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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13화 (13/99)

〈 13화 〉 4. 던전 마스터들의 사교 파티(3)

* * *

일단 진정이 필요하니 소수를 세도록 하자. 0.1, 0.2…….

이게 아니잖아!

젠장 진정이 되지 않는다. 심장이 계속 뛰고 있어. 그 정도로 현재 레베카의 모습은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흐응.”

평소에 듣던 저 콧소리도 저런 복장으로 내니까 왠지 남자를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뭔가 이상하네. 난 네가 이 모습을 보자마자 또 청혼할 줄 알았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레베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저런 식으로 떠보는 말을 하는 걸까.

아르켈을 향한 레베카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호의이지, 애정이나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지금도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나를 조련하려고 드는 걸까?

“제 눈앞에서 저놈이 레베카님께 청혼하는 모습은 절대로 못 봅니다.”

살았다.

진짜 좋은 타이밍에 등장해줬어, 영감.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해졌거든.

고개를 들어 베르의 모습을 바라보자 흥분이 조금 가신다.

“나도 받아줄 생각은 없어.”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안 받아줄 걸 아는데 뭐하러 청혼을 하겠어. 아르켈이야 너한테 미쳐있다지만 나는 아니라고.

“저기……. 제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도 되는 건가요?”

오. 나디아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에 눈이 번쩍 뜨였다.

“괜찮아. 오히려 더 좋은 옷을 입히고 싶었는데.”

“그 드레스는 너무 화려해서 저한텐 안 어울렸을 거예요.”

어깨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길이의 옅은 금색 머리카락. 에메랄드 같은 연녹색 눈동자. 가느다랗지만 긴 눈썹. 오른쪽 눈 아래 애교점까지.

“움직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요. 저 이상하지는 않죠?”

“굉장히 어울려. 그렇지 베르?”

“예, 레베카 님. 굉장히 잘 어울린단다 나디아.”

동감이야. 둘의 말대로 나디아는 자신의 피부색과 같은 하얀색 드레스가 굉장히 어울렸다.

사실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포인트는 늑대 귀와 꼬리였다. 복슬복슬할 것 같아서 왠지 쓰다듬어주고 싶어진다.

나디아도 꾸미니까 저렇게 예쁘구나?

그리고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것 같아. 나디아의 가슴도 작은 건 아니지만, 바로 옆에 흉악한 것을 달고 있는 분이 계시니까, 왠지 안심이…….

“아르켈님 뭔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신 것 같은데요.”

“아니, 전혀.”

오히려 나디아의 모습을 보니 굉장히 안심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이게 딱히 실레되는 생각은 아니잖아? 물론 앞에 몇 가지 두서가 붙기는 하지만.

“정말로요? 이상하다, 눈이 수상했는데.”

이게 부하 주제에 기어오르려고 하는 거 봐라? 상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지. 평소에 내 모습을 봐라. 레베카가 까라고 하면 그냥 깠잖아.

“슬슬 출발하셔야 시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 가자 아르켈 나디아.”

“네.”

적절한 화제 전환이다, 영감. 아까부터 굉장히 도움을 받고 있어.

자, 그럼 이제 마계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건가. 영감이 문을 열고 레베카를 에스코트한다. 그를 뒤따라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

여기가 마계라고?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고 말았다.

태양이 내리쬐고 있고, 정원은 잘 가꿔져 있다. 심지어 정원 중앙에는 분수가 물을 내뿜고 있는 것도 보인다.

지상과 다를 게 없다.

내가 생각한 마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마계라고 하면 왠지 좀 황폐한 느낌이 들지 않아?

“타자, 나디아.”

“네!”

아니야. 여기는 플락 가문의 정원이라서 이렇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다. 레베카의 아버지인 ‘율리히 플락’이 지상에 관심이 많을 수도 있잖아?

정원 밖까지 나가면 내가 생각하는 마계의 모습이 나올 거야.

“아르켈.”

영감의 목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이 맥없이 끊겼다. 어? 언제 레베카와 나디아는 마차에 탄 거야?

잠깐만, 저 마차에 설마 나도 타야 하는 건가? 저 레베카랑 저 좁은 공간에 같이 있어야 한다고?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너는 마부석이다.”

“휴우.”

베르셀리우스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로 고마워 영감. 아까부터 나한테 자꾸 도움만 주네.

영감이 의도치 않은 건 알고 있지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

“네놈 그 한숨은 뭐냐. 설마 레베카님과 함께 마차 안에 타고 싶었다는 불경한 생각을……”

아니야, 절대로 그거 아니야. 오해 멈춰!

“설마 그런 생각을 했겠어.”

“하긴 네놈이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그런 기본적인 매너조차 지키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영감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잽싸게 마부석에 앉았다. 그러자 마차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원을 지나 저택의 대문을 넘어 보이는 마계의 풍경은…….

역시나 지상의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뭐, 이럴 것 같기는 했어. 그냥 잠깐 내 생각을 관철했던 거지 예상은 했었어.

“그래도.”

지상과는 공기의 향이 다르다. 그리고 군데군데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바위가 홀로 떠 있는 모습도 제법 신기하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마차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레베카님. 아르켈님한테 왜 청혼을 안 하시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예전에는 아르켈님이 청혼하시는 거 굉장히 귀찮아하셨잖아요.”

마차에 마법이라도 부여했는지 목소리가 아주 조그맣다. 아르켈의 몸이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들리지 않았겠네.

“그냥 뭐.”

그나저나 이거 왠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대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들어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법.

아니 그래도 여자들의 대화를 엿듣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궁금한데?

“하루 넘어 꼴로 청혼하던 게 익숙해져서 그런가. 허무한 느낌이 들어서.”

잠깐만, 레베카 너 설마.

“레베카님 설마…….”

나디아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보다.

설마 레베카가 나를 좋아한다? 아니면 좋아하게 됐다? 그런 상황인가?

“응? 뭐?”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저기서 진짜로 날 좋아한다면 딱히 아르켈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라고 소리를 치던가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반응이 나와야지.

“아르켈님이 좋아지신 거예요?”

“최근에는 좋아졌어.”

“꺅!”

아니야, 나디아. 니가 생각하는 그런 좋아, 가 아니야. 너무 흥분해서 레베카의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나 보구나.

“아르켈님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하급 마족과 귀족의 러브 스토리라니!”

나이다가 저런 캐릭터였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평소의 나디아답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러브 스토리를 좋아하나 보다.

“왠 러브 스토리?”

“네? 방금 아르켈님이 좋아지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완전 헛다리 짚었다고.

“최근 일을 잘하잖아. 아르켈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도 어떻게 던전에 사람들이 찾아오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거야.”

부하로서 마음에 들었다, 정도인가. 확실히 내가 요즘 일을 잘하기는 하지.

“그건 아닐……. 거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거기선 그냥 아닐 거라고 말해줘.”

레베카와 나디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쯤에서 그만 듣는 게 좋겠다. 호기심도 어느 정도 해결했고, 역시 걸즈 토크를 엿듣는 건 양심이 찔려.

목소리가 안 들리게 차단 마법이라도 걸어놓으면 되겠지?

* * *

레베카와 나디아는 한참이나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아르켈이 최근 이상해.”

둘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시긴 해요.”

“그렇지? 원래 나 말고 다른 이들이랑은 길게 이야기도 안 했었잖아.”

“맞아요! 저한테도 항상 단답형으로만 대답해주셔서 큰일이었다고요.”

그것도 던전에 같이 있으니까 그 정도 대화를 한 거지. 마계에 있었을 때 아르켈은 언제나 나디아를 무시했었다.

“내 곁을 떠나지도 않았고.”

“그랬지요.”

확실히 아르켈은 언제나 레베카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른 이랑 대화를 길게 나눠.”

확실히 한 달 전쯤을 기점으로 아르켈이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었다. 나디아 역시 그 점을 인지하고 있기는 했다.

“게다가 일 때문에 내 곁을 자주 비워. 일을 잘하니 좋아해야 하는데 뭔가 공허해.”

나디아는 레베카가 마차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르켈님도 이상해졌지만, 레베카님도 이상해졌다 싶어서요.”

“내가?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싱겁기는.”

레베카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디아는 진실로 충성하는 레베카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죄책감을 느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예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레베카님.’

사실 모른다는 대답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저 감정이 어떤 형태로 싹이 틀지는 나디아 역시 모르기에.

‘아예 눈치채지도 못하셨다면 우선은 숨기는 게 맞겠죠?’

나디아는 레베카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판단이 옳기를 바랐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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