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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10화 (10/99)

〈 10화 〉 3. 여자의 집착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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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포디미아의 궁궐 안, 메르넬라는 앞으로 있을 일을 위해 목욕 재개를 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목욕하는 수준이 아니라, 경건한 의식이라도 앞둔 듯 차분하게 그리고 꼼꼼히 제 몸을 씻었다.

“하아.”

메르넬라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 풍만하다고 자신하는 흉부와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펑퍼짐한 엉덩이.

비단결보다 고운 것 같은 노란색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모습은 너무나도 색정적이었다.

어떤 남자라도 넘어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원하는 남자는 절대로 제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르켈님…….”

그 남자의 이름은 아르켈 소토르프, 우리들의 왕이자 아래 아이들에게는 신 중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였다.

아르켈과 메르넬라는 수없이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정확히는 자신과 아르켈을 포함한 11명이 같이 보낸 시간이지만.

그래. 영겁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간 동안 그들은 같이 있었다. 몇몇은 서로 눈이 맞아 결혼했고, 몇몇은 아래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아르켈만큼은 영겁 동안 홀로 있었다.

“저는, 아니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홀로 군림하는 그 외로운 뒷모습에 넋이 나가서, 그래서.

“당신을…. 사모하고 있어요.”

먼저 반해버렸다. 그렇기에 메르넬라는 아르켈에게 순결을 바치고 싶어 영겁의 시간 동안 그 누구에게도 이 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하아…….”

처음과는 다른 조금 뜨거운 한숨이 흩어진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 몸은 안달이 나고 있는데, 어째서 그는 저를 바라봐주지 않는 걸까.

슬퍼, 화가 나, 그를 속박하고 싶어. 나만 보게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를 속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마음 뿐이기에.

더군다나 신하 된 입장이니 폐하를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상으로 내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그의 명령 때문에 이렇게 가끔 자신을 위로하며 참아내고 있다.

“후우. 이럴 때가 아니죠. 슬슬 시간이에요…….”

어느 정도 몸이 진정됐기에 메르넬라는 욕실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의 메르넬라의 풍만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고 그것도 모자라 향유를 발랐다.

그 일말의 과정은 신성한 의식을 앞둔 무녀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폐하.”

메르넬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 *

소락과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드워프들의 협조 덕분에 순조롭게 마을이 건설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드워프 왕국 쪽과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것 정도다.

마을이 완성되고 어느 정도 굴러가기 시작해야 던전 운영도 시작할 수 있기에 당장은 이 한가로움을 즐기면 되지 않…….

“어?”

분명 한가로움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아포디미아 쪽에서 통신이 오는 걸까.

순간 엄습하는 불안함 때문에 몸을 떨었다. 설마 이제 기다릴 수 없으니 지상으로 꼬라박겠다는 말을 하려고 통신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

“꿀꺽.”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데도 불안함에 마른침을 삼키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밉다. 일단 받아는 보자. 통신조차 받지 않으면 진짜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

[존경하는 아르켈 소토르프 폐하, 육백하고도 서른 그리고 네 번째 정기 통신이에요.]

메르넬라의 목소리다. 정기 통신? 아르켈의 기억을 뒤지던 중, 이와 관련된 기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르켈은 한 달에 한 번씩, 아포디미아와 정기적으로 통신하고 있다.

그게 벌써 634번째면 아르켈이 지상으로 내려온 지 벌써 50년이나 지났다는 뜻이다. 아, 참고로 이 세계의 시간 개념은 지구의 시간 개념과 같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작사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잘 지냈어?”

[저는 잘 지냈어요. 폐하께서도 만수무강하시지요?]

“응.”

실제로 만수무강하기는 하지만, 만약 만수무강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만수무강하다고 할 거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희가 곧장 지상으로 내려올 거 다 알고 있어.

[이제 슬슬 침공 시기를 결정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이것 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린다고.

진짜 충성심이 깊은 것 맞아?

아니 충성심이 깊은 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서도 내 심정은 전혀 이해해주지 않잖아!

“그 이야기는 저번에 끝낸 것으로 아는데? 아직 멀었어.”

그나마 정말로 다행인 건 침공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르켈의 재량이라는 거다.

메르넬라, 혹은 다른 신하들이 아무리 재촉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재촉일 뿐이다. 최종 결정권은 내가 쥐고 있다.

저번에 느낀 바지만, 그야말로 핵발사 스위치 같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걸 아는 데도 왜 이리 불안함이 느껴질까.

[하오나 폐하.]

아, 깨달았다. 내 불안함의 근원은 분명 메르넬라의 목소리에서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져서일 거다.

[폐하께서 지상으로 내려가신 지 이제 오십이 샤, 열 밀이 지났답니다.]

아포디미아는 지상과는 달리 독자적인 시간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대충 샤는 년이고, 밀은 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

634번째 정기 통신이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 시간이 지났음이 정확하다.

[정확히는 오십이 샤, 열 밀, 일 유가, 오 마누, 십일 칼파, 십이 씰이네요. 아 제가 말하는 중에 사 씰이 더 지났어요.]

어라? 뭔가, 뭔가 이상하다.

지금 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굉장히 무섭게 느껴진다. 아르켈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무서워.

아니 무서운 걸 넘어서서 괴기스러울 정도다.

[그 시간 동안 폐하의 용안을 뵙지 못한 제 마음도 헤아려주셔요.]

머리가 아파졌다. 메르넬라 때문이 아니라 아르켈의 기억 때문에 아픈 거다.

[항상 폐하와 통화할 때 목욕 재개를 하고 있음에도 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너무나 슬프답니다.]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나는 메르넬라는 아르켈에게 구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켈은 그녀의 구혼을 거절했다는 사실 역시도.

[폐하께서도 그러신가요? 어라? 왜 대답이 없으세요?]

아니, 대답할 틈은 줘야 할 거 아니야. 크윽, 머리가 너무 아파. 이놈의 기억은 도대체 언제까지 갑자기 떠올라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거야.

[폐하? 설마 옆에 누군가가 있어서 대답하시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입도 못 열고 있는 거라고.

[그렇지요? 제 말이 맞지요? 그렇다면 혹시 옆에 계신 분은 여성 분이신가요?]

도대체 왜 내 옆에 여자가 있다고 확정을 짓는 거야?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잖아!

[사랑하옵고 존경하는 폐하. 지상에서 여성 분을 만나고 계신 거지요? 혹시 결혼도 하신 건가요? 본래 종족을 감추고, 본래 신분을 속이고 여성과 결혼하여 아이도 가지신 건가요?]

메르넬라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온다. 그 음색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노였다.

구혼을 거절한 기억은 봤지만, 메르넬라가 이 정도로 아르켈에게 집착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군요. 그래서 침공의 시기를 알려주시지 않는 거였어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 당장!]

위험해, 본능이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온다.

아니 그냥 본능이고 자시고 지금 메르넬라의 상태가 위험한 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고!

당장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메르넬라는 내 명령조차도 어기고 지상에 내려올 수도 있다.

“메르넬라.”

간신히 머리를 진정시키고 기억 속의 아르켈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메르넬라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진정해. 심호흡 좀 하고.”

[후우, 후우우.]

“결혼이니, 아이를 가졌다느니, 내가 그럴 거 같아?”

[그러실 리가 없지요. 잘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 워낙 매력적이신지라 저는 언제나 불안하답니다.]

진정했네. 정말 다행이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뒀더라면 명령이고 뭐고 바로 지상에 꼬라박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벌어질 참상은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온 지상이 화염에 휩싸여 멸망을 향해 걸어가게 될 거다. 내가 지금 애써 마을을 만들고 있는 것도 무주공산 날아가 버리겠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세 치의 혀로 지상을 구한 셈인가?

[혹여나 마음에 드신 여성 분이 생기셨다면 꼭 제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아셨지요?]

“그래.”

당장 마음에 든 여자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혹시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메르넬라한테는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르켈님!”

저 멀리서 드워프들이 손짓을 한다. 정기 통신이고 뭐고 빨리 끝내야겠다.

“난 별일 없이 지내고 있어. 조금 더 인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지상의 다른 생명체들도 관찰 중이야."

[설마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생각이신가요?]

도대체 인간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메르넬라의 목소리에서 이리도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걸까.

아직 거기까지는 기억을 볼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

“그건 조금 더 지켜봐야지.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알겠어요. 다음 통신까지 만수무강하시길 바랄게요, 폐하.]

“그래. 메르넬라도 잘 지내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메르넬라와 통신을 끊었다.

“하아.”

동시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떻게 잘 넘겼네. 잘했다, 나.

그나저나 이놈의 기억은 정리를 해도 해도 계속해서 새로운 기억이 떠올라서 끊임없이 내 머리를 괴롭히네.

아르켈의 힘을 생각하면 전투 중에 기억이 떠오른다고 해도 별문제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대화 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은 상기해둬야겠다.

아차, 방금 드워프들이 날 불렀었지?

“무슨 일이야?”

“목재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인간들이 벌목해다가 주고 있기는 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려서 차라리 도시에서 사 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굳이 목재를 사다 주지 않으셔도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만…….”

어허. 그럴 수는 없지. 시간은 금이라고 하잖아. 특히 던전 운영을 최대한 빨리해보고 싶은 내 입장 상 마을이 건설되는 시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좋다.

“기다려. 목재 사서 올게.”

“그럼 가시는 김에 인간들의 맥주도 사다 주셨으면 합니다.”

저번에 도시에서 맥주를 사다 줬더니 좋다고 마셔대던 드워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맥주가 드워프들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나야 한국 사람인지라 톡 쏘는 맥주를 좋아하지만, 드워프들은 맥주라면 다 좋아하는 것 같다. 새로운 맛이라면서 감탄하기도 했었고.

수상하다는 눈으로 드워프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그저 순수하게 말했을 뿐인지 조금도 찔리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착각인가?

아니 그냥 뻔뻔한 걸 수도 있다.

“알았어.”

그래 뭐, 그런 정도로 뻔뻔한 것은 상관없다. 고작 맥주 좀 사서 온다고 내 재산에 타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야호!”

“아르켈님이 최고십니다!”

나는 드워프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마법을 사용해 바르크 백작 영지로 이동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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