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프레데리카, 너를 원해 -->
물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그 감각을 즐겼다.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자유로웠다.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둘러싼 ‘무엇’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조금도 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흘러흘러 가다 보면 내가 가고 싶던 곳에 가는 걸까? 그녀는 아래로 깊이 가라앉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몸속까지 따뜻함으로 채워지자 나른하고 충만했다.
손끝부터, 발끝부터 근육이 한 올 한 올 풀려가는 감각에 그녀는 미소지었다. 잔뜩 굳었던 몸이 막 태어났을 때처럼 나긋나긋해졌다. 손가락의 말단에서부터 자르르 전기가 흘러서 그녀의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숨을 후우, 내뱉었다.
누군가가 손바닥을 간질였다. 발바닥과 오금, 옆구리와 겨드랑이, 목 뒤도 빠짐없이 간질였다. 이어 강아지풀이 온몸에 휘감기는 듯했다. 간지러움이 극에 달해 그녀는 웃다 못해 할딱거렸다.
한참을 간지러움에 시달리다 보니 기운이 쪽 빠졌다. 기운이 없어진 팔과 다리가 축 늘어졌다. 누구인지, 무엇인지 그녀의 몸을 단단히 받치고 있어서 더 아래로 가라앉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천 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녀는 이 안온함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 평온한 세상에 파묻혀서 영원히 잠만 자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를 부르는 건가?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떠서 사방을 살폈다. 그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찾고 싶었다.
주변은 조금 끈적이는 검은 물이 가득했다. 아니, 과연 물일까? 기체처럼 보이기도 했고, 크림이나 점액질의 무엇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안에 점점이 수도 없이 박혀 반짝이는 것들은 보석인지 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이런 것들에 파묻혔는데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니 그건 그것대로 신기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배를 깔고 엎드렸다. 다리를 휘저으니 암흑에 박힌 반짝이는 것들이 다리에 감겨들었다. 그녀는 귀를 바닥에 대 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나.]
뭐라는 거지. 잘 안 들리는데.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조금 더 바닥으로 귀를 눌렀다.
그러자 머리부터 불쑥 아래로 꺼졌다. 당황한 나머지 버둥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한 번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공간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래 함정에 빠진 것처럼, 그녀의 몸은 점점 끌려들어갔다.
‘안 돼, 탈출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탈출하려고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 빌어먹을 책 속 세계에서 나와서 인간으로 살려고, 내가 살던 세상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행복하게 살려고 뭘 했는데!
뭘 했더라,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게 정말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어? 그건 그냥 네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 아니니?’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목소리는 계속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그냥 네가 삶이 너무 지루했던 거 아니야? 사실 책 속이라고 생각한 것도 긴 세월을 살면서 네가 만든 가짜 기억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어디 한 번 질펀하게 즐기기나 해 보자, 하고 그 남자들을 꼬드긴 거 아니었어?’
그녀는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딱 달라붙은 듯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도리질을 치는 와중에도 몸은 절반 이상 아래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꼴사나울 정도로 다리를 허우적대 보았지만 결코 그 진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점차 숨이 막혀왔다.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시원하게 기침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폐 깊이 집어넣고 싶었다. 깔딱대며 넘어가는 숨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워서 손톱을 세운 채 바닥을 긁으려 했지만 이 요상한 공간에서는 손톱이 닿아 지탱할 만한 단단한 것조차 없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가, 바짝 펴졌다.
케엑, 컥. 겨우 열린 입술에서는 숨넘어가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어느새 발끝까지 모두 반짝이는 암흑 속에 파묻혔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탈출?’
깔깔깔, 하고 웃음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 비웃음에 대응할 기력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힘없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긁어내렸다.
살려줘, 이러다 죽을 것 같…….
눈을 뜬 프레데리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흰 커튼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천장과, 저녁 노을이 있었다.
눈만 뜬 채 숨을 쉬지 않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숨 쉬는 법을 배우기라도 한 사람처럼 히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급하게 들어찬 공기가 기도와 폐를 자극했는지 격렬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내장을 쏟아낼 것처럼 기침을 하며 프레데리카는 몸을 둥글게 말며 옆으로 누웠다.
마침내 기침이 가라앉고, 눈에 맺힌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시고 나서야 프레데리카는 깨달았다.
나는 죽지 않았다.
허무함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수백 년 이 정신 나간 책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만 생각했고, 마침내 그 답을 찾았다고 여겼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차라리 이야기가 원래대로 진행되게 두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야기가 종결되고 나면? 그 어디에도 프레데리카 르데트라는 존재의 소멸은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럼 영원히 책 속에 갇히고 마는 게 아닌가.
분명 카이온과 마지막으로 정사를 나누고 나서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확신컨대 숨도 끊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마치 쇠약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건강하기만 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행위가 허무하리만치, 사라져버렸다. 대체 뭘 했던 걸까, 나는.
문득 깨어나기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기억났다. 사실은 네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는 건 긴 삶에 지쳐서 만들어 낸 ‘설정’ 아니냐는, 그런 비난 어린 목소리.
“흐으…….”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에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나는 분명 눈을 뜬 순간부터 이 세계가 원래 살던 곳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냈던 세계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래서 그렇게나 열심히 기록을 했는데.
기록.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기록한 증거물이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났다. 자신의 책상에 꽂힌 노트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것을 펼쳐서 줄줄 읽어내려갔다.
처음 무언가 인지하고 자신의 존재가 이질적이라고 느낀 다음부터 기록했던 노트였다. 그녀가 기록한 데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인지하기 직전의 기억이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처음부터 어른이었고, 처음부터 모든 걸 알았다. 처음부터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외부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것조차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정해진 거라면……. 사실 이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고 나는 거기에 맞도록 만들어진 캐릭터라면.
프레데리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노트를 닫았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손에 든 것처럼 노트를 내던졌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무릎이 꺾여 휘청이며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등과 엉덩이가 아팠지만 그 통증을 인식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난, 나는…….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만 중얼거리던 프레데리카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 단 하나만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뛰어 들어온 비올렌이 소리쳤다.
“프레데리카, 깨, 깨어났어! 프레데리카가 깨어났어!”
그는 엎드려 통곡하는 프레데리카에게 날 듯 다가와 그녀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는 말 모르는 짐승처럼 오직 프레데리카의 이름만을 중얼거리며 울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올렌이 자신을 안고 운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올렌의 외침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아르칸드와 레지어스의 눈에도 경이와 감격, 그리고 기쁨이 어렸다. 아르칸드가 비틀대며 프레데리카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고, 레지어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방에 발을 들였다. 이제는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마왕은 흐느끼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프레데리카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비올렌을 밀어낸 카이온은 이어 프레데리카의 두 팔을 붙들어 세웠다.
단 한 차례도 이런 식으로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한 적 없던 프레데리카의 얼굴은 흉하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로 더럽혀진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던 카이온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놓았다. 프레데리카는 다시 고꾸라지지 않았다. 그저 앉은 채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손을 붙잡았다. 마왕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프레데리카의 손에 자신의 이마를 댄 그는 그대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마왕은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반기며 카이온은 그 손등에 이마를 부볐다. 코 끝에서 톡 하고 떨어진 작은 물방울이 그녀의 드러난 무릎에 떨어졌다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카이온의 등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마왕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냉하기만 했다.
네 남자는 프레데리카를 부축하고 일으켜 다시 침대에 눕혔다. 저러다 몸에 있는 물이 다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프레데리카는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네 사람을 각자 침대를 둘러싸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그들을 돌아볼 때까지 그 자리에서 내내 기다릴 작정이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하늘을 물들였던 주홍색 빛은 새까만 빛에 밀려나고 있었다. 태양의 마지막 발악이 산등성이에 걸쳐진 채로 있다가 마침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세상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동그란 달이 하늘 높은 곳까지 걸리고 나서야 프레데리카는 겨우 울음을 그쳤지만, 그대로 지쳐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프레데리카의 곁을 지키던 네 사람은 순번을 정해 그녀가 깨어났을 때를 대비하기로 했다. 맨 먼저 남게 된 아르칸드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섰다.
프레데리카의 숨이 끊어졌을 때 같이 움직임을 멈추었던 루시와 다른 하인, 하녀 인형들이 어느새 집을 쓸고 닦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음식 냄새가 저택에 맴돌았다. 레지어스와 비올렌은 식당으로 향했고, 카이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토록 기다려 온, 프레데리카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 작품 후기 ==========
마지막 챕터입니다:D
<-- -->
눈을 뜬 프레데리카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육신만 살아 있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반응이 없었단 뜻이었다. 멍청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앉은 채로 몇 시간이고 보내는 게 일과였다.
의욕이 아예 제거된 사람처럼 멀뚱하니 앉아만 있는 프레데리카를 비올렌은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켰다. 그녀에게 조곤조곤 그들의 지난 이야기를 읊어주었다. 예전에 함께 수업 대신 놀러 갔던 강가에서 보낸 시간이라든가, 비올렌이 성년이 되던 해 생일에 프레데리카가 준 선물을 아직까지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되새겼다.
흘끔 프레데리카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까 비올렌은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저 멀리 알 수 없는 곳에 붙박힌 채였다.
아르칸드는 수도를 오가며 프레데리카의 몸에 영혼이 제대로 안착되었는가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코카네스에 돌아온 날이면 그는 프레데리카의 앞에 마주 앉아서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그건 프레데리카가 자신의 이름으로 쓴 책이었다.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프레데리카에게 다가가는 것과 달리 레지어스는 그녀의 방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무슨 결심을 한 건지, 그는 프레데리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지어스가 그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내내 하다 나온 일은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이었다.
인간들이 제각기 프레데리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도록 애쓰는 동안, 카이온은 뜻밖에도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 처박힌 채로 웬만하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여러 일을 겪으며 마왕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지만 누그러진 셋이 카이온의 안부를 궁금해했지만, 그들을 만나도 마왕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긴 했다.
그날 밤도 카이온은 무릎을 세워 모으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앉은 프레데리카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방이 아니라 사방이 회색에 울렁이는 기묘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런 공간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카이온은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프레데리카. 오늘도 얼굴을 안 보여줄 셈인가.”
그녀는 카이온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수그린 등으로 열렬히 표현하는 프레데리카에게 카이온은 따로 재촉하지 않았다.
“그럼 좀 앉아 있다 가지.”
대답 없는 프레데리카의 옆이마에 슬쩍 입술을 눌러 붙였다 뗀 카이온은 피식 웃고는 멀리 시선을 던졌다. 일렁이는 회색빛의 공간은 카이온을 향해 비죽 다가왔다가는 금방 저만치 떨어졌다.
좀 더 대담하고 공격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프레데리카. 카이온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속으로 웃었다.
그녀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엿새째였다. 아마 오늘도 이렇게 앉아 있다만 나갈 듯했다.
프레데리카는 정말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숨은 쉬었지만, 누군가와 눈빛을 교환하지도 않았고 입 밖으로 말 한마디 꺼내질 않았다.
어느날은 비올렌이 사색이 된 채로 아르칸드를 붙잡고 심각하게 물었다.
“정말 프레데리카는, 살아 있긴 한 거지?”
“무슨 말이에요, 그게.”
“……살아 있는 인형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프레데리카를 보고 있으면.”
감정적 교류가 없는 인간과 지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사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제대로 겪어본 일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울고, 소리치고, 화를 내고,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사람이라니.
비올렌은 울컥 뭔가 치솟는지 몇 번이나 입을 뻐끔대다가 장탄식을 내뱉으며 목 뒤를 손으로 쓸었다. 그런 비올렌을 보며 아르칸드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정신은 매우 섬세하다고요. 우리가 그녀의 뜻을 완전히 꺾어버렸다는 걸 생각해 봐요. 프레데리카 님으로서는 몇백 년에 걸쳐 소원하던 일이 무산된 건데……. 충격이 적은 쪽이 이상한 거죠.”
“그딴 생각할 시간 있으면 앞으로나 걱정하지 그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비올렌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낯을 한 카이온이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내리깐 채로 서 있었다.
“슬슬 네놈의 왕이나 신의 주구들이 몰려올 텐데. 프레데리카를 여기에 계속 두어도 될지, 아니면 어디론가 이동해서 몸을 숨길지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
“제길. 그도 그렇군.”
“프레데리카 님이 저 상태라면 어딜 이동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요. 이 세상 어느 땅으로 도망친다 한들 마왕의 목을 노리지 않는 자들이 없을 겁니다. 끝까지 따라붙겠죠.”
차라리 저 마왕의 목을 따서 보내버리는 게 어떨까, 라는 욕구가 비올렌의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카이온은 완전히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비올렌과 아르칸드, 레지어스가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해도 과연 쉬이 제압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프레데리카를 포기할 리도 없었다.
마왕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했지만 비올렌이 볼 때 그건 애정 그 이상의…… 집착이었다. 필요하다면 카이온은 당장이라도 그들 셋을 모두 죽여버리고 프레데리카만 데리고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지금 인간들에게 보이는 인내와 신의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막 그들이 있는 곳에 들어서던 레지어스도 대화를 조금이나마 들은 모양인지 같이 어두운 낯이 되었다. 그는 침울하지만 뭔가 단단히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이 집을 누군가 공격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지. 맞아. 그래서 말인데,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뭔데요?”
아르칸드가 묻자, 레지어스는 조금 주저했다. 그의 눈이 카이온을 향했다. 성기사와 마왕의 눈이 마주치고 레지어스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가 씹어 뱉듯 한 말에 심지어 카이온까지 눈이 동그래졌다.
“마족의 땅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데.”
“뭐? 레지어스, 제정신이야?”
“그곳만큼은 누구도 프레데리카 님을 해치려 들지 못할 테니까. 모든 땅의 주인 가운데, 그녀를 해치지 않을 자는…… 마왕 하나뿐이지.”
넷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제일 먼저 목소리를 낸 자는 카이온이었다. 그는 미묘한 웃음을 지은 채 팔짱을 끼었다. 그가 고개를 까닥까닥하더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놀랍게도 성기사의 말이 틀리진 않군 그래.”
“하지만, 마족의 땅이라니. 마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더듬더듬 비올렌이 당혹스러움을 표하는데, 오히려 레지어스 쪽이 더 강경하게 나왔다.
“어느 곳으로 간다 한들 위험한 건 마찬가지겠지. 마왕이 프레데리카 님의 곁을 떠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저들은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프레데리카 님을, 나를, 우리 전부를 죽이려 할 테고. 우리 모두 살려면 마족의 땅으로 가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야.”
“……카이온.”
아르칸드가 처음으로 카이온의 이름을 불렀다. 마왕은 느긋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르칸드는 뭐라 물으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마법사를 보며 카이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건지 알아차린 듯 빙긋 웃었다.
카이온은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었다.
“나의 땅에서, 프레데리카 말고 너희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겠느냐 물으려던 거겠지.”
마법사의 어깨가 들썩였다.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벌개진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비올렌은 참담한 얼굴이 되었지만, 의외로 레지어스는 덤덤하게 카이온에게 부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면구스럽지만, 가능하다면…… 마계에 함께 들어가도 되는지 묻고 싶군.”
“레지어스, 진심이야?”
“이대로 이곳에 뻗대고 있을 수만은 없어, 비올렌. 우리 힘만으로 계속 몰려올 성기사나 기사들을 막아낼 수도 없고.”
“하지만 마족이야, 마족의 땅이라고!”
“싸우는 건 좀 나 없을 때 싸우지 그래. 내 앞에서 그러지 말고.”
작게 혀를 찬 카이온이 이야기를 마저 나누라며 그 자리를 뜨자,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세 사람은 긴 대화가 시작될 것을 예감하고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그들이 언쟁하는 소리가 카이온에게 들려왔다. 마왕은 피식 웃으며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늦은 시간까지 격론을 벌이던 셋이 어떻게 결론을 내린지 카이온은 알지 못했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는 프레데리카의 정신 속으로 방문했다.
“프레데리카. 오늘도 여전하군.”
카이온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오늘도 프레데리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온은 조금도 급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프레데리카만을 데리고 마계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다만 프레데리카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니 멋대로 버리는 짓은 지양하려 할 뿐이었다.
오늘도 얌전히 앉아 있다가 돌아가게 되려나. 카이온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흐물거리는 회색 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이온은 외부에서 들리는 희미한 타격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리 정신계에 들어와 있다 해도 바깥 상황을 아주 모를 수는 없었다.
나직한 비명과,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내는 시끄러운 소음. 그리고 기합과, 카이온과 프레데리카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결국 마왕과 그의 곁에 있던 현자를 죽이러, 사람이 온 것이다.
점점 요란해지는 소리를 배경 삼아서 카이온은 조용히 프레데리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카이온이 프레데리카의 정신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프레데리카에게 처음에 말을 건 이후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옆에 앉아만 있었다.
“프레데리카. 지금 밖에 나와 널 죽이러 온 사람들이 있다. 아마 네 충실한 애완견들이 열심히 싸우는 모양이지.”
[…….]
“여기서 그냥 죽고 싶은 거라면 그래, 말리지 않겠어.”
[…….]
“하지만 한 차례 죽음으로써도 너는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 않아? 이번에 죽는다고 한들 다시 뜻을 이루리란 보장도 없고……. 만약 죽는 것이 네 소원이라면 방해하지 않겠어. 하지만 정말 그걸로 만족해?”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덤덤한 듯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듣는 프레데리카의 손끝이 가끔 움찔거렸다. 카이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가 이대로 그냥 얌전히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의욕이 없었다면 수백 년을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이번에 눈을 다시 떴을 때도, 넋을 놓았을지언정 분명 다시 다른 목표를 세워 달릴 만한 의지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길게 잇진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카이온은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프레데리카의 뒤통수에 대고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기다릴게. 프리카.”
다시 눈을 떴을 때, 카이온은 훨씬 명확한 소란과 마주했다. 그는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이미 복도에는 낯선 얼굴 하나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마왕은 그 시체를 가볍게 넘어서 프레데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프레데리카가 넋 빠진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카이온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금 힘 주어 일으키자 프레데리카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까, 그럼.”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지도 않고, 카이온을 바라보지도 않고, 프레데리카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비올렌이 척 보기에도 성기사로 보이는 자와 검을 맞대고 있는 게 보였다. 비올렌은 둘을 등지고 있어 몰랐지만, 성기사는 마왕과 프레데리카를 알아보았다. 그자의 눈이 번뜩였다.
으아아, 하고 성기사가 있는 힘을 다해 비올렌을 밀어냈다. 갑작스럽게 밀어붙이는 검에 비올렌이 주춤하는 틈을 타 성기사가 온몸으로 그를 받아버린 뒤 뒤로 제꼈다. 흉흉한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성기사가 검을 치켜든 채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살기 어린 목소리에도 프레데리카는 고요하기만 했다.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슬쩍 뒤로 물러났다. 성기사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프레데리카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몸을 추스른 비올렌은 그 광경을 보며 경악했다. 저건 흡사, 마왕이 프레데리카를 방패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비올렌은 이를 악물고 도약했다. 마왕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린 성기사의 등에 힘껏 검을 꽂아 넣었다.
성기사의 입에서 피거품이 꾸르륵 하고 끓어넘쳤다. 숨이 끊어져가는 와중에도 성기사의 눈은 마왕과 프레데리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둘을 향했다가, 비올렌이 검을 돌려 뽑자 그대로 고꾸라졌다. 계단참에 쓰러진 성기사를 흘끔 본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다시 고쳐 안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비올렌이 버럭 성질을 내며 카이온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얼굴에 잔뜩 튄 남의 피가 그의 얼굴을 흉흉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젠장, 미친 거 아니야? 프레데리카를 검 앞에 노출시키다니!”
“내가 설마 프레데리카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래, 몇이나 왔지?”
“수도 없어. 계속 계속 나타나.”
“그렇군. 마법사와 성기사 놈은 어디 있지?”
“바깥에.”
어쩔 생각이냐고 묻는 용사의 눈을 바라보며 카이온은 싱긋 웃어주었다.
“성기사 놈이 말한 대로, 도망칠 때가 된 거 같군.”
========== 작품 후기 ==========
매일 오고 싶은데 죄송해요. 이상하게 마지막 챕터가 참 어렵네요.
그래도 2월 중에는 완결까지 다 올릴 예정이랍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
하지만 도망치기 이전에 프레데리카를 깨우는 게 더 급했다. 카이온은 품 안의 프레데리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현실을 직시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카이온은 이어 비올렌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비올렌은 광분하여 날뛸 게 뻔했다. 굳이 그의 생각을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프레데리카가 이 세계를 인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카이온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얼굴의 묻은 피를 대충 문질러 닦고 있던 비올렌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희끼리는 합의를 보았나? 나를 따라갈 텐가?”
“……제기랄, 8년 동안 싸워놓고 가게 된 곳이 마족의 땅이라니.”
비올렌은 투덜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우선으로 프레데리카의 안전을 생각하자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세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했다. 설사 그녀가,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침내 결론이 나온 것에 만족하며 카이온은 씩 웃었다. 그러면서 일부러 비올렌 듣기에 거북할 법한 말투로 지껄였다.
“너희들의 숨은 당연히 붙여 놓아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
“하지만 프레데리카가 너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면 그깟 목숨 지켜줄 생각 없으니 그때부턴 알아서 하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카이온을 노려보던 비올렌은 입술을 꽉 깨물 뿐,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카이온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비올렌은 침을 탁 뱉었다. 피 섞인 침을 발로 비벼 문지른 그는 검을 고쳐잡고 마왕의 뒤를 따라갔다.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요란한 폭음과 어지럽게 뒤엉킨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온은 그것이 자신을 죽이러 온 성기사 무리와 그에 맞선 레지어스 그리고 아르칸드의 소리임을 알았다. 시간을 오래 끌 필요는 없을 듯했다. 속전속결로, 저들을 모두 죽이고 프레데리카에게도 약간의 충격요법을 쓰기로 했다.
순간 비올렌의 눈앞에서 카이온과 프레데리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황한 비올렌은 급히 뛰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현관문이 열리질 않았다.
“이게 뭐야!”
온몸을 부딪쳐 보아도 어찌 된 영문인지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급히 가까운 창문으로 뛰어갔다. 그것 역시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검 손잡이로 내리쳐도 깨지지도 않았다. 비올렌은 이를 갈았다. 카이온이 뭔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창문 너머로 성기사들 무리 한가운데에 선 카이온이 보였다.
“카이온! 이런 미친, 카이온, 뭐 하는 거냐!”
그는 주먹으로 창문을 내리치며 마왕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닿을 리가 없었다.
한편 바깥에서 한창 싸우던 성기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형체에 당황했다. 그것이 나타남과 동시에, 레지어스와 아르칸드가 무언가에 붙들린 듯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대로 뒤로 쭉 밀려났다. 아르칸드는 입까지 틀어막힌 건지 윽윽 대며 도리질을 쳤다.
“멈춰, 뭐 하려는 수작이야!”
레지어스가 고함을 쳤지만, 그들을 묶어버린 당사자는 조금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천히, 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뿜는 서늘하고 독한 마기에 성기사들은 일제히 마왕에게로 검끝을 돌렸다. 사납게 벼려진 검들이 당장이라도 카이온에게 달려들 듯 번뜩였다.
카이온은 여유로운 얼굴로 자신을 죽이러 온 인간들을 둘러보았다. 품에 안은 프레데리카의 귀에 대고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프레데리카. 이제 눈을 뜨고, 잘 봐. 여기가 네가 사는 세상이야. 나를 죽이고, 날 ‘보호한’ 널 죽이러 온 자들이 네 앞에 있어.”
요기 어린 눈과 마주친 한 성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왕 카이온, 네 놈의 목을 신성한 성전에 바치고야 말겠다!”
“신의 이름에 영광 있으라!”
“마왕과 동조한 저 계집도 죽여!”
동시에 성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발이 떨어지는 순간, 카이온은 프레데리카를 슬쩍 앞으로 밀었다. 비틀거리며 프레데리카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검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검은 프레데리카의 몸을 반토막 내려는 것처럼 날아왔다. 하지만 그 검은 그녀에 몸에 가 완전히 박히지 못했다. 다만 옆구리를 꽤 깊이 베고 지나갈 뿐이었다. 벼락같은 통증이 찾아오자 비로소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으윽…….”
검이 지나간 부분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프레데리카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이온이 그녀의 몸을 받아 안았다.
그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이었다. 프레데리카의 옆구리를 벤 검 외에 다른 어떤 자도 카이온과 프레데리카에게 닿지 못했다. 카이온을 중심으로 폭발한 마기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성기사들의 목을, 심장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숨을 빼앗긴 성기사들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툭툭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한가운데에서, 프레데리카는 창백해진 얼굴로 헐떡이며 자신의 이마를 카이온의 가슴에 밀어붙였다. 잔뜩 일그러진 입술에서 비로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파, 아…… 흐윽…….”
“프레데리카, 넌 여기에 살아 있어. 알겠지?”
“아윽…… 아…….”
혼란스러웠다. 허리부터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상처가 당연히 아물어야 하는데, 고통도 금방 사라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미칠 듯한 아픔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프레데리카는 헐떡이며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파하는 프레데리카를 보면서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웃는 그가 미웠다. 이 아픔을 빨리 어떻게든 사라지게 해 주기는커녕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때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깨달음이 있었다.
‘상처가 낫지 않아?’
프레데리카 르데트는 죽지 않았다. 어떤 부상도 순식간에 나아서 그녀를 죽음이라는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상처가 낫지 않았다.
아픔 때문에 자꾸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쓰러지려는 걸 카이온이 단단히 안았다. 그가 프레데리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왕의 속삭임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아프지 않고 싶어?”
“하…… 아파…… 너무 아파…….”
“아프다는 건 살아 있다는 좋은 증거지. 그러니까 이제 눈을 뜨고 나를 봐라, 프레데리카. 그리고 말해.”
고통으로 맺힌 눈물에 어른거리는 눈으로 본 카이온의 모습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살고 싶다고 말해.”
“……으으.”
“살려달라고, 아프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다.”
할 수 있지, 라고 되묻듯 카이온이 웃었다. 피에 물든 프레데리카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서는 힘껏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만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아파 울음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이온은 황홀한 음악을 듣는 듯했다.
혀가 굳어버린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하려는 말이 결국은 항복 선언임을 알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의 안으로 달팽이처럼 틀어박혔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프레데리카는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하여 살아 있음을 난폭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마왕을 노려보았다.
네가 이겼어.
“살려, 줘…….”
마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처럼, 카이온의 얼굴에 만족과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프레데리카에게 입 맞추었다. 뜨거운 체온이 그녀에게 낙인을 찍는 듯했다. 프레데리카는 눈을 감고 카이온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이곳에 속했든 속하지 않았든 간에, 지금 프레데리카는 마왕과 용사가, 마법사와 성기사가 사는 이 세계에 살아 있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결국은 이곳에 온전히 인간으로 살게 되어버렸다.
떨리는 프레데리카의 입술을 핥은 카이온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프레데리카를 바닥에 눕혔다. 끙끙대고 헐떡이는 프레데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은 카이온은 비로소 제 힘에 포박당한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손을 가볍게 휘젓는 것만으로 저택의 현관이 열렸고, 마법사는 말을 하게 되었고 레지어스는 정신없이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프레데리카의 옆에 쓰러지듯 무릎꿇고 앉은 레지어스는 앞뒤 잴 것 없이 그녀의 벌어진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피가 흐르는 찢어진 상처를 서서히 아물게 했다. 축난 몸도 그의 신성력으로 점차 회복되어갔다. 볼에 붉은 기가 서서히 돌아왔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거의 굴러오듯 뛰어온 비올렌이 우악스럽게 카이온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마왕은 순순히 그에게 잡혀주지 않았다. 그러자 비올렌은 검을 뽑아들고 아예 마왕의 목을 따려고 날뛰기 시작했다.
그가 난동을 피우거나 말거나, 아르칸드는 허옇게 뜬 얼굴로 프레데리카의 곁으로 비틀비틀 다가왔다. 아르칸드가 다가오자,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아르칸드가 턱을 덜덜 떨었다. 곧 그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라 툭툭 떨어졌다.
“프레, 프레데리카 님.”
“……왜 죽을 상을 하고 있어요.”
“살아났군요. 살아났어…….”
“애초에 죽지도 않았잖아요…….”
죽고 싶었지만. 작게 중얼거린 마지막 말을 아르칸드도 레지어스도 못 들은 척했다. 그 사이 레지어스는 온전하게 돌아온 프레데리카의 옆구리를 확인하고는 성호를 그으며 신에게 기도했다.
제 양옆에 앉아서 감격에 겨워하는 두 남자를 보자니 프레데리카는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뭐 좋다고 이렇게 울고 기도하기까지. 그녀가 두 사람을, 아니 넷 모두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이럴까.
그녀는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레지어스가 얼른 그녀의 등을 받쳐 일어나기 쉽도록 도와주었다. 예전이라면 예의 바르게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했을 프레데리카였을 테지만, 그녀는 레지어스를 한 번 흘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칼춤을 추며 마왕을 죽여버리겠다고 왁왁 소리를 질러대는 비올렌을 잠시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한숨을 쉬었다. 붉게 피어오른 입술에서 퉁명스러운 명령이 툭 튀어나왔다.
“그만 해, 비올렌. 시끄러워.”
그녀의 말에 비올렌은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바로 멈춰 섰다. 그러더니만 그 자리에서 검을 버리고는 프레데리카에게로 뛰어왔다. 울먹이는 비올렌을 보며 프레데리카의 미간에 더 깊은 골이 패었다.
“하아…….”
짜증스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자,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카이온이 보였다. 마왕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니 프레데리카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피어오르려던 불꽃도 곧 푸스스 식어버렸다.
화를 내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계획은 실패였다. 무슨 이유인지 프레데리카도 알 수는 없었다. 자신의 내면에 침잠할 때 했던 생각대로 애초부터 그녀가 이 세계에 ‘그런 식으로’ 설계되었던 인간이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원래 세계에 돌아가길 실패한 건지,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프레데리카는 이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헛웃음이 터졌다. 그 오랜 시간을 발버둥 쳤던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다시 한번 죽어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때의 자신은 멋도 모르고 용감했다. 어차피 죽지 않으니 무슨 짓을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 근처까지 갔을 때 이미 그녀는 한 번 죽을까 봐 두려워했다. 현실에 눈을 뜨고 숨을 쉬는 지금이라고 다를 수가 없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네 남자를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카이온, 비올렌, 아르칸드, 레지어스. 그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프레데리카의 물음에 넷이 전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 -->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떠나? 어디로요?”
영문 모를 말에 프레데리카가 카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프레데리카의 옆에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던 마왕은 아, 하고 작은 탄식을 터트렸다. 그녀에게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르칸드가 담담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고, 모두 함께 마계로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요상하게 바뀌었다.
“프레데리카 님이 괜찮다고 허락해 주시면, 함께 가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르칸드는 침착한 듯 보였지만 사실 속으로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프레데리카가 거절한다면 그들로서는 그녀의 곁에 남을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는 순간, 마왕이 기뻐하며 냉큼 세 사람의 목을 따고 말 게 분명했다.
애초에 애정으로 시작된 관계가 아님을 알았다. 순전히 프레데리카는 필요에 따라 선택된 이들이 카이온, 비올렌, 아르칸드 그리고 레지어스였다. 그나마 그녀에게 효용이 있을 법한 건 오로지 마왕뿐이었다. 그런 관계이니, 프레데리카가 모두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참하게 느낀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칸드는 그녀에게 매달려 애원하고 싶었다. 아직 그는 프레데리카가 주는 작은 애정 한 톨이 고팠다. 그녀의 손에 닿고 싶었고, 그녀가 웃는 게 보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프레데리카를 연모하는지 구구절절하게 풀어놓고 싶었다. 아르칸드는, 프레데리카를 원했다. 미치도록.
아마 그건 다른 자들도 다 마찬가지 아닐까. 아르칸드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면서 프레데리카가 내릴 선고를 기다렸다.
아르칸드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프레데리카는 자기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너무 적어서, 그것이 지켜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했다.
한참만에 프레데리카는 바닥을 툭 차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들을 다 망쳤지.”
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들어 넷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당신들의 운명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좀 더 행복했지. 마왕을 물리친 용사와 대마법사와 성기사가 되어야 했는데 내가 망쳤어. 심지어 비참하게 만들었고…….”
“아니야, 프레데리카. 그건……!”
“들어 봐, 비올렌.”
애써 그녀를 대신 변호하려 드는 비올렌을 막은 프레데리카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비올렌도, 아르칸드도, 레지어스도, 그리고 카이온도 나한테는 실제가 아니어서 그랬어요. 미안하진 않아. 그때 그 선택은 내게 최선이었어요. 내가 살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결국 상황은 이렇게, 나는 여기에 남았고 당신들의 삶은 엉망이 되었죠.”
“…….”
모두의 눈이 최종 선고를 내릴 프레데리카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겨우 내 곁에 있는 걸로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녀의 허락에 셋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걸 보며 카이온은 조금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거절했다면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널 독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당신이 제일 오래 살 거잖아요. 그럼 결국 카이온 뜻대로 되는 건데, 뭘.”
장난스러운 프레데리카의 말에 카이온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프레데리카가 오래도록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떠날 준비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프레데리카는 자신이 부리던 하녀와 하인 인형들의 작동을 멈췄다. 굳어져 쓰러진 루시의 이마에 입을 맞춘 프레데리카는 나지막하게 안녕, 하고 인사를 남겼다.
짐을 챙길 것도 딱히 없어서 다들 맨손으로 정원에 모였다. 떠나기 전, 바닥에 널린 성기사들의 시체를 둘러보던 프레데리카의 눈이 레지어스에게 향했다. 그녀는 시체들을 턱짓하며 그에게 물었다.
“정말 마계로 가도 괜찮겠어요? 레지어스, 당신도 성기사잖아.”
“그 제안을 먼저 한 건 레지어스야, 프리카.”
비올렌의 말에 프레데리카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곧 알아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미 마왕의 얼굴도 봤고, 그를 보호하다시피 하던 프레데리카를 모른 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레지어스는 신전의 적이 될 만했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보았던 레지어스는 종교에 몸 담은 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냉철한 면이 있었다. 그들에게 최선인 방법으로 마계를 떠올렸다 한들 썩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이해한 것처럼 보이자, 카이온은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듯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럼 바로 가지.”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모두의 눈이 레지어스에게 향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몇 번 깨물다가 아르칸드를 향해 말했다.
“저들의 시신을 한 곳에 모아두고…… 태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죽은 성기사와 신관의 시신은 전부 불에 태워 신의 곁으로 보내는 게 관례였다. 이대로 이 시체들을 내버려 두면, 사람이 드물게 오가는 곳이니 썩어 문드러지거나 짐승의 밥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불에 태우면 그걸 발견한 주민들이 신전에 알리고, 재가 된 시신이나마 모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레지어스의 마음을 안 비올렌과 아르칸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이온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죽는 대로 내버려 둔 자가 무슨 의리가 남아서 그러는 건지. 비웃으려는 건지 한마디 하려 입을 열려 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젓자, 카이온은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다물었다.
아르칸드의 마법으로 성기사들의 시체는 정원 한가운데에 차례대로 놓였다. 그가 일으킨 마법의 불이 오로지 시신만을 불태웠다. 마법의 녹색 불과, 시체 타는 연기가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코카네스 중심부만이 아니라 더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큰 불길이 격렬하게 시신들을 집어삼켰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카이온이 결국 재촉하고 나서야 셋은 발걸음을 돌렸다. 카이온의 옆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던 프레데리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한 손은 이미 카이온이 꼭 붙든 채였다.
커다란 몸집의 비올렌이 제일 먼저 뛰어와서는 남은 한 손을 덥석 잡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을 한 비올렌을 보며 프레데리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이어 아르칸드와 레지어스까지 모이자, 카이온은 더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힘을 풀어놓았다.
다섯의 신형을 감싼 마기는 그대로 하늘로 높이 뻗어올라갔다. 짙은 어둠이 단박에 하늘을 가로질러 멀리 달음박질쳤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난 깊은 상처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하늘에 나타난 이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쳐나왔다. 모두들 두려워하며 하늘을 손가락질하고 떨며 울부짖었다. 그것이 마왕의 마기임을 알아챈 신전에는 난리가 났다. 신전에 숨겨둔 각 왕국의 첩자들은 급히 자신들의 왕에게 그 정체를 알리는 전서구를 띄워댔다.
마왕이 힘을 되찾았다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더 이상 마족과의 전쟁은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짧은 날들이 단박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그 마기에서 마족들이 뛰쳐나와 인간의 목을 물어뜯을까 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늘을 가로지른 짙은 선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당장이라도 재앙이 닥칠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은 의외의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하다가, 곧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는 사이, 다섯 인영이 인간계와 마계를 잇는 단 하나의 통로 앞에 나타났다.
“진짜 빨리 도착했네.”
놀란 눈으로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받고 답하는 대신 마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둠이 일렁이며 길을 열었다. 마침내 익숙한 마계의 공기가 그를 반기는 지점에 서서, 카이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웃으며 프레데리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라, 프레데리카.”
프레데리카를 향해 다정히 웃던 눈이 그녀 뒤에 있던 다른 이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이온은 굳이 다른 세 남자를 억지로 밀어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카이온은 불만스럽지만 모두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마왕의 얼굴에 드러난 불만을 알아챈 프레데리카는 그의 곁에 다가가서는 발돋움을 했다. 가볍게 카이온의 뺨에 입을 맞춘 프레데리카가 웃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카이온.”
“……프레데리카 네 뜻이니,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프레데리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두려움과 기대로 뒤섞인 얼굴을 한 비올렌과 아르칸드, 레지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같이 가요. 이게 마지막 기회예요.”
그 말에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뒤돌아서거나 뒷걸음질 치는 이도 없었다.
프레데리카는 기꺼이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것이었다.
*****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마왕을 되찾은 마계는 그 어떤 때보다 환희와 평화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마왕의 거대한 성 또한 그랬다.
사실 성이라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거대한 바위산을 깎아 만든 그 성은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그저 험악한 산으로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안은 인간의 그 어떤 화려한 성보다도 호화로웠다.
그것은 마왕이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있는 방들에는 마왕과, 그가 이끌고 들어온 인간들이 온 뒤로 마족들이 함부로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마족들은 마왕이 데리고 온 자들이 그들을 무참히 도륙하던 그 인간들임을 알았지만 누구도 쉬이 그들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지 않았다. 마왕이 그들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어느 마족도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각자 방 하나씩에 자리를 잡은 인간들은 마계 밖으로는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 마족과 척을 졌었냐는 듯, 아예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그들의 시선이, 갈증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단 한 곳뿐이었다.
그 방들 가운데 가장 화려한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감히 귀 기울이는 마족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그곳을 두려워하고, 피했다.
열락과 환희로 가득 찬 신음이 시시때때로 터져 나왔다.
방의 주인은 방에 놓인 거대한 침대에 완전히 늘어진 채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누워 있었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듬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땀에 젖은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이 제법 성가실 법도 한데,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알아차리기에는 그녀의 흐트러진 앞섶을 파고든 손이 너무나도 방해였다. 커다란 손은 가슴의 원래 생김새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꽉 틀어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거친 손가락이 이미 단단하게 서서 단단해진 첨단을 슬쩍 잡고는 둥글리자,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젖혔다. 자신의 가슴을 집요하게 애무하는 손을 밀어내기라도 해보려는 듯, 그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고 힘을 주는 듯했다. 하지만 손의 주인은 도무지 그녀의 뜻을 따라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조금 더 힘을 주어 젖꼭지를 비틀자, 프레데리카의 허리가 파득 튀었다.
달달 떨리는 무릎을 세우고 있기가 좀처럼 힘이 들었다. 차라리 다리라도 자유로이 바르작거릴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프레데리카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때문에 드럴 수도 없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강인한 손에 고정된 채로 그녀는 이번에는 아래쪽에서 몰려오는 쾌감에 흐느꼈다. 점점 달아오르는 몸이 힘겨워서 프레데리카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제발, 아읏……. 아, 아아…… 그만……!”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잔뜩 달아오른 아래에서도 달콤한 물이 흘러나왔다.
<-- -->
끈질기고 집요한 두 사람의 애무가 벌써 얼마 동안이나 지속된 건지. 프레데리카는 점차 머리가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얕은 절정이 몇 번이고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는지 모른다. 차곡차곡 쌓인 음란한 감각은 이제 그녀의 전신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살결이 스칠 때마다 몸에 낙인이 찍히는 듯했다.
프레데리카가 흘린 애액을 꼼꼼하게 핥던 남자가 일부러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그녀의 여린 살을 빨아들였다. 그 음란한 소리에 대번에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녀는 허리를 비틀며 도리질을 쳤다.
“싫어, 흐응, 그런 소리 내면……!”
“하지만 정말 달콤한 걸, 프리카의 애액은.”
“하지, 마! 하윽! 앗……, 아파!”
애액과 타액으로 얼룩진 얼굴로 해맑게 웃는 비올렌을 나무라려던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젖꼭지를 꽉 잡은 채 당겨대는 손길에 비명을 질렀다. 손의 주인이 거칠어진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집중하십시오, 프레데리카 님.”
“흐으, 제, 발…… 살살, 좀……!”
“비올렌만 편애하시니 심술이 나서 그만.”
레지어스가 하나도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한 손이 올라와 프레데리카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는 까끌한 손가락이 제 입술을 매만지면 매만지는 대로 두었다. 혀로 그 손끝을 건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검지와 중지가 밀려 들어왔다. 프레데리카는 기다렸다는 듯 레지어스의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그것을 혀로 굴리고 핥자, 성기사의 신음이 더욱 깊어졌다.
어쩐지 뾰죽한 얼굴이 된 비올렌이 그런 프레데리카를 올려다보더니만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혀가 예고도 없이 밀지 안으로 파고들자, 놀란 프레데리카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레지어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정도는 아프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레지어스는 제 손가락으로 프레데리카의 혀를 희롱해댔다.
위아래로 연약한 점막이 농락당하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점차 몽롱하게 풀려갔다. 이제는 전신이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마치 분홍빛 인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가슴팍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식는 느낌에 몸 곳곳에 소름이 쪽 돋았다.
“흐으으!”
비올렌의 혀가 가장 민감한 내벽을 누르자, 프레데리카는 눈을 질끈 감으며 퍼덕였다. 자유를 봉인당한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온전하지가 못했다. 헐떡이며 흘린 타액이 주르륵 흘러서 그녀의 가슴에 떨어졌다.
귓가에 뜨거운 숨이 닿는가 싶더니, 레지어스가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물어댔다. 귓바퀴를 핥으며 질척한 목소리로 성기사가 물었다.
“제가 본 어느 성물보다도, 아름다우십니다. 프레데리카 님.”
“흐어, 으…… 으응…….”
대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프레데리카는 레지어스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좀 더 힘껏 빨았다. 그것이 마치 그의 아랫도리라도 되는 것처럼. 동시에 그녀의 내벽이 재촉이라도 하듯 꿈틀거렸다. 만족스럽다는 듯 비올렌이 웃자, 그 울림이 그녀의 온몸을 흔들어댔다.
이제 시간이 된 것을 알리려는 듯 레지어스가 발끝으로 비올렌의 어깨를 밀었다. 비올렌이 떨어져나가자, 프레데리카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쉬움은 곧장 레지어스의 단단히 발기한 페니스가 채워주었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뒷겨드랑이로 손을 넣더니 번쩍 들어 안아서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것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잔뜩 풀어놓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비좁은 프레데리카의 안을 레지어스의 성기가 힘겹게 밀고 들어갔다.
“아, 아아아……! 너무, 흐윽, 아, 잠, 깐…… 커…… 흐아아……!”
“거의, 다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레지, 어, 아으윽!”
프레데리카의 눈이 커다래졌다. 쾌감과 미약한 고통이 동시에 밀려들어서 그녀의 눈물을 터트렸다. 어느새 다가온 비올렌이 그녀의 젖은 뺨을 핥았다. 그의 것 역시 완전히 단단해진 채였지만, 인간계에서도 충실한 ‘개’처럼 굴었던 비올렌은 감히 프레데리카의 허락 없이는 자신의 성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울지 마, 프리카. 응?”
“으읏, 아……. 흐으…….”
다정한 목소리로 비올렌이 그녀를 달래는 사이 레지어스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를 움직였다. 안을 뭉근히 휘젓는 감각에 프레데리카가 헐떡였다. 굵고 긴 레지어스의 좆은 그녀의 배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는 사정없이 안을 짓눌렀다. 그녀의 얄팍한 배가 불룩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프레데리카는 몸을 관통하는 새파란 감각에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막은 비올렌의 입술 때문에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코를 울리는 것이 전부였다. 숨을 모두 삼켜버리려는 듯 비올렌의 혀가 프레데리카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혀를 속박한 그의 것은 프레데리카가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무언가, 붙들 것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당연히 레지어스와 비올렌이 프레데리카를 꽉 붙잡고 있으니 그럴 일은 조금도 없었지만, 프레데리카는 그럴까 봐 겁이 났다. 그녀의 손이 비올렌의 벗은 가슴을 더듬었다. 자꾸만 헛손질을 하는 그녀의 손을, 비올렌이 친절하게도 꼭 붙들어주었다.
“흐윽, 흐! 으읏! 흐으응……!”
“프레, 데리카. 프레데리카, 으윽, 프리, 카.”
그것 외에는 말을 잊은 듯 레지어스는 연신 프레데리카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의 허릿짓이 점점 거칠어졌다.
비올렌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프레데리카의 손을 더 꽈악 붙잡았다. 덜덜 떨리는 그의 몸을 프레데리카의 손톱이 긁어내릴 때마다, 비올렌은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입술을 뗀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프레데리카에게 애원했다.
“프리카, 으읏…… 제발, 만져줘. 으응?”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비올렌의 눈과 흐려진 프레데리카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을 툭 떨구었다. 그것을 허락이라 여기고 비올렌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자신의 두 손을 이용해 프레데리카의 손으로 터질 것 같은 좆을 감쌌다.
작고 뜨거운 것이 닿자마자 비올렌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떨었다. 당장 사정해버릴 뻔한 것을 참아내고 그는 천천히 제 손을 움직였다.
프레데리카는 제 앞뒤에서 헐떡이고 흐느끼는 두 남자 사이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흐릿한 눈 저 멀리에서 반짝, 반짝 하고 몇 번이고 별들이 점멸했다. 뱃속에서 팡 하고 터지는 열락에 흐느끼는 소리에 두 남자의 몸짓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아앙, 하아앙! 힉, 싫, 흐으……! 천천, 히, 아……!”
“프레데리카, 아윽, 프레데리카……!”
“으읏, 흐…… 프리카, 아…….”
힘껏 안으로 짓치고 들어오는 레지어스의 페니스가 느껴지고 잠시 후 다리를 타고 주르르 뜨거운 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비올렌이 토해낸 정액이 그녀의 손을 축축하게 적셔갔다. 두 남자가 헐떡이며 프레데리카의 양 어깨에 자신의 뺨과 이마를 기댔다. 세 사람의 몸은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엉겨 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인 프레데리카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얕게 숨만 할딱였다.
맹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프레데리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힘들어…….”
“레지어스가 적당히라는 걸 몰라서 그래.”
“……우리 둘 사이에 자네가 안 끼었으면 훨씬 덜 힘드셨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프레데리카는 날 좋아한다고. 내가 핥아주는 것도 좋아하고, 또…….”
“그걸 꼭 굳이, 매번 이렇게 중간에 난입해서 해야겠어?”
“……그만해요, 둘 다. 나 누울래.”
어차피 둘 다 애초에 이러려고 온 것도 아니면서 정신없이 달려들어놓고는. 프레데리카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두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프레데리카를 침대에 눕혔다.
당연하다는 듯 비올렌이 프레데리카의 몸을 닦을 수건과 물을 가지러 가고, 레지어스는 그녀의 옆에 앉아서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매번 비슷한 식으로 몸을 섞곤 있지만, 프레데리카는 약간 지쳤다.
마계로 오고 난 뒤, 프레데리카는 그들의 연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그들에 대한 마음을 모르겠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내가 넷 모두에게 일종의 책임감, 아니 부채감을 느낀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녀의 말에도 넷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넌 나의 몸은 좋아하지 않나.’
카이온의 말에 프레데리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답에 아르칸드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애정은 지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걸요.’
‘난 프리카 네가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걸. 네가…… 날 그렇게 길들였잖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고백하는 비올렌의 얼굴을 프레데리카는 조금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어찌 보면 그녀가 멋대로 저들을 물들인 셈이기도 했으니까.
레지어스 같은 경우에는.
‘당신께서 절 미워하지만 않으시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대체 이들이 뭐가 모자라서, 아니 프레데리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다고 이렇게 목을 매는 것인지. 그녀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걸로 충분히 만족한다 하니 프레데리카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어두워진 프레데리카의 낯을 보던 카이온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마왕의 미소가 이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가, 하고 프레데리카는 잠시 고민했다.
‘곁에만 있어라, 프레데리카.’
‘……그걸로 괜찮겠어요?’
‘충분해. 너의 죄책감만으로도.’
다른 이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니 프레데리카도 같이 마주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부탁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애정을 표현하는 걸 부디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그게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푸념하듯 중얼거리는 프레데리카를 내려다보며 레지어스가 작게 웃었다. 그는 헝클어진 프레데리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 맞추었다.
“싫으십니까?”
“싫은 건 아닌데…… 힘들어요.”
“아르칸드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그가 무슨 내 전속 자양강장제냐고 대답하려다 말고, 프레데리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투덜거린다 해도 어차피 아르칸드는 기꺼이 프레데리카에게 그가 만든 약을 먹이러 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주는 약이라도 제때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때마침 돌아온 비올렌이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프레데리카는 눈을 감았다. 수마가 몰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고 숨이 고르게 변할 즈음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졌다.
“잘 자요, 프레데리카 님.”
다시 눈을 떴을 때, 프레데리카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인영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비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르칸드 님.”
“비올렌도, 레지어스도 참……. 이렇게 매번 사람 진이 빠지게 몰아붙이고.”
“그러게요…….”
“검잡이들이라 그런 걸까요?”
여상한 말투로 제 친구들을 흉 본 아르칸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프레데리카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친 프레데리카를 일으켜 앉히고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어 입에 대 주었다. 프레데리카는 그것을 생명수인 것처럼 급히 들이켰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자 약의 달콤한 향이 훅 퍼졌다.
<-- -->
낯빛이 조금 돌아오는 걸 보며 아르칸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약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아시죠? 프레데리카 님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너무 약해요.”
“으응, 그러게요.”
“전처럼 회복력이 좋은 몸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인지하고 운동을 하든, 여튼 체력을 기르셔야 한다고요.”
“아…… 알았어요…….”
최근 부쩍 아르칸드의 잔소리가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프레데리카는 눈을 데룩 굴렸다.
그의 말대로,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육신이 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활 습관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건강하기만 한 신체가 아닌지라 단련을 해야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 그런 것과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영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런 체력으로 자꾸만 유혹에 넘어가고, 가끔은 본인이 꼬드겨서 몸을 섞어대니 버틸 수가 없는 거였다.
오늘도 그의 잔소리가 잘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아르칸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손을 꼭 붙잡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프레데리카 님. 이런 식으로 자꾸 회피하시면 말이죠. 저도 수가 있어요.”
“네?”
“다음에 올 때 제 손에 뭐가 들려올지 상상해 보시겠어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아르칸드를 바라보다가 주춤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 어떤 협박보다 이게 제일 무서웠다. 어쩌면 이 대마법사는 그렇게 음란한 장난감들을 잘도 만들어내는지! 아주 마계에 넘어온 뒤로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는지 자꾸만 헉 소리 나는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는 프레데리카의 몸을 농락해댔다.
가장 최근에 그가 가져왔던 손가락 한 마디만한 구슬이 줄줄이 달린 그것은……. 프레데리카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물건이 제 안에 전부 들어와서 미친 듯이 진동할 때마다 그녀는 엉엉 울며 빌었다. 제발 빼달라고, 아니 아르칸드의 것을 넣어달라고. 그녀의 애원을 들으면서도 아르칸드는 고개를 저으며 그 구슬 끝에 매달렸던 긴 꼬리를-세상에, 마치 말 꼬리처럼 길고 탐스러운 연갈색의 털이 달려 있었다!-쓰다듬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르칸드가 그녀의 도톰한 둔덕 사이에 숨은 음핵에 씌웠던 그 작은 고깔은 또 어땠던가. 그것이 잔뜩 부풀어 오른 음핵을 빨아들이고 자극할 때마다 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흘러나왔던지. 그 때문에 마치 실례라도 한 것처럼 잔뜩 젖은 침대보를 손으로 훑으며 웃던 대마법사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란!
‘으아앙, 아앗! 히익, 아르칸, 흐아아아……!’
‘조금만 더 울어주세요. 네? 으응, 아직 부족해요. 프레데리카 님.’
음란한 마법도구들 때문에 잔뜩 성감이 고조된 채로 마침내 아르칸드의 좆을 아래로 물었을 때 솔직히…… 너무 좋아서 울긴 했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프레데리카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셔야 해요. 약속 지키시는 거예요? 약으로 버티는 건 안 좋은 거라고요.”
언제 ‘협박’이나 했냐는 듯, 아르칸드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주무세요. 약 기운에 아마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아르칸드 님.”
“나중에 다시 올게요.”
천천히 프레데리카를 다시 눕힌 그는 동그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순하고 착한-관계를 가질 때만 빼고-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레데리카는 그의 말대로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꿈조차 없는 편안한 잠이었다.
마계는 의외로 인간계와 아주 다르지 않았다. ‘사소한 세부사항’이 달랐지만, 그래도 인간계에 있는 것은 마계에도 다 있었다.
녹색 가득한 벌판 대신 오묘한 빛을 내뿜는 연보랏빛의 구불거리는 풀들이 바람에 따라 누웠다 일어났다. 울창한 편백나무 숲을 거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타는 듯한 이파리를 가진 회색빛의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물보다는 조금 끈적한 듯한 연녹빛의 커다란 호수가 나타나기도 했다. 하늘에는 날개 넷 달린 새들이 날았고, 나무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머리 둘 달린 사슴 비슷한 것이 뛰어다녔다.
마족들도 무리를 지어 살았고, 서로 짝짓기를 하여 자손을 만들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장마당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인간들처럼 누군가가 누군가를 다스렸고, 규율이 있어 그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받았다. 오히려 인간에 비해서 마족이 더 그들의 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 비해서 훨씬 잔혹하게 처벌하였으니까.
어쨌든, 모습은 인간계에 비해 기괴할지언정 마계도 그냥, 마족이 사는 세계였다.
마족의 시장을 돌아다니는 시커먼 두 형체에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검은 두건이 달린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서 많이 작았는데, 키가 큰 쪽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작은 쪽은 계속 두리번거리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조금 앞서 나가느라 작은 형체 쪽이 멀어지자, 큰 쪽의 로브에서 팔이 불쑥 나와서는 작은 쪽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떨어지지 마라.”
“아, 미안해요. 신기해서 정신을 팔았더니 그만.”
꽤 신이 난 얼굴로 여전히 두리번거리면서 성의 없는 사과를 하는 프레데리카를, 카이온은 인상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았다.
마족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 해서 성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자신과 붙어 있을 때야 그의 기운과 냄새로 프레데리카를 가리면 그만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그녀를 놓치기라도 하면 금방 인간이 마족 사이에 있음이 드러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온이 그녀를 찾아내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잠시라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때론 살육이라는 본능에 너무 충실한 놈들도 있어서, 그녀가 마왕이 데려온 귀중한 손님이라는 걸 잊고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마족들의 삶을 둘러보는 프레데리카의 얼굴이 새삼 반짝였다. 카이온은 그녀가 이 세계에서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이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저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심과, 흥미.
처음에 만났던 프레데리카는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그녀는 카이온과, 다른 셋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자신의 옆에 앉아서 그에 대해 물어보는 프레데리카의 목소리가 마왕은 듣기 좋았다.
그녀가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 했을 때 기꺼이 따라나선 것도 프레데리카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아, 저기.”
조금 전 주의를 주었던 건 그새 잊은 건지, 프레데리카는 또다시 통통 튀며 걸음을 빨리했다. 카이온은 그녀를 부르려다 그만 피식 웃고는 그냥 바짝 따라붙었다.
마족들의 먹을거리를 흥미롭게 구경하던 프레데리카가 돌아서서는 카이온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거 인간도 먹어도 되는 거예요?”
“글쎄, 인간이 먹는 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시험해 볼까?”
카이온이 비죽 웃었다. 마족의 식량을 먹었을 때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험해 볼만한 대상이 성에 셋이나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한지 알아차린 듯, 프레데리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지 말아요.”
“내가 뭘?”
“얼굴에 다 써 있어요. 하지 마요.”
“그것 참 아쉽군.”
진심으로 아쉬움이 묻어나는 마왕의 목소리에 프레데리카는 그의 가슴을 한 번 더 때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이 다시 이어지고, 또다시 멈춘 곳은 놀랍게도 장신구가 있는 곳이었다.
프레데리카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카이온에게 물었다.
“마족도 치장을 해요?”
“왜, 마족은 미에 대한 의식이란 게 없는 줄 알았나?”
“전쟁터에서 그런 걸 어떻게 느끼겠어요?”
신기하네……. 프레데리카는 반짝이는 눈으로 늘어 놓아진 장식들을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 기묘한 소용돌이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작은 반지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스스럼없이 손가락에 끼우려 했다. 하지만 카이온의 손이 프레데리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요?”
“이게 어떤 건 줄 알고, 겁도 없이.”
“아…… 이것도 위험한가요?”
조금 실망한 얼굴로 프레데리카는 반지를 내려놓았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이온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마왕의 가슴에 폭 파묻힌 프레데리카는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카이온이 한참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더니만, 물어보았다.
“반지가 가지고 싶나?”
“그냥, 끼어보고 싶어서?”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신형이 흔들렸다. 앗, 하는 순간 프레데리카는 익숙한 공간에 돌아와 있었다. 프레데리카를 그녀의 침대에 앉힌 카이온은 로브를 벗어던지고는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대체 이 마왕이 뭐하는 걸까. 프레데리카는 카이온이 왜 잘 구경하다 말고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시장 구경을 실컷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조금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런 프레데리카의 앞에서 카이온은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마왕이 주저하는 꼴은 처음 보는 듯해서 프레데리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주먹을 펴서 내보인 것은 우아한 무늬가 음각된 반지였다. 거기에는 무언가 일렁이는 검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생각하지도 못한 물건이 카이온의 품에서 나오자 정말로 놀라서,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게 뭐예요?”
“인간들은 연모하는 이에게 애정을 고백하고, 영원을 약속할 때 장신구를 주지 않나. 특히 반지.”
“그건 결혼할 때잖아요.”
“어쨌든.”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왼손을 조심스레 받쳐 들더니만,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 넣었다. 조금 큰 듯하던 반지는 제자리에 가자마자 저절로 줄어들더니 손가락에 딱 맞게 조여들었다.
프레데리카의 손에 자리 잡은 반지를 바라보는 카이온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잘 어울리는군.”
“……이거, 나 주는 거예요?”
“그 검은 보석은 내 기운을 응축한 거다.”
“네?”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는 프레데리카에게 카이온이 말했다.
“프레데리카.”
“…….”
“내가 네 것이라는 증거로 삼아다오.”
“카이온, 이건…….”
“너를 원한다, 프레데리카. 소멸하더라도 네 손에 소멸하고 싶을 만큼, 널 원해.”
두 손으로 공손히 그녀의 손을 받쳐 든 카이온은 반지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경건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프레데리카는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 오자, 프레데리카는 한숨을 토해내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너무하네.”
“…….”
“사람 마음 약해지게…….”
프레데리카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술은 투박하게 카이온의 입술에 가 닿았다.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꾹, 누르고 떨어진 프레데리카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카이온을 보고 다시 한번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카이온의 손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훅 끌어당겨져 안기자마자 카이온의 격렬한 입맞춤을 맞이해야 했다. 프레데리카는 여유롭게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프레데리카, 프레데리카 하고 카이온이 연달아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입술을 찾았다.
성난 파도처럼, 카이온은 프레데리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뱃속에서 일어난 불길에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계속해서 그녀를 갈구했다. 기꺼이 카이온을 받아들이면서 프레데리카가 속삭였다.
“좋아요, 카이온.”
“프레데리카…….”
“좋아, 으응. 카이온. 좋다고.”
내가 가질게요. 프레데리카는 그렇게 속삭이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떼밀었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마왕은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뒤로 넘어갔다. 무릎을 꼼질거려 카이온의 배를 타고 앉은 프레데리카가 씨익 웃으며 그의 목젖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마치 그녀가 처음으로, 카이온을 취했을 때처럼. 그의 숨통을 조이듯이.
숨을 조이는 손길조차도 달콤해서 카이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프레데리카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나 지금 당장 당신을 안고 싶은데.”
“…….”
“그래도 돼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프레데리카.”
두 사람의 몸이 단박에 엉켜들었다. 마치 두 마리의 뱀처럼 서로를 단단히 얽고 감은 채로 그들은 서로의 몸을 찾아들었다. 서로 다른 두 숨이 뒤섞이고, 탄식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프레데리카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긴 시간과 헛발질을 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어쩌면, 이 세계에 뿌리내리라고 주어졌던 길고 긴 유예였던 건지도 모른다고.
아무려면 어때. 프레데리카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검게 빛났다.
〈끝〉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