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7. 주인공의 동료와 만나다(4)
* * *
루이나는 한참을 울었다. 오늘 루이나의 다양한 표정을 보게 되네. 게임에서는 뭔가 달관한 듯한 말만 했고, 감정 표현도 적었었는데 말이야.
사정을 모르니 위로를 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치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냥 우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솔직히 그냥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중이다.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면 좀 달랐을까?
“죄송해요.”
아,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당황하셨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추하지는 않았다. 그냥 놀랐을 뿐이지.
“왜 우는지 안 물어보세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죠.”
개인 사정을 굳이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왜 또 존댓말이세요? 아까는 반말해놓으시고.”
“제가요? 아.”
루이나에게 가르침을 줄 때는 반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랬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푸흡, 이젠 사과하시네요? 이상해요.”
내가? 그보다 아까까지 울다가 이제는 웃고 있는 네가 더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면 앞으로는 반말한다?”
“그렇게 해주세요.”
“훌륭하군.”
누가 박수를 치면서 이쪽으로 오는가 싶었는데 바르크 백작이었다.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 양반은 또 왜 저래?
“자네가 마스터인 것을 잠깐 의심했었네. 용서해주게나.”
그래서 나와 루이나가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했구나.
“괜찮습니다.”
뭐, 딱히 상관없다. 마스터의 존재는 흔하지 않다. 제 종족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가 얼마나 있겠는가.
주인공 파티는 너나 할 것 없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긴 뭐하니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도록 하세나.”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좀 그래.
“저는 잠시 여기서 쉬어도 될까요?”
아, 루이나는 몸이 한계였지. 그래도 여기서 쉬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지 않나? 응, 역시 그냥 내버려두고 가긴 그렇다.
루이나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꺅!”
루이나가 소녀 같은 비명을 지를 줄이야. 오늘 진짜 루이나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게 되는 구나.
“자, 잠깐만요!”
잠깐만은 무슨 잠깐만이야.
“여기 계속 있다가 감기 걸릴 수도 있잖아. 가시죠, 백작님.”
“허허허, 그렇게 하세나.”
백작과 함께 다시금 응접실로 향한다. 그러는 와중에 루이나가 자꾸 뭐라고 궁시렁거렸지만, 전부 무시했다.
“으으!”
내 손에 의해 소파에 앉혀진 후, 담요까지 덮어주자 루이나는 불만이라는 듯이 볼을 크게 부풀리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루이나의 시선을 무시하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무엇 때문에 나와 만나고 싶어 했지?”
자, 이제 본론이다. 솔직히 실력을 조금 내보였으니 내 말이 거절당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바르크 백작이면 더더욱이 그렇다.
물론 덕분에 나는 바르크 백작에게 집요하게 노려지게 되겠지만.
“비명 숲 근처에 마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별다른 긴장감 없이 내가 백작과 만나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그쪽에 마을을? 왜 굳이?”
아, 맞다. 나야 그쪽에 무조건 마을이 있어야 하는 입장이긴 하다지만, 다른 사람들 기준으로는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그 근처에 무슨 특수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괴물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치안도 좋지 않은 위치다.
다시 말해 마을을 만들기에 딱히 메리트가 없다.
그런데 왜 굳이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다.
“백작님의 영지 쪽 사람들은 아니지만, 다른 영주들의 폭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모은 사람 중에서는 바르크 백작 영지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도시임에도 말이다.
그만큼 백작은 영지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영주들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말해줄 수 있겠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 근처에 있는 백작의 가신들이 영지 관리를 못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마을의 촌장으로 삼으려고 점찍은 에디와 소피아, 그리고 마르도켈 자작의 이야기를 상세히 말했다.
그 외에도 몇몇 영지의 폭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자 백작의 얼굴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구겨졌다.
“지들 알아서 하겠거니 그냥 내버려뒀더니.”
바르크 백작은 바쁘다.
당장 영지 근처에 비명 숲이 있는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프라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아라엘 왕국과 프라엘 왕국은, 아니 그냥 여덟 왕국은 서로 사이가 나쁘다.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신기하지 않을 정도로.
게임 내에서는 던전의 출현 때문에 각 왕국끼리의 긴장 상태가 완화되었다고 말하는 NPC가 심심치 않게 보일 정도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벌을 내릴 것을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구하고자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
딱히 구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내 필요 때문에 내 멋대로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만들려고 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다. 내가 선인임을 포장할수록 바르크 백작은 날 실력 외적인 면에서도 신용할 테니까.
“자네는 그 마을에 계속 있을 거고?”
“예.”
뭐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근처 던전에 있겠지만.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나설 것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마을에 계속 남아있겠다면 치안은 딱히 문제없겠지. 병사들을 적게 파견해도 되겠어. 나쁘지 않아…….”
예상대로 백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좋아 이대로 있으면 마을을 승인받는 건 일도 아니겠어.
“그럼 나도 하나 물어봄세.”
응? 뭘 또 물어보려고…….
“검문도 받지 않고 내 영지에 몇 번이고 다녀간 이유는 무엇인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귀찮다는 이유로 순간이동 마법으로 백작의 영지에 들어왔다.
그 점은 고려조차 안 하고 있었다. 백작과 만나게 되면 분명 저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자네가 그럴 마음만 먹었으면 내 목은 이미 바닥에 뒹굴고 있었을 거야.”
백작의 정보력을 너무 얕봤다.
“그게…….”
“아니, 말하지 말게. 내가 맞춰볼 테니까.”
백작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 눈빛이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내가 아는 실력자 중에서 자네와 외모가 같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 다시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젊어 보이는데 그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마, 내가 마족인 걸 들킨 건가?
“게다가 아르켈이라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야.”
들켰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을을 승인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당장 마족이 세운 마을이라면서 불태우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건가?
아니, 마족임을 들켰으면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 결론은.”
어? 백작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자네가 아니, 당신께서는 반로환동에 이르러 은거하셨던 분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아니, 저기요 백작님?
어떻게 그렇게 명확한 중간과정을 거쳤는데 그런 어이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여기서도 반로환동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어? 나는 전혀 몰랐는데?
“아.”
루이나도 놀랐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아마 그러니까 그렇게 강했던 거였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 봉신 놈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다시 나오신 것이겠지요. 그것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자 제 영지에 몰래 들어오셨고요.”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쫄아 있었던 것 같다. 인간 사회에서, 마족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나쁘다.
그런 마족이 곤란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마을을 만든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백작이 저런 결론을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짜 어이가 없다. 아까까지 쫄아 있었던 내 마음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진다.
“신분을 숨기시려고 하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제 봉신 놈들이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백작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당연히 마을 건설을 승인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잘못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니 세금도 향후 10년간은 면제하도록 하지요.”
제 결론은, 이라고 말할 때부터 말투가 묘하게 공손해졌다고 싶었더니. 아무래도 백작은 내가 은거했었던, 엄청나게 늙은 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향후 10년간 세금 면제라.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굉장히 좋아할 만한 소식이다.
“혹여나 본인의 신분을 밝히시기 싫으시면 앞으로 활동하실 때 필요한 신분 역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오.”
그러잖아도 백작의 이번 지적 때문에 앞으로는 인간 신분이 필요하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주겠다고 하면 나야 고맙지.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가끔 제 부하들을 한 번씩 지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고작 그걸로 끝? 내가 아는 바르크 백작의 반응과 사뭇 다르다. 실력자를 향한 백작의 욕심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고작 가끔 한 번씩 지도해주는 거로 끝이라고?
아.
굉장히 죄송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에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됐다.
부하의 잘못은 결국 윗대가리 역시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자기 봉신들 때문에 은거를 풀었으니 결국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서 저렇게 공손한 거고, 그래서 제 욕심을 내보이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거다.
이거 생각보다 개꿀인데?
“좋아,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자연스레 백작을 하대했지만, 백작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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