 그녀와 몸을 섞고 나면 점차 그의 힘이 돌아오는 걸까? 분명 막 생포되었을 때만 해도 조금도 마나가 반응하지 않았었다. 심장에 느껴지는 검날은 여전히 생생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힘이 아주 조금이지만 돌아온 건 사실이었다.
섹스를 통해 힘이 회복되다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카이온은 이 모든 게 무슨 조화인지 프레데리카를 깨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프레데리카는 한 번 노려보고만 말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줄 거였다면 애초부터 했을 거다. 프레데리카는 입을 열면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양 말을 아꼈다.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보려 해도 어차피 죽지도 않는 괴물이니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계집일까.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알고 싶어졌다.
해가 뜨고 나서도 프레데리카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카이온은 방을 나와버렸다. 그녀가 깨길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대체 왜 프레데리카의 곁을 지키고 앉았었는지, 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방을 나서서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사이에 만난 건 자신이 목을 부러뜨려 고장냈던 하인 하나와 그의 방을 정돈해주는 하녀 하나였다. 처음 왔을 때 보았던 루시라는 하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 인형들은 어디에서 지내는 걸까. 그러고 보면 저택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하인과 하녀들도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집은 깔끔했고, 정원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정말 기묘한 장소였다.
두 층짜리 저택을 다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레데리카와 카이온 외에 사는 이가 없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자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고 발을 멈췄다. 카이온은 2층 계단참에 선 채로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그 끝에는 카이온의 방이 있었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프레데리카의 방이 있었다.
마족인 그는 인간의 예의와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족들도 개인의 공간을 침범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의식적으로 프레데리카의 방은 계속해서 피했다.
하지만 저 방이 궁금했다. 꽉 닫힌 그 문 너머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프레데리카의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카이온의 발이 천천히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멈춰 서서는 조금 망설이다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동그란 손잡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갔다.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자, 심심한 공간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티테이블에 의자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티테이블 위에 놓인 소담한 화병 하나와 책상 위에 일렬로 늘어선 몇 권의 책 그리고 노트, 잉크병과 펜이 전부였다. 자다가 카이온의 방에 온 이후로 누구도 방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인지 침대의 이불이 옆으로 젖혀져 있었다.
대체 방 꼬락서니가 이게 뭐지. 카이온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에서 방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그는 침대부터 시작해서 창문가에 놓인 티테이블, 그리고 책상까지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어차피 방 크기가 자그마해서 돌아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 닿는 곳에 있는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세계의 역사라는 제목의, 단순하다 못해 성의 없는 제목의 책을 펴 보았다. 저자는 프레데리카 르데트. 카이온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카이온도 이 책을 알았다. 이 책은 100년도 더 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었다.
프레데리카 르데트는 세계의 인과에서 벗어난 존재인가. 죽지 않는 몸, 100년도 전에 쓴 그녀 이름의 저서. 마왕의 마법을 스스로 풀 수 있는 자. 마족에게 걸린 제약을 조금씩이지만 해제할 수 있는 존재.
만약 카이온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런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프레데리카를 괴물이나 마녀 취급하며 두려워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가 신의 현신 같은 존재라며 숭배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어설픈 상태가 되었다 해도 카이온은 마왕이었다. 그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았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다.
다만 그 긴 시간 동안 이런 인간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만이 놀라웠다.
그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고 다른 것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바깥 부분에 꽂힌 벽돌색 정장의 노트 여러 권을 발견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 노트들은 꽤 자주 만진 모양인지 책등 윗부분의 가죽이 헤진 채였다. 카이온은 그중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노트를 꺼내서 맨 첫 장을 펼쳐 보았다.
그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카이온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어떤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나도 읽을 수 없는, 하지만 문자임은 확실한 그것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그렇게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이어지기만 하다가, 거의 끝이 되었을 무렵에 처음으로 아는 글자가 나왔다.
거의 소멸한 고대어로 적힌 문장이었다. 카이온이 소멸시킨 선대 마왕 때나 쓰던 것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그 문장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읽던 카이온은 마지막 문장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제 이 언어로 글을 쓰는 편이 더 쉽게 느껴지는 건, 내가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아닐까.]
어딘지 모르게 절망감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는 노트를 덮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두세 개쯤 건너뛰어 다른 노트를 꺼내 들었다. 아무 곳이나 펼치자, 이번에는 훨씬 익숙한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드문드문 프레데리카가 기록한 문장을 읽으며 종이를 넘겼다.
[미치도록 지루한 삶이 이어지는데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왜 사냐 하면, 그저 웃지요.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좌절감.]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괴이한 능력이 있음에도 프레데리카 르데트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잊지 마, 네 이름을.]
그리고 또박또박 적힌, 또다시 읽을 수 없는 문자.
이름을 잊지 말라고. 카이온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의 그녀의 진짜 이름이라는 걸까?
다른 노트를 꺼내려던 그는,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프레데리카의 하녀 인형인 루시가 서 있었다. 루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빤히 카이온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에게 남의 방에서 뭐 하냐고 묻지도 않고,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묵묵히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카이온의 존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인형의 태도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침대를 정리하는 루시에 등에 대고 그는 질문을 던졌다.
“네 주인은 일어났느냐?”
“아직 주무시는 중입니다.”
그건 카이온의 방에 가서 자고 있는 프레데리카를 확인했다는 뜻일까? 카이온은 더 이상 노트를 꺼내 읽어보기를 그만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가 나가거나 말거나 루시는 제 할 일을 하는 데만 열중했다.
프레데리카의 방에서 나온 카이온은 그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개목걸이를 채워 이곳으로 데려온 인간의 현자에게는 아주 분명한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스러운 지점이 바로 카이온에게 이상한 제안을 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걸 더 캐 보는 건 과연 나에게 이득인가. 카이온은 잠시 셈을 해 보았다. 프레데리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모두 아는 게 그의 힘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카이온에게 중요한 것은 힘을 되찾고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일이었다. 프레데리카가 원하는 건 이 세상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숨긴 비밀을 안다 해서, 두 사람의 목표가 달라질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프레데리카의 사정 따위를 알고 공감해줘야 할 이유를, 카이온은 찾을 수가 없었다. 굳이 찾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는 그저 프레데리카가 다리를 벌려주면 내키는 대로 취하고, 자신의 힘이 돌아오는 것만을 느끼면 되었다. 어차피 그녀도 애초부터 그렇게 제안을 하지 않았나.
더 이상 프레데리카의 이상한 점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카이온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한결 가볍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프레데리카가 잠들어 있을 방에 불쑥 들어간 그는 곧장 침대로 올라갔다.
“으응…… 뭐…….”
갑작스러운 침대의 출렁거림에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범인을 찾던 프레데리카가 제 위에 올라온 카이온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카이온은 그녀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대뜸 프레데리카의 입에 깊이 입 맞추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치는 마왕의 어깨를 프레데리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 마왕의 방에서는 두 남녀가 열락에 못 이겨 지르는 신음과 교성이 쉴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요란한데도, 누구 하나 그 방 근처에 얼씬거리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