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

                  

<-- 4. 아르칸드 -->

                                                            

그정도로 했으면, 알아서 나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저주하고 욕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프레데리카는 지금 제 앞에 와서 앉아 있는 비올렌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하나씩 앞에 둔 두 사람은 프레데리카의 집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제복에 훈장을 달고, 장군에게 내려지는 검을 패용한 채 프레데리카를 찾아온 비올렌은 그 어떤 때보다도 말쑥해 보였다. 그의 뒤에는 비올렌을 보좌하는 기사가 넷이나 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조금 수줍은 얼굴로 웃어 보인 비올렌이 운을 뗐다.

“갑작스럽게 수도에 가게 되어서 말이야. 폐하께서 날 찾으신다 하더라고. 프레데리카, 내가 없는 동안 몸조심하고.”

“……대체, 왜.”

그녀가 말한 ‘왜’는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하느냐’는 거였다. 그 수모를 겪고도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연인인 척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왜’를 뭐라고 알아들은 건지, 비올렌은 영 딴소리를 해댔다.

“글쎄다, 나도 폐하께서 왜 부르시는 건지 모르겠네. 당장 수도에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가 봐야 알겠지? 섭섭하겠지만 조금 참아줘.”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한 비올렌은 손을 뻗어 프레데리카의 손을 살짝 잡았다. 프레데리카는 뒤편에 시립하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흐뭇함이 묻어나는 걸 알아채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놓고 그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지금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코카네스 영지에는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것도, 프레데리카가 비올렌을 묶어두고 욕 보인 그날 밤 이후에 말이다.

비올렌은 당연히, 며칠이나 그녀를 찾지 않았다. 아무래도 충격이 커서 더 이상 얼굴을 안 보려 하나보다, 라고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프레데리카가 마음을 놓은 사이에 빠르게 퍼진 소문에 그녀는 뒷골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놀랍게도 비올렌은 겨우 사흘하고 반나절만에 프레데리카의 집을 다시 찾았다. 그런 비올렌을 보고 카이온조차 질린 얼굴을 했다. 반면 비올렌은 이제 카이온과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냥 마왕이라는 존재가 그 집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저 상냥한 얼굴을 하고는 프레데리카의 손을 꼭 붙잡을 뿐이었다.

‘난 괜찮아.’

그 말에 질린 프레데리카가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아예 그녀를 증오해 버리라는 듯, 프레데리카는 더 심한 짓을 해댔다. 도무지 비올렌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그를 몰아붙였다. 온갖 모욕을 주길 꺼리지 않았고, 그의 앞에서 카이온과 질펀하게 뒹굴었다.

하지만 도리어 어느 밤 프레데리카의 방에 숨어든 비올렌이 한 말에, 그녀는 제 친구를 떼어낼 방법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카, 오늘도 날 묶어줄 거야?’

스스로 그녀의 개가 되길 원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프레데리카는 꽤 질려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잘 달래 돌려보내려 하거나, 적당히 능욕하고 그만두려고 하면 눈을 빛내며 매달리기도 했다.

‘내가 싫어? 응? 질렸어? 그러지 마, 제발. 날 버리지 마.’

보다 못한 카이온이 억지로 떼어놓으려다가 하마터면 칼부림이 날 뻔도 해서, 프레데리카는 비올렌이 올 때마다 성심성의껏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괴롭힘당하는 게 성질에 맞는 모양인지, 비올렌은 프레데리카에게 매도당하면서 매번 절정에 달했다.

어떤 식으로 치욕스럽게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에 더해, 남들 앞에서는 이렇게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연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프레데리카는 그런 비올렌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멀끔한 모습으로 생긋 웃는 비올렌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슬쩍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려 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붙들었다. 조금 아플 정도로 손이 잡히자, 프레데리카의 눈꼬리에 주름이 잡혔다.

“레니, 아파.”

“아, 미안. 잠시라도 헤어진다 생각하니 아쉬워서 그만.”

미안, 하고 속삭이며 비올렌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때마침 그의 뒤에 선 기사 하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아, 벌써.”

“늦었겠다, 비올렌.”

프레데리카가 일부러 서둘러 일어나며 그를 전별하려 하자, 비올렌은 아쉬움에 미적대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가 일어나자, 기사들이 발을 부딪치며 다시 한 번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런 부하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비올렌은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빨리 돌아올게.”

“음……. 그래…….”

“돌아오면, 곧장 찾아올게.”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프레데리카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애써 눌러 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탕 과자라도 붙들 듯,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의 손을 소중히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그 손등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열기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프레데리카는 입매를 팽팽히 당겼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프레데리카와의 바뀌어버린 관계가 그의 안에서 무언가를 망가뜨린 모양이었다.

잔혹하던 8년의 전쟁도 바꾸어놓지 못했던 비올렌의 맑은 눈빛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끈적한 욕망과 집착이 그 안에 가득 고여 있었다.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프레데리카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연인 행세, 그까짓 것 그만두어도 그녀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건만. 순수하던 비올렌을, 그녀의 목적을 위해 가장 저열한 방법으로 ‘망가뜨렸다’는 죄의식이 자꾸만 프레데리카의 발목을 잡았다.

정말 어렵게 프레데리카의 손을 놓은 비올렌이 거의 끌려가다시피 부하들과 나가고 나자, 그제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떨궜다. 괜히 골치가 아파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점점 집착이 심해져가는 듯하던 비올렌이 강제로 떠나게 되었단 사실 하나뿐인가 싶었다.

비올렌이 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이온이 응접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드디어 갔나 보군.”

“……그러게요.”

프레데리카가 끙, 하고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에 기대어 선 카이온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카이온의 여유롭던 낯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프레데리카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온이 급히 프레데리카를 향해 다가왔다.

“왜 그래요?”

“가만히 있어라.”

카이온의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코를 눌렀다. 그가 하는 행동에 프레데리카는 제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지 알아차렸다. 코 아래와 입술, 턱을 타고 뜨끈한 피가 주르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비올렌에게 착실하게 모욕을 준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네.

프레데리카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사람처럼 흐, 하고 웃었다. 그녀가 웃자, 카이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코피가 흐르는 게 그렇게 좋나?”

“그냥 좀 웃겨서.”

“그 찰거머리 같은 놈이 수도로 떠났으니 그 사이에 넌 좀 쉬는 게 좋겠다.”

“하하하.”

“그렇게 밤마다 저 짐승 같은 놈을 상대하니 몸이 남아날 리가.”

혀를 차며 비올렌을 욕하는 카이온의 말을 듣고 있으니, 프레데리카는 폭소를 터트리고 싶어졌다.

“카이온, 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

“네가 계약을 이행하기도 전에 저 개새끼 때문에 복상사할까 봐 걱정하는 거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 두시고…… 이제 멈춘 거 같은데 놔 줘요.”

제 머리를 붙든 마왕의 손을 프레데리카가 슬쩍 밀어냈다. 카이온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의 엄지가 프레데리카의 코 밑을 쓸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혀로 핥는 카이온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맛있어요?”

“……생각보다는.”

“다행이네. 그럼…… 다 핥아서 먹어주면 안 되나, 응?”

“시끄럽다.”

넌 좀 쉬어야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걱정 어린 핀잔을 던진 카이온이 프레데리카를 번쩍 안아 올렸다. 두 팔에 가뿐하게 들려진 프레데리카는 까르르 웃으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마왕의 한숨이 그녀의 정수리에 와 닿았다. 그래서 프레데리카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도착한 비올렌은 곧장 왕을 배알했다. 프레데리카의 앞에서 보였던 말랑하고 다정한 표정 따위는 어딘가에 집어치운 그는, 살벌한 얼굴을 한 채 왕의 앞에 부복했다.

“일어나게.”

왕이 심드렁하게 명령하자마자 비올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을 바라본 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왕이 물었다.

“영지에 내려간 뒤에 영 소식이 없어서, 직접 보고 얘기 좀 하려고 불렀네만.”

“…….”

“그게 꽤 고까운 모양이로군, 그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뚝뚝하게 답하는 비올렌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걸 참으며 왕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저 건방진 시골의 애송이의 이름이 그렇게까지 드높지만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비올렌을 칭송하고 따르는 건 왕에게 위협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비올렌을 어떻게든 짓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존경받는 영웅을 억지로 굴복시키거나 제거했다가는, 왕이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마왕이 죽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무기인 비올렌을 망가뜨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왕은 참아야 했다. 왕은 심호흡을 하고는 되도록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내가 후작의 소식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영지에 내려갔으면, 그곳에 있을 현자 르데트와 그녀가 감시하고 있을 마왕도 만났을 텐데.”

프레데리카의 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비올렌의 몸이 꿈틀했다.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반응하는 개처럼, 제 가랑이 사이에 달린 물건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려는 걸 알아챈 비올렌은 가까스로 음심을 눌렀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헛기침을 한 비올렌은 왕의 물음에 답했다.

“현자 님은 충실하게 본인의 직무를 수행 중이셨습니다.”

……마왕과 밤낮없이, 몸을 섞으면서 말이지.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을 안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데리카를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치솟는 건 당연했다. 마왕 따위에게 그녀의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은데, 심지어…….

“마왕은 여전히 무력한 상태이고, 도망갈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합의가 이루어져 그자를 처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래, 그건 당연한 일이지. 하물며 지금 내 영토에 있는 마왕을 내 이름으로 처단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노릇이고.”

왕의 말에 비올렌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디 빨리빨리 밀어붙여서, 마왕을 죽여버렸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혹시, 카이온이 죽으면 프레데리카가 슬퍼하는 건 아닐까? 비올렌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매섭게 질책했다. 마왕은 인간이 아니었다. 애정을 주거나 할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프레데리카가 잠시 그의 몸을 취한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쾌락을 위한 것일 뿐, 마왕에게 마음을 주어서일 리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비올렌의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새 챕터, 아르칸드 시작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트시그널도 넘넘 감사해요〉ㅅ〈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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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영양가 없는, 주로 왕의 한탄과 짜증 그리고 의심 섞인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한 뒤에야 비올렌은 마침내 알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알현실에서 나오자마자 목 끝까지 채운 제복 재킷의 단추를 풀고 한숨을 쉬었다.

그저 대화만 나눴다고 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의 부정적인 기운을 내내 받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바짝 입이 마르고, 목이 탔다.

비올렌은 신경질적으로 긴 회랑을 성큼성큼 걸었다. 어느새 그의 뒤에 따라붙은 기사들은 그들의 상관이 영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는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생각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코카네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비올렌은 당분간 수도에 묶여 있을 신세였다.

‘후작, 그대는 영지를 돌볼 책임 외에도 이 나라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통솔해야 하는 역할도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들이 나의 충성스러운 병사가 되도록 애써야 하지 않겠어?’

프레데리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반쯤은 멋대로 코카네스로 돌아갔던 책임을 왕이 묻겠다는데, 그의 신하된 입장에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작위나, 직위 따위 받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거부권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비올렌은 단정히 빗어 올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프레데리카가 이렇게 자신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쥐어 뜯었던 밤이 떠올랐다. 그녀의 달뜬 숨결이 눈가와 볼에 와 닿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때를 떠올리자 왕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대신 아랫배가 후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곁에 마왕을 두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비올렌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사이에 그가 확인한 사실은, 카이온이 프레데리카를 해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런 면이 비올렌을 더 짜증 나게는 했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에 프레데리카는 계속 카이온을 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나도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회랑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비올렌은 거기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상대방의 이름을 외쳤다.

“아르칸드!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아, 비올렌. 수도에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수줍음 많은 대마법사는 비올렌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올렌이 덥석 손부터 붙잡자, 아르칸드의 얼굴에는 대번에 홍조가 돌았다.

알아 온 시간이 그렇게나 긴데도 아르칸드는 항상 부끄러워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와는 딱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비올렌이 먼저 다가가서 치댄 끝에 바뀐 게 그나마 이 정도였다.

“당연히 마탑으로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는 어쩐 일입니까?”

“의뢰를 받은 게 있어서 잠시 왔습니다만, 비올렌과 만나다니…… 기쁘네요.”

수줍지만 확실하게 기쁨을 표현하는 아르칸드를 보자 비올렌도 매우 행복해졌다.

비올렌은 당연히 이번에도 자신이 먼저 그를 자신에게 배정된 사무실로 초대해서 차를 대접해야 할 거라 생각했다. 전쟁 동안 거의 10번 중 9번은 비올렌이 아르칸드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아르칸드 쪽에서 먼저 비올렌에게 초대의 말을 건넸다.

“제, 연구실에 가서…… 차 한 잔 하시겠습어요? 궁금한 것도 많고요.”

“아, 연구실요? 연구실이 있어요? 그나저나 정말로 지금 날, 먼저 초대한 겁니까?”

반색하는 비올렌과 눈이 마주친 아르칸드의 얼굴이 다시 불타는 듯 붉어졌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하지만 항상 초대는 내 몫이었잖아요!”

“그랬던가요. 하하, 기억이 잘…… 흠흠. 그럼 가실까요?”

기꺼운 마음으로 비올렌은 아르칸드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법사의 뒤를 따라가는 용사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직 찻잔을 앞에 두지도 않았는데 조잘거리기 시작한 비올렌을 흘끗 돌아보며 아르칸드도 슬며시 웃었다.

두 사람이 아르칸드의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의 연구실 한쪽에 놓인 티테이블에는 따뜻한 차가 준비되는 중이었다. 아마도 아르칸드가 마법을 부린 모양이었다.

허공에 홀로 뜬 찻주전자가 우아하게 찻물을 두 개의 잔에 따르고는 살포시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금테 두른 접시에는 갓 구워진 듯 보이는 작은 쿠키들이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언제 봐도 신기한 모양인지, 비올렌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들을 좇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르칸드가 그런 순수한 모습을 내보이는 비올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정다감하고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러다가 곧 비올렌이 탄식을 내뱉으며 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르칸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대체로 비올렌이 이야기하면 아르칸드는 들었는데, 아무리 말이 길어져도 마법사는 끈기 있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마침내 코카네스와 프레데리카, 그리고 마왕에 이르렀을 때였다. 비올렌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고향을 매우 사랑하시는 모양이에요.”

“그것도 그렇지만, 프리카가 걱정이 되어서요.”

아르칸드는 소리 없이 입 속으로 프리카, 하고 말을 굴려보았다.

비올렌의 곁을 지켰던 그 고요한 현자를 오로지 이 남자만이 프리카라고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유대가 아르칸드는 종종 부러웠다. 태어나면서부터 마법사들 사이에서 거의 홀로 크다시피 한 그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정하고 친절한 듯 보였지만, 비올렌에게만은 분명 예외인 지점이 있었다. 그의 스승이면서 친구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비올렌의 어리광도 장난도 모두 받아주었다. 조금 더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비올렌에게만이었다.

한 발 뒤에 물러선 자리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르칸드는 8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비올렌의 자리에 자신이 있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프레데리가카 돌아갈 곳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가 자신에게도 좀 더 따스하게 웃어주고, 손을 어루만져주길 바라곤 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어쩐지 프레데리카에게 죄스러워서 단 한 번도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프레데리카가 마왕에게 현혹되어 갔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모두가 무력함을 느꼈지만, 아르칸드의 것은 조금 궤가 달랐다. 그는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대마법사라 불리는 사람이었고, 당연히 마왕의 마법을 파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아르칸드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력한가를 알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프레데리카를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비올렌과의 긴 대화 끝에 이제야 그가 원하는 화제가 왔기에, 아르칸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레데리카 님은, 음, 별일 없이 잘 지내시나요?”

“뭐, 그렇죠.”

다른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르게 미묘하게 짧은 대답과 그 속에 숨겨진 경계심이 느껴졌다. 아르칸드는 저도 모르게 빤히 비올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르칸드는 자신이 좀 예민한 건가, 하고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서신을 몇 번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더라고요.”

“서신…….”

“분명 돌아가시기 전에는 서신을 보내도 되겠냐는 말에 그러라 하셔서…….”

“왜요? 뭐가 궁금했는데요?”

이번에는 적의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르칸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뜩 날을 세운 비올렌이 마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아르칸드는 약간 당혹감을 느끼면서 답을 했다.

“마법적인 부분에서, 궁금한 것도 있고 잘 지내시는지, 안부도 물을 겸이요.”

“그녀는 잘 지냅니다. 그리고 마법적인 부분이라니. 프레데리카가 마법에 대해서 아르칸드보다 잘 알 리가 없잖아요?”

“비올렌, 하지만 그때 내가 당신을 그녀의 집으로 보내려 할 때 막혔잖아요. 기억나지 않나요? 그리고 마왕이 그녀에게 건 현혹 마법을 어떻게 깼는지도…….”

“아니, 그녀는 마법에 대해 몰라요. 아르칸드,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프레데리카는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는 잘 지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대놓고 면박을 주는 비올렌 때문에 아르칸드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마왕에게 프레데리카가 끌려갔던 그날 아르칸드는 자신의 속에 잠들어 있던 연정만 느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도 알아챘다.

그러니,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에 대해 조금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이건 과했다.

눈만 끔뻑거리다가, 아르칸드는 슬며시 눈을 돌렸다.

뭔가 있다. 프레데리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든, 마왕에게든, 아니면 둘 다에게든 문제가 있는 거다. 거기에 비올렌도 얽혀 있고.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비올렌의 반응은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비올렌에게 프레데리카에 대한 일을 더 묻는 건 그를 더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게 과연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아르칸드의 판다는 부정적이었다.

아르칸드는 웃는 낯으로 다시금 제 앞에 마주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별일 없이 지낸다는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놓이네요. 그리고 비올렌 말이 맞아요. 마법에 대해서 그녀에게 묻다니, 좀 지나쳤죠.”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비올렌이 그만큼 프레데리카 님을 아끼는 마음이 커서 그런 거겠죠. 괜히 이쪽으로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요.”

“알겠어요. 아. 수도에 있는 동안 지낼 집은 구했습니까?”

무난한 화제로 말을 돌리자, 비올렌은 얼른 따라왔다. 아르칸드는 적당히 대화를 이어나가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비올렌 코카네스가 수도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 기간은 대략 한 달가량이었다. 그정도라면 이쪽에서의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내려가서 프레데리카와 대면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눌 시간으로 충분했다.

불꽃이 튀길 것 같았던 짧은 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자, 두 남자의 대화는 평이하게 돌아왔다. 마침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마치고 나서, 아르칸드는 비올렌을 전송했다.

문을 닫고 연구실에 혼자가 된 아르칸드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흐으…….”

자신의 척추 하나하나를 훑으며 올라오는 마왕의 혀를 느끼며 프레데리카는 진한 숨을 내뱉었다. 까끌까끌한 카이온의 혀가 피부를 긁으면 온몸이 짜릿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느릿하게 그녀의 등을 맛본 카이온이 슬쩍 뒷목을 물었다. 프레데리카는 끙끙대며 그의 이가 제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는 그 촉감을 즐겼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가 카이온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달아오른 얼굴과 풀린 눈이 이미 몸에 잔뜩 쌓인 흥분감을 대변해주었다. 그 얼굴이 만족스러워서 카이온은 낮게 웃으며 그대로 프레데리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입맞춤을 저지하고는 그의 왼쪽 가슴에 제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검의 기운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카이온.”

“왜 그러나.”

“검이 반은 녹은 거 같아요.”

“……그래.”

“이제 뿔 정도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힘이 생기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마왕이 제 힘을 드러내지 않는 건지, 프레데리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들은 카이온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만, 서서히 그의 잘려나간 뿔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그의 몸을 감싸고, 두 개의 뿔 쪽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당연히 원래의 모습으로 커다랗게 자라날 거라고 생각했건만. 프레데리카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과 달리, 카이온의 머리에 달렸던 뿔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밋밋해진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아니, 왜……?”

“손바닥은 다 나았나?”

“손바닥?”

질문에 카이온이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에 프레데리카는 무의식적으로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비올렌을 묶어 두었던 그날 밤, 카이온의 뿔에 몇 번이나 긁히고 찢어져 상처가 났었다. 하지만 손바닥은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물론 흉은 좀 졌지만.

그녀는 카이온의 눈 앞에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였다.

“당연하잖아요. 그 상처가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 난 죽지도 않는다고요?”

“다 나았다니 다행이군.”

뭐……? 카이온이 한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입술에 겹쳐오는 카이온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휘감겨오는 상대의 혀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프레데리카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작품 후기 ==========

세 번째 남주가 등장했습니다!

내일도 열심히 쿵떡쿵떡:D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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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

자신의 척추 하나하나를 훑으며 올라오는 마왕의 혀를 느끼며 프레데리카는 진한 숨을 내뱉었다. 까끌까끌한 카이온의 혀가 피부를 긁으면 온몸이 짜릿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느릿하게 그녀의 등을 맛본 카이온이 슬쩍 뒷목을 물었다. 프레데리카는 끙끙대며 그의 이가 제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는 그 촉감을 즐겼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가 카이온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달아오른 얼굴과 풀린 눈이 이미 몸에 잔뜩 쌓인 흥분감을 대변해주었다. 그 얼굴이 만족스러워서 카이온은 낮게 웃으며 그대로 프레데리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입맞춤을 저지하고는 그의 왼쪽 가슴에 제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검의 기운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카이온.”

“왜 그러나.”

“검이 반은 녹은 거 같아요.”

“……그래.”

“이제 뿔 정도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힘이 생기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마왕이 제 힘을 드러내지 않는 건지, 프레데리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들은 카이온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만, 서서히 그의 잘려나간 뿔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그의 몸을 감싸고, 두 개의 뿔 쪽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당연히 원래의 모습으로 커다랗게 자라날 거라고 생각했건만. 프레데리카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과 달리, 카이온의 머리에 달렸던 뿔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밋밋해진 머리로 손을 뻗었다.

“아니, 왜……?”

“손바닥은 다 나았나?”

“손바닥?”

질문에 카이온이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에 프레데리카는 무의식적으로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비올렌을 묶어 두었던 그날 밤, 카이온의 뿔에 몇 번이나 긁히고 찢어져 상처가 났었다. 하지만 손바닥은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물론 흉은 좀 졌지만.

그녀는 카이온의 눈 앞에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였다.

“당연하잖아요. 그 상처가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 난 죽지도 않는다고요?”

“다 나았다니 다행이군.”

뭐……? 카이온이 한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입술에 겹쳐오는 카이온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휘감겨오는 상대의 혀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프레데리카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씩 두 사람 사이의 열기가 짙어져 갔다. 부드러웠던 키스는 점차 격렬한 것으로 바뀌었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카이온을 달래듯 받아주던 프레데리카는 처음으로 카이온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항상 잘려나간 뿔 때문에 제대로 헤집어보지 못한 마왕의 머릿결은 그 촉감이 매우 매끈하고 좋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기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유영하다가 흘러나갔다.

내 머리는 이제 꽤 푸석해졌는데. 프레데리카는 이제 제 빛깔도 잃어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푸흐, 하고 웃었다. 그녀가 웃자, 카이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머리를 매만지더만 웃다니, 이건 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할까 하던 카이온은 고민 대신 그녀의 몸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손에 가득 잡히는 가슴을 주무르다가,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자, 프레데리카가 허리를 비틀었다. 이제는 이 정도의 자극만으로도 금세 흥분해 버렸다. 프레데리카는 젖어드는 다리 사이를 느꼈다. 그녀가 두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우고 바짝 붙여오자, 이번에는 카이온이 후후, 하고 웃었다.

단단한 허벅지가 음부를 강하게 자극하자, 프레데리카가 기대감에 가득 찬 신음을 토했다.

“흐아, 좋아아…….”

“빨리 내놓으라고 보채는 솜씨가 늘었어.”

“하지만…… 이걸 안에다 넣으면, 너무 좋은걸…….”

가득 차는 느낌이라서. 프레데리카의 손이 핏줄까지 불뚝 선 카이온의 페니스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라도 만지는 듯한 손길에 카이온은 눈을 내리깔고 신음했다. 그녀의 손길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걸 보면, 이미 자신 또한 프레데리카에게 중독될 대로 된 게 분명했다. 친구라는 허울 좋은 명칭을 버리지 못하는 멍청한 개새끼를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제 것을 어루만지는 프레데리카의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고정해버린 카이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다른 애무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밀어 넣었지만, 프레데리카는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열로 몸을 떨며 그의 좆을 받아들였다.

카이온의 몸짓은 순식간에 격렬해졌다. 빠르게 이어지는 추삽질에 프레데리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리며 울부짖었다.

“흐아! 아, 으흣! 빨, 빨랏, 아! 아앙!”

“너무, 윽, 조이지 마.”

“아앗! 흐아앙! 내, 내가, 아! 그러려, 는, 게! 히익……!”

금세 두 사람이 맞닿은 부분에 부글부글 흰 거품이 들끓었다.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건지, 프레데리카의 엉덩이 아래 시트에는 커다란 물 얼룩이 생겼다.

쏟아져 들어오는 열락에 프레데리카는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눈앞이 핑 돌면서 자꾸만 시야가 점멸했다. 그저 쾌감 때문인가 생각했지만, 어쩐지 귀도 먹먹해지고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숨이, 깔딱거렸다.

예민하게도 프레데리카의 이상을 알아챈 카이온이 급히 제 것을 그녀의 몸에서 빼냈다. 뜨거운 열기가 단박에 사라지자, 그것을 놓친 아쉬움 때문에 그녀의 밑이 벌름거렸다. 프레데리카의 몸이 충실하게 남자와 맞붙어있길 원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의식은 아득해져갔다.

“프레데리카, 정신 차려라!”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멀리에서 카이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둔한 피부에 무언가 닿았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섹스하다가 기절이라도 하는 건가. 프레데리카는 스스로가 좀 우스워졌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프레데리카를 바라보는 카이온만 다급했다.

성교로 인한 쾌락으로 정신을 잃는 그녀를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숨도 약해졌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뺨을 쳐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카이온은 이를 갈며 그녀의 명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힘을 살짝 불어넣었다. 프레데리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의 마기에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차피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왕의 마기를 몸에 넣는다 한들 죽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시커먼 기운이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카이온에 눈에만 보이는 그 기운인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휘감고 돌았다.

다시 그 기운이 명치에 모인 순간이었다. 프레데리카가 눈을 번쩍 뜨더니만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흐으윽!”

“정신이 드나?”

“허윽, 헉…… 대체……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프레데리카는 영 모르는 눈치였다. 카이온은 그녀를 반쯤 일으켜 앉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프레데리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정리해주며, 카이온이 답해주었다.

“네 상태가 이상해져서 내 기운을 넣어서 강제로 깨웠다.”

“내가, 이상해졌다고요?”

“숨도 점점 약해지고 몸도 차가워졌다. 꼭…….”

죽으려는 것처럼. 카이온은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프레데리카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묘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그랬구나. 고마워요, 카이온.”

“……좀 쉬는 게 좋겠군.”

“그럴게요. 당신 말대로 자야겠어요.”

이불속으로 꼬물꼬물 파고드는 프레데리카의 모습을 카이온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 때까지 그는 자리를 지켰다.

카이온이 옷을 갖춰 입고 방 밖으로 나올 때였다. 계단으로 루시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카이온을 보더니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에게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다.”

“손님이 와 계셔서 그런데, 깨워도 괜찮을 상태이십니까?”

“아니, 곤란하다.”

루시는 당황하거나 난감해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꾸벅 숙여 보였다. 몸을 돌리는 하녀 인형을 바라보던 카이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무표정한 인형의 얼굴이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온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가서 대신 만나보지.”

놀랍게도 루시는 카이온에게 주제넘다느니, 그럴 필요 없다느니 같은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대로 하시라는 듯, 한쪽으로 비켜설 뿐이었다.

“응접실에 계십니다.”

“알았다.”

그는 거침없이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가까이 갈수록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냈다.

프레데리카의 곁을 지키던 세 똥개 새끼들 중 하나가 여기 온 모양이었다. 수도로 간 비올렌의 기운은 아니었다. 불쾌한 신의 기운을 가진 성기사 놈도 아니었다.

마왕의 마법에 대적하던 인간의 마법사가 응접실 문 너머에 있었다.

기척 한 번을 내지 않고 카이온은 벌컥 문을 열었다. 반가운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하려던 아르칸드는, 예상하지 못한 자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마왕?”

“네놈은 또 무슨 일로 여길 찾아왔느냐?”

“대체, 이게 무슨…… 프레데리카 님을 어떻게 한 거냐!”

아르칸드의 몸 주변에서 광포한 마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군. 카이온은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란 피우지 마라.”

“뭐라고?”

“여기서 마법을 부려서 난장판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자중하시지. 지금 그녀는 지쳐서 자고 있는 중이니까.”

마왕이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아르칸드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점차 마법사의 투기가 가라앉자, 카이온은 혀를 차며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마왕을 아르칸드는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왕에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미루어 볼 때, 여전히 그의 힘은 봉인된 채인 게 확실했다. 하지만 아르칸드는 경계를 풀지 않고 카이온과 마주 앉았다.

“그래서, 어쩐 일이지?”

카이온의 물음에 아르칸드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말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서는 질문했다.

“네 뿔은…… 어디로 간 거지?”

“대체…… 어떻게 지금 그런 게 궁금할 수가 있는 거냐?”

“마왕의 뿔은 그의 상징 아닌가?”

“하여간 마법사 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곤 하지만, 이 상황에 그딴 질문을 하는 걸 보면 넌 그중에서도 심각하게 이상한 놈인 게 확실하군.”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카이온은 제 매끈해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약간 민망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숨겨뒀을 뿐이다.”

“숨겨 둬? 어떻게?”

“내가 그런 것까지 네 녀석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너야말로 왜 프레데리카를 찾아온 거지? 그녀는 바쁘고 피곤한 몸이다. 쓸데없는 용무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이번에는 아르칸드 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네가 프레데리카 님의 뭐가 된다고, 그런 말을 하지?”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그녀에 대해 더 잘 알 것 같은데.”

여유가 넘치는 카이온의 대답에 아르칸드는 뭔가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올렌의 이상한 태도도, 카이온의 느긋함도, 아마 프레데리카에게서 연유한 것일 테지만…….

하지만 이유를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아르칸드는 반드시 프레데리카를 만나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굳혔다.

“곧 목이 잘릴 마왕과 할 이야기는 아니니, 난 프레데리카 님을 만나야겠어.”

“그러든 말든. 되도록 할 말만 빨리 하고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군.”

그럼 열심히 기다려 보라고. 카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그를 내버려 둔 채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르칸드는 초조하게 응접실에 앉아 프레데리카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다.

그의 고민을 불식시켜 준 사람은 시중을 들러 온 하녀였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종을 울려 불러주세요.”

“프레데리카 님께, 정말 별 일 없는 건가요?”

아르칸드가 걱정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하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주인님께선 매우, 괜찮으십니다만.”

“하지만 저 마왕이, 무슨 수작이라도 벌인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아니오. 마왕은 주인님께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주인님께서 확언하신 걸요.”

확고한 믿음에 가득 찬 하녀의 말을 들으니, 아르칸드로서도 막무가내로 프레데리카가 위험할지 모른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하녀는 잠시 말을 멈춘 아르칸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곧장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결국 홀로 남은 아르칸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작품 후기 ==========

헤헤 이제 아르칸드도 프레데리카의 손에 떨어질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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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를 내버려둔 채 카이온은 다시 2층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 조급했다. 카이온은 자신의 방으로 곧장 돌아갔다.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프레데리카를 확인한 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권속을 불러냈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의 몽마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전에는 손바닥에 올라올 만한 크기였던 것이 이제는 거의 손끝부터 팔꿈치까지의 길이 정도로 커 있었다. 몽마는 한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나의 왕이시여.]

“일전에 명한 것은 어떻게 되어가기에 내가 찾을 때까지도 아무 보고가 없지?”

질책하는 목소리에 요물의 어깨가 움찔했다. 조금 겁먹은 기색을 한 그것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악몽을 꾸는 순간을 살피려고는 했습니다만, 저 인간 계집의 방어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합니다.]

“겨우 그런 변명이냐?”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적당한 핑계를 대겠습니까. 하지만 왕이시여, 저 인간은…….]

몽마는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만 결국 솔직하게 속내를 토해냈다.

[제 능력으로는 무리입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카이온은 이제 사시나무처럼 몸을 발발 떠는 몽마를 지그시 내려보다가 손을 휘저었다. 요물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곧장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의 권속인 몽마가 엿보지 못하는 꿈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의 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심지어 정신세계마저도 보통 인간의 것과 다르다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옆에 앉았다. 그의 손이 프레데리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만, 곧 그녀의 이마에 얹어졌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카이온은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차분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은 손에 잉크가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카이온은 그 소년이 어릴 적의 비올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비올렌의 방이나, 그의 집임에 틀림없었다. 카이온은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꿈에서조차 그놈을 보고 있다니, 얼마나 마음이 깊기에. 심통이 나서 당장이라도 그 꿈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그는 양식 있는 마족이었기에 잘 참아냈다.

[참 잘 쓰네요.]

[스승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래요.]

[아니, 이건 도련님이 잘한 거예요. 같은 나이의 아이들은 이 정도로 글씨를 단정하게 쓰지 못하는 걸요?]

프레데리카의 칭찬에 소년이 배시시 웃었다. 그 순한 웃음을 프레데리카는 자애롭게 마주보았다.

카이온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저러고 있나.

순간 두 사람의 모습에 어렴풋하게 다른 잔상이 겹쳤다. 카이온은 긴장한 채로 그 방향을 주시했다. 프레데리카와 비올렌의 모습이 흔들리고, 옅어지면서 그 자리에 다른 낯선 얼굴 둘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모습은 희고 검고 잿빛인 점과 선의 방해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이게 몽마가 말했던 방어 장벽인 모양이었다. 카이온은 천천히 그 점과 선이 만들어낸 평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손이 마치 유리라도 닦아내듯 그것을 문질렀다. 점과 선은 의지가 있는 듯 꿈틀대며 마왕의 손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왕의 마기가 손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회색조의 점과 선은 파르르 떨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리 제가 특별한 인간이라 해도 마왕의 마기에 온전히 대항하는 건 무리인 모양이지. 카이온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깨끗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굳이 그 방어 장벽을 모조리 없앨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랬다가 프레데리카의 정신이 카이온의 존재를 알아채기라도 하면, 앞으로 엿보는 건 불가능해질 테니까.

조금 전까지 프레데리카와 비올렌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얼굴이 꽤 닮은 두 여자는 아마도 모녀로 보였다. 어린 쪽은 길쭉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을 들고 비올렌과 똑같이 종이에 무언가 끄적이는 중이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그런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커다란 검은 유리가 덧대어진 상자가 있었다. 그 옆으로는 흰 김이 뿜어져 나오는 반투명의 갈색 통도 있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은 탁자 위에는 주먹보다 조금 작고 동그란 노란 과일이 여러 개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앉은 방 창문 너머로,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른 여자 쪽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조……좋습니다.]

[잘 쓰네. 근데 ‘좋습니다’에서 ‘좋’의 받침은 히읗이란다, 시옷이 아니라.]

[네에…….]

소녀의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런 아이의 실망감을 금방 알아챈 건지, 여자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얼렀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들어갔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야.]

[하지만 자꾸 틀리잖아요.]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책도 많이 읽고, 또 많이 쓰다 보면 금방 맞춤법 정도는 익숙해질 거야.]

북돋아 주는 말에 기운을 얻었는지 소녀가 웃음을 띠었다. 그러더니 다시 의욕적으로 손에 쥔 것을 단단히 잡고는 종이로 눈을 돌렸다.

여자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카이온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아해졌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알아챈 순간, 소녀의 손에 들린 길쭉한 나무 막대기가 툭 탁자에 놓였다. 소녀는 자신이 글씨를 쓰던 종이를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이상하네…….]

소녀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좌우로 몇 번 갸웃거리던 소녀는 종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입을 벙긋댔다.

[이상하네. 이상하네. 이상하네. 이상하네…….]

그리고 순간. 그녀의 고개가 정확히 카이온 쪽으로 들렸다.

소녀의 새까만 눈은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엿보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듯 번뜩였다.

위험하다, 라고 카이온의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그 눈과 마주치기 직전, 카이온은 급히 장벽에서 손을 뗐다. 곧장 점과 선들이 와글와글 빈 공간으로 몰려들어 카이온과 소녀 사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대로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의식에서 튕겨 나왔다. 그는 조금 숨을 헐떡이면서 프레데리카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어느새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대체, 뭐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또한 그들이 앉아 있던 공간에서 본 물건들도 처음 보는 것들투성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을 산 카이온조차도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것들. 대체 그런 희한한 광경이 왜 프레데리카의 머릿속에 있단 말인가?

자꾸만 죽음을 원하는, 죽지 못하는 여자가 그토록 소중하고 따뜻하게 기억하는 광경이라니. 어느 모로 봐도 수상하고, 기이했다. 확실한 근거도 없지만, 카이온은 그 낯선 풍경이 프레데리카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그 이상한 기억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아니, 프레데리카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용납되지 않을 일인가. 카이온이 아는 프레데리카는 겨우 세간에 알려진 것과, 8년 간의 전쟁에서 직접 부딪치며 느낀 게 전부였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프레데리카와의 계약 이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프레데리카를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그녀가 숨긴 비밀이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다.

문득 그는 1층 응접실에 있을 아르칸드를 떠올렸다.

분명 이번에 찾아온 아르칸드는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프레데리카의 시선을 아르칸드에게 돌려놓은 사이에, 카이온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카이온은 그대로 프레데리카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프레데리카는 많이 지쳤던 모양인지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흐린 눈을 끔뻑대며 둘러보던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옆을 지키고 앉은 카이온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해요?”

“깨어나는 걸 기다렸다.”

“몇 시야 대체…… 나 얼마나 잔 거죠?”

“오래 잤다. 그보다 손님이 와 있는데.”

손님이라는 말에 프레데리카의 이마에는 더 짙은 주름이 패었다. 그녀는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카이온이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주자, 그 행위가 낯설다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꺼이 마왕의 손길의 도움을 받았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녀는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누구…… 누구요? 누가 찾아왔어요?”

“현자님의 두 번째 개.”

“개?”

“아르칸드 호브 말이다.”

프레데리카는 난감하다는 듯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더니, 곧 이불을 홱 젖히고는 침대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에 소름이 쪽 돋는 걸 본 카이온은 혀를 차며 의자에 걸어둔 그의 로브를 건넸다.

“그따위로 벗고 돌아다니면 또 쓰러진다.”

“뭔데 이렇게 자상하게 굴어요? 그런다고 해서 나오는 거 없는데.”

“자꾸 앓는 꼴 보기 싫은 것뿐이야.”

매우 의심스럽다는 듯 카이온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그가 건넨 로브를 걸치고는 종을 울렸다. 금방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루시와 다른 하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에게 일별조차 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뒤를 하녀 인형들이 나란히 따랐다. 냉랭하게 닫히는 문을 보던 카이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프레데리카는 루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루시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손님은 아직도 거기 계셔?”

“네.”

“그래, 그럼 얼른 옷 갈아입고 가자.”

이미 오랫동안 손님을 기다리게 한 터라, 프레데리카는 치장은 간단히 한 채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프레데리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아르칸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흘러넘쳤다.

“프레데리카 님!”

“아르칸드 님. 기별을 하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양순한 얼굴로 웃는 프레데리카가 아르칸드에게 목례를 했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한참 동안 박대당했지만, 그 긴 시간은 홀랑 까먹은 듯 아르칸드는 열렬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탈하신 거죠?”

“네? 네에.”

“마왕이, 프레데리카 님 대신 나타나서는…….”

“아…… 네. 조금 피곤했을 뿐이에요.”

민망하게 웃으며 프레데리카는 슬쩍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조금 아픈데, 하고 그녀가 속삭이자 아르칸드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았다.

“죄죄죄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손 잡은 걸로 뭘 죄송하다고 그러세요. 기다리느라 힘드셨을 텐데, 식사는 하셨나요?”

“아, 네. 하인들이 챙겨주더군요.”

“다행이네요. 시간도 거의 저녁 때이니 같이 식사나 하시면서 이야기 나누시겠어요?”

무슨 일로 오신 건지는 천천히 듣기로 해요.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아르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궁정에서 하듯 에스코트했다. 프레데리카 역시 그의 에스코트를 어색함 없이 받았다.

두 사람이 식당으로 향하는 것을, 계단참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카이온이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식당 문까지 닫혀 1층 복도가 고요해진 뒤에 2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의 발은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프레데리카의 방에 들어선 카이온은 책상에 다가갔다. 변함없이 나란히 꽂힌 노트 몇 권을 꺼낸 그가 빈 자리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그가 꺼낸 것과 똑같이 생긴 새로운 노트들이 생겨났다.

얄팍한 눈속임에 불과했지만, 그가 프레데리카의 기록을 탐독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줄 정도는 될 것이었다. 어차피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방을 나서서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소개글에 키워드 하나를 조심스레 추가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했습니다만,

아르칸드와의 이야기에선 좀 취향 탈 것 같은 소재를 쓸 예정이라서요.

부디 괜찮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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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튀는 감정도 보이지 않는 프레데리카의 얼굴과 마주하자 아르칸드는 더욱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같이 차분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르칸드는 차라리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

그가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프레데리카는 더욱 목소리를 다정하게 냈다.

“아르칸드 님은,”

“…….”

“저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네. 네? 헉, 네?”

기습적으로 정곡을 찔린 아르칸드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가, 당황해서 몇 번이나 이상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말았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르칸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는 마법사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 찰나였다. 그녀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아르칸드가 여기 온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 또다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잘 익은 토마토가 된 마법사를 달래 좀 더, 다가오게 만들어야 했다. 프레데리카가 사근사근하게 작은 목소리로 아르칸드의 어정쩡한 고백에 답했다.

“저도 아르칸드 님을 참 좋아해요. 아르칸드 님은, 정말 훌륭한 마법사이시고 제가 존경하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아르칸드는 그녀의 말에 담긴 오류를 바로잡을 수도 없었다.

뭘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당신을 오래 연모해 왔다고? 그래서 이 나라를 떠날 수가 없었다고? 멀찌감치에서 우물쭈물하며 그녀의 소식을 어떻게 하면 전해 들을 수 있을지, 그런 궁리나 소심하게 하고 있었다고? 그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렸다.

난감함 어린 목소리가 아르칸드의 귀에 와 닿았다.

“아르칸드 님의 서신에 답을 못한 건…… 좀 바빠서였어요.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나 제 소식을 궁금해하셨다니, 죄송해서 참…….”

“아닙니다! 바쁘셨을 테지요! 물론,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저, 식사, 마저 하시죠!”

이 화제가 더 이어지다가는 심장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던 아르칸드는, 얼른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가 접시에 코를 박을 듯 하고 제 앞에 놓인 식사를 먹어치우는 걸 보며 프레데리카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르칸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그가 부끄러워할 만한 쪽으로 진행되진 않았다. 그 이후로는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가 이어졌을 뿐이었다. 디저트까지 모두 끝낸 뒤에, 두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

프레데리카가 앞장서서 아르칸드를 그가 묵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의 방은 카이온의 방 바로 옆이었다.

“하인이 씻으실 물을 준비해 드릴 거예요.”

“네, 음, 정말……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는데도 환대해 주시고…….”

“저, 집이 작아서 드릴 수 있는 방이 여기뿐이네요.”

“네?”

“바로 옆에 있는 복도 끝방이 마왕의 방이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는 듯 웃으며 말하는 프레데리카를 보며 아르칸드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너무 당황해서 그녀에게 물으려던 걸 하나도 묻지 못한 채였다. 마왕이라는 말을 들으니 새삼 그가 제 목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라는 게 떠올랐다.

“일단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뵈어요. 참, 내일 돌아가시는 건가요? 제 안부 때문에 오셨다니 이정도면 충분히 확인하셨을 것 같고…….”

이대로 다시 수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르칸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의 입에서는 말이 막 되는대로 터져 나왔다.

“아니, 저, 사실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마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젠장, 이게 아닌데……. 아르칸드는 제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혀를 마법으로 차라리 묶어버리고 싶었다. 좀 더 돌려서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올렌의 기묘한 태도도, 마왕의 행동 변화도, 소식을 뚝 끊었던 프레데리카에 대해서도 좀 더 유연하게 묻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놓고 묻는 게 아니라!

아르칸드의 질문에 프레데리카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사르르 웃어 보였다.

“마왕이, 그러니까…… 카이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하셨군요.”

“카이…… 온이요?”

마왕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프레데리카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마왕이 힘을 되찾아 그녀에게 또다시 현혹 마법을 건 걸까? 하지만 조금도 마왕이 무슨 수를 쓴 듯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촛불이 흔들리자 복도에 어린 그들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르칸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또요? 뭐가 궁금하셨나요?”

“제가 수도에서 비올렌을, 만났는데…… 그가, 좀 예민하게 굴더군요. 프레데리카 님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아.”

“그, 그러니까! 아니, 제가 뭘 의심하고 이런 건 아니고요!”

“네. 그리고 또요?”

“제, 제 공간이동마법을 막았던 그 마법도 궁금합니다. 대체 어떻게, 프레데리카 님이 마법에 얼마나 조예가 깊으신 건지 모르겠고, 어……. 또 아까 마왕이, 프레데리카 님의 몸 상태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혹시 어디 편찮으신 곳이 있는지도 그렇고…….”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아르칸드는 뭔가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프레데리카는 마침내 아르칸드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르칸드는 얼떨결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프레데리카는 문가에, 아르칸드는 완전히 방에 들어서고 말았다.

“아르칸드 님.”

“네…….”

“어쩌면, 이렇게 궁금한 게 많으셨는지. 마법사의 호기심이란 정말…… 대단하네요.”

“아니, 그게…….”

“다 답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지요?”

또 한 발, 프레데리카가 아르칸드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아르칸드는 어정쩡한 자세로 뒤로 물러났다. 프레데리카의 손이 자연스레 문을 닫아버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아르칸드는 억,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커다란 소파에 걸려 그대로 나자빠진 것이라, 그대로 의자에 푹 파묻힌 꼴이 되었다.

프레데리카는 그와 발끝을 마주하는 곳까지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소파의 등받이를 짚었다. 천천히 여자의 얼굴이 다가오자, 아르칸드는 완전히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어디부터 답을 해 드릴까…….”

은근하게 중얼거리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에 아르칸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의 체향이 그의 코에 와 감겼다. 가랑이 사이의 물건에 정신머리도 없이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세울 상황이 아닌데! 아르칸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평생 여자를 거의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연정을 품은 첫 상대가, 이렇게 바짝 다가서서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저, 프레데리카 님…… 조금만…… 떨어져서…….”

“왜요, 저 좋아하시잖아요?”

“네?!”

아르칸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아까 그 대답이, 제대로 이해하고 한 답이었단 말인가! 아르칸드는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잖아요?”

“그,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게, 싫으신가요?”

그럴리가! 아르칸드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순진한 청년의 반응에 프레데리카는 후후 하고 낮게 웃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가는 이대로 아르칸드가 정신을 놓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되었다. 프레데리카는 너그럽게, 그를 가둬두었던 팔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그의 옆에 나란히, 하지만 바짝 붙어 앉았다.

“어디부터 답을 해 드릴까요. 우선, 아르칸드님의 공간이동을 막았던 건 마법 아니에요.”

“네? 그럴 리가요! 제 마법이 부딪친 순간에 나타났던 마나의 파동은 분명 마법이었는데요!”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제 의지라고 해야 할까요?”

아르칸드는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프레데리카가 그의 손을 잡자 곧장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머리가 표백되어서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할 의지도 날아간 모양이었다.

비올렌도 순진하기는 했지만 이쪽은 더 하네. 원체 폐쇄적으로 사는 마법사라는 자들의 특성을 알곤 있었지만, 아르칸드는 정도가 더 심했다. 프레데리카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아르칸드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비올렌을 말씀하셨죠. 그 애가, 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민감하게 굴던가요?”

“그게, 이상하게 당신께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프레데리카 님을 화제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거 같았어요.”

“그랬구나. 아무래도 연인의 일을 다른 남자가 이야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아르칸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프레데리카를 쳐다보았다. 우습게도, 단박에 눈에 눈물이 고이려 했다.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단념해야만 하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프레데리카는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내린 채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머나, 속상하시구나. 울지 마세요.”

“아니…… 그런 게…….”

“정확히 말하자면 연인인 척만 하는 거예요. 하지만 비올렌은 진짜 연인이길 원하는 거니까…… 아마도 아르칸드 님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그렇게 대했을 거예요.”

연인인 척이라니. 아르칸드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무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카이온은…… 나와 계약을 했어요. 나를 도와주면, 그의 힘을 내가 되돌려주겠다고. 그랬는데, 왜일까요. 아예 뿔도 숨겨버리고…… 어쩐지 다정해졌네요.”

두 사람 사이에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가 입을 열 때까지 충실히 기다려 주었다. 그가 프레데리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겨우 몇 마디가 떠듬떠듬 튀어나왔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이해가, 저는…….”

“영민한 대마법사 아르칸드 호브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을 텐데요.”

“마왕과, 비올렌…… 그들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왕과 그런 계약을 했는데 비올렌이 가만히 있었다니. 그렇다면 뭔가 더 있는 거잖아요. 혹시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인가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알고 싶어요?”

“……네.”

“돌이킬 수 없는데도요?”

“저는…… 프레데리카 님을 알고 싶어요.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조금 더 당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행복할 겁니다.”

“아, 저를 사랑해서요?”

어쩐지 그 사랑이라는 단어에 비웃음이 어린 듯했지만 아르칸드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열렬히 흔들었다.

“제가 어리석어 보일 거라는 거, 압니다. 남들이 아무리 떠받들며 대마법사니 뭐니 해도, 저는 그냥…… 프레데리카 님과 어떻게 하면 더 친해질지만 고민한 멍청이였을 뿐인걸요. 당신이 가진 비밀이 무언지, 알고 싶습니다.”

“…….”

“제가…… 비올렌이나, 마왕보다 못하다면 할 수 없지만…….”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묘하게 자신감이 없는 이 순진한 마법사가 프레데리카는 재미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을 돌이켜 깨닫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저주를 퍼붓고 울고 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솔직히 말해서, 프레데리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르칸드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 접촉이 은밀하게만 느껴져서, 아르칸드는 자꾸만 목이 뻣뻣해졌다.

“내가 마왕이랑, 비올렌이랑……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요, 정말?”

“네.”

“나는 카이온과 비올렌, 두 사람 모두를 안았어요.”

곧장 그녀의 말이 해독이 되지 않아 아르칸드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프레데리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좀 더 노골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주었다.

“나랑 카이온이랑, 비올렌이 몸을 섞는 사이라고요. 이해했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가 숨은 제대로 쉬는지 걱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등을 쓸어주자 아르칸드는 다급히 숨을 내뱉으며 몸을 움츠렸다.

이제는 그녀의 웃음이 그저 예쁜 것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아르칸드는 그녀의 눈가에 어린 색기를 드디어, 알아챘다.

“이게, 내 비밀이에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감사합니다!

새 키워드도 괜찮다 해주셔서 감사해요...//ㅅ//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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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쩌겠냐는 듯 바라보는 프레데리카에게 아르칸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많은 마법을 익히면서도 느껴본 적 없던 과부하가 머리에 걸린 기분이었다.

항상 침착하고, 약간은 초연한 듯 보이던 전장의 현자가, 용사만이 아니라 마왕과도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순간 그는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는 곧장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설마, 마왕을 데리고 온 게 그런 이유에서였습니까?”

“네, 그렇답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녀는 순순히 긍정했다.

“왜…… 죠?”

“그냥, 그러고 싶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인 프레데리카는 슬쩍 뒤로 몸을 물렸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자, 아르칸드는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비밀을 알았으니, 어떻게 할 건가요?”

“어떻게 하다니요?”

“이 사실을 신전에 가서 고한다든가. 뭐…… 그럴 수 있잖아요? 마왕과 사통한 배반자라고. 당장 죽여야 한다고.”

그녀의 지적은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아마 누군가가 마왕과 정을 통해 그의 힘을 돌려주려 한다면 당연히, 아르칸드는 그자를 처단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프레데리카라니. 아르칸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갈등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를 고발한다니, 아르칸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선택지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이를 그런 식으로 내칠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고민하는 건 이런 부분이었다. 이 사실을 가슴에 묻고, 모른 척 수도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면 아르칸드는 다시는 프레데리카를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마왕도, 비올렌도 그녀의 곁에 있는데 아르칸드 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 둘처럼 프레데리카에게, 무언가 할 수는 있을까?

아르칸드가 돌처럼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프레데리카는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가서 고발하신다 해도, 원망하지는 않을게요. 아르칸드 님이 그런 반응이신 것도 당연해요.”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프레데리카 님에 대해서 알릴 생각이 없어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정말인가요? 그냥 솔직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저도 제가 지은 ‘죄’가 뭔지 정도는 아니까요.”

“전…… 저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 머뭇거리는 아르칸드에게 쐐기라도 박듯, 프레데리카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르칸드 님,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는다 하더라도, 부디 비올렌의 이야기는 빼고 해 주세요. 그 애는 그냥, 애정에 눈이 멀었던 것뿐이에요. 그 정도의 자비는 보여주실 수 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칸드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비올렌이 오랫동안 알아 온 소중한 친구라서 그토록 감싸려 드는 걸까? 아르칸드 자신이 그런 위치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지낸 시간이 8년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는데, 왜 자신은 여전히 그저 아는 사람 정도에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이렇게나, 프레데리카를 사랑하는데?

심지어 카이온에게도 밀린 기분이었다. 적이었던 마왕조차도 거리낌 없이 안을 수 있는 프레데리카인데, 왜 자신은 비밀을 알자마자 곧장 고발이라도 할 것처럼 정해두고 이야기하는 걸까? 아르칸드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뇨, 프레데리카 님.”

“아…….”

“이미 저도 비밀을 알아버렸으니까…….”

“…….”

“제가, 공범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의 비밀을 같이 지키게 해 주세요.”

끊임없이 몰려오는 마족 앞에서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었다. 아르칸드의 두 손이 프레데리카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어설프게 끌어당기는데도, 그녀는 순순히 끌려갔다. 아무 요령도 없이 부딪쳐오는 아르칸드의 입술이 제 치아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아팠을 텐데도 아르칸드는 꼼짝도 않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댄 채 있었다.

소리 없이 프레데리카가 입술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어린 소년처럼 구는 이 남자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언젠가부터 조금 의미가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이렇게 제 발로 들어와서 쉽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르칸드는 대마법사이고, 어리석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감정은 다른 문제지.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서는 목을 감아 안았다.

감정적 교류를 거의 해 보지 못한 채로 자란, 마법만 아는 대마법사는 너무나도 쉽게 프레데리카의 손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아르칸드의 어설픈 입맞춤은 곧 프레데리카에게 이끌리며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서로의 입술을 맞댔다 떼며 체온을 느끼다가, 그녀의 혀가 슬쩍 밀고 들어오자 아르칸드는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입을 벌려 그녀를 환대했다. 처음인 그가 겁먹지 않도록 프레데리카는 다정하게 그의 혀를 도닥이고 민감한 점막을 나긋하게 훑었다.

“으음…….”

눈을 감은 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아르칸드가 화들짝 놀라자, 프레데리카가 코를 울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속삭이는 소리에 아르칸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데리카의 손이 그의 옷 앞섶을 풀어헤치고는 천천히 쓰다듬자, 아르칸드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처음으로 여자의 손이 몸에 닿은 것이라 그 느낌이 생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른 듯 보이지만 의외로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그의 몸을 손끝으로 느끼던 프레데리카는 아예 그의 상의를 벗겨버렸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살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아르칸드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는 상대가 미는 대로 그대로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웠다. 어느새 그의 배 위에 올라앉은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와 눈을 맞춘 채로 생긋 웃으며 다짐이라도 받듯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되돌이킬 수 없어요.”

“돌이키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 오래전부터…… 이러길 바랐는지도 몰라요.”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프레데리카는 몸을 숙여 그의 입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그의 위에 앉은 채로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어버렸다. 손님을 맞이하는 차림새이긴 했지만 가볍게 차려입은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모든 천이 금세 땅으로 떨어졌다.

나신인 채로 자신을 깔고 앉은 프레데리카의 모습이, 아르칸드에게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겨우 하루도 채 가기 전에, 그녀와의 관계가 180도 바뀌어 버렸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아르칸드의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보드라운 살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는데, 프레데리카가 불쑥 그의 손을 붙잡아서는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말캉한 살이 손에 들어오자, 그의 얼굴에 단박에 피가 몰렸다.

굳어서 좀처럼 움직일 줄을 모르는 남자의 손에 프레데리카는 제 손을 겹쳐서는 천천히 주물렀다.

“이렇게…… 해 주세요. 으응. 좀 더, 세게 해도 괜찮아요.”

마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처럼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가 말하는 대로 충실히 움직이려 노력했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서 프레데리카는 하마터면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일 한 번 치러보기도 전에 아르칸드가 완전히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었다.

아르칸드의 손가락이 바짝 선 유두를 살살 굴렸다. 그 감각이 아찔하면서도 감질나서, 프레데리카는 좀 더 가슴을 그의 손에 밀착시키며 졸라댔다. 손가락이 더 어지럽게 움직이자, 프레데리카의 입에서 만족감 어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한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서는, 스스로의 다리 사이를 찾아들었다. 수풀을 헤치고 그 안에 숨은 조그마한 음핵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비벼댔다.

“흐으…….”

짜릿짜릿한 감각이 아랫배를 때려댔다. 가슴과 아래에 동시에 찾아드는 쾌감이 마음에 들었다. 프레데리카의 손이 조금 더 욕심을 냈다. 점차 꽃잎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아르칸드의 배를 촉촉하게 적셨다.

아르칸드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외치는 제 이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는 스스로의 몸을 만지며 점점 흥분하는 프레데리카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다리 사이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가 나오는 게 보였다. 질척이는 소리와, 음란한 광경에 바지 속에 감춰진 그의 페니스가 완전히 돌처럼 단단히 굳어 일어났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렸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프레데리카가 곧장 하반신을 아르칸드의 아랫도리에 맞췄다. 아직 한 번도 여자의 몸 안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남자의 단단한 살덩어리가 프레데리카의 젖은 음부에 닿았다. 아르칸드는 저도 모르게 으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겨우 닿기만 했는데 그대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자극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그였기에, 프레데리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두 손으로 프레데리카의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 악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프레데리카가 비음을 흘렸다. 그녀의 엉덩이가 천천히 원을 그렸다. 아르칸드의 페니스를 타고 앉은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르칸드는 괴로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안 돼요…….”

“왜요, 응? 이렇게 비비면…… 기분이 좋은데, 하아…….”

“흐윽, 으…… 참, 참기가 어려워요, 제발……!”

“참지 않으면 되잖아요.”

프레데리카의 손이 발기한 아르칸드의 페니스를 붙들었다. 그것을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그대로 자신의 몸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상상해 본적도 없던 감각에 아르칸드가 눈을 홉떴다.

“으윽……!”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치 프레데리카에게 집어 삼켜지는 자신의 것을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아르칸드의 손이 발발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아르칸드의 성기를 자신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을 꽉 채우도록 페니스를 밀어 넣은 프레데리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르칸드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나, 그가 스스로 뭔가 시작하길 기대하긴 조금 무리로 보였다. 어쩔 수 없나. 프레데리카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녀의 안이 능수능란하게 아르칸드의 좆을 쥐었다 폈다. 천천히 일어서며 그의 것을 놓아주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다시 내리찧었다. 귀두와 기둥에 느껴지는 수없이 많은 감각에 아르칸드는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어느새 그도 프레데리카의 움직임에 맞추어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힘껏 위로 찔러대기 시작하자 프레데리카는 비로소 그에게 몸을 맡겼다.

“아, 하으, 흐아앙! 좀, 흐윽, 살살, 아!”

프레데리카가 애원하듯 졸랐지만, 아르칸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쾌감에 몸을 맡겼다. 퍽퍽 찧어대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자신의 귀를 때릴 때마다, 아르칸드는 비로소 자신이 프레데리카의 안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조금만 더, 조금 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더 깊은 곳까지 프레데리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칸드가 프레데리카에 대해 뭔가 더 알게 되기도 전에, 그녀의 내부가 꿈틀거렸다. 불시에 당한 일격에, 아르칸드는 그만 단단히 붙들고 있던 인내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흐윽…….”

멈추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고 있던 정액이 그의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프레데리카의 안을 가득 채운 정액은 넘쳐 흘러서 그들의 결합부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미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 프레데리카는 조금 아쉬운 기분으로 아르칸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걸 티를 낼 정도로, 그녀는 예의가 없지 않았다.

“잘했어요, 아르칸드 님.”

프레데리카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아르칸드는 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이마와 뺨에, 그리고 입술에 연신 와 닿았다. 아르칸드는 차마 그녀에게 키스를 조르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천천히 프레데리카가 몸을 일으키자, 꿈틀대는 좁은 안을 아르칸드의 음경이 빠져나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느껴지는 쾌감에 아르칸드는 몸을 떨었다. 프레데리카가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우리 진짜 공범자네요.”

“네…….”

“쉬세요, 내일 아침에 만나요. 그때 다시 이야기 해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르칸드를 소파에 그대로 둔 채, 프레데리카는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주워들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아르칸드는 차마 그녀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짧은 정사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나온 프레데리카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억센 손에 이끌려 그대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어라,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카이온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방문이 사납게 닫혔다. 마왕의 두 손에 붙들린 프레데리카는 손에 쥔 드레스로 자신의 몸을 대충 가렸다. 다리 사이로 조금 전 받아들였던 아르칸드의 정액이 주르르 흘렀다. 그 느낌이 몸서리치게 좋아서, 그녀는 살짝 다리를 꼬았다.

번뜩이는 눈으로 말없이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프레데리카가 웃었다.

“다 들렸어요?”

잔망스럽게 묻는 말에 카이온이 으르렁대며 사납게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듯 덮쳤다.

                                                            

========== 작품 후기 ==========

원래 초보는... 다 서투른 법이니까요:D 곧 발전이 있겠지요.

만족 못한 걸 채워줄 자가 옆방에 있으니 다 괜찮다...다 괜찮다(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ㅅ〈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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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주의*

카이온의 팔 안에 갇힌 채 그가 퍼붓는 입맞춤을 속절없이 받아야만 했다. 잔뜩 성이 난 그의 팔과 등이 으스러질 듯 그녀를 끌어안으며 꿈틀거렸다. 숨이 막혀와서, 프레데리카는 몇 차례나 카이온에게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고 바동거렸다. 하지만 마치 족쇄처럼, 카이온의 팔은 풀릴 줄을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비틀리던 드레스가 마침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더 이상 가로막는 것이 없어지자, 카이온은 더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밀착했다.

“읍……! 읏, 잠…… 흡…….”

그녀의 입안을 거칠게 유린하는 카이온의 혀는 자꾸만 도망치려 하는 프레데리카의 혀를 단단히 옭아맸다. 숨이 모자라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왕의 이가 사납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자, 비릿한 피맛이 두 사람의 입안에 감돌았다. 얼마나 세게 물어 뜯은 건지 프레데리카의 흰 턱을 타고 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쓰라린 입술 때문에 대번에 프레데리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카이온은 그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입술을 떼었다. 아픔에 눈물이 아롱진 눈을 들여다보던 카이온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까칠한 혀가 턱을 흐르는 피를 핥아 올렸다.

마치 달콤한 꿀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감돌았다.

그 얼굴이 매우 얄미워서, 프레데리카가 톡 쏘아붙였다.

“아프잖아요,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짜.”

“이러라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아야! 상처 핥지 말아요!”

카이온의 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단단히 끌어안았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커다란 엄지가 여전히 피가 나는 아랫입술을 뭉개듯 문질렀다. 붉은 연지가 발리듯, 피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입술에 번졌다. 아프다는데도 자꾸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는 카이온을 프레데리카는 노려보다가, 그의 엄지를 콱 물어버렸다.

“하지 말라고요. 아파.”

“뭐 하나만 묻지.”

“뭔데요?”

“얼마나 더 많이 끌어들일 생각이야?”

천천히 가까워진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와 귓불에 내려앉았다. 코를 문지르고 입술을 지분거리며 그는 연신 대답을 종용했다.

프레데리카는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는데요? 뭘 끌어들여요?”

“내가 분명, 다른 놈이랑 나눠 갖는 건 질색이라고 얘기했는데. 그 성검을 든 멍청한 개로 모자라서 이번에는 마탑에만 갇혀 산 정신병자 차례인가?”

“카이온, 그들은 다 이름이 있다고요.”

“그자들 이름까지 신경 쓸 친절 따위 없어. 그래서, 얼마나 더 이 집에 들일 거지? 나 말고도 몇이나 더 안아야 직성이 풀릴 거야?”

“세상에, 대체 왜 이래요?”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카이온은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진하고 붉은 멍이 올라오는 걸 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연달아 어깨와 가슴팍에도 낙인을 찍듯 흔적을 남긴 카이온은 놀랍게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프레데리카를 놓아주었다.

그의 입술과 손길에 조금씩 다시금 달아오르던 프레데리카는 어쩐 일인지 그녀에게서 물러서는 카이온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이러느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하나 있지. 네가 다른 자들과 붙어먹으면 내가 굉장히 화가 난다는 사실 말이야.”

그 순간, 프레데리카는 싸늘한 기운이 방 전체에 번져가는 것을 알아챘다. 벽이며 가구가 전부 은근한 보랏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동안 열심히 몸을 맞댄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단단하게 마력 결계를 치다니. 프레데리카는 새삼 마왕의 회복력에 감탄했다.

카이온의 손이 프레데리카를 향해 내밀어졌다. 그의 손짓에 따라 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꿈틀대며 솟아올랐다. 가느다란 지렁이 같은 그 촉수들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방을 채워갔다.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기에 프레데리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뒤편에서 촉수들이 뻗어나왔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프레데리카의 뒤에 가까이 다가온 그것들이 순간 저희들끼리 몸을 합치더니만, 두꺼운 밧줄처럼 변했다. 촉수들이 순식간에 프레데리카의 팔다리를 향해 뻗쳐나갔다. 피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과 발이 촉수에 감겨 고정되자, 프레데리카가 당황한 눈으로 그것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이게 뭐야…… 카이온,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이라니. 그렇게 받아들였나?”

“그럼 뭔데, 이게!”

“오히려 놀린 쪽은 너잖나, 프레데리카. 이건 그 놀림의 대가라 생각하면 되겠군.”

“무슨 소리, 으앗……!”

따져 물으려던 입이 단번에 다물렸다.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그녀를 허공으로 들어올린 탓이었다. 마치 박제된 나비처럼, 프레데리카는 팔다리가 벌어진 채로 카이온의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촉수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것들이 몸에 휘감겨오자, 프레데리카의 얼굴에 공포와 불쾌감이 어렸다. 아무리 팔다리를 움직여 보려 해도, 촉수로 된 밧줄은 너무나도 단단히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 뜨끈한 체온을 가진 촉수들이 그녀의 몸을 탐색하듯 슬금슬금 피부 위를 기어가기 시작했따.

“싫, 싫어…… 으읏, 카이온…… 아, 제발! 싫, 다고!”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카이온은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촉수에 몸을 잠식당해가는 프레데리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징그러운 뱀 수십, 수백 마리가 달라붙은 듯한 느낌에 프레데리카는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두려움은 점차 희석되어 갔다. 수십 가닥의 촉수가 그녀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휘감고 빨아댔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불쾌감은 곧 뜨거운 쾌감에 집어 삼켜졌다.

“흐윽…… 하…… 아! 싫…… 히익!”

마치 유두에 작은 혀 수십 개가 달라붙어서 끈질기게 핥고 빨아대는 듯한 기분이었다. 흥분감에 단단해진 유두를 그 작은 가닥들이 찔러댈 때마다 허리가 움찔거렸다. 파르르 떠는 등을 여러 개의 촉수 가닥들이 훑어내렸다. 척추 하나하나를 지나치는 뜨겁고 미끈한 것들의 느낌이 야릇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어느새 다리 틈으로 파고든 것들은 그녀의 속살을 젖히고는 그 안에 숨어 있던 작은 돌기를 찾아냈다. 얇디 얇은 촉수의 끝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곳에 입이 생겨났다. 미세한 이빨을 가진 그것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클리토리스를 깨물어댔다.

“흐앗! 아흐앙! 아, 아으! 잠, 깐만! 아! 아항!”

“만족스러운 모양이군, 프레데리카.”

“아, 카이, 아! 안 됏, 아! 흐아앗, 히익!”

“네가 좋아하는 곳만 찾아서 열렬히 만족시키려 할 녀석들이니까, 마음껏 즐겨도 좋아.”

“아, 으읏……! 그, 그마안……! 히잇, 힉!”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연달아 치달아 오르는 쾌감에 프레데리카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헐떡이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숨이 막히도록 그녀를 덮치는 그 쾌감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허리를 빼 보아도, 촉수들은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클리토리스가 붉게 부어올라 몸집을 키우자, 들러붙는 촉수들이 더 많아졌다. 그것들은 각다귀 떼처럼 제 입을 그녀의 공알에 대지 못해 안달이었다. 수십, 수백은 될 듯한 촉수들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는데, 카이온의 얼굴이 불쑥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 어떤 때보다도 다정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카이온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정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프레데리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정신 차려, 프레데리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잘, 잘못 했…… 나, 좀, 아윽! 흑!”

저절로 사과의 말이 터져 나왔다. 울며 비는 프레데리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은 카이온은 다시금 한 발 물러섰다. 이미 그의 바지춤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그는 지금 당장 그녀에게 손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었다.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놀린 대가를 반드시 돌려줘야만 했다.

할딱이는 프레데리카의 눈앞으로 한 다발의 촉수가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저들끼리 몸을 배배 꼬더니, 어느새 아이 팔뚝만한 두께로 뭉쳐졌다. 생김새가 누구 다리 사이에서 보았던, 그 흉악한 것과 똑같았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해보려 했다. 그것은 인정사정 봐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지, 그대로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읍…… 흐읍! 응!”

마치 남자의 물건처럼 촉수는 프레데리카의 입안을 힘껏 들락거렸다. 목 깊은 곳까지 짓쳐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두툼한 촉수는 마치 제 의지가 있는 것처럼 그녀의 입 앞 곳곳을 찌르며 탐색해댔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그녀를 흥분시켰다.

허공에 달랑 띄워진 채 촉수에 온몸을 침범당하다 못해 아예 입에 문채 프레데리카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시달려야 했다. 전신에 있는 모든 민감한 부위마다 그녀가 원하는 것 이상의 자극이 오는데,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안에는 신음을 흘릴 새도 없었다. 연달아 눈앞에서 흰 빛이 번쩍였다. 그때마다 다리 사이 깊은 곳에서부터 애액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놀랍게도 촉수 중 어느 것도 그녀의 질 안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마치 그곳은, 저들의 주인의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만 같았다.

미칠 것만 같은 쾌감 속에서도 프레데리카는 그래서, 허전함을 느꼈다. 무언가를 자신의 안에 밀어 넣어 주길 원했다. 크고, 뜨겁고, 단단한 것이 그녀의 안을 쑤시고 들어와 마구 헤집어주길 바랐다.

아랫입이 제가 물 것을 찾아서 움찔거렸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 건지, 촉수 몇 가닥이 그 주변을 슬슬 어루만져댔다. 감질나는 느낌에 프레데리카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정염에 흐려진 눈으로 프레데리카는 애타게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말로 조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입에 박힌 촉수는 여전히 추삽질을 해댔다. 찢어진 입술에서 다시금 피가 터졌다. 그것은 프레데리카가 미처 삼킬 수 없었는 타액과 함께 섞여 턱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어느새 허공에 뜬 그녀의 발 아래에는 프레데리카가 흘린 침과 피, 그리고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 있었다.

“흐으…… 으응! 읏!”

“왜, 이것들로는 부족한가?”

“흐응, 으…….”

카이온의 질문에 프레데리카는 힘겹게 도리질을 했다. 그녀의 눈이 카이온의 다리 사이에 가 닿았다. 불룩해진 바지춤을 본 그녀의 눈에 원망이 가득해졌다.

대체 그렇게 되도록 왜 참고 있는 건데? 프레데리카는 당장이라도 넣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세워서는 제 입 안을 쑤셔대는 촉수를 악 깨물었다. 그것은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는 모양인지 요동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신호라도 된 건지, 천천히 입 안에서 빠져나갔다.

프레데리카는 숨을 헐떡이며 도리질을 치고는 카이온을 흘겨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카이온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그만, 괴롭히고…… 흐으, 제발…….”

“…….”

“빨리, 빨리이…… 카이온, 제발, 넣어줘, 응?”

흐느끼듯 조르는 목소리에 카이온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감사합니다!

:D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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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돌아온 힘으로 괴롭힐 수 있는 만큼 괴롭혀주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프레데리카가 숨긴 비밀이 뭔지 알아내겠다는 의지로 그녀의 방에서 훔쳐낸 노트를 읽는 중이었다. 그의 귀에 흘러들어온 남녀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대번에 카이온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챘다.

신경질적으로 노트를 덮은 카이온은 이를 악 물고 두 남녀의 행위가 끝나길 기다렸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와, 열락에 가득 찬 숨소리, 쾌감에 못이겨 내지르는 신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는 동안 카이온은 점점 분이 차올랐다.

왜 프레데리카가 자신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자들에게 손을 뻗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불쾌하고 화가 났다.

그것이 독점욕이며 질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거나,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카이온은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았다.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원해서 울며 비는 걸 보지 않으면, 이 화가 풀리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아르칸드의 방에서 나온 프레데리카를 곧장 제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법사에게 뚫리지 않을 정도로 온 힘을 짜내 방 전체에 결계를 둘러버렸다. 촉수를 다루는 것쯤은, 반쯤 힘이 돌아온 상태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미끈한 나신을 기어 다니는 촉수에게 농락당하며 쾌감에 몸부림치는 프레데리카를 보면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카이온…….”

그의 이름을 부르는 프레데리카의 입술이, 참을 수 없게 유혹적이었다.

카이온이 한 발 다가서자, 촉수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침대처럼 솟아오른 미끈한 덩어리 위에 프레데리카의 몸이 사뿐하게 놓였다. 이미 온몸을 공략당한 프레데리카는 움직일 기운도 없는지 그 위에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카이온을 향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팔이 카이온을 향해 내밀어졌다. 카이온이 거칠게 옷을 벗어던졌다.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며 카이온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흉측해 보일 정도로 검붉게 달아오른 마왕의 페니스가 프레데리카의 아래를 천천히 문질렀다. 잔뜩 새어나온 애액이 귀두와 기둥을 흠뻑 적셨다. 그의 단단한 물건이 입구를 스칠 때마다 프레데리카가 할딱이며 몸을 뒤틀었다.

고통 어린 목소리로 카이온이 탄식했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어떻게 하긴…….”

그의 음경이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프레데리카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감돌았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내벽이 꿈틀대며 카이온의 것에 감겨들었다.

겨우 여자의 몸 안에 제 것을 밀어넣은 것뿐인데, 빌어먹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카이온은 못내 그것이 분해서, 그녀의 어깻죽지를 물어뜯었다. 프레데리카는 그것조차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건지 목을 뒤로 젖히며 발발 떨었다.

프레데리카가 힘겹게 카이온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곧게 뻗은 두 다리도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아까 그 촉수가 그녀를 붙들었듯 프레데리카가 단단히 카이온에게 들러붙었다.

“당신은, 약속만 지키면 돼요…… 으읏……. 알잖아…….”

“약속…….”

“힘을, 되찾아서…… 날 죽이면…… 하윽! 아! 으, 흐아앗!”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다. 카이온은 이를 갈며 인정했다.

마왕은 자신을 속였던 이 요사스러운 인간의 현자를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았다.

힘껏 허리를 찧어대자, 프레데리카가 박자를 맞추어 제 허리를 흔들었다.

“하앙, 앗, 아으흑! 좀, 더……! 흐, 으응!”

“제길, 그만, 윽, 조여라…….”

“아니, 아, 아직 더……! 히익, 힉! 아! 거기, 아, 좋아앗……!”

굵은 땀방울이 카이온의 이마에서 툭툭 떨어져 그녀의 뺨에 흘렀다. 그것이 마치 프레데리카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카이온은 이를 갈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댔다. 그의 몸짓이 더욱 격해졌다.

옆에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촉수들 몇 가닥이 슬슬 두 사람이 교접한 부위로 다가왔다. 카이온의 좆을 타고 안으로 그것들이 파고들자, 늘어나는 부피감에 프레데리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는 헐떡이며 도리질 쳤다.

“안 돼, 아, 안…… 더는…… 찢어질, 것, 같…… 흐앙!”

뱃속 가장 깊은 곳까지 짓쳐 들어오는 카이온의 페니스에 더해, 안쪽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촉수의 움직임에 프레데리카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그녀의 다리 사이는 홍수라도 난 것처럼 물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느껴지는 대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잔뜩 곱아버린 발가락이 다시 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우악스럽게 카이온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흐느끼며 도망치려 하는 프레데리카를 단단히 끌어안은 카이온은 이를 악 물고 제 것을 끝까지 천천히 뺐다가 단박에 쾅 박아넣었다. 힉,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또다시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카이온을 느끼며 프레데리카가 애원했다. 제발, 제발. 그것이 그만하라는 뜻인지, 더 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카이온은 제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다시 한 번 퍽 소리가 나게 두 사람의 살이 맞부딪쳤다.

감질나는 움직임에 이어지는 충격이 잇따르자 프레데리카는 더는 뭐라 말할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예민해진 내벽에 전해지는 페니스와 촉수의 자극에 그저 숨만 할딱일 뿐이었다.

“프레데리카…….”

탁한 목소리로 부른 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대번에 그녀의 다리 사이가 조여들었다.

“으윽…….”

카이온이 흘린 신음이 좋았다. 여린 통로 안을 헤집던 카이온의 살덩이가 움찔거렸다. 그의 크고 단단한 부분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프레데리카의 몸이 휘어지며 가슴이 출렁거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가슴을 단단히 움켜쥐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희롱해댔다.

강요하듯, 아니 애걸하듯 그가 속삭였다.

“내가 좋다고, 말해라.”

“아으읏…… 아응, 아, 하악! 카이온, 카, 카이…… 앙! 하읏, 그만, 아!”

“내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한다고. 네 주변을 맴돌던 그 두 새끼보다도 내가 더 좋다고 해 봐.”

“아, 으으…… 나 이상, 해져…… 아아앙! 흐아!”

카이온의 페니스가 들락거릴수록, 촉수들의 그녀의 질 안쪽을 파고들며 민감한 곳만 골라 눌러댈수록, 그의 목소리가 프레데리카의 몸을 울려댈수록. 프레데리카는 뱃속이 자글거렸다. 온몸이 찌르르했다. 다리 사이에 맴돌던 쾌감이 이제는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사방을 휘감고 도는 감각에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서, 말해…….”

“좋, 아……! 아윽! 아! 좋앗, 흐아앙!”

“제길, 크윽…….”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마왕을 놓치면 죽을 것만 같았다. 프레데리카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을 촉수들이 휘감았다. 말캉하고, 흐느적거리고, 축축하고, 미끈하고, 출렁이는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땀과 체액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음란하게 둘 사이에 얼마 남지 않은 공간을 메웠다.

카이온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온 힘을 주어 제 안에 있는 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프레데리카는 시야가 완전히 점멸하는 걸 느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아득하게, 카이온이 고백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내가 어떻게…… 차마…… 일 수 없을 것 같…….”

그 말을 확인하는 대신 프레데리카는 더듬더듬 카이온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입술이 닿자, 프레데리카는 비로소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프레데리카가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력을 되찾았을 때, 방을 가득 메웠던 촉수는 모두 사라진 뒤였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부둥켜 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힘겹게 깊은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카이온의 가슴에 이마를 붙이고는 중얼거렸다.

“나 못 일어나겠어…….”

“방까지 데려다 주겠다.”

“씻어야 된다고요…… 아직도 촉수가 기어 다니는 거 같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프레데리카를 다시 한번 힘주어 끌어안은 카이온은 몸을 일으키고는, 저쪽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드레스를 가져왔다. 그것을 지쳐 늘어진 프레데리카의 몸에 잘 펴서 덮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기운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카이온의 목이라도 끌어안았을 테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정말이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냥 카이온의 두 팔 위에 축 늘어진 채로 덜렁덜렁 흔들렸다.

카이온의 방문이 휙 열렸다. 프레데리카를 안은 채 한 발 나서려던 순간, 그대로 그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문 앞에 사색이 된 채 서 있는 아르칸드가 있었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이온은 또다시 울컥하고 뱃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리 꺼져.”

“프레데리카 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네놈이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했을 뿐이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

뻣뻣하게 굳은 아르칸드의 옆을 카이온이 스쳐 지나가려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발을 멈춰야만 했다. 아르칸드가 포기하지 않고 다급하게 늘어진 프레데리카의 손을 붙잡은 탓이었다.

그는 당혹감과 걱정이 어린 얼굴에 혼란까지 더해진 채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아르칸드로서는 이 상황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뇌가 이 부분에 대해 명징하게 사고하기를 그만 두어 버린 듯했다.

언제까지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과 농밀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조차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렇게 잡히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던 프레데리카가 자신만이 아니라 마왕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보였다. ‘그’ 마왕과 말이다!

심지어 카이온의 팔 안에 안긴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한두 번 둘 사이에 접촉이 있었단 뜻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그가 알았던 프레데리카는, 허상이었던 걸까?

다 가시지 않은 성교의 여운으로 색기 어린 얼굴을 한 채 기운 빠진 모습으로 늘어진, 저 사람은 정말로…… 프레데리카가 맞는 건지. 아르칸드는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비올렌이 보였던 기묘한 태도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프레데리카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굴었던 건지. 순간 알아채 버렸다.

비올렌도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던 거다. 거기에 아르칸드까지 프레데리카에게 관심을 보인다 여기니, 단박에 공격적으로 그를 물리치려 한 거였다.

대체 프레데리카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점차 망연해져가는 아르칸드의 표정에 프레데리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르칸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프레데리카 님, 진짜로, 어, 괜찮으신 겁니까? 아무리 뚫으려 해도, 결계가 풀리질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정말 저자가 당신께 무슨 위해라도 가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데…….”

“괜찮아요, 아르칸드 님. 보시다시피요. 그런데 제가…… 많이 피곤해서요.”

“아…….”

“내일 아침에 뵈어요. 미안해요.”

“네…….”

놓아달라는 의미로 프레데리카가 살짝 손을 비틀자, 아르칸드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 마법사를 흘끔 노려본 카이온은 곧장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아르칸드는 점점 그에게서 멀어지는 두 남녀를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모습이 복도 반대편의 어느 방 안으로 사라져버리자, 그제야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 작품 후기 ==========

많은 독자분들께서 읽어주셔서, 이번에 잭팟 18과 버프 18에 해당하는 글로 선정이 되었답니다.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점핑큰절을 수백 번 올려도 모자르겠습니다 정말 ㅠㅠ

그나저나 버프18에 선정되면서 독자님들께 이벤트로 제공 가능한 딱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이벤트를 통해 독자님들께 드리려고 해요!

1월 11일부터 17일까지 댓글을 달아주시는 독자님들 가운데 10분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딱지 20장씩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D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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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지만, 프레데리카의 집은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히 집을 쓸고 닦는 하인과 하녀가 오가는 발소리만 들렸다.

아르칸드는 평소와 다름없이 해가 뜨기 전부터 깨어 있었다. 옷도 정갈하게 갖춰 입은 채로 침대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지만, 카이온이 그의 방으로 돌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왕은 프레데리카의 방에서 밤을 지샜다는 뜻인 걸까? 아르칸드는 마왕의 팔 안에 지쳐 늘어진 채 희미하게 웃던 프레데리카를 다시 떠올렸다.

‘괜찮아요.’

아르칸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무리 프레데리카의 앞에서 얼치기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해도, 그는 인간 가운데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 마법사였다. 본래의 그는 영민함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가 마법으로 현혹당했거나 조종당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마왕의 마력이 상당히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분명 그를 막 생포했을 당시만 해도, 카이온의 마력은 프레데리카가 심장에 박아넣은 검에 완벽하게 틀어막힌 채였다. 아주 간단한 마법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마왕은 무력했었다.

그랬던 자가 어떻게 아르칸드가 뚫을 수 없는 결계를 친단 말인가. 대체 프레데리카는 무슨 생각으로, 또 어떻게 그의 힘을 돌려준 걸까.

하지만 적어도 마왕의 힘이 완전히 다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르칸드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마왕의 마력은 너무나도 강대해서, 그가 숨기려 한다 해도 전부 감춰지지 않았다.

이상한 점도 있었다. 힘이 돌아왔다면, 당연히 마왕은 복수를 하려 했을 것이다. 일부만이라 해도 말이다. 특히 프레데리카에게는 더더욱……. 카이온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뿔이 잘리는 치욕을 맛보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프레데리카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어제 아르칸드가 본 마왕의 모습은 복수를 꿈꾸는 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프레데리카에 대한 카이온의 태도가 놀라웠다. 마왕이, 설마. 아르칸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흩어버렸다.

마족이 인간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호랑이와 사슴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면 그건 비극일 수밖에 없다. 호랑이는 언제나 사슴을 죽여 포식하고자 하고, 사슴은 그런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하고 도망가고자 할 뿐, 둘 사이에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카이온이 프레데리카를 소중하게 안아 들고 있던 그 광경이 자꾸만 아르칸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왕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프레데리카는 거의 카이온에 관해서는 마음을 놓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가 목을 물어뜯는다 해도 그냥 둘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르칸드가 모르던 그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유대감이 생겨난 건 분명했다.

문득, 아르칸드의 눈앞으로 프레데리카를 탐욕스레 끌어안은 카이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 상상까지 덧붙여졌다.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알몸인 채 침대를 뒹구는 모습도, 깊게 입 맞추는 모습도.

그러자 울컥하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허리 아래가 뜨끈해졌다.

“이런…….”

전부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 모두 자신이 핵심을 피하려고 억지로 짜낸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미친 듯이 질투가 났다. 자신은 이제야 겨우 프레데리카에게 닿았는데, 카이온도, 비올렌도 이미 프레데리카의 다디단 몸에 취해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자비롭게 아르칸드마저 품어주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그렇듯, 다른 놈들도 다 프레데리카를 독점하고 싶어 할 거라고.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의 안부를 묻는 아르칸드에게 이를 드러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또 카이온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르칸드의 앞에서 결계를 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아르칸드는 손톱을 깨물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프레데리카가 그를 받아들인 건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른 둘에 비해 그 자신은 프레데리카를 붙잡을 만한 게 없었다. 마왕은 마왕이라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프레데리카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고, 비올렌은 그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며 제자였다. 그에 비하자면 아르칸드는, 전쟁 기간 동안 곁에 있었던 동료에 지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날 후순위로 미루지 않게 하려면, 날 버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르칸드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차피 그녀는 아르칸드를 쉽게 놓아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

홀로 방에서 고뇌에 휩싸인 아르칸드를 데리러 온 건 어느 하인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며 식당으로 내려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아르칸드는 제 차림새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1층 식당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하인을 따라 1층 식당에 들어선 아르칸드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광경에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식탁에는 맛깔나 보이는 식사가 잘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식사는 겨우 한 사람 분이 전부였다. 프레데리카는 보이지 않았고, 카이온이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은 자리에 앉아서 차 한 잔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대체 프레데리카는 어디에 있고, 마왕만 여기 있는 건가. 아르칸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알아챈 카이온이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식사나 하시지, 마탑의 쥐새끼.”

“프레데리카 님은 어디 계시지?”

“그녀는 피곤해서 식사하는 대신 자겠다고 했다.”

마치 그 집에 사는 사람처럼, 카이온은 여상하게 답을 해 주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노트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출간된 서적은 아니고, 누군가의 기록물인 게 분명했다. 아르칸드는 그것을 살펴보려 했지만, 그 눈길을 알아챈 카이온은 내지가 보이지 않게 노트의 등을 보였다.

의심과 불안, 불만이 어린 얼굴로 아르칸드는 카이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과연 마왕을 앞에 두고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식사의 질이 워낙 훌륭했던 나머지, 그는 착실하게 접시를 비울 수 있었다.

식당에는 평화로운 적막이 흘렀다. 오로지 식기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마침내 아르칸드의 앞에 찻잔이 놓였을 때, 카이온이 드디어 읽고 있던 노트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마왕의 눈이 마법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르칸드는 지지 않고 그 눈을 마주 쏘아보았다. 프레데리카 앞에서 얼뜨기처럼 굴었다 한들, 그 역시 8년 동안 마왕의 군대를 고전시킨 장본인 중 하나였다.

“이봐, 마법사.”

“…….”

“언제 이 집에서 꺼질 생각이지?”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

“너 아니어도 프레데리카는 이미 충분히 피곤해. 그러니까 그만 귀찮게 굴고 꺼져.”

날파리라도 쫓는 듯한 손짓까지 하며 카이온은 아르칸드를 종용했다. 코웃음을 친 아르칸드가 되물었다.

“그러는 마왕, 당신이야말로 무슨 속셈으로 여기 붙어 있는 거지? 하, 힘이 돌아왔는데, 여기 있을 이유가 있나?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순종하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거 보이나? 어차피 이 목줄이 매인 한 난 프레데리카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마왕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에 매인 가죽 목걸이를 톡톡 쳤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카이온이 덧붙였다.

“주인님이 손수 매주신 거라, 내 맘대로 풀 수가 없어서.”

“어처구니가 없군.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만. 어쨌든 넌 방해 말고 빨리 네 소굴로 돌아가라고.”

“당신이 프레데리카 님께 어떤 위협이 될 줄 알고…….”

“위협?”

카이온이 코웃음을 쳤다.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그대로 눈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입만은 충실하게 독설을 내뱉었다.

“내가 위협이 된다 해서, 네깟 놈 혼자 뭘 어쩌겠다고?”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밀리는 소리가 울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된 아르칸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채 카이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카이온을 공격하려는 듯, 아르칸드의 주변에서 마나가 요동쳤다. 식탁과 식기가, 창문과 벽이 흔들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온이 혀를 찼다.

‘그나마 나에게 대항하던 개새끼들 중 가장 순한 줄 알았더니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조금 도발한 정도로 이렇게 부들부들 떨며 흥분할 줄이야. 하긴 그 전쟁통을 겪어온 데다 비올렌이나 성기사 놈과 친하게 지냈으니 물이 들었더래도 한참 전에 들었을 법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카이온이 경고했다.

“프레데리카의 집을 부술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두지 그래.”

그 경고는 아르칸드에게 잘 먹혔다. 당장이라도 카이온을 향해 온갖 마법을 난사할 듯 하던 아르칸드가 아차 하는 얼굴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아르칸드는 자신이 너무 쉽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로소 식당이 다시 고요해지자, 카이온은 노트를 접어 팔에 끼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미 하나 없는 눈길이 아르칸드를 향했다.

“정말로 너는 여길 떠나는 편이 좋겠군.”

그 말을 남긴 마왕이 휙 식당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아르칸드는 자괴감에 빠진 채 한참을 서 있었다.

터덜터덜 식당을 나선 아르칸드는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일단 프레데리카를 만나야겠다 생각했다. 그녀의 방 앞에 서서 아르칸드는 머뭇거렸다. 아직도 자는 중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에 쉽게 노크도 하지 못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문 앞을 서성이길 5분여,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문을 열고 나온 건 하녀 루시였다.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아르칸드를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얼떨결에 아르칸드는 그녀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루시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주인님을 보러 오셨습니까?”

“그, 그래요.”

“방금 깨셔서 몸단장을 마치셨으니 들어가시지요.”

“아, 감사…….”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루시는 아르칸드를 쓱 지나쳐 멀어져 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하녀의 뒷모습을 보던 아르칸드는 얼른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살짝 노크했다. 열린 문 틈으로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방에 들어선 아르칸드는 코에 끼쳐오는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그가 알고 있는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피 냄새였다.

전장에 있는 내내 맡았던 그 지독하게 비릿한 향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르칸드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는 순식간에 방을 휙 둘러 보았다. 하지만 방 어디에서도 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는 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낙낙한 드레스를 입은 채 창문 앞 티테이블에 앉은 프레데리카뿐이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아르칸드를 환영했다.

“간밤 편안히 주무셨나요?”

사라지지 않는 피 냄새에 아르칸드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냐고 프레데리카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일단 그는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네, 프레데리카 님은 푹 쉬셨습니까? 피곤해서 식사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습니다.”

프레데리카의 앞에 마주 앉으며 아르칸드가 안부를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밤에, 좀 지쳤을 뿐이었어요. 아시다시피,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녀가 말한 ‘많은 일’이 뭔지 떠올린 아르칸드의 귀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프레데리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 밤을 떠올리고 나니 부끄러움이 치솟아서 눈을 피하게 되었다. 순진한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낮은 소리로 웃자 아르칸드의 얼굴은 아예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 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아르칸드랑 한 번 더 쿵떡쿵떡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되는 밤이네요.

더불어 독자 이벤트도...뭘 해야 할지......ㅇ〈-〈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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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죄송합니다.”

“어머,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게, 그러니까.”

“저는 좋았는데……. 사과하시니까, 뭔가 제가 잘못한 것 같잖아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테이블 너머에서 손이 불쑥 뻗어와서는 아르칸드의 손을 붙잡았다. 작고 보드라운, 하지만 차가운 손이 닿자 아르칸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발그레해진 볼을 한 그는 프레데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을 원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한 게 맞는 모양인지, 프레데리카가 잘했어요, 하고 속삭였다.

살면서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칭찬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르칸드는 새삼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그저 앞에 앉은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녀가 웃어주기만 해도 몸이 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그의 손등을 간질이는 손가락이 너무 차가워서, 아르칸드는 그녀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쌌다. 자신의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조그마한 두 손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여주었다. 점점 프레데리카의 손에 온기가 도는 게 느껴지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손이 왜 이리 차가운가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종종 이런 때가, 다들 있잖아요?”

“몸이 찬 건 좋지 않은 건데…… 혹시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습니까?”

조심스럽게 프레데리카의 뺨까지 뻗어나간 아르칸드의 손은 잠시 그녀에게 닿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곧 용기를 내어 엄지로 그녀의 눈 아래를 쓸었다. 프레데리카의 눈 밑이 거뭇했다.

전장에서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 자에게…… 혹시 밤마다 너무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요?”

“네?”

“아, 아니 그러니까! 어, 피로가 누적되어 보여서, 그래서요! 근데, 아무래도 어젯 밤처럼…… 계속 그러면…… 원치 않는 데도 마왕이, 그, 그…….”

“통정하자고 조르냐고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저어 부정하는 모습을 본 아르칸드는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협박을 당하거나, 강제로 원치 않는 일을 한 사람의 태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진 걸까? 전장에서의 8년이 그녀의 건강을 해치고 만 걸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신전에서 보았던 프레데리카는 생기가 넘쳤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건드리면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다시금 피 냄새를 기억했다. 분명 무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르칸드의 얼굴이 점차 심각한 빛을 띠기 시작하자, 프레데리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이 마법사가 뭘 생각하는 건지 몰라도, 할 필요 없는 의심을 하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그녀의 건강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프레데리카는 끝까지 모두가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모르길 원했다.

“아르칸드 님.”

은근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려던 마법사는 화들짝 놀라며 프레데리카에게 다시 집중했다.

어젯밤 그의 위에서 정염에 불타던 모습 따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한 미소를 띤 프레데리카가,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왜 좋아요?”

그 질문 하나만으로 당장 아르칸드는 머릿속에 커다란 불공이라도 터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목에서 턱 걸려서는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수천 수만이었지만 도무지 그것을 제대로 된 문장, 아니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줍은 마음을 밤의 마력에 넘어가 술술 불긴 했지만, 이런 훤한 대낮에, 맨정신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당사자에게 말한다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태어난 이래 가장 멍청한 모습일 거야. 아르칸드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그렇게 혹평했다.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저, 그냥, 정신 차려보니, 좋아하고 있었어요…….”

“흐응.”

“프레데리카 님은, 아름다우시고. 아, 무, 물론 제가 프레데리카 님을 외모 때문에 사랑하게 된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현명하고, 사려 깊고, 어, 또, 용기 있고, 현명…… 아니 이건 이미 말했는데. 그러니까, 에.”

좀 더 멋있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너절한 사랑 고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르칸드는 가슴을 치며 한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더듬대며 늘어놓는 것들을 조용히 듣고 있던 프레데리카가 물었다.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여기 와서 알게 되셨을 텐데.”

“네?”

“저는 모두를 속였잖아요.”

아르칸드 님도 포함해서요. 프레데리카가 눈을 깔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는 듯해서, 아르칸드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속이다 못해, 결국 아르칸드 님마저…… 부정한 길로 들어서게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왕과 제가 맺은 계약을 모른 척하게 만들었잖아요. 누군가 알게 되면, 아르칸드 님마저 위험해질 텐데…….”

눈물 한 방울이 프레데리카의 눈에서 툭 떨어졌다.

그에 아르칸드는 황급히 연신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프레데리카 님이 그냥 그랬으리라 생각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일부러 위험한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저는…… 이렇게 해서 프레데리카 님을 지킬 수 있다면 행복할 거예요.”

“아르칸드 님…….”

“당신의 계획이 무엇이든, 도와드릴게요. 혼자 다 짊어지고 가려 하지 마세요. 혹시 저 마왕이 프레데리카 님을 힘들게 한다면, 제가 대신 혼내줄 테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발개진 눈가를 하고 프레데리카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르칸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프레데리카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아르칸드에게 보이던 예의 그 따뜻한 것 아니라, 잔뜩 일그러지고 흉한 웃음이었지만.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만은 여전히 다정했다.

프레데리카가 진정한 듯하자, 아르칸드는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제가 당신을 지킬게요.”

“…….”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편이 될게요.”

맹세를 하는 아르칸드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이런 순진해 빠진 착한 이를 속이게 된 것이 프레데리카로서는 못내 미안했다. 하지만 딱히 그를 제지할 생각도 없었다.

프레데리카를 올려다보는 아르칸드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 프레데리카는 기꺼이, 입을 맞춰 주었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하듯 입술만 맞대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아르칸드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자 아르칸드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공간의 일부가 잘려나가면서 그 너머로 어두컴컴한 미지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주저없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아르칸드의 손에 들린 것은 손가락 한 마디 만한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가 다시 손을 휘젓자 검은 공간은 사라졌다. 아르칸드는 그것을 프레데리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예요?”

“제가 만든 포션입니다.”

“저 안 아픈데요?”

“알아요. 하지만 피곤해 보이니까.”

“겨우 피곤한 데에 누가 포션을 써요.”

“상관없어요. 전 프레데리카 님이 건강한 게 좋은 걸요.”

프레데리카가 자신의 눈앞에서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려는 건지, 아르칸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난감한 얼굴로 손 안에 들린 유리병을 보던 프레데리카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병뚜껑을 열어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역하도록 달콤한 향이 입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가 그것을 꿀꺽 삼키자, 아르칸드가 환하게 웃었다.

“잘하셨어요.”

“괜히 저한테 이런 귀한 걸…….”

“프레데리카 님에게는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아요. 참, 식사하지 않으셨죠? 제가 나가서 식사할 걸 올려보내라 할게요.”

아르칸드는 가볍게 프레데리카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프레데리카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소박하고, 놓인 것도 거의 없는 그 책상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본 아르칸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프레데리카의 책상 위에 있던 그 여러 권의 노트는 분명 오늘 아침 카이온이 보고 있던 것과 같았다.

혹시 그녀에게서 빌린 책인가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건 책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이온이 보고 있던 노트에 있던 기록은 인쇄가 아닌 필사였다. 그렇다면 저 노트는 프레데리카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닐까?

카이온은 그것을 정당하게 손에 넣은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저것을 가져다가 읽고 있는 걸까? 대체 어떤 기록이기에? 이 사실을 프레데리카에게 알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카이온을 직접 추궁해 프레데리카가 알아차리기 전에 가져다 놓게 만들어야 할까?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일단은 프레데리카가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 노트에 대한 건,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르칸드는 약간의 찜찜함을 안고 루시를 찾아 1층으로 내려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프레데리카는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혀뿌리를 누르자, 울컥 구역질이 치밀었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 역한 반응을 억누르려 했지만 그녀는 연거푸 혀를 눌러댔다. 마침내 뱃속이 뒤집히며 말간 물과 달콤한 향기가 역류해 올라왔다.

“우웩…….”

숨을 헐떡이며 프레데리카는 뱃속에 든 것을 모두 비우려 여러 번 억지로 토했다.

빈 속에서 나온 위액과 포션 일부, 그리고 약간의 피가 욕조에 너저분하게 흐른 걸 쏘아본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물을 부어 그것을 쓸어내버리며, 프레데리카는 혀를 찼다.

겨우 포션 정도로 상태가 나아질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토하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조금도 건강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 얼치기 대마법사의 걱정 때문에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이를 악 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화급히 다시 욕조에 고개를 처박았다.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침과 섞인 피가 끈적하게 입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아침에 이미 한 차례 피를 쏟았던 터였다. 아무래도 억지로 토한 영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로 입을 헹군 프레데리카는 다시 한 번 욕조를 깨끗하게 치우고는 한편에 놓인 약통을 집어들었다. 약초를 갈아 환으로 만들어 둔 강력한 진통제를 여러 알 털어 넣고 씹어 먹은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욕실을 나섰다.

잠시 후 루시가 식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프레데리카는 천천히 앞에 놓인 스프와 부드러운 빵을 깨끗하게 비우고, 사과 두 쪽을 먹은 뒤 몸치장을 시작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프레데리카는 완벽해야 했다.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다만 스스로와 주변을 많이, 더 많이 망가뜨려야 했다. 그것이 육체든 정신이든 간에, 무엇이 되었든 전부 모두의 예상에서 어긋나게 해야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만 같았다. 카이온은 이미 힘을 반절 이상은 찾았고, 비올렌은 짓밟히는 더러운 쾌락에 빠졌다. 예상보다 좀 빨랐지만, 아르칸드도 순진함을 곧 저버릴 듯했다. 마지막을 프레데리카는…… 이미 그 전쟁터에서 카이온의 품에 안겼던 순간부터, 망가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카이온이 모든 힘을 되찾고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다시 일어날 때가 되면, 더 이상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프레데리카가 비올렌도, 아르칸드도 모두 망쳐놓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 자신마저 끝내 죽고 말 테니까.

그 순간을 황홀하게 그리며 거울 속의 프레데리카는 미소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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