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의심에 찬 눈초리 -->
프레데리카의 집에 사흘을 머물렀던 아르칸드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고 그만일 줄 알았건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꾸 되돌아왔다.
아르칸드가 프레데리카의 집 문턱을 밟을 때마다 카이온은 짜증을 냈다. 대체 저 마탑의 정신병자가 왜 자꾸 찾아오느냐며 신경질을 냈다. 사실 왜 돌아오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는 더욱 아르칸드가 꼴 보기 싫었다.
비올렌에 이어 이번에는 아르칸드. 카이온은 이제 드러내놓고 프레데리카에게 “다른 놈들에게 자꾸 안기지 말라”며 으르렁댔다.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이 화를 낼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을 뿐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요? 우리가 무슨 사이나 된다고?”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카이온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아르칸드가 왔다 가기만 하면 마왕은 집요하게 프레데리카를 탐했다. 그녀가 목이 쉬도록 교성을 지르고 이제 그만하라고 빌고 애원할 때까지. 그렇게 끈질긴 정사가 끝나고 나면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완전 짐승이 따로 없다며, 마왕의 존엄은 어디 갔느냐고 프레데리카가 아무리 타박해도 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아르칸드는 또 그 나름대로 프레데리카를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서 오곤 했다.
취미가 마법 물품을 만드는 것인 이 대마법사는, 침대 위에서 스스로의 실력이 카이온에게 못미친다는 것을 금방 파악했다. 아르칸드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는 대신, 다른 쪽으로 프레데리카를 만족시키기로 결정했다.
처음 그녀에게 그것을 내밀 때만 해도, 아르칸드는 부끄러움에 미쳐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혹시라도 프레데리카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어떻게 이런 저질스러운 생각을 했느냐”고 비난할까 봐 잔뜩 심장을 졸인 채로 그녀의 심판을 기다렸다.
의외로 프레데리카는 그가 내민 것을 보고는 어깨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재미있겠네요.”
그것이 프레데리카의 총평이었다.
낮부터 아르칸드는 자신이 가져온 마법 도구들과 함께 프레데리카의 침실에 찾아들었다.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책을 읽던 그녀는 마법사의 방문에 기꺼이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르칸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슴팍에 묶여 있는 리본을 당겨 풀었다. 헐거운 실내복은 리본이 풀리자 금세 흘러내려서, 그녀의 어깨와 가슴팍을 드러냈다. 달콤해 보이는 흰 살결을 본 아르칸드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느른한 웃음을 지으며 프레데리카가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또 뭘 가져왔어요?”
“프레데리카 님께 잘 어울릴 것 같은 장신구예요.”
침대 위로 불쑥 올라온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의 눈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그가 가져온 것은 약간 틈이 벌어진 손톱 만한 고리 두 개였다. 거기에는 각각 그녀의 눈과 똑같은 녹색의 보석과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고리를 집어 든 프레데리카가 찬찬히 그것을 살피는 동안, 아르칸드는 급히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양 가슴을 손에 쥐고는, 붉은빛의 유두를 정신없이 빨았다. 어느새 그녀의 실내복은 전부 벗겨져 허리까지 내려간 뒤였다.
“흐응, 잠깐만……. 이거, 어떻게 쓰는 건지 알려주고…….”
“아, 맞다.”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의 손에서 고리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눌러 뒤로 완전히 편하게 기대도록 했다.
“이건 말이죠.”
“음…… 앗, 잠깐…… 조금 아파……”
고리를 살짝 잡아 벌린 아르칸드는 그것으로 자신이 빨고 핥아 동그랗게 솟아오른 유두를 꽉 집었다. 생각보다 조이는 힘이 센지, 프레데리카가 신음을 흘렸다. 고리에 달린 보석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을 보던 아르칸드는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나머지 하나도 재빨리 반대편에 똑같이 매달았다.
도톰한 살을 단단히 조여오는 집게의 압력에 프레데리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욱신거리는 것이 불쾌한 듯했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 유두에 매달려 달랑대는 걸 보니 또 묘한 흥분감이 찾아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사이,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치맛자락 아래로 머리를 들이민 그가 손으로 도톰한 살을 벌리고 그 안의 민감한 돌기를 크게 핥자, 프레데리카가 몸서리를 쳤다. 파르르 떨며 몸을 뒤틀자, 가슴에 매달린 보석이 흔들렸다. 방울이 딸랑이는 소리가 귀엽게 울렸다.
“흐아, 으, 이거 너무, 흐으응……!”
게걸스레 아래를 빨아대는 아르칸드 때문에 프레데리카의 자세는 점점 무너져 내렸다. 기대어 있던 몸이 들썩이고 허리가 휘었다. 자꾸만 하늘로 치솟으려 들썩이는 하반신을 두 손으로 단단히 내리누른 아르칸드는 더 열정적으로 그녀의 클리토리스와 질 입구를 핥았다. 그의 혀가 강하게 공알을 누르자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모로 꼬며 소리를 내질렀다.
“으앙, 아! 아르, 칸, 흐윽, 하앙! 아! 아흑!”
그녀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침대 시트를 잡았다. 자신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가슴에 매달린 방울이 흔들렸다. 고리가 점점 그녀의 유두로 파고들었다. 프레데리카는 점점 젖꼭지에 느껴지는 자극이 심해진다고 생각했다. 왜, 점점 안으로 고리가 쑤시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걸까. 가슴 끝이 간질간질하고, 또 짜르르했다. 아래로도 위로도 느껴지는 쾌감에 프레데리카는 도리질을 쳤다.
흥분한 몸은 착실히 남자의 물건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을 아르칸드는 열렬히 받아마셨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의 혀가 질 안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말랑하고 뜨거운 것이 안을 휘젓자, 프레데리카의 안이 그것을 반기듯 꿈틀거렸다.
“아, 좋아…… 으응, 하…….”
“좋아요, 정말……?”
“으응, 으…… 조금 더…….”
아르칸드는 천천히 그녀의 치마 안에서 기어나왔다. 자극이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에 프레데리카가 한숨을 토했다. 열기 어린 눈으로 아르칸드를 바라보며 프레데리카는 손을 내밀며 졸랐다. 빨리, 조금 더 해줘요. 이걸로는 안 돼. 그런 프레데리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아르칸드는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천천히 힘주어 짓눌렀다.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에 프레데리카가 입을 벌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리가 바르르 떨려왔다.
쾌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며 아르칸드가 속삭였다.
“사실은, 프레데리카 님의 이곳에도 고리를 매달아주고 싶었어요. 너무 예쁠 것 같았거든요.”
“으하앙……!”
“프레데리카 님…….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기대와 욕망이 얼룩진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레데리카는 열락으로 흐릿해진 눈으로 잔뜩 성난 자신의 작은 진주를 장난치듯 건드리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이 뜨거운 숨을 내뱉고는 탓하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할 거였잖아요…… 흐응……. 하악! 아!”
“그래도 허락받고 싶었던걸요.”
어느새 아르칸드의 손에는 그녀의 젖꼭지에 단 것과 한 세트인 똑같은 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느릿하게 프레데리카의 속살을 젖혔다. 그는 일부러 실수인 척 그 고리로 붉게 달아오른 클리토리스를 긁었다. 그때마다 프레데리카는 물 밖에 내어놓은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었다. 왈칵 쏟아져 나오는 애액이 어느새 그녀의 엉덩이와 침대 시트를 질펀하게 적셔 놓았다.
마침내 클리토리스에 보석과 방울이 매달렸다. 아르칸드는 그것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는, 그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그의 몸이 천천히 프레데리카의 위로 기어올라왔다. 할딱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르칸드가 양 손을 그녀의 손에 겹쳐왔다. 깍지를 끼고 꽉 쥔채, 프레데리카의 머리 위에 단단히 고정한 그가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프레데리카 님, 너무 예뻐요.”
“아……. 왠지 아르칸드 님, 날 놀리려고 매번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오는 거 같아…….”
“놀리다니, 무슨 말씀을. 전 프레데리카 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데요.”
다정하게 입을 맞춘 아르칸드는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삽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그의 물건은 잔뜩 성날 대로 성나 있는 상태였는데도. 프레데리카는 재촉하려고 다리를 뻗어 그의 허리를 안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아르칸드는 그의 두 다리로 프레데리카의 다리마저 단단히 고정시켰다.
의아한 얼굴이 된 프레데리카를 보며 아르칸드가 속삭였다.
“이 고리들의 역할은 그냥 매달아 놓기만 하는 게 아니라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명을 하는 대신, 아르칸드는 짧게 입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히익……!”
양 가슴 끝과 클리토리스에서 고리들이 징징대며 진동하기 시작하자, 프레데리카는 새된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정신없이 온몸을 두들겨 맞는 것처럼 쾌감이 격랑이 되어 몰려왔다. 홉뜬 눈에 보이는 아르칸드의 얼굴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정제되지 않은, 통제 불능의 전류가 가장 민감한 곳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몸을 들썩이며 그 쾌감의 물결에서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그녀의 사지를 단단히 붙든 아르칸드의 팔다리는 단단히 못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못하는 프레데리카는 몸을 벌벌 떨며 쉴 새 없이 교성을 내뱉었다.
“아으, 아항! 아! 아아앙! 하, 으아! 그, 그마…… 히이익, 힉!”
“예뻐, 프레데리카 님. 예뻐요…… 너무 아름다워.”
“흐아아앙! 아! 제, 제발, 아흑!”
“이대로 더, 더 많이 느껴주세요. 이대로 절정에 다다르는 프레데리카 님이 보고 싶어요.”
“아앙, 아, 하악! 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생각, 그런 것은 할 새도 없었다. 그녀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쾌감과 공포였다. 이대로 완전히 이상해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마법사의 물건은 단순히 진동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부분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기묘한 가려움에 그녀는 온몸을 뒤틀어댔다.
누군가가 다리 사이로 뭐든 쑤셔주었으면, 제발 그랬으면. 프레데리카는 간질간질한 질 안쪽의 느낌에 엉덩이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너무 허전하고, 간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방울들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스스로의 신음과 방울 소리, 그리고 아르칸드의 속삭임이 프레데리카를 혼미하게 했다.
“조금 더 즐거우시라고, 고리가 진동하면 흥분제가 살짝 흘러 들어가게 해 놓았어요.”
“흐아, 아! 시, 싫…… 아으윽! 넣, 넣어, 넣, 히익, 힉, 윽! 으앙, 앙, 아르, 아르!”
소변이라도 본 것처럼 시트는 흠뻑 젖었지만, 그녀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프레데리카의 입술에 아르칸드의 것이 겹쳤다. 정신없이 아르칸드의 혀를 빨며 프레데리카가 흐느꼈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이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에 한층 더 흥분했다.
그가 마침내 프레데리카의 팔다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자, 그녀는 곧장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손이 곧장 자신의 아래를 찾아들었다.
프레데리카는 끙끙대며 자신의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 더, 크고 단단한 것, 뜨겁고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그걸 갖고 있는 건, 자신에게 풀리지 않는 쾌락을 안겨 준 아르칸드였다.
손가락 두 개로 추삽질을 해대며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돌려 아르칸드를 바라보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그는 프레데리카가 스스로 제 몸을 쑤셔대는 걸 홀린 듯 지켜보고 있었다. 손을 멈추지 못하며,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를 보고 똑바로 누웠다. 다리를 벌려 보인 그녀가 흐느끼며 애걸했다.
“여기, 여기에……. 제발…… 넣어줘요, 아르칸드…… 아흐…….”
“프리카…….”
“아흐, 안돼, 이걸론…… 부족해, 제발……!”
그녀의 양손이 자신의 부어오른 아랫입을 잡아 벌렸다. 흥분한 속살이 아르칸드를 유혹하듯 꿈틀거렸다.
아르칸드는 넋 나간 사람처럼 몇 번이나 프리카, 프리카 하고 중얼대며 그녀의 아래에 자신의 좆을 가져다 맞췄다. 그 입구에 귀두를 문질러대자 애액이 윤활제처럼 그의 물건을 적셨다. 그가 뜸을 들이자, 프레데리카의 손이 대뜸 아르칸드의 페니스를 붙들었다. 그녀는 하반신을 움직여 아르칸드의 귀두를 제 비부에 딱 맞게 가져다 놓았다.
“아르칸드, 빨리…… 빨리 박아줘…….”
그 말에, 아르칸드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찌르고 들어오는 성난 육봉의 감각에 마침내 프레데리카가 환희에 찬 얼굴로 웃었다.
========== 작품 후기 ==========
새 챕터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도구플...근데 아직 안 끝났어요. 다음편에 이어집니다ㅇㅅ〈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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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P주의*
아르칸드의 귀에 들리는 환희와 쾌락이 담긴 신음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채찍질이었다. 오열하듯 헐떡이는 프레데리카를 느낄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프레데리카의 뺨에 떨어졌다가, 흘러내렸다. 쾌감에 일그러진 얼굴에 흐르는 그 물방울은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더, 더, 더. 조르는 소리에 아르칸드는 이를 악물었다. 허리를 힘차게 움직이며 치받을 때마다 프레데리카의 허리가 둥글게 휘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음란해 보이는지 알까.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의 뺨과 이마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쾌락은 프레데리카를 거의 실성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녀는 고리에 집힌 음핵과 유두를 자꾸만 아르칸드에게 밀어붙였다. 좀 더 문지르고, 누르고, 고통스럽게 해 주었으면. 고리에 집힌 부분들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아르칸드 딴에는 조금 더 빠르게 절정에 달할 수 있게 하겠다고 흥분제를 심은 모양이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종류의 음욕에 절어버린 프레데레카에게는 치명적인 독 수준이었다. 아르칸드의 페니스가 들락거릴 때마다 음란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잔뜩 단단해진 살덩어리가 제 안을 가르고 밀고 들어오는 감각은 황홀해서, 도저히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빨리, 그녀의 두 다리가 아르칸드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바짝 몸을 밀착하고 박자를 맞추어 허리를 움직이자, 그녀의 위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좋았다. 이 젊은 대마법사의 좆이 제 안을 헤집는 게 미치게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프레데리카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뱃속에서 시작되어 온몸을 휘감은 욕정의 불길은 너무나도 거셌지만, 아르칸드 혼자서는 도저히 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게 고통스러웠다. 무언가 더 필요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카이온이 있잖아. 프레데리카의 머릿속에 마왕의 얼굴이 스쳤다. 아르칸드와 살을 섞는 와중에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조금도 미안하지도 않았다.
무슨 상관인가. 그녀에게는 그가 필요한데.
감당할 수 없는 물결이 그녀를 몇 번이고 질식시켰다. 프레데리카는 이러다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상대의 숨이 꺽꺽 넘어가고 눈빛이 흐려지는 걸 아르칸드는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알아챘다.
“프리카, 괜찮아요?”
다급하게 물으며 그는 프레데리카의 몸에서 제 것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가 그의 팔을 꽉 붙들고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히익, 히익,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안에서 아르칸드는 걱정에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그는 사색이 되어서 프레데리카의 머리와 뺨을 연신 쓸었다.
“왜, 왜 그러는 거예요? 정신 차리고 날 좀 봐요. 네?”
“흐으…….”
프레데리카는 아르칸드의 가슴에 이마를 밀어붙였다. 다리가 배배 꼬였다. 흐릿한 정신에도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멈출 줄 모르는 이 불길을 꺼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언지 알았다.
“흐, 하…… 카…… 으흑, 카이…… 아…….”
그녀의 말은 부정확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 건지 금방 알아챘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데리카의 내벽은 여전히 꿈틀거리면서 아르칸드의 것을 계속 오물대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어느새 아르칸드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칸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만으로는 프레데리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패배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건,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는 그 순간조차도 그는 프레데리카를 놓을 수 없단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둘의 눈이 동시에 열린 문으로 향했다. 아르칸드는 문간에 선 카이온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들을 바라보는 카이온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진 채였다. 얼굴에 감도는 싸늘함은 마치 전장에서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당연히 마왕이 불쾌감을 느낄 거라고, 아르칸드는 수긍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프레데리카의 몸은 여전히 아르칸드 자신과 연결된 채였다. 조금 전까지 패배감을 느꼈던 것도 잊고 아르칸드는 보란 듯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프레데리카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는 온 힘을 다 짜내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제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흐악, 하! 아!”
“……이 꼴을 하고, 날 불러?”
잔뜩 흐트러진 얼굴의 프레데리카가 눈물 어린 눈동자로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볼과, 아르칸드의 이가 짓씹어 부은 새빨간 입술은 더할 나위 없이 야했다. 아르칸드의 목을 안고 있던 그녀의 한 팔이 카이온을 향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프레데리카가 그를 불렀다.
“이리, 아읏, 이리…… 와요, 흐윽…….”
“미친…….”
카이온은 더 심한 말이라도 내뱉고 싶다는 듯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이를 갈던 그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나보고, 지금 그 사이에 끼라는 건가?”
“카이, 제발…… 나, 하응! 당신이 필, 필요해…… 아! 아, 안 돼…… 제발……!”
아르칸드가 박아대는 대로 프레데리카의 손이 바람에 흩날리는 손수건처럼 흐느적댔다.
보란 듯 자신의 앞에서 현자를 탐하는 마법사와, 그 아래에서 쾌감에 울부짖으면서도 자신을 찾는 현자를 마왕은 이를 악물고 바라보았다. 그의 두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모멸감을 느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다리 사이의 양물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저 꼴을 보고도 너는 저 계집에게 동하는 거냐. 카이온은 스스로가 어처구니 없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데리카가 자신에게만 만족을 못해 다른 남자를 열을, 백을, 천을 끌어들인다 한들…… 카이온은 결국 그녀의 앞에 다시 무릎꿇고 그녀의 몸을 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는 거칠게 제 상의를 벗어 집어던졌다. 두 사람이 뒹구는 침대로 다가가며 바지춤도 풀었다. 자신을 보고 잔뜩 흥분해서 우뚝 서 버린 카이온의 페니스를 본 프레데리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어렸다.
카이온은 입술을 깨문 채 프레데리카의 머리맡에 무릎으로 올라섰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카이온의 물건에 와 닿자, 그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마치 짐승처럼 카이온이 이를 드러냈다.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그 눈이 나만 담게 하고 싶다.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 악력에 프레데리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 붉은 혀가 유혹이라도 하듯 꿈틀거렸다. 카이온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신의 좆을 그대로 처박았다.
“우웁……!”
거대한 남근이 입안을 가득 메우자, 프레데리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지 프레데리카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방울이 요란하게 딸랑거렸다. 꺽꺽대는 소리에 맞추어 카이온이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밀어넣었다.
턱이 뻐근하다 못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프레데리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남자의 좆에서 나는 축축하고 비린 냄새가 코 안을 가득 메웠다. 목구멍 안쪽까지 잔뜩 메웠다가, 빠져나가는 살덩어리를 저도 모르게 혀로 감았다. 빠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들락거리는 좆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컥, 크읍, 큭…….”
프레데리카가 괴로워하는 듯 보이자 아르칸드는 카이온을 노려보았다. 마법사의 눈길 따위에 주춤하지 않고, 카이온은 보란 듯 그녀의 입 안에 제 것을 더 격하게 밀어넣었다. 아르칸드가 울컥 화를 내려는 순간, 프레데리카의 내벽이 마치 그의 것을 쥐어짜듯 강하게 조여들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격한 쾌감에 아르칸드는 카이온에게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숨을 멈췄다. 붉어진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아르칸드를 보며 코웃음을 친 카이온은 이번에는 프레데리카의 가슴에 매달린 고리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잔재주를 피우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손가락이 두 개의 고리를 붙들고는 위로 잡아당겼다. 고리는 쉬이 빠지기는커녕, 제가 불고 있는 젖꼭지를 꽉 문 채 위로 딸려 올라갔다. 단단해진 유두로 전해져오는 강렬한 고통에 프레데리카가 허리를 휘며 발발 떨었다. 그녀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아르칸드의 좆을 안으로 더 깊게 빨아들이듯 움직였다. 아르칸드는 이를 악물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붙들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정신없이 추삽질을 해댔다. 프레데리카의 사정을 인지할 정신이 없었다.
“헉, 흐…… 프리, 카. 프리카……! 아윽……!”
애칭을 연신 불러대며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아르칸드를 노려보던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입에서 자신의 물건을 꺼냈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그의 페니스가 번들거리고 빛났다. 입가며 턱 주변으로 잔뜩 흐른 침을 닦아주며 카이온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부족한 게 눈에 보이는군.”
“흐억, 흑…… 카이온…….”
그는 프레데리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넣어서는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 바람에 아르칸드는 하마터면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버티고 앉았다.
“이게 뭐 하는…….”
“닥쳐, 너랑 대화 따위 할 생각 없으니까.”
“뭐……?”
아르칸드가 뭐라 더 대꾸하기도 전에,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이미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프레데리카는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다는 듯 그저 두 남자 사이에 몸을 온전히 내맡긴 채였다. 그녀는 기운이 다 빠진 팔을 아르칸드의 어깨에 걸치고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르칸드 님…… 나, 너무 좋아…….”
“……프리카, 프레데리카 님.”
“그렇게, 불러주는 것도 좋아, 흐아앙!”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카이온이 제 것을 프레데리카의 뒤에 꽂아넣자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 들어온 거대한 좆이 주는 이물감에 프레데리카가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아파, 흐앙, 아, 파……! 학! 하응!”
“윽, 제길…… 끊어지겠어, 힘 풀어……!”
“이게, 뭐, 으윽.”
프레데리카는 이제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그녀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건 제 뱃속으로 들어온 두 개의 좆뿐이었다. 그것들이 자신의 안에서 서로 맞부딪치고 비벼지며 주는 감각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아찔하도록 좋았다.
어느새 그녀의 안에 각자의 페니스를 정신없이 쑤셔대는 두 남자 사이에서 그녀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흐느적대며 흔들렸다. 카이온의 등에 완전히 기대고 있자, 아르칸드의 손이 그녀의 부푼 유방을 희롱해댔다. 카이온의 손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찾아들어서는, 마법사가 걸어놓은 고리를 만지고 당겨댔다.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절정이 치닫고 치닫고 또 치달아서는 자꾸만 그녀의 몸을 난타했다. 머리카락에서조차 저릿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붙들었고, 누군가의 입술이 입 안으로 찾아들었다. 엇박으로 치고 들어오는 두 개의 육봉이 내벽을 긁고 나갔다가 꾹 누르며 들어오면 그녀는 쉬어버린 목으로 교성을 내질렀다.
프레데리카, 하고 누가 부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불러도 상관없었다. 대답 따위 할 정신은 없었으니까.
자신을 붙든 두 남자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들이 제것을 안으로 있는 힘껏 밀어넣는 순간,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머리도, 가슴도 모두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뜨끈한 것들이 앞뒤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두 살덩어리가 빠져나가자, 체온이 훅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후두둑하고 정액이 다리 사이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기운이 없어서 헤, 하고 웃었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들이 그녀를 옆으로 눕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이 프레데리카를 다시 엎드리게 했다.
잔뜩 자극받아 민감해진 질 안으로 또다시 둘 중 하나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왔다.
“흐아…… 그마안……!”
파르르 떨며 프레데리카가 애원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게 누구인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로 남은 한 개의 육봉을 입에 물어야 했다.
또다시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뭔가 둥글고 불룩한 것이 연달아 그녀의 항문으로 들어왔다. 하나, 하나, 계속 밀려 들어온 것에 배가 가득 찬 감각이 묘했다. 애써 손을 뻗어 그것을 빼내 보려고 끙끙거리는데, 그것들이 사정없이 진동해댔다.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두드리는 쾌감에 프레데리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콧물도, 침도 잔뜩 흘렀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그녀는 이제 그만 해달라고 애원하려 했지만, 입이 막혀버린 터라 나오는 건 억눌린 신음이 전부였다.
“우웁! 흐읍! 읍!”
“예뻐, 프레데리카.”
“좀 더, 좀 더 빨아줘요.”
“흐응! 으, 윽, 으읏!”
한여름 햇살 아래 눈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프레데리카는 자신이 녹아내리는 중이라 느꼈다. 이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방안에는 셋이 헐떡이는 소리와, 프레데리카의 뱃속에서 진동하는 마법기구의 소음만이 존재했다. 사람의 말을 셋 모두 잃어버린 듯했다.
풍랑에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프레데리카는 계속, 계속 흔들렸다. 결국 파도에 완전히 침몰당한다고 느낀 순간이 찾아왔다. 입안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액을 미처 다 삼키기도 전에 등 뒤에 흩뿌려지는 정액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멀어져가는 감각 너머에 그녀의 이름을 연신 다정하게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ㅅ'*)......
다른 모양의 3P를 쓰고 싶었는데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백스텝한 결과...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17일까지 코멘트 남겨주신 독자님들 가운데 무작위로 10분께 딱지 20장을 보내드릴 거예요!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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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프레데리카의 몸에서 마침내 빠져나온 카이온과 아르칸드는 헐떡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걸 처음 본 아르칸드가 완전히 당황한 사이에 카이온은 익숙하다는 듯 욕실로 가서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고 수건을 챙겨서 나왔다.
“그렇게 멍청하게 있을 거면 저리 비켜라.”
딱히 공격적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르칸드는 카이온의 박력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아르칸드는 마왕이 익숙한 듯 손을 놀리는 양을 지켜보았다.
마왕은 수건을 충분히 적혀 그녀의 입 안에 고인 정액을 닦아내고는 다른 수건으로 얼굴도 꼼꼼하게 훑어냈다. 정액과 땀에 절은 몸 곳곳도 빠짐없이 깨끗이 하던 그는, 프레데리카의 가슴에 매달린 고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가락이 고리를 붙들었다. 뭔가 한 낌새도 없었건만, 그대로 그 손가락 사이에서 고리는 가루가 되어버렸다. 나머지 고리들마저 제거해버린 카이온은 또다시 묵묵히 그녀의 몸을 닦았다.
그 정성스러운 손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아르칸드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마왕이, 인간에게 저렇게 애정 어린 손길을 보낼 수 있는 건가? 카이온은 프레데리카가 마치 종이로 만든 인형인 것처럼 굴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비롯한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겠다는 살의에 불타올랐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르칸드는 마왕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이유가 프레데리카임을 확신했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카이온은 태도를 바꾼 걸까.
그 사이 카이온의 손은 프레데리카의 다리 사이로 내려왔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 비죽 나와 있는 끈을 끌어당겼다. 둥근 사탕 같은 유리구슬들이 그가 잡아당길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끌려나왔다. 거의 열두어 개가 모조리 몸 밖으로 나오고 나자, 그것들 역시 재가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카이온은 똑바로 누운 프레데리카의 다리를 벌렸다. 잔뜩 토정해 놓은 프레데리카의 비부에는 허연 정액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프레데리카의 안으로 천천히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 고인 것들은 모조리 긁어냈다. 성교할 때와 다름없을 강한 자극이었지만, 기절한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만족할 정도로 안에 든 것들을 빼낸 카이온은 물에 젖은 수건을 들어 음부까지 모조리 닦아내고 난 뒤에야 프레데리카의 몸을 닦기를 마쳤다.
마왕이 뒤처리를 하는 게 너무나도 익숙해 보여서 아르칸드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베개에 머리를 고여 주고,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뒤에 카이온은 침대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아르칸드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적당히 찾아와서 귀찮게 굴지 그래.”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똑같이 프레데리카를 힘들게 한 주제에, 마왕이 당연하다는 듯 훈계를 하니 아르칸드는 어이가 없었다. 카이온은 콧방귀를 뀌며 마법사를 노려보고는 대야와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혼자 남은 아르칸드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는 프레데리카의 옆에 앉았다.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쓸며 속삭였다.
“프리카, 미안해요.”
그녀의 애칭을 부를 때마다 아르칸드는 묘한 승리감에 차올랐다. 그 호칭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했다. 프레데리카가 그렇게, 자신을 허락해준 것만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괜찮을까? 아르칸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이렇게 음란한 짓을 함께 한 뒤인데도,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좀처럼 되질 않았다.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몸을 씻은 카이온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아르칸드의 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의 목덜미를 붙들고 무작정 잡아 끌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조용히 해라, 깬다.”
카이온의 협박은 잘 먹혀서 아르칸드는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프레데리카를 두고 나온 두 사람은 복도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울컥 화를 내려는 아르칸드보다 카이온이 한 발 먼저 입을 열었다.
“마법사, 혹시 프레데리카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적 없나?”
“그게 무슨 소리지?”
“무엇이 되었든.”
마왕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카이온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아르칸드는 카이온의 말을 무시하는 대신 곰곰이 지난 시간을 되짚었다.
프레데리카의, 이상한 점…….
“체력이 많이 줄어든 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전쟁이 길었으니 피로가 누적되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되는데.”
“……그거 외에는?”
“글쎄…….”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여러 남자를 안는다는 그것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프레데리카의 몸에 그토록 빠져든 주제에 그걸 이상하다고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프레데리카라 해서 남자를 탐하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아르칸드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카이온은 대답을 종용할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마법사의 옆을 지나치려 하는데, 아르칸드가 급히 카이온의 팔을 붙잡았다.
전장에서였다면 아르칸드가 카이온의 팔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려 할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아르칸드는 그에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너, 프레데리카 님의 책을 훔쳤지?”
카이온은 대답하는 대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에 확신을 얻은 아르칸드가 손에 더 힘을 주고 말했다.
“주인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개도 있나?”
“그래, 프레데리카의 노트……. 네가 도움이 되겠군.”
“뭐?”
“따라와라.”
얼떨결에 아르칸드는 카이온의 손에 질질 끌려 그의 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이온은 2층으로 올라오는 루시에게 “가서 네 주인을 돌보라”며 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구는 카이온의 태도에 아르칸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르칸드를 의자에 앉힌 카이온은 제 침대 베개 밑에 둔 프레데리카의 노트를 가져와서 그의 앞에 펼쳐 보였다. 정갈한 글씨가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프레데리카의 개인 기록인 게 확실하자, 아르칸드는 고개를 돌려 애써 그것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한테 이건 왜 보여주는 거지? 프레데리카 님의 사생활이야, 이렇게 멋대로 보면……!”
“여기, 이 부분.”
긴 손가락이 페이지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아르칸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에는 아르칸드가 처음 보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카이온은 무언가 희망이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읽을 수 있나?”
“아니…… 처음 보는 글자인데.”
“마탑에 그렇게 오래 처박혀 있어 놓고 이거 하나를 못 읽어?”
경멸 어린 목소리에 아르칸드가 울컥하며 재깍 반박했다.
“세상에 없는 글자를 어떻게 읽을 수 있어!”
“세상에 없는 글자?”
“그래! 문장 사이에 있으니 문자라고 생각할 뿐이지, 이런 글자는 없다고.”
“마법사, 이걸 당장 읽어라.”
압박감 가득한 목소리가 아르칸드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힘을 잃은 마왕에게-힘이 일부 돌아왔다곤 하지만, 예전에 자신이 맞서던 때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짓눌리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호기심은 그의 이성을 눌렀다. 마법사는 언제나 그런 생물이었다. 아르칸드는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눈으로는 프레데리카의 노트를 읽어나갔다.
[마법사, 성기사, 성검, 마왕, 그리고 전쟁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이제 이야기는 본 궤도에 들어섰다. 여기에서 나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 르데트가 순순히 이야기를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프레데리카가 아니라 □□□이라는 존재로 반드시 살고야 말 테니까. 절대로 스스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너의 목표는, 이야기의 완전한 파괴라는 걸 잊지 마.]
아까 카이온의 손가락이 닿았던 부분은 읽을 수 없었지만 나머지는 소수민족의 언어로 적혀 있어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아르칸드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런 마법사의 기색을 읽은 카이온이 곧장 종이를 몇 장 넘겼다.
새로운 페이지에서 카이온이 손가락으로 짚은 문장을 아르칸드는 재빨리 읽어내렸다.
[규칙 1. 이야기가 뒤틀리려면 내가 아니게 되어야 한다.]
[규칙 2. 이야기가 뒤틀리려면 나 외의 다른 이들도 함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규칙 3. 이야기에서 벗어나려면 죽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아르칸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뒤틀리고, 거기에서 벗어나? 대체 프레데리카는 어떤 의도로 이런 것을 규칙이라고 써 놓은 것일까? 아르칸드의 의아한 얼굴을 이해한다는 듯 카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트를 덮어 다시 손에 쥐고는 말했다.
“그래서 묻는 거다. 프레데리카에게서 이상한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나?”
“그분이 널 이곳으로 산 채로 데려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지, 따지자면.”
“흠.”
아르칸드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8년 동안 프레데리카 님은 말하자면, ‘고결’과 ‘순결’이라는 단어를 압축해 놓은 사람과 같았지. 오로지 전쟁에서 마족을 물리치는 일에만 헌신했고, 어떤 종류의 유혹에도 눈을 돌린 적이 없어. 돈, 명예, 색욕…… 어떤 것도 말이야. 그런 분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마왕을 집에 구금해 놓는 것에 이어 마왕과 통정을 했다, 라. 누가 봐도 이상하지?”
“계속해 봐.”
“거기에 나…… 도 끼어 있고. 보아하니 비올렌도 프레데리카 님에게 안긴 것 같은데.”
“그래.”
“솔직히 가장 이상한 지점은 그거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건, 딱 그 부분밖에 없어. 그 이상한 일에 끼어 있는 주제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씁쓸한 얼굴로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는 아르칸드의 기분 따위를 카이온은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카이온은 마법사의 말을 듣고 뭔가를 더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카이온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르칸드가 뭘 말하려던 거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마왕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원래 그는 혹시 프레데리카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인간들이 그녀를 같은 인간으로 대했을까를 잠깐 생각해 보기만 해도,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인 건 확실했다.
대신 카이온은 다른 쪽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이, ‘이야기’ 말이다.”
그의 손가락이 ‘이야기’라는 글자를 툭툭 쳤다. 아르칸드는 말없이 카이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뭘?”
“이야기를 뒤틀고, 벗어난다라고 프레데리카는 표현했잖나.”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이야기 속에 있다고 인식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괴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아르칸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마왕이 혹시 그 사이에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카이온은 꿋꿋했다.
“프레데리카가 이렇게 생각한 지 하루이틀 일이 아니더군.”
“…….”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마왕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한 손으로 노트를 꽉 끌어안은 채였다.
“난 의심하고 있거든, 프레데리카가…… 떠나려 한다고.”
살아서든 죽어서든, 내 곁을 말이지.
“난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프레데리카 님이 떠나다니, 어딜 떠난다는 거지?”
“어디로든 말이야. 너도 그녀가 사라지는 걸 원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르칸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은 어떤 근거가 있어서 프레데리카가 떠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기록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봐서는 확답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는 프레데리카의 노트를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이온이 멋대로 그녀의 기록을 보았다고 비난한 주제에 지금은 그 자신도 프레데리카의 개인 기록을 읽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카이온은 자신이 들고 있던 노트를 불쑥 아르칸드에게 건넸다.
홀린 것처럼 아르칸드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가져가라.”
“이렇게, 멋대로…….”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지.”
멋대로 대화를 끊어버린 카이온은 곧장 아르칸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나는 뒷모습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마치 동상처럼 굳어져 섰다.
노트를 손에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칸드는 마왕의 등을 노려보다가 바로 그의 방을 나가버렸다. 마법사의 기척이 프레데리카의 집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카이온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또다시 프레데리카의 방 쪽이었다.
========== 작품 후기 ==========
놓치지 않을 거예요...(김희애 톤)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오늘까지 댓글 남겨주신 분들 중 무작위로 10분을 선정해서 딱지 20장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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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은 느렸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느릿느릿 프레데리카의 방을 향해 다가가는 그의 얼굴은 착잡한 듯도 보였고, 화가 난 듯도 보였다. 문 앞에 서서 바로 문고리에 손을 올리지 못하고 주저하던 그는 스스로가 ‘주저’했다는 사실에 실소했다.
모든 마족 위에 군림하고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그들을 모조리 복종시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였다. 카이온은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마왕이었다. 단 한 번도 행동하기를 주저해 본 역사가 없었다.
그런데 겨우 인간 여자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 두려워서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냐? 카이온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이성이 호되게 호령했다. 그런데도 몸은 따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카이온은 예민하게 집중했다. 그가 잘 알고 익숙한 프레데리카가 아닌, 그녀가 만든 인형 루시의 움직임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상태를 돌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더러워진 방을 치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프레데리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커다란 손이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무슨 소리라도 날까 봐 천천히 그것을 돌리고는, 역시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바닥을 닦고 있던 루시의 고개가 카이온을 향했다.
표정 하나 없는 인형의 눈이 침입자를 빤히 응시하더니, 곧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루시는 들고 있던 걸레를 가지런히 접어 모아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카이온은 당연하다는 듯 그 인형에게 명령했다.
“나가라.”
그는 주인이 아니었지만, 루시는 기꺼이 명에 따랐다. 걸레와 양동이를 차곡차곡 챙겨서는 카이온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그제야 카이온은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창백한 낯으로 깊은 잠에 빠진 프레데리카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카이온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설탕 공예를 만지듯 잔뜩 주의를 기울여 프레데리카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프레데리카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덜 건강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카이온은 그녀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온은 다른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프레데리카가 미웠다. 자신 대신에 그녀를 끌어안고 핥고 빠는 놈들이 죽이고 싶었다. 처음 프레데리카와 했던 약속 같은 건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너를 곁에 두고 싶다.
내가 너의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푸석한 머리카락 한 줌을 쥐어 그 끝에 입을 맞췄다.
그의 의식이 프레데리카의 정신으로 또다시 찾아들었다. 그 사이에 그의 권속인 몽마가 몇 차례나 프레데리카의 꿈을 엿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소멸 될 것이 두려워 벌벌 떠는 몽마를 돌려보낸 뒤, 카이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직접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정신 장벽이 단단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길 얼마나 주저했던가.
무엇을 보게 될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프레데리카가 이 세계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기록을 통해 이미 잘 알게 된 바였다. 그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프레데리카는 이 세계를 저주했다. 과거의 그녀가 가끔씩 분에 못 이겨 노트 몇 페이지에 걸쳐서 발붙인 세계를 저주하는 글을 써 놓은 걸 보고 카이온은 두려웠다.
왜 이 세계를 미워하고 떠나고 싶어하는지, 카이온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프레데리카가 그에게 했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힘을 되찾아서 나를 죽이고 이 세계를 멸망시켜요.’
처음에는 그저 놀리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프레데리카와 숨결을 나누며 점차 힘이 돌아오자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죽지 않는 몸이니까, 그대로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길 바랐다.
다시 눈을 뜬 카이온의 앞에는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프레데리카의 머리 위에는 화려한 장식이 얹어져 있었다. 그것은 약 150여 년 전에 사라진 어느 왕국의 상징이었다. 아름다운 수와 레이스로 꾸며진 드레스 밑단에는 피와 재가 잔뜩 묻어 더러워진 채였다. 그녀의 시야 끝에는 왕성이 찬란하게 불타고 있었다.
[잘 타네.]
모닥불이라도 보고 있는 양 중얼거린 프레데리카가 몸을 돌리자, 카이온과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챌까 봐 카이온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스치듯 카이온의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아직도 한참 더 남았어……. 한참 더…….]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프레데리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또다시 풍경이 이지러지며 바뀌었다.
이번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한 70년쯤 전일까? 프레데리카는 시녀의 복장을 하고 어느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여자의 귀에 속삭였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오늘도 베르지안 계집의 처소로 가셨다 합니다.]
프레데리카의 속삭임을 들은 여자는 파르르 떨더니만, 앞에 놓인 문진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사기로 된 문진이 부서졌다. 황후라는 여자는 괴성을 내지르며 방 안의 물건들을 부숴댔다. 그 파편이 튀며 프레데리카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붉은 실선이 하얀 볼에 그어지며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조금도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카이온은 베르지안이란 이름을 듣고 이 나라의 최후를 기억했다. 후궁에게 빠진 황제와, 그것에 모멸감을 느낀 황후, 둘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번성했던 제국이 치정으로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일에 대해 그도 읽은 적이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그곳에도 있었던 건가. 카이온은 그녀가 역사 속에 하나씩 자리를 잡은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다시 바뀐 풍경은 꽤 익숙한 곳이었다. 프레데리카의 집에 그녀와 비올렌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비올렌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프레데리카는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성검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응.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프리카, 아니 스승님. 스승님은 항상 나를 과대평가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아, 레니. 넌 성검의 주인이 될 거야. 나는 ‘알아.’]
프레데리카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번뜩임을 카이온은 놓치지 않았다.
저 ‘안다’는 말은 말 그대로 비올렌이 성검의 주인이 되리라는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단 뜻이라고, 카이온은 추측했다. 그녀가 어떻게 이 세계의 흐름을 알고 있는지는 아직 그도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순간 카이온은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프레데리카가 비올렌의 스승이 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올렌이 성검의 주인이 되어 카이온에게 대적할 인물이라는 걸 알고, 그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데리카가 마왕을 붙잡은 것도, 이런 관계가 된 것도 다 예정되어 있던 일인 걸까?
그 순간, 프레데리카의 눈이 비올렌에게서 멀어져서는 카이온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마왕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정신 속에서 그 정신의 주인이 그를 알아채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카이온은 마왕이기에 강했지만, 어쨌든 다른 존재의 정신 속에서는 그 정신의 주인이 절대자였다.
카이온을 발견한 프레데리카는 생긋 웃었다. 카이온은 섣부르게 그녀에게 말을 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카이온.]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이온.]
어느새 비올렌은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도 그 낼름대던 혓바닥을 멈춘 채였다. 프레데리카의 발이 옆으로 살짝 틀어지고, 그녀가 카이온을 향해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프레데리카가 다가오자 카이온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의식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의식의 주인이 그를 내보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기랄. 카이온은 욕설을 내뱉었다.
거의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프레데리카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소감이 어때요?]
“나는 네가 왜…… 죽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왜 너는 이 세계를 혐오하지?”
[알잖아요. 난 이 세계 사람이 아닌걸. 그러니 싫지.]
“하지만 이미 수백 년을 살았잖나.”
[카이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요? 당신은 힘이 봉인된 지금이 행복해요? 그 상태로 수백 년을, 마계가 아닌 인간들 사이에서 살면 행복할까요?]
그 말에 카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이해받았다 느낀 건지,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처연한 빛을 띠었다.
[그러니 날 죽여줘요. 죽어야, 나는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네가 살던 곳이 여전히 네가 살던 그 세계 그대로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이미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났잖아.”
[상관없어요. 뭐가 어찌 되었든 난 여기가 싫은걸.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요. 아주 지긋지긋하고…….]
“프레데리카.”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시간이 또 나 때문이라는 걸 떠올리면……. 그래서 나는 내가 저주스러워.]
감정이 격해지자, 바닥이 출렁거렸다. 카이온은 제대로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카이온을 신경도 쓰지 않고, 프레데리카는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녀의 눈에서, 귀와 코에서,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울었다.
[죽고 싶어. 정말, 죽고 싶다고.]
순간 발밑이 쑥 꺼지며 카이온은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의 귓가에 계속해서 죽고 싶다고 울부짖은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여전히 자고 있는 프레데리카였다.
안도한 것도 잠시, 프레데리카의 몸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잔뜩 피를 토하는 그녀를 황급히 안아 든 카이온이 소리 높여 루시를 불렀다.
“루시, 당장 이리로 와! 프레데리카, 정신 차려라. 프레데리카…….”
처음으로 카이온은 누군가가 죽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무서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이 빠지는 지리멸렬한 회의에 참여한 비올렌의 얼굴은 왕창 찌푸려진 채였다. 벌써 이 지긋지긋한 군상들과 수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낸 지 1달이 가까워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왕이 억지로 떠맡긴 군사들의 대략적인 훈련도 끝날 터였다.
그냥 병사들만 돌보는 일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왜 왕은 자꾸만 그를 이 귀족들의 고상한 입씨름에 참여시키고 싶어 하는지, 비올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왕이 그의 권위를 그런 식으로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비올렌은 영원히 모를 터였다.
거의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회의가 끝났다. 비올렌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를 지나가던 시종과 시녀들이 움찔거리며 피했다.
프레데리카가 보고 싶어…….
미칠 듯 지루했던 나날 내내 비올렌은 프레데리카를 떠올리며 버텼다.
처음에야 그녀의 발에 짓밟혀 사정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음욕에 불타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순수하게 그녀를 그리워하게 됐다. 그냥 프레데리카를 마주하고, 차 한 잔 하며 나 너무 힘들었다고 투덜대고 싶었다. 너는 건강한지, 마왕이 허튼 짓은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어쩌면 서신 한 통이 없을까. 겨우 한 달여 가량의 짧은 수도 방문이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섭섭했다.
프레데리카와 회포를 풀 수 없어 답답하던 비올렌은 문득 아르칸드를 떠올렸다.
그날, 아르칸드가 프레데리카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날카롭게 굴었던 게 미안해서 사과하러 간 게 몇 차례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아르칸드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꼭 사과를 해야 하건만. 비올렌은 생각이 난 김에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에게 사과하고, 또 저 지질한 귀족들의 회의를 욕하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도 같았다.
그는 금세 아르칸드의 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노크를 하자 반갑게도 안에서 답이 들렸다. 비올렌은 환히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르칸드, 오랜만…….”
전우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선 비올렌은 그에게 바로 다가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르칸드는 낡은 노트에 코를 박고 누가 들어온지도 모른 채 그것만 읽고 있었다. 방문자 쪽을 향해 손을 내밀어 잠깐 기다려달라 표시해 보인 그는 도무지 노트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비올렌은 마법사라는 종족이 얼마나 하나에 몰두하면 주변을 신경쓰지 못하는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냥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마침내 아르칸드가 노트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와 있는 비올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었다.
“비, 비, 비올렌?!”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니……, 아닙니다. 앉, 앉아요. 어, 차 드릴까요?”
“주면 감사히 마시죠.”
허둥대던 아르칸드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책상 위의 것들을 와르르 바닥에 쏟고 말았다. 종이와 노트, 필기구 등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아르칸드가 허겁지겁 그것을 줍는 걸 본 비올렌도 얼른 그를 도우려고 다가섰다.
비올렌은 근처에 떨어진 낡은 노트에 손을 가져갔다. 펼쳐진 노트에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써 있었다. 어쩐지, 그 글씨체가 낯익었다.
그가 노트를 집어들려고 하는 걸 본 마법사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하지 마요!”
그러나 이미 비올렌은 그 노트를 집어 든 뒤였다. 정갈한 글씨를 조금 읽은 것만으로도 비올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짐승처럼 사나운 얼굴이 된 비올렌이 아르칸드를 홱 노려보았다.
“프레데리카의 것을, 아르칸드 님이 왜 갖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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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아르칸드는 비올렌의 손아귀에서 노트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검 쓰는 이의 악력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오히려 비올렌이 힘주어 노트를 당기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칼만 들이대지 않았다뿐이지, 비올렌은 이미 눈빛만으로는 아르칸드의 가슴에 칼을 꽂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비올렌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이 왜 프리카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잖아!”
“내가 그걸 대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프레데리카를 찾아갔어? 그랬던 겁니까? 가서 대체 뭘 한 거야!”
비올렌의 손이 대뜸 아르칸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바짝 끌려가다 못해 까치발까지 들고 선 아르칸드는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잔뜩 매서운 얼굴이 되어서 비올렌을 마주 노려보았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프레데리카 님과 내가, 무슨 일이 있었든……!”
“아르칸드 호브, 프레데리카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파들파들 떨며 위협을 하는 비올렌을 보며 아르칸드는 삐딱하게 웃었다.
“손끝이요?”
“……설마.”
“그러는 비올렌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합니까? 어차피 당신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을 텐데…… 악!”
분에 차 아르칸드를 내동댕이친 비올렌의 손이 덜덜 떨리며 허리에 찬 검 손잡이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듯했지만, 그의 손은 검 손잡이를 꽉 붙잡고만 있을 뿐 차마 발검하지 못했다.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칸드가 잔뜩 인상을 쓴 채 짧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비올렌의 손에 들려 있던 노트가 빨려 들어가듯 아르칸드의 손으로 날아왔다. 그것을 품에 감추듯 꼭 끌어안은 아르칸드는 주춤 뒤로 물러나며 일갈했다.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어서 나에게 이러는 거라면, 틀렸어요. 애초에 프레데리카 님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비올렌 당신도 잘 알잖아. 내게 이러고 나면, 마왕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여기에서 비올렌이 발이 묶인 사이에 그녀 곁에 있는 마왕은 실컷…….”
“시끄러워!”
“사실을 직시하란 말입니다!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8년 동안 한 번 언성을 높인 적 없던 아르칸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비올렌도 움찔했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린 건 아니었기에 곧장 유순한 태도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아르칸드는 신경질적으로 떨어진 물건들에 손을 휘저었다. 난장판이 된 바닥과 책상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비올린이 씩씩대며 또 말을 이으려 했지만, 아르칸드는 손을 휘저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삽시간에 피로한 얼굴이 된 아르칸드는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는 비척비척 의자에 앉아서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봐요.”
“……나는, 인정할 수가, 어떻게 당신이…….”
“프레데리카를 누가 더 만족시키고 독차지하느냐는 솔직히,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 제대로 듣지 않으면 비올렌, 당신 진짜 후회할 거야. 그러니 앉아요.”
솔직한 심정으로 비올렌은 방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곧장 코카네스로 말을 몰아가 프레데리카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싶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럴 자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에 가득 찬 비올렌은 조금만 누가 건드려도 폭발할 듯 잔뜩 굳어 있었다. 아르칸드는 그런 전우를 보면서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프레데리카 님과 관련한 문제니까, 제발 들어요.”
연모하는 이의 이름은 마법의 주문처럼 비올렌을 움직였다. 여전히 당장이라도 아르칸드의 목을 맹렬히 물어뜯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도 비올렌은 그의 앞에 앉았다.
그제야 아르칸드는 품에 안고 있던 낡은 정장의 노트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이 그 노트를 토닥였다.
“이건, 맞아요. 프레데리카 님의 물건이에요. 아, 잠깐. 화내지 말고 일단 내 말부터 들어요. 이걸 준 건 마왕입니다. 그가, 프레데리카 님이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하면서…… 준 일기예요.”
“숨겨? 뭘?”
“마왕은 프레데리카 님이 이 세계를 떠나려 한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비올렌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떠나긴 어딜 떠난단 말인가?
상대가 영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자, 아르칸드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프레데리카 님이 몇 살인지는 아십니까?”
“……나보다, 연상이라는 건 압니다.”
“이 한 권의 기록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2년 동안의 것입니다. 꼭 그 당시의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고, 그분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잔뜩 있어요.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프레데리카 님은 최소한 200, 아니 30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아르칸드의 말에 비올렌은 화가 났던 것도 잊어버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300년 가까이 산단 말인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인 비올렌을 보고 아르칸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한다 해도, 일단 넘어가죠. 우선은 프레데리카 님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얘기할게요. 프레데리카 님은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은 이야기 속이고, 어떤 식으로 미래가 진행될지 그분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왕과의 전쟁도, 미리 알고 있었고요. 또 반드시 이 이야기에서 나가겠다고 다짐하는데, 탈출하기 위한 규칙이 세 가지입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정말…….”
“이야기가 뒤틀리려면 내가 나 자신이 아니어야 하고, 자신 외의 다른 이들도 원래 운명에서 이탈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죽어야 하죠.”
‘죽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겁게 들리는지. 비올렌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순수한 탐구자의 자세가 된 아르칸드는 노트를 뒤적이면서 비올렌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여기, 보면 이렇게 쓰여 있죠. ‘계획대로 신전은 마왕에게 대적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예상보다 약간 빠르지만, 비올렌이 성검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 독을 풀어야 한다. 순수하고 고귀한 인물이어야 할 용사와, 마법사, 성기사 그리고 무한한 악이어야 할 마왕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이따위로 세세하게 설정을 해 놓다니 미친 거 아닐까.’”
“그래서, 프레데리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죠?”
떨리는 ‘용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법사’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뭘 어떻게 했느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걸까? 아르칸드는 비올렌이 정말 몰라서 되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상상할 수도 없어서, 머릿속에 다 입력이 되지도 않고 해석도 안 되는 걸로 보였다.
하긴 아르칸드도 그랬다. 도저히 프레데리카의 기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리고 그 상태로 변함없는 모습인 채 수백 년을 살았다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가 프레데리카를 아예 몰랐다면, 아마도 그녀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은 광인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정돈된 채였다. 또한 프레데리카가 예상했던 대로 사건은 일어났고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보다도, ‘뒤틀림’을 아르칸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알던 프레데리카도, 비올렌도, 마왕도…… 심지어 아르칸드 자신도 어느 기점부터 스스로를 잃은 듯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싶지만 프레데리카의 앞에 서면 또다시 혼미하게 그녀에게 빠져들어 허우적댔다.
만약 프레데리카의 기록이 사실이고, 카이온의 추측이 맞다면 프레데리카는 지금 ‘죽어서 이야기 속에서 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중인 셈이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의 비올렌은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서, 프레데리카가 지금 죽으려고…… 그런다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마왕이 그랬고, 이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도 안 돼.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믿지? 프레데리카에게 물어보긴 했습니까? 아니,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프레데리카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분이 미쳤다고 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명료한 정신으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지.”
비올렌은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만,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그 한 달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르칸드가 프레데리카에게 안겼다, 그건 그저, 화가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가 죽으려고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녀에게 목 매는 자신을 두고? 비올렌은 자신의 앞에 앉은 아르칸드를 바라보았다. 만약 아르칸드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면. 그녀의 계획을 몰래 알아낸 카이온도, 그렇다고 한다면?
프레데리카에 대한 진득한 집착만 만들어두고, 그녀 자신은 사라지려 한다고?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가정이었다.
힘없는 목소리로 비올렌이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난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마왕이 그러더군요. 그는…… 프레데리카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그것 또한 놀라운 말이었다. 마왕이, 인간에게 애정이라도 느낀단 말인가? 황망한 얼굴이 된 비올렌을 보며 아르칸드는 쓰게 웃었다.
“놀랐습니까? 나도 많이 놀랐어요. 마왕은…… 프레데리카를 꽤 소중히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심지어 힘이 돌아왔는데도, 그 힘을 숨긴 채 그녀 곁에 있더군요.”
“뭐라고요?”
“뭐가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노트를 모두 읽은 뒤에 프레데리카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가서, 카이온과…… 논의를 할 거고요. 그녀를 이 세상에 묶어두기 위해 뭘 어떻게 할지 말입니다.”
천천히 아르칸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올렌은 멍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선고라도 내리듯, 아르칸드가 말했다.
“비올렌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왕궁의 복도를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비올렌의 어깨는 축 늘어진 채였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병영 쪽을 향하는 중이었다.
뭘 어떻게 하고 싶느냐니.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나.
비올렌은 아르칸드의 질문에 답했다. 나는 프레데리카를 잃을 수 없어요.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라고요. 난, 프레데리카를 사랑해요. 그 대답에 아르칸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안타깝게도 나도 그런 마음이군요. 불쾌할 법한 답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비올렌은 화가 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떠나려 했다고? 죽으려 했다고? 비올렌은 몇 번이나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끈 스승이며 친구이자, 비올렌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랑할 그녀가, 왜 떠나려 한단 말인가.
순간 ‘이야기 속’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비올렌의 등에 소름이 주르르 내달렸다.
프레데리카는 정말로, 나를 한 사람으로 보고 있긴 한 걸까?
정말 그녀의 말대로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이야기 속에 빠진 존재라 여기고 주변을 대해 왔다면, 심지어 이 세계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면. 그럼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비올렌이나 아르칸드, 카이온을 그저 이야기 속의 인물로 여기고 무정하게 대했던 건 아닐까?
그럼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모든 애정은 뭐란 말인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낙심하면 위로했던 그 시간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건가.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비올렌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눈물이 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럴 리 없다고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한 번 터진 생각의 물꼬는 자꾸만 그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애써 눈물을 도로 밀어넣으며 비올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떻게든 빨리 코카네스로 돌아가야 했다. 프레데리카에게 가서 직접 묻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르칸드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냐고, 정말 넌 죽고 싶은지, 나를 떠나고 싶은 건지……. 넌 나를 사람으로는 보고 있는 건지 물어야 했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야 해.’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나에게 믿으라고 했잖아…….
비올렌은 비참함이 자신을 잡아먹는 것을 느꼈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 작품 후기 ==========
증맬 비올렌 눈물샘은 수도꼭지인가... 눈물 많은 남자...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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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딱지 보내드릴 분들입니다! 사실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 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ㅠㅠ 딱지를 드리지 못하는 분들께는 정말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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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프레데리카가 자신 외에 다른 남자들을 안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쌓아 올린 모든 기억이, 소중했던 추억이 뿌리채 흔들리는 듯했다.
그날 밤 비올렌은 앓았다. 열이 오르고 입술이 메말랐다. 자꾸만 과거를 되짚으며 그때 프레데리카가 했던 말이 사실은 이런 뜻이었는지, 그녀가 한 행동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따졌다. 그런 자신이 싫었고 경멸스러웠다. 그냥 프레데리카가 좋은 걸로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점차 그의 얼굴은 바짝 말라 갔다. 비올렌은 아르칸드를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아르칸드가 그에게 안겨준 정보만으로도 비올렌은 죽을 것만 같았다.
수척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코카네스 후작을 본 이들은 다들 깜짝 놀라며 어디 아프지 않느냐 걱정했다. 그를 싫어하는 왕조차 은근히 걱정할 정도였다. 비올렌은 뒷말 나오는 것이 싫어서 약속된 기한까지는 수도에 남아 있겠다 고집했다.
그가 수도에서 코카네스로 돌아가기로 한 기일까지 사흘 남았을 때, 신전에서 일단의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찾아왔다. 그 선두에는 비올렌과 아르칸드의 동료였던 레지어스가 서 있었다.
마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한 신전은 그 사이에 그 규모며 위세가 부쩍 자라 있었다. 신관들이 입은 옷은 막 내린 눈처럼 새하얬고, 성기사들의 위용도 어마어마했다. 왕궁으로 들어오는 신전의 사절단을 기다리던 왕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저것들이 내 전리품을 약탈하려고 오는구나. 승냥이 같은 새끼들.”
왕이 씹어 뱉은 말에 귀족들은 낮은 목소리로 찬동했다. 비올렌만이 무심한 눈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레지어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침내 왕의 앞에 다다른 그들은 왕에게 하는 예를 하는 대신, 신관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만을 표했다. 왕의 눈썹은 불쾌함으로 꿈틀거렸지만, 그 역시 신전과 대놓고 대립할 수는 없어 분을 눌러 참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이시여.”
“그간 별고 없었나 보군. 다들 낯이 좋아.”
“신의 뜻에 사는 저희들이야 그분의 품 안에서 언제나 다복하지요.”
으레 하는 인사말을 서로 주고받은 뒤, 신관들과 왕, 귀족들은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속내야 어쨌든 겉으로는 다들 웃음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약간 뒤처져 걷던 비올렌은 그의 옆으로 다가온 레지어스를 보고 오랜만에 웃음을 띠었다. 비올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레지어스, 오랜만입니다.”
“그 사이에 꽤 얼굴이 상했습니다. 수도에서의 생활이 고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좀 요새 피로했던 모양입니다.”
상석에 앉을 왕과 신관 대표 외에는 정해진 자리가 따로 없어서 사람들을 제각기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레 비올렌과 레지어스는 나란히 앉았다. 그들에게서 대각선으로 떨어진 자리에 앉은 아르칸드가 두 사람을 보고 묵례했다. 레지어스는 환히 웃으며 마주 답했지만, 비올렌은 흐릿한 눈으로 그를 한 번 보기만 할 뿐, 인사를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레지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못 봤다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개월이었다. 그 사이에 그렇게나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이 틀어졌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두 사람의 일은 레지어스가 섣불리 끼어들어 중재하거나 할 순 없었다. 그는 둘 사이의 불편한 감정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공유되지 않았던 시간을 이야기하는 레지어스에게 비올렌은 곧잘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빠져 있다는 걸 성기사는 금방 알아차렸다.
결국 레지어스가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비올렌, 몸이 안 좋은데 억지로 나온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피로 누적일 뿐이에요. 너무 집중을 못했지요. 미안합니다.”
“일찍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여기에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제가 따로 찾아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그때였다. 상석에서 와장창하고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눈이 동시에 한 곳으로 모였다.
거기에는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히고 씩씩대는 왕과,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올려다보는 신관이 있었다. 왕은 대놓고 신관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감히 어떻게, 멋대로 마왕을 내놓아라 마라 명령을 해! 신을 모시는 자들이면 세속에 신경 끊고 수도나 할 것이지, 어딜 감히 여기까지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요구라니요. 신의 뜻에 따라 시작된 전쟁이니 신전의 손에 마왕이 처단되는 게 무에 그리 이상합니까! 오히려 속세의 왕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느라 마왕이 여지껏 살아 숨쉬고 있는 게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마왕을 잡은 건 나의 신하고 나의 백성이야! 그들이 어디 신전 소속이었나!”
“큰 공을 세운 건 신전의 성기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곧 멱살까지 잡으며 드잡이질을 할 둘의 기세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고정하십시오, 싸우시면 안 됩니다, 말리는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다시금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레지어스와 비올렌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쾌함 가득한 목소리로 레지어스가 중얼거렸다.
“마왕이 살아 있으니 이 난리로군요.”
“……그러게요.”
“그것을 붙들고 계시는 프레데리카 님이 많이 힘드실 텐데, 정작 누가 마왕의 끝을 볼지 정하질 못해서 이 난리라니.”
프레데리카의 이름이 나오자 비올렌이 움찔했다. 하지만 레지어스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연회장 상석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려던 비올렌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러다 결국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는 멈춰서고 말았다. 난투극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인 왕과 신관을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급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신관을 말리려던 레지어스는 멀어지는 비올렌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의 관심을 싸움을 말리는 데 집중되었다. 결국 왕이 신관에게 헛주먹질까지 해댔기 때문이었다.
개싸움이 겨우 진정된 뒤에야 레지어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그는 피로했다. 신전은 드러내놓고 속세의 권력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 전면에 마왕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던 레지어스를 세워놓고 알차게 써 먹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레지어스의 칼날 아래 마왕의 목이 떨어지는 걸 보아야겠다고 성하께서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레지어스는 내심 질려버렸다.
순수하게 신을 향한 믿음과, 사람들을 공포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신념으로 뛰어들었던 성기사직이었다. 마족을 베어내고 또 베어내었던 8년 동안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알아줄 건 전우뿐이라고, 레지어스는 확신했다.
비올렌의 집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가 사는 저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어서 레지어스는 무례를 무릅쓰기로 했다.
그가 비올렌의 저택에 다다랐을 때, 방문자를 맞이한 하인은 적잖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카네스 후작은 안에 계시나?”
“네, 그, 그게…… 네. 그렇습니다만.”
하인은 말을 더듬었다. 의아한 기분이 든 레지어스가 무심결에 하인의 등 뒤로 눈을 돌렸다. 저택 안은 어둡고, 인기척이 적었다. 그때 집안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레지어스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고, 하인은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후작 각하께서, 어, 오늘 심기가 좋지 못하셔서…….”
“내가 잠시 올라가 봐도 괜찮겠나?”
상대가 후작의 동료이며 유명한 성기사임을 아는 하인은 그의 질문에 도리질을 치지 못했다. 하인이 물러서자, 레지어스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희미하던 울음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 우는 이가 설마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인가, 싶어서 레지어스는 의아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그는 문 앞에 서서 똑똑똑, 하고 세 번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울음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목소리가 사납게 튀어나왔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비올렌, 레지어스다.”
방문객이 누구인지 밝히자마자, 안에서 나는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잠시 뒤, 잔뜩 감정을 억누르느라 힘겨워하는 비올렌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오늘은…… 보기가 좀 곤란…….”
“잠시 들어가겠다.”
분명히 거절하는 말에도 레지어스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물이며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비올렌이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못한 채로 원치 않은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레지어스는 그런 그를 보고도 안쓰러워하거나 탄식을 내뱉지 않았다. 대신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아서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넬 뿐이었다.
성기사의 손에 들린 새하얀 손수건을 바라보던 비올렌은 슬쩍 그것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대충 얼굴을 닦아내고는 바지에 슥 문질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붕어처럼 부어 있었고, 눈동자도 새빨갰다.
품에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은 레지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부끄러운 모습을 다 보였군.”
“자네가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르데트 님이 마왕에게 끌려갔을 때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네 이름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올까. 비올렌은 자신의 앞에 앉은 성기사가 무감하게 내뱉은 프레데리카의 성을 듣고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언제나 씩씩하던 남자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걸 보며 레지어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언제나 단정한 낯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대번에 눈썹이 쳐졌다.
“비올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레지어스, 나는…….”
비올렌은 차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을 어떻게 레지어스에게 꺼내놓는단 말인가.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외자였다. 프레데리카의 일을 레지어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갑갑했고, 무언가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비올렌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너무나도 단편적이었다.
“프레데리카가, 보고 싶어…….”
“뭐?”
“그녀를, 잃을까 봐…… 난 너무 두려워. 내 곁에서, 사라질까 봐…….”
“비올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프레데리카 님이 어디로 떠난다고 했어?”
힘겹게 고개를 젓는 비올렌의 등을 레지어스는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정신없이 흐느끼느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친구를 달래던 레지어스는 결국 하인을 불렀다. 그는 하인에게 독한 술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거의 억지로 비올렌에게 먹였다.
술이 약한 비올렌은 그것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프레데리카의 이름을 속삭이며 흐느껴댔다. 레지어스는 비올렌의 몸에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는 조용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
도무지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라서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답답함을 위로받으러 갔다가, 도리어 위로를 해주고 나오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레지어스는 얼떨떨했다.
고요해진 후작저를 나오던 그는 다시 한번 그 저택을 돌아보았다. 대체 프레데리카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비올렌이 저 난리인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직접 물으러 가기도 어렵고……. 레지어스는 답답한 마음만을 안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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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레지어스는 그가 모시고 온 신관의 부름을 받았다.
전쟁에서의 공으로 신관 앞에 무릎 꿇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얻은 그였지만,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고개를 먼저 숙여 보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기사라 칭해지는 레지어스를 신관은 불편함 어린 눈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성기사 주제에 신관보다 더욱 존경받는다니, 겨우 칼잡이에 불과한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신관은 굳이 표내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신관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레지어스와 마주 앉았다.
“그대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따로 불렀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이것은 성하께서 내리신 특별하고도 비밀스러운 명입니다. 반드시 비밀을 엄수해야 합니다.”
그 말에 레지어스는 입 앞에서 성호를 그려 보였다. 절대로 이 임무에 대해 말하지 않고 복종하겠다는 표시였다.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좀 있으면 코카네스 후작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지금 그의 영지에 마왕을 데리고 있는 현자 르데트가 살고 있다지요.”
프레데리카의 성이 여기에서 나오다니. 레지어스는 심장의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레지어스 경은 코카네스 후작과 함께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는 이유를 들어 그곳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제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서 마왕의 상태를 살펴보고, 가능하다면 현자의 협조를 얻어서 마왕을 죽이도록 해요. 그 목을, 가지고 돌아오십시오.”
레지어스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하듯 신관을 바라보았다. 신관은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께서는 그 사악한 마족의 수괴가 계속 이 땅에 발붙이고 숨 쉬고 있는 그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십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각자 제 잇속을 챙기느라 정작 중요한 본분을 잊고 있는 것에 매우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을 기다리고만 있다간, 마왕이 도망치거나 힘을 되찾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신전이 직접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만, 레지어스 경. 우리는 경을 믿습니다. 경은 마왕을 꺾은 신의 자랑스러운 검이 아닙니까?”
신관은 그 뒤로도 한참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묵묵히 그의 자질구레한 변명들을 듣던 레지어스는 신관이 말을 마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나가서 코카네스 후작과 떠날 채비를 하겠다는 말에 신관은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했다.
방에서 나오기 직전, 레지어스는 잠시 머뭇대다가 물었다.
“그런데 만약 현자 님이 협조하지 않으시면…….”
“그러면 현자 역시 불신자인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나요? 게다가 이미 한 번 마왕에게 현혹되었던 몸 아닙니까? 그러니…….”
죽이라는 이야기로군. 레지어스는 그에 대해 뭐라 대꾸하는 대신에 입을 꾹 다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신관이 머무는 방에서 나온 레지어스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가는 건가.
역시 마왕은 그 자리에서 처단했어야 했다. 지리한 물밑 발싸움의 끝에 신전은 뒤통수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일을 맡는 건 레지어스가 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동료, 혹은 동료들과 척을 지게 되지 않을지 걱정했다.
고민이 잔뜩 얹어진 어깨가 저절로 쳐졌다. 조금 기운 빠진 채로 왕궁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지어스 경.”
뒤돌아본 자리에는 아르칸드가 서 있었다. 레지어스는 얼른 우울하던 표정을 고치고는 그를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아르칸드 님. 지난 연회에서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아뇨, 그때는 그러기엔 조금 어려웠지요. 자리가 자리인 만큼…….”
문득 레지어스는 아르칸드와 비올렌 사이에 흐르던 묘한 냉기를 기억해냈다.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했던 걸까.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걷던 레지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올렌과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냥…… 약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곧 풀게 되겠죠.”
“그런가요. 조금 걱정했습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끊겼다. 그러다 레지어스가 먼저 물었다.
“혹시 프레데리카 님을 뵈러 간 적이 있습니까?”
“네? 왜, 왜요?”
“왜냐니…….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에 신전의 명으로 그분께서 잘 지내시는지 코카네스 영지에 들러 안부를 여쭈러 가게 되었습니다.”
레지어스의 말에 아르칸드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마법사가 보이는 감정 변화를 성기사는 놓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떠날 것 같다며 울부짖던 비올렌과, 프레데리카의 안부를 물으러 간다는 말에 동요를 보이는 아르칸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레지어스는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흐지부지되었다. 아르칸드는 급한 볼 일이 생각났다며 도망치듯 레지어스의 곁을 떠나버렸다. 레지어스는 코카네스에 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아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카이온.”
눈을 뜬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마왕의 이름을 불렀다. 잠긴 목이 칼칼해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눈을 뜬 프레데리카의 손을 카이온이 꽉 붙잡았다. 그의 얼굴에 어린 수심을 보며 프레데리카는 의아했다.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어? 이유를 물으려 했는데 입술이 찢어질 듯 아프고 목이 너무 쓰라렸다. 그녀가 겨우겨우 물 한 마디를 내뱉자, 카이온이 득달같이 물을 대령했다.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와준 그는 아예 프레데리카의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대 주었다. 입술도 마비된 건지,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이 주는 물을 반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줄줄 흘렸다. 턱을 따라 흐른 물이 툭툭 가슴팍에 떨어져 번져나갔다.
조금 입을 적신 것만으로도 프레데리카는 훨씬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표정이 편안해진 그녀를 안도한 표정으로 바라본 카이온은, 그녀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등 뒤에 베개도 받쳐주었다.
시중들어주는 거야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카이온, 뭐 하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아나?”
“크흠, 흠……. 아, 목이야. 당연히 모르죠.”
“일주일이 넘었다.”
그렇게나 길게. 프레데리카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삐걱대는 몸이 이제 슬슬 완전히 망가지고 부서져 제 기능을 못할 준비를 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웃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번에 카이온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넌, 네가 그렇게 아팠었는데 웃음이 나오나!”
“나 안 죽는 거 알면서 뭘 그래요?”
“아니,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네가 흘린 피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하나?”
“나 걱정했어요?”
장난스레 묻는 목소리에 카이온은 태산처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했다.”
“…….”
“네가, 죽을까 봐. 걱정했어.”
“힘이 다 안 돌아왔는데 나 죽을까 봐서? 약속은 지켜요, 당신이 완전히 힘을 되찾기 전엔…….”
“그 말이 아니다! 넌, 진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마왕 때문에 프레데리카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이 마왕님이 왜 이러실까. 프레데리카는 그의 기이한 태도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카이온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어느새 그녀는 카이온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새털이라도 껴안듯 조심스럽게 프레데리카를 품에 안은 마왕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죽지 마라, 프레데리카.”
“…….”
“죽지 마, 네가 왜 죽고 싶어 하는지는 알지만, 제발…… 여기 있으면 안 되겠나.”
그 말에 프레데리카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카이온을 밀어냈다. 순순히 카이온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프레데리카의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겁에 질려 동그래진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데룩 굴렀다.
“안, 안다고.”
“프레데리카, 진정해.”
“네가, 뭘 안다고.”
“……다른 세계에서 왔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죽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넌 몰라.”
그녀는 미친 듯이 도리질을 쳤다. 딱딱대며 부딪치는 이를 억지로 다스리며 그녀가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마치 욕설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활자 주제에, 감정을 아는 척, 나를, 이해하는 척 하지 마.”
“……프레데리카.”
“웃기, 웃기지도 않아. 너를, 내가 모를 거 같아! 내가!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이제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발작하듯 고함을 질러대는 프레데리카는 이윽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오로지 비명뿐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를 카이온이 다가가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가 조금도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손의 자유를 잃은 프레데리카가 몸부림치다가, 카이온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이가 파고든 자리에서 검은 피가 동그랗게 배어났다. 하지만 카이온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놔! 놔아악!”
울부짖은 프레데리카를 이 악문 채 바라보던 카이온은, 결국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대번에 입술을 깨물렸고, 또다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카이온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다는 듯, 카이온의 혀가 조심스레 그녀의 입안을 도닥였다. 발광하던 프레데리카는 그 입맞춤이 전혀 반갑지 않았는지 그 혀마저도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 안에 비릿한 피맛이 번졌다.
프레데리카가 숨이 가빠하는 게 느껴지자 그제야 카이온은 입술을 뗐다. 혀도 입술도 피범벅이 된 그는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진정해, 프레데리카. 넌, 환자다. 이러다가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죽게 내버려 둬, 제발!”
그녀가 소리치거나 말거나 카이온은 주문처럼 진정하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아무리 미친 이처럼 발악을 하려 해도, 프레데리카는 기운이 없었다. 일주일이나 누워만 있었다는데, 아무리 몸이 회복이 되었다 한들 패악질을 부릴 힘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카이온의 품에 완전히 늘어진 채, 그녀는 흐느꼈다.
프레데리카가 기댄 가슴이 젖어드는 걸 느끼며 카이온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도닥였다. 숨을 헐떡이며 울던 그녀가 조금씩 진정하는 듯 하자, 그제야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다시 침대에 기대 앉혔다.
눈물 어린 눈으로 프레데리카는 피투성이가 된 마왕을 노려보려 했다. 하지만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부적절하게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꼴이 그게 뭐예요…….”
“네가 이래놓은 거다.”
“마왕이라면서, 미련하기도 하지.”
“난 괜찮다.”
“괜찮겠지요. 나만큼이나 빨리 나으니까.”
카이온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젖은 볼을 연신 닦아냈다. 눈물의 흔적 따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듯, 닦고 또 닦아냈다.
그 손을 프레데리카의 차가운 손이 붙잡았다. 손바닥에 뺨을 밀어붙인 채, 프레데리카는 마왕을 올려다 보았다.
“카이온. 당신, 나 좋아해요?”
“……애석하게도.”
“세상에. 내가 정말 제대로 비틀어놨구나.”
설정 다 완벽하게 망가졌네.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카이온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되묻지 않았다.
손바닥에 뺨을 비비던 프레데리카는 어느새 피만 말라붙어 있고 말짱해진 카이온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왕의 피 묻은 입술을 훑었다. 느릿하게, 주름 하나하나를 전부 만져보려는 듯 느긋하게 움직이던 엄지가 슬며시 그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말캉한 혀를 건드리는 손가락을 깨물세라 카이온의 턱에서 힘이 빠졌다.
그런 마왕을 이제는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프레데리카가 속삭였다.
“그래도 난 결국 죽고 말 텐데. 어떡하면 좋아.”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물렸다. 그 보드라운 살결이 아쉽다는 듯 카이온의 이가 손끝을 아주 살짝 깨물었다. 프레데리카는 타액으로 범벅이 된 엄지를 자신의 입으로 쏙 집어넣고 음미하듯 쪼옥쪼옥 소리를 내며 빨았다. 마침내 손가락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프레데리카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이 카이온을 향해 활짝 벌어졌다.
뭘 원하는지가 훤하게 보여서 카이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병자다. 일주일만에 깨어난 허약하디 허약한 인간이다. 그는 턱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잔뜩 욕망을 억누른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자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프레데리카는 상대의 부탁 같은 건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만.”
“카이온. 빨리 안아줘요.”
“넌 쉬어야 해.”
“난 아직 죽을 때가 멀었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아쉽게도, 회복도 되었고. 그러니까 당장 날 안아요. 빨리.”
그녀의 보챔에도 카이온은 자제력을 한껏 발휘할 뿐이었다. 앉은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는 그를 보는 프레데리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안 안아 줄 건가요?”
“넌 좀 더 쉬어야 한다고…….”
“조여.”
카이온의 목에 얌전히 둘러 있던 가죽끈이 단박에 그의 숨통을 조이고 들었다. 숨이 막혀오자 그는 헐떡이며 한 손으로 제 목을 긁었지만, 프레데리카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되게 오랜만에 쿵떡쿵떡 타임이 온 거 같아요...!
프레데리카는 사랑하니까 상대를 괴롭히는 겁니다, 암요...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트시그널도요!:D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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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1/2
싸늘한 눈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카이온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마침내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온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새 말라 뼈가 보이는 발이 차례로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불 걷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똑바로 일어섰다. 바닥을 짚고 선 다리가 잠시 흔들리는가 했지만, 곧 똑바로 섰다. 프레데리카의 발이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카이온의 가슴을 밟았다.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왕을 바라보는 프레데리카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곱게 웃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도 숨 좀 막힌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요.”
“끄흑…… 흐…… 컥…….”
“그리고 우리 이렇게 하는 거, 처음도 아니잖아?”
오랜만에 추억도 되새기고 좋네요. 프레데리카는 그렇게 중얼대며 카이온의 다리 사이로 가 앉았다. 그녀의 손이 너무나도 쉽게 카이온의 바지와 속옷을 내려 버렸다. 반쯤 일어선 좆을 마치 강아지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목소리도 달콤하고 입가에 미소도 띤 채였지만, 프레데리카의 얼굴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카이온은 그녀가 두려웠다. 무려 마왕씩이나 되어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자체에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데리카가 두려웠다.
숨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카이온의 몸이 달달 떨렸다. 얼굴이 검붉게 변한 채 고통스러워하는 마왕을 프레데리카는 꽤 오래 지켜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카이온은 숨이 모자라 헐떡대고 괴로워할지언정 기절하거나 숨이 멎지 않았다.
“죽지 않는 건 저주받은 거라고요. 이렇게, 지금처럼 말이야.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을 계속 겪느니 죽는 게 낫지.”
조잘대는 프레데리카에게 카이온은 한 마디도 답할 수가 없었다. 목을 쥐어뜯느라 여기저기 피가 흘렀다. 입가에 흐른 침으로 얼굴이 더러워지는 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카이온의 손이 프레데리카에게 뻗치지 않은 건 놀라운 일이었다.
쓸데없이 참을성이 있는 마왕이라고 생각하며 프레데리카는 혀를 찼다. 자신의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둔 리본을 풀어내서는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직 말랑한 감이 남은 카이온의 페니스를 쥐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프레데리카는 그 어린아이 팔뚝같은 살덩어리 밑동에 리본을 조여 맸다. 예쁘게 리본까지 지어주고 손가락으로 귀두를 탁 튕기자, 카이온이 괴로움 가득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휘었다.
“조금만 풀어줄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목을 조이던 줄이 느슨해졌다. 히이익, 힉, 하고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이온의 얼굴색이 조금 나아지는 걸 확인한 프레데리카는 두 손으로 그의 기둥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열심히 흔들어댔다.
작은 손으로 미처 다 감싸지지도 않는 커다란 페니스를 힘있게 잡은 손이 위로 쭉 올라왔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내려왔다. 그녀의 손 안에서 카이온의 페니스는 점차 단단해져 갔다. 점점 부피가 더해지는 그의 물건을 프레데리카는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벌써부터 맑은 액을 찔끔 흘리는 귀두 끝을 손바닥으로 감싸고는 문질렀다. 마치 아이 머리통이라도 쓰다듬듯이.
“흐윽, 큭, 그, 그만……! 흐억!”
“착하네요, 이쪽은. 말도 잘 듣고. 본체랑 어찌나 다른지.”
핏줄이 돋아 험악한 몰골이 된 카이온의 것을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돌연 그것을 놓았다.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내 보인 그녀가 물었다.
“이래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애원을…… 제발 그만…….”
“언제는 못해서 안달이더니.”
어깨를 으쓱한 프레데리카는 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핏기가 적어 흐릿한 분홍으로 보이는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카이온이 몸을 비틀어 도망치려 했지만, 프레데리카 쪽이 훨씬 빨랐다.
“……!”
프레데리카의 입으로는 카이온의 페니스를 반절도 채 다 물 수가 없었다. 커다란 좆이 버거웠는지 그녀는 낮은 비음을 흘렸다. 혀가 부드럽게 귀두를 휘감고 돌다가, 그 첨단을 꾹꾹 눌러댔다.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쾌감이 카이온의 몸을 달렸다. 그는 두 손으로 프레데리카의 자그마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허벅지와 엉덩이의 근육이 그 결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그녀에게 해라도 입힐까,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달달 떨며 살짝 쥘 뿐이었다.
잔뜩 젖은 살결을 빨고 핥는 음란한 소리가 카이온을 괴롭혔다. 프레데리카는 착실하게도 입으로도 손으로도 그의 음경을 열심히 애무해댔다.
그녀의 작은 손이 기둥을 꽉 쥐고 가지런한 치아가 갓머리를 긁고 지나갈 때마다 카이온은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피가 잔뜩 몰린 살기둥은 검붉게 변해서 흉악스러워 보일 정도였지만, 프레데리카의 입술은 그것이 사탕이라도 되는 양 물고 놓질 않았다.
“흐응…… 음…….”
일부러 츄웁츄웁 소리까지 내 가며 남자의 것을 맛있다는 듯 빨아대던 프레데리카가 흘끗 카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저렇게나 미칠 거 같은 얼굴을 하고선, 그래도 버티네. 프레데리카는 잔뜩 흐트러진 마왕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일부러 입술에 힘을 잔뜩 주고 귀두 끝부터 아래까지 쭉 훑어 내려가자, 카이온이 제 입술을 새하얗게 질리도록 꽉 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더 버티나 보자, 하는 심술이 치솟았다. 한 손이 그의 음낭을 조물조물 주무르다가, 그 아래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음낭 아래에 가려진 도톰한 부분을 그녀가 꽉 누르자, 카이온의 몸이 파닥 튀었다.
“흐억, 헉……! 아윽……!”
사정감이 치밀어올랐지만, 프레데리카가 꽁꽁 묶어둔 페니스는 시원하게 토정하질 못했다. 그녀의 입안에서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듯 펄떡였지만, 프레데리카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손과 입이 카이온을 괴롭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마왕의 눈이 흐려지고, 그의 눈과 입가에서는 그에게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체액이 흘러넘쳤다.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이 두어 번 더 크게 몸을 뒤튼 뒤에 입을 떼었다. 턱이 아파서 사실 더 할 수도 없었다.
숨이 가쁘게 오가느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카이온의 넓고 두툼한 가슴을 그녀는 천천히 어루만졌다. 눈물이 잔뜩 흘러 젖은 속눈썹을 바들바들 떠는 마왕의 모습은 참 보기에 좋았다. 그녀는 목줄을 조금 더 느슨하게 만들어주고는 다정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래도, 하고 싶지 않아요?”
“흐으…… 프레데리, 카, 그만…….”
“마왕이면 마왕답게 음욕에 불타고 그러지 그래요. 당신이 무슨 성자도 아니고 왜 참아?”
그녀는 종알거리며 파자마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속옷을 쥔 채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프레데리카는 그대로 카이온의 몸 위로 올라탔다.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그의 가슴과 어깨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카이온의 이마와 코, 턱을 덧그렸다.
“애초에 우리 약속은 이렇게 계속 서로 씹질이나 하고, 당신은 힘을 되찾아서 날 죽이는 거였잖아요. 응? 이제 와서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있어요?”
“내가, 너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내 힘은 돌아오지만…… 넌 점점 쇠약해져 갔잖나.”
“그래서?”
“죽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이다.”
“그럼 힘도 다 되찾지 못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카이온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프레데리카의 이맛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안 돼요. 곤란해.”
“지금의 힘 정도로도, 나는 괜찮…….”
“아니, 내가 안 괜찮다고요. 내가 말했잖아요? 나도 죽이고, 이 세상도 망하게 해달라고.”
그녀의 손가락이 카이온의 미간을 세게 밀었다.
“힘을 다 되찾지 못하면 그게 어디 되겠냐고요.”
“프레데리카…….”
“약속을 지켜요, 마왕님. 어차피 마족이 원하는 건 이 세계의 멸망이잖아요.”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이 파자마자락을 걷어 올렸다. 붉고 도톰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음부가 카이온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이미 흥분했는지, 촉촉하게 젖어 반들거리는 속살을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한 손으로 벌려 보였다.
“나 혼자 너무 수고했으니까. 이번에는 당신 차례.”
카이온은 입술만 깨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는 실망스럽다는 듯 일부러 길게 한숨을 흘렸다. 그녀의 무릎이 마왕의 양 귀 옆에 나란히 놓였다. 새하얀 파자마가 그의 머리 위로 덮였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익숙하고도 유혹적인 향기가 카이온을 덮쳤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그녀를 밀어내고, 침대에 다시 눕히고, 잠을 재워버리자고 그의 내면이 속삭였다. 불끈 쥐었던 두 손이 프레데리카의 골반을 붙들었다. 이대로, 들어 올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프레데리카를 거절하길 거부했다. 둔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혀가 거칠게 프레데리카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으…… 좋아앗…….”
프레데리카의 입에서 만족스러움의 탄성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액체를 카이온은 생명수라도 되는 양 정신없이 빨아 마셨다. 한 겹 천 너머에서 들려오는 프레데리카의 교성과, 입술이며 얼굴에 부벼지는 프레데리카의 아랫입 모두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그의 혀가 길게 비부를 핥아 올리더니만 그 주변 살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날카로운 이가 연약한 살을 물고 긁어대자 프레데리카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려했다. 하지만 카이온의 두 손이 굳건하게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질척한 소리가 연신 울렸다.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꽃잎과 그 꿀을 게걸스레 취했다. 뜨거운 열기가 옷자락 속을 가득 메웠다.
한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쓱 들어왔다. 그 손은 주저 없이 음순을 벌리고는 그 안에 숨은 채 달아오른 음핵을 찾아냈다. 손톱 끝으로 그것을 사정없이 꾹 누르자, 프레데리카가 비명같은 교성을 질렀다.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왈칵 애액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카이온의 손을 적시고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에 묻은 그 달콤한 액체를 빨아먹은 카이온이 다시 한 번 손끝으로 클리토리스를 붙들고 쥐어짜고 굴려댔다.
“흐앙! 하, 아앗! 아아앙! 힉, 너무, 아, 으힉!”
카이온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시작되어 머리끝으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짜릿한 감각에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휘저으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어느새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두 개의 손가락과, 여전히 작은 공알을 찧고 눌러대는 다른 손가락 때문에 프레데리카는 더욱 헐떡였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헐떡이는 그녀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도무지 몸을 제대로 지탱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풀썩 그녀의 한 팔이 꺾였다. 이어 다른 팔도 무너져내렸다. 반쯤 엎드린 그녀의 아래를 치맛자락 안에서 카이온의 손을 사정없이 프레데리카의 내벽을 들쑤시고 긁어댔다.
“아앙, 아, 흐아아앙! 꺄읏, 흑! 카이온, 아, 으아……! 너무, 아, 살, 살, 제발……!”
온몸이 전기 맞은 개구리처럼 잔뜩 긴장하며 바르르 떨렸다. 프레데리카는 끊어지지 않는 절정에 숨 쉬는 것도 잊고 꺽꺽댔다.
한참만에 프레데리카의 치맛자락 아래서 카이온이 빠져나왔다. 쾌락과 죄책감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그는 반쯤 엎어진 채 엉덩이만 들고 있는 프레데리카를 내려다보았다.
이 인간이 자신을 원하면, 카이온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미 프레데리카에게 중독될 대로 중독되어서, 그녀의 향기 한 자락만으로도 그의 이성은 더 이상 일하기를 거부했다. 어떻게든 참겠다고, 목을 조이면서까지도 버텼건만 결과는 이거였다. 또다시 그는 프레데리카를 걸신들린 듯 탐하고 말았다.
생애 어느 순간에도 느낄 리 없다고 생각한 자기혐오가 카이온을 휩쌌다. 하지만 그의 페니스는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당장 저 벌름거리는 아랫구멍에 자신의 좆을 쑤셔 박고 마구 흔들어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프레데리카가 할딱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그를 보며 돌아섰다. 엉금엉금 기어 카이온의 페니스 앞에 엎드린 그녀는 그것이 사랑스럽다는 듯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카이온이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의 어깨를 부서져라 쥐었다.
“나, 기대할 거예요. 알았지요?”
그녀의 손가락이 카이온의 좆을 죄고 있던 리본을 풀었다. 카이온은 나오지 못하고 몰려 있던 정액이 왈칵 치밀어오르는 걸 느끼며 더욱 허리를 구부렸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희멀건 체액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하지만 겨우 그정도로 가라앉을 상태가 아니었는지, 흉악할 정도로 빳빳하게 선 붉은 좆은 꺼덕대며 제가 들어갈 자리를 찾았다.
프레데리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는 무릎을 잡고 벌려 보였다. 이미 그녀 역시, 카이온의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작품 후기 ==========
00시 17분에 한 편 더 이어서 올라갈 거예요: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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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2/2
더는 두 사람에게 인내심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를 와락 끌어안은 카이온이 자신의 페니스를 그녀의 안으로 곧장 밀어 넣었다.
어마어마한 부피감과 배 가장 깊은 곳까지 찌르다 못해 자궁까지도 짓누르는 듯한 압력에 프레데리카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녀의 내벽이 그녀의 안을 들쑤시기 시작한 그 흉기를 쫀득하게 감쌌다. 안으로 바짝 밀고 들어왔다가 아쉽다는 듯 물러나는 그것을 따라 꿈틀거렸다.
귀두가 안쪽을 긁어내리고 가장 민감한 부위를 꽉꽉 누를 때마다 프레데리카는 주저않고 교성을 내질렀다.
“아으! 아, 아아앙, 힉! 카이, 카이! 빨, 빨리, 더! 흐으윽, 읏, 너, 너무, 아!”
“으윽…… 제기랄, 흣! 너는, 진짜……!”
“히익, 히이이, 흐아읏! 아아, 좋, 좋아…… 카이온, 좋아앗, 아학, 하앙!”
그 ‘좋다’는 말이 자신이 아닌 자신과의 행위가 좋다는 뜻임을 알면서도 카이온은 더욱 흥분했다. 그는 프레데리카를 번쩍 안아들고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마주 앉혔다. 허리를 세게 위로 튕길 때마다, 프레데리카의 아랫입이 카이온의 좆을 꽉 물어댔다.
정신없이 온몸을 두들기는 쾌감을 버틸 수가 없어서 프레데리카는 두 팔로 카이온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것이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올 것처럼 가득 들어차서는, 안을 마구 휘저어대는 느낌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둘의 접합부에서 자글자글 끓어오른 거품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더럽혔다. 거세게 절구질을 할 때마다 둘의 체액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에서 왈칵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이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애액인지, 아님 실금이라도 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부끄러움을 느낄 정신 따위는 남지 않은 채였다.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카이온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했다. 피부에 배어 나온 땀이 둘의 사이에서 미끈거리며 은근하게 그들의 몸을 자극해댔다. 프레데리카는 바짝 솟은 자신의 유두를 그의 단단한 가슴에 문지르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흐으, 하……. 카이온, 흐윽! 아으읏!”
“널, 너를 잃을 수 없어, 윽…… 프레데리카, 흐억, 으…….”
“아, 조금 더, 아아아! 하으앗……!”
수천 수만의 별들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프레데리카가 몸을 바짝 긴장시키더니만 허리를 둥글게 휘며 고개를 젖혔다. 절정으로 달뜬 얼굴은 붉었고 그녀의 눈은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나를 봐, 나를 보라고! 카이온은 거칠게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채서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신의 혀를 막무가내로 밀어 넣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고는 정신없이 그녀의 숨과 타액을 갈구해댔다.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게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옅게 땀이 밴 이마가 달콤하게만 보였다. 카이온은 그래서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이러면서, 대체 왜 너는. 이럴 거라면, 대체 왜 나를.
분노와 슬픔이, 절정과 함께 찾아왔다. 온몸을 울리며 으르렁대는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작은 몸을 바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잔뜩 쌓였던 정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와 프레데리카의 뱃속을 가득 채웠다. 채우고도 넘치는 정액이 줄줄 흘러 둘이 결합한 틈새에서 툭툭 떨어졌다.
“하아…….”
기분이 좋다는 듯, 웃음기 섞인 얕은 한숨을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의 어깨 너머에 살포시 뱉었다.
카이온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그의 목덜미와 땀이 흐르는 등을 쓸어내렸다.
“카이온.”
“…….”
“포기해요.”
프레데리카의 종용에 카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목덜미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럴 수 없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목덜미에 부벼대는 눈에서 물기가 스몄다.
안타깝게도, 프레데리카는 그런 카이온이 조금도 불쌍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도의상, 다정하게 그의 등을 도닥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있었다.
다른 때 프레데리카와 관계를 가지면 생생해졌던 것과 달리, 오늘 카이온은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프레데리카를 안아 들고 욕실로 가서는 그녀의 몸을 꼼꼼하게 닦고 옷까지 갈아입혀 주었다.
다정다감한 마왕이라니, 설정 붕괴에도 정도가 있지.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을 내심 비웃었다.
다시 침대에 프레데리카를 눕힌 카이온은 이불을 덮어주고는 침통한 얼굴로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다.”
“뭘요?”
“널…… 아픈 너에게 손 대면 안 되는데. 내가…….”
그는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남자를 보며 프레데리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이 정도로 마왕의 성격이 달라졌다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는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점이었다.
“난 좋았는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내가 하자 그랬잖아.”
“프레데리카, 제발 네 몸을 소중히 여겨다오.”
“다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건, 내 배알 꼬이라고 하는 거죠?”
생긋 웃어 보이며 프레데리카는 짜증을 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는 손만 살짝 쏙 내놓고는 휘저었다.
“좀 더 잘 테니까 갈래요?”
“그래, 쉬어라.”
마왕의 입술이 프레데리카의 반듯한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말 잘 듣는 개처럼 마왕은 그대로 프레데리카의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프레데리카는 이불을 홱 젖히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발길은 곧장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선 프레데리카는 자신이 꽂아 둔 노트를 차례대로 세었다. 하나, 둘, 셋……. 두 권이 비어 있었다. 게다가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아마도 이 노트를 빼간 카이온은 몰랐을 테지만, 노트들은 나름의 순서를 가지고 꽂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오래된 일기를 들고 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프레데리카는 손을 놓았다.
알아낸다 한들 뭘 어쩔 텐가. 그녀가 수백 년에 걸쳐 알아낸,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은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있으면 프레데리카의 몸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그녀의 영혼은 본래의 세계로 갈 수 있었다.
종잇장에 기록된 글자들 주제에 마치 자기 생각이 있는 양 구는 게 프레데리카는 가소롭기만 했다.
그녀가 살면서 만난 모든 인간이 다 그랬다. 생각이 있는 척, 살아 숨 쉬는 척.
신경질이 어린 손길로 프레데리카는 노트의 순서를 다시 정리했다. 노트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리가 끝나자 그녀는 마지막 권을 꺼내어 펼쳤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 프레데리카는 펜을 들었다. 휘갈기듯 몇 문장을 써 넣고는, 호- 바람을 불어서 잉크를 말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노트를 닫아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남은 이들이 보라고 써 넣은 문장은 이랬다.
[그리하여, 프레데리카는 죽음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것은 일평생의 소원이었고, 이뤄야만 하는 과업이었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순간 그녀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이 세계가 아무리 나를 붙든다 한들 나는 죽고야 말 거야.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가 영원히 사라져버리길. 그리고 너희들도 모두, 세상에서 지워져버리길.]
프레데리카가 눈을 뜨고 난 며칠 뒤, 그녀의 집으로 아르칸드가 갑자기 찾아왔다. 프레데리카는 그를 환영하며 기꺼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르칸드는 이전에 왔을 때처럼 곧장 프레데리카의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 대신, 도리질을 쳤다.
의아한 기분으로 아르칸드를 올려다보는 프레데리카에게 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레지어스 님이 비올렌과 함께 오고 있어요.”
“레지어스 님이요?”
“신전에서 프레데리카 님의 안부를 묻고 오라고 했다는데, 그게 진실일 리가 없잖아요. 분명 신전에서 레지어스 님에게 뭔가 시킨 거예요. 마왕과 관련된 것을요.”
어쩌면 당신을 해하려 들지도 몰라요. 낮게 속삭이는 아르칸드의 얼굴에는 근심이 잔뜩 묻어났다. 프레데리카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신전에서, 저를 어떻게 하려 하겠어요. 그리고 레지어스 님이잖아요. 그분과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하지만 레지어스 님은 성기사이잖습니까.”
“성기사가 아무리 신전의 명령을 가감 없이 따른다 해도, 그분께 자비를 얻을 기회야 있겠죠. 벌써부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정 걱정이 되면, 아르칸드 님이 여기 계셔줄래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웃었다. 아르칸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는 두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프레데리카의 귓가에 단단한 결심이 어린 목소리가 맹세의 말을 읊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르칸드 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드릴게요.”
“고마워요, 정말.”
프레데리카는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결의로 가득 찬 포옹도 잠시, 프레데리카의 손이 등줄기를 쓸어내리자 아르칸드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프레데리카가 속삭였다.
“우리 오래 못 만났잖아요. 네?”
“프리, 카…….”
“기다렸단 말이에요.”
애교 섞인 조르는 목소리에 아르칸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저 그녀가 조금 칭얼댔을 뿐인데도, 아르칸드는 도무지 프레데리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카이온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수도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그는 프레데리카를 침대에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옷을 위로 훌렁 벗기자, 재미있다는 듯 프레데리카가 까르르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여윈 몸을 보고도 아르칸드는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잔뜩 흥분해 버린 뒤였다. 그의 입이 성급하게 프레데리카의 가슴을 짓씹었다. 붉은 자국이 가슴 곳곳에 피어났다.
프레데리카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찔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아르칸드는 훌륭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둘의 헐떡이는 숨결과 음란하게 질퍽이는 소리만 곧 방에 가득찼다.
수 차례의 열락을 맛본 끝에 아르칸드가 잠든 프레데리카의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본 상대는 카이온이었다. 마왕은 화를 잔뜩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그를 을러댔다.
“프레데리카가 얼마나 쇠약해져 있는지 모르나? 대체, 오자마자 무슨 짓이야.”
대답하는 대신 아르칸드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조금 민망했던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그는 카이온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는데 잘 됐네. 할 얘기가 있으니 방으로 가지.”
“……정말 파렴치하군.”
“네 녀석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피차 다를 것 없는 처지의 두 남자는 서로에게 조용히 으르렁대며 소리죽여 복도를 걸었다.
카이온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문에 기대어선 채 팔짱을 낀 그는 아르칸드가 의자에 앉는 걸 지켜보았다. 아르칸드는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쉬었다.
“프레데리카의 상태는 어떻지?”
“네놈이 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는 채로 있었다. 피도 많이 토했고.”
“좋지 않네……. 그래도 그녀는 일단 죽지 않는 몸이니,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거야. 그러니 저렇게 멀쩡한 척할 수 있는 거지.”
“알면서 어떻게 그 몸에 손을 댈 수가…….”
“아, 진짜! 넌 뭐 얼마나 고결했기에 계속 날 비난해!”
짜증을 버럭 낸 아르칸드는 씩씩대며 카이온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쾌감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침묵이 흘렀다. 놀랍게도 먼저 사과한 쪽은 카이온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 예민하게 행동했다.”
“……됐어. 흠. 문제는, 프레데리카 님이 찾은 규칙, 그러니까 그녀를 망가트리고 우리를 바꾸어놓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거야. 그 규칙을 깨트리고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프레데리카 님은 죽지 않을 거야.”
그게 명확하지 않다니. 마왕은 실소했다.
어쩌면 그건 카이온에게만 확실하게 보이는 규칙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프레데리카와 네 남자 가운데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은 건 마왕 카이온, 그였으니까.
다른 셋은 인간이었다.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라 오히려 눈치채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카이온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을 알려주었다.
“그 규칙은, 프레데리카에게 애정을 느끼는 데에서 출발하는 걸로 보인다.”
“뭐?”
“규칙 두 번째를 기억하나? ‘나 외의 다른 이들도 함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궤도를 벗어난다, 라.”
“마왕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완벽하게 궤도를 벗어난 셈이지.”
스스로를 비웃으며 카이온은 순순히, 자신이 프레데리카에게 완전히 정복당했음을 선언했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연참이에요!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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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다 못해 충격적인 고백에 아르칸드는 언어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마족은 감정 따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파괴와 살육에 대한 의지였다. 긍정적이라 부를 만한 감정은 그들에게 허락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족의 가장 정점에 있는 자가 감정을 느꼈단다.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아르칸드는 삐걱대며 고개를 내젓고는 중얼거렸다.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타인이 느끼는 바를 멋대로 재단하면 안 된다고 배운 적 없나? 하긴 마탑에서 그런 고차원적인 삶의 규칙 같은 걸 가르칠 리가 없겠지. 마법사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다는 사실을 내가 잠시 잊었군.”
“…….”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아르카드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러 폈다.
“일단, 프레데리카 님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흘러가고 있다 쳐. 그럼 우리가 되돌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
“방법을 찾을 기회는 있을 거다.”
“무슨 근거로?”
“아직 그녀가 죽지 않았으니까.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프레데리카가 사라지게 되는 시점을 뒤로 미루고, 그 사이에 방도를 찾으면 되겠지.”
카이온의 말을 경청한 아르칸드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 어떻게 하면 프레데리카가 완전히 궤도에서 이탈해 원하던 대로 다른 세계로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 전에, 카이온에게 알려둬야 할 사실도 있었다.
“마왕,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지금 이쪽으로 비올렌과 레지어스가 오고 있어.”
“멍청한 개새끼가 돌아오는군. 옆에다가 신의 도살자까지 매달고.”
“……그래. 어쨌든, 비올렌이 돌아오면 그에게도 협조를 얻는 게 좋겠다. 비올렌에게도 프레데리카 님의 상황을 설명을 하긴 했으니까…….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있는 편이 낫겠지.”
무언으로 카이온은 그에 긍정했다. 어차피 비올렌 또한 프레데리카에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 중 하나였다. 배제하려 한들 밀려날 생각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비올렌이 데려오는 레지어스는 좀 다른 문제였다.
“성기사 놈은 어찌할 생각인가?”
“글쎄, 레지어스 님의 목표는 사실 마왕, 당신이라서.”
“아. 신의 하수인들이 더 참지 못한 모양이로군.”
“마왕, 당신이 상대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러다가 레지어스의 손에 죽어준다면 더 감사한 일이겠지만. 아르칸드는 속으로 험한 생각을 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카이온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기사가 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레지어스를 물리칠 수 있다면, 프레데리카의 곁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 세계에 남도록 공작을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렇지만 성기사의 손에 소멸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포기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녀가 곁에 없는 남은 생에는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든 레지어스의 칼날을 피하고 프레데리카를 이 세계에 묶어둘 방법을 찾는 것, 그 외에 카이온이 고민해야 할 사항은 없었다.
둘은 몇 가지 사항을 간단히 더 논의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르칸드는 인사조차 없이 카이온의 방을 나갔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프레데리카라는 한 사람을 두고 그녀에게 구애하는 경쟁자들끼리,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협력을 해야 한다니. 하지만 카이온도, 아르칸드도 그 이상함을 애써 무시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밀어내는 건 프레데리카가 완전히 이 세계에 남게 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에게 맹세한 대로 그녀의 집에 남았다. 프레데리카 홀로 유유자적한 가운데, 두 남자는 비올렌과 레지어스가 당도할 날이 가까워 오자 점점 예민해져 갔다. 어쩐지 두 남자와 뒹구는 게 전보다 수월하지 않다는 생각을 프레데리카가 할 정도였다.
한편 레지어스는 비올렌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코카네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만을 얼마나 그렸던 건가, 하고 레지어스가 궁금해할 정도로 비올렌은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일정이 지체되면 짜증을 냈다. 그 끔찍했던 전쟁터에서조차 관대하고 느긋했던 비올렌이, 사람이라도 바뀐 듯 굴었다.
레지어스가 좋은 말로 그를 달래보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결국 레지어스는 비올렌은 비올렌대로 내버려둔 채 직접 일행을 다독이는 쪽을 택했다. 비올렌의 수하들은 기꺼이 성기사의 지휘를 받아들였다. 이미 전장에서 오래 함께 보고 지낸 사이였으니 어색할 일도 없었다.
코카네스까지 이틀 가량의 거리를 남겨둔 날 밤. 여관에 찾아든 일행은 굉장히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올렌이 워낙 재촉을 해 대는 통에 정신없이 말을 달렸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조금 여유를 가지면 안 되는 건지 하고 꼭 물어봐야겠다고 레지어스는 다짐했다. 다들 잘 법한 늦은 시간, 마침내 그는 비올렌을 방문하기로 했다. 손에 잔 두 개와 술 한 병을 든 레지어스는 비올렌의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다, 그대로 멈칫했다.
프레데리카, 프리카…….
연신 그녀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워대는 비올렌의 목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문 너머에서 듣는데도 그의 목소리에 열기가 어려 있는 걸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레지어스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은 전우의 은밀한 자기 위로를 훔쳐 들었다는 민망함이나 불쾌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비올렌이, 프레데리카를 생각하며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게…… 싫었다. 레지어스는 닿을 수조차 없는 프레데리카에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을 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비올렌이 미웠다.
문 너머의 남자가 상상하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붉어진 얼굴과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애타게 갈구하는 입술. 그리고 휘감겨 오는 부드러운 몸의 곡선.
급작스럽게 솟구치는 질투와 음욕에 레지어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움찔하고 발이 뒷걸음질을 쳤다. 레지어스는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삐걱대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문을 닫고 기대어 서서는 한참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웃기지도 않게, 그의 양물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레지어스는 자신의 신체 반응에 심각하게 당황했다.
급히 손에 든 것들을 아무 데나 내려놓고 그는 자신의 짐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단도를 찾아냈다.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호를 그린 레지어스는 급히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더듬더듬 이어가던 기도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머리가 희게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레지어스는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단도를 뽑아 들었다. 파랗게 선 날을 바라보던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따끔한 느낌이 들면서 곧 피가 주르르 흘렀다. 고통이 찾아오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아픔 때문인지 멋대로 고개를 쳐들던 다리 사이의 물건도 가라앉아 갔다.
단검이 덜그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말짱한 손으로 상처를 짓눌렀다.
‘너는 성기사다. 신에게 몸을 바친, 항시 몸과 마음이 정결해야 하는 신의 종이야.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누군가가 레지어스의 마음속에서 속삭였다. 감히 그런 생각이라니. 그건 신의 종으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음욕을 가졌던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프레데리카를 두고 음란한 상상을 했던 걸 말하는 건가.
그의 손에 난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갔다. 성기사로서 흔치 않게 강한 성력을 가진 그는 이렇게 사소한 상처 정도는 자연치유가 되곤 했다. 마침내 두 손에 묻은 피 외에는 레지어스가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는 증거는 남지 않았다.
레지어스는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비릿한 쇠 냄새가 그를 비난하는 듯했다.
프레데리카에 대한 연심을 온전히 접지 못했던 걸까. 레지어스는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하고 참회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헛되게도, 이렇게나 쉽게 그는 무너졌다.
코카네스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비올렌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정신 차려.”
그는 스스로의 뺨을 쳤다. 신의 명을 받아, 마왕을 처단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런 삿된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치고 기도를 올렸다. 아까보다는 좀 더 명료해진 머리로 그는 신께 자신을 이끌어달라 빌었다.
결국 레지어스는 그날 밤 비올렌을 찾아가지 못했다. 그와 함께 마시려던 술은, 결국 마개가 열리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방에 남았다.
두 사람은 예정된 것보다 반나절 빨리 코카네스에 도착했다. 비올렌의 부모와 먼저 인사를 나눈 레지어스는, 그들과 일별하자마자 곧장 프레데리카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비올렌에게 요청했다.
“원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프레데리카 님께 안부를 묻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성하의 명을 지체할 수 없다네.”
“그래, 그렇겠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비올렌은 레지어스를 데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비올렌의 저택에서 프레데리카의 거처까지는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다. 평화로운 길을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 이틀 전의 밤 일로 레지어스가 거의 입을 다물어버린 데다, 애초에 온 신경이 프레데리카 쪽으로 쏠렸던 비올렌 역시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새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마침내 프레데리카의 두 층짜리 집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불현듯, 레지어스가 질문을 던졌다.
“비올렌, 혹시 프레데리카 님과 친우 이상의 관계가 되었나?”
“뭐? 무슨…….”
“연인이 되었는가, 라고 묻는 거네만.”
비올렌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어스는 조금 속이 시원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체념한 듯도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재촉한 거군. 그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안하게 됐어.”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 그렇게 기사들을 괴롭히고 그랬나?”
“내가, 경황이 없었어. 미안.”
“사과는 나중에 자네 부하들에게 하라고. 가지.”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레지어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과 저택 사이의 거리가 점차 좁아졌다. 저택 정원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비올렌과 레지어스의 눈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택 현관 앞에 프레데리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비올렌과 레지어스를 발견한 프레데리카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려던 레지어스는 주춤하며 비올렌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비올렌의 얼굴은 잔뜩 굳은 채였다.
연인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묘한 감각이 레지어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다시 프레데리카 쪽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난데없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레지어스는 결국 프레데리카를 끝까지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그리고 하트시그널 모두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선작이 좀 있으면 3000이 될 거 같아요... 두근두근합니다.
뭔가 이벤트라도 해야 할까요? 하면 뭘 해야 할까요? 고민이 되네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