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8. 아르켈 소토르프(4)
* * *
“나도 갈래.”
예? 아니, 이건 또 무슨.
“어디를요.”
“올라간다며. 나도 가겠다고.”
“아니, 제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몰라. 그래도 갈 거야.”
아, 머리 아파. 아무래도 오늘은 두통이 멎지 않을 예정인가보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같이 가겠다니.
당연하지만 레베카를 데려갈 수는 없다. 거기가 어디라고 애를 데려가. 그러다가 메르넬라랑 레바카가 만나기라도 한다면…….
와씨,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끔찍해.
난 감당할 자신이 없다.
“던전은 어떻게 하실려고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레베카를 말려보기로 하자.
“레베카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던전이 공략당할 수도 있잖아요. 축제에서 우승하시는 것도 중요하잖습니까.”
“그, 그건.”
역시 레베카를 말리려면 던전을 들먹이는 게 최고지. 거봐,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이기려고 드는 게 치사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그러면 뭐 어때.
일단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끔 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혹시 던전이 문제시면 제가 지키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어?”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용, 자이로니아의 말이었다.
뭐야, 너 아직 있었어?
“그, 그럼 안 되나요? 그렇게 하면 왠지 살려주실 것 같아서 일단 여쭤봤어요. 히, 히익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잠깐만. 이거 왠지 X된 거 같은…….
“그렇게 해.”
“레베카님!”
역시나. 아니 그 전에! 이 여자는 도대체 이 용을 어떻게 믿고 던전을 맡겨두겠다고 하는 거야.
오늘 처음 봤어, 게다가 방금까지만 해도 우릴 죽이려고 했던 용인데!
“용의 약속은 절대적이잖아. 나랑 약속해. 내가 올 때까지 내 던전을 안전하게 지켜주기로.”
“무, 물론이에요. 그, 그쪽 오빠가 살려준다고만 약속해주시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지켜드릴. 히익!”
아, 그냥 죽여놓을 걸 그랬어. 아직도 아르켈의 전력을 가늠하지 못해서 전력을 발휘해야 죽일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한 게 패착이었다.
50% 정도만 개방해서 그냥 죽여놓는 게 나았을 것을. 그랬다면 레베카에게 자기가 던전을 지키겠다느니, 같은 말도 못했을 텐데.
“자, 던전 문제는 해결했어. 이제 이견 없지? 무조건 같이 갈 거야. 아 몰라, 따라갈 거야!”
“왜 그렇게 떼를 쓰십니까.”
사람 미쳐버리게.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는데.
“지금 안 따라가면, 아르켈이 안 돌아올 거 같단 말이야!”
그럴 일은 없다. 무조건 돌아올 거다. 나만의 작은 던전이 이제야 운영되기 시작하려는 참인데 내가 안 돌아오긴 뭘 안 돌아와.
“하아.”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레베카의 불안은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따라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메르넬라는 어떻게 하고? 애초에 레베카가 따라가도 괜찮은 게 맞나 싶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데려갈게요. 그럼 되죠?”
“진짜? 말했다. 간다고 된다고 말했어. 무르기 없기야.”
“예이, 예이.”
이런 걸 무르겠냐. 무르는 순간, 용서해주지 않을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럼 가기 전에 우선 나디아한테 말부터 하죠. 안 그러면 걱정할 거 같으니까요. 게다가.”
분노를 한껏 담아 자이로니아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던전에 도마뱀 새끼가 들어오면 분명 놀랄 테니까요.”
“히익! 사, 살려주세요!”
“안 죽여.”
지금은 안 죽여. 울분이 쌓이긴 했는데, 지금은 던전을 지켜야 할 파수꾼 같은 거니까 살려둘 생각이다.
다녀와서는 어……. 음……. 조금 고민해보자.
“사,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안 죽인다고.”
“다녀와서 죽이실 거 같아서 그래요! 제발요!”
거 더럽게 눈치 빠르네.
“뭐해, 빨리 가자.”
“하아.”
반대로 레베카는 더럽게 눈치가 없다.
* * *
레베카와 자이로니아가 약조를 나누고, 나디아에게 잠시 둘이서 다녀올 곳이 있으니 그동안 자이로니아가 던전을 지킬 거라는 말까지 해준 후, 여행길에 올랐다.
사실 여행길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마법을 써서 근처까지 이동할 생각이니까.
“손을 잡아주세요.”
“응.”
레베카가 내 손을 잡자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거 손 참 보드랍고 조그맣네.
아, 이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지.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내가 원하는 지역까지 이동했다.
“응? 여긴 어디야?”
원채 순식간에 이동한지라 레베카는 눈을 뻐끔뻐끔 뜨면서 나와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다, 네?”
그래, 여기는 바다다. 그것도 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망망대해.
“위를 봐보세요.”
“와.”
그리고 우리의 위에는 원래라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거대한 위성, 아포디미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엄청나게 크다.
“아르켈. 저긴 왜 저렇게 어두워?”
레베카가 가리킨 곳은 아포디마의 바로 아래쪽이었다.
필시 다른 곳은 밝을진대, 이상하게도 저쪽만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채 어둠이 다가오면 잡아먹겠다는 듯, 똬리를 틀고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저긴 게임에서도 미탐사 지역으로 인간은 다가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래도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문제는 왜 저 현상이 일어나는지 설명해주기에는 나도 지식이 조금 아니, 많이 딸리는 편이라는 거다.
그래도 설명을 바랐으니까 일단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주도록 하자.
“우선 아포디미아는 공전하지 않는 위성임과 동시에 이 행성의 자전축과 맞닿아 있는 위성입니다.”
“자전축은 뭐야?”
아,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였어?
“이 행성이 자전하고 있는 건 아시죠?”
“그건 무슨 뜻이야?”
아, 이건 포기하자. 대충 저 시커먼 공간은 지구를 예로 들자면 북극인 셈이고 북극 위에 항상 저런 거대한 위성이 항시 떠 있는 거다.
그러니 지구의 개기일식보다 훨씬 어두운 개기일식이 항상 계속돼서 저런 지역이 형성될 수 있는 거다.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과학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써놨던 것 같기는 하지만, 고졸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버렸다.
“올라가시죠.”
“뭐야, 왜 설명 안 해주는데!”
죄송합니다, 그건 제 능력 밖의 문제라서요.
“그리고 올라가자니, 그건 또 무슨…….”
레베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끈다. 그렇게 조금 나아가 장막을 걷자, 바닷물이 허공에 떠올라 아포디미아로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와.”
저런 거대한 위성이 있으면 기조력 때문에 바닷물이 이렇게 떠오르는 현상이 발생하는 모양이다.
밀물과 썰물이 과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예쁘네요.”
물이 허공에 스스로 떠올라 길을 수놓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몽환적이다.
마치 물로 이뤄진 에스컬레이터 같아서, 나 역시 레베카와 마찬가지로 감탄하고 말았다.
“응.”
“올라갈까요?”
“여길 올라가자고?”
“예.”
레베카를 이끌고 물 위를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점점 위로 나아갈수록 레베카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불안한 건가?
“괜찮아요.”
껴안듯이 레베카를 붙잡자 그제야 손의 힘이 조금 약해진다. 어느 정도 안심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물로 수놓은 길이 점점 좁아져 간다. 동시에 아포디미아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가. 그렇게 어느 정도 다가갔을까.
“아…….”
어두운 공간에 별만이 사방을 수놓은 광경이 우리를 반겼다.
반짝이는 작은 별빛을 걸어 다니는 것 같아, 마치 은하수 속을 헤엄치는 것 같다.
우리의 길 역할을 해주었던 물 역시 별빛을 머금어 찬란하게 빛난다. 어두우나, 별빛만이 만연했기에 무섭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굉장……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직접 우주를 걸어 다니게 될 줄이야. 별들이 선명해서 너무나도 아름다워.
태양의 존재를 가리고 있는 아포디미아 덕분에 별빛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아름답게 내 시야에 다가온다.
그렇게 은하수를 거닐고 걸어, 아포디미아로 향하는 두 번째 장막을 걷어내자 별빛이 아포디미아에서부터 도시의 불빛이 보임과 동시에 별빛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이 장막이야말로 지상으로부터 아포디미아에 도시가 있음을 숨기는 가림막임과 동시에 아포디미아를 방어하는 결계라 할 수 있다.
“도시가 있, 어? 어떻게? 아포디미아에 어떻게 도시가 있는 거야? 올라간다는 게 여길 말하는 거였어?”
“하나씩 말하세요. 어차피 전부 설명해드릴 생각이었으니까.”
애초에 그 용년 앞에서 전력을 발휘한 시점에서 레베카에게는 전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었다.
“우선 다이나토스부터 설명을 해드려야겠네요.”
다이나토스.
우리들의 문자로 최강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우리 종족의 명칭이기도 하다.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이 종족 명칭은 다른 종족이 붙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붙였다고 한다.
어찌 그리 오만할 수 있을까. 최강이라는 뜻은 일개 개인의 이름에 붙여도 오만하다는 느낌이 들 것인데 종족명을 그리 칭하다니.
그러나 아르켈의 기억을 떠올려볼수록 그것이 오만도 자만도 아닌 당연하다 납득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 지상은 오로지 하나의 제국만이 있었습니다. 그 제국을 다스리던 종족이 ‘다이나토스’였죠.”
지상에 건립된 단 하나의 제국. 모든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종족. 그것이 바로 다이나토스였다.
“그런데 우리 종족은 개체 수가 매우 적어요.”
제국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개체 수가 네 자릿수를 넘어가는 일이 없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께서는 우리와 다른 종족들 사이에 중간 관리를 맡길 종족을 하나 두셨습니다.”
정확한 종족 명은 ‘디오이키시’라고 하지만, 너무 귀찮으니까 우리도 그냥 아래 아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이나토스와 아래 아이들은 제국을 통치해나갔어요. 인간이고, 엘프고, 오크고, 드워프고 심지어 용마저도 우리의 지배를 받았지요.”
모든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데 어찌 최강을 자처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명칭을 다이나토스라고 정한 것은 결코 오만도, 자만도 아닌 당연한 것이었다.
“그 제국이 멸망한 것도 역시나 아주아주 오랜 옛날.”
이야기해나갈수록, 아르켈의 기억 속에 새겨진 끔찍한 분노가 느껴진다.
“모든 종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우리 선조와 아래 아이들은 모두 도망쳤지.”
지배받던 모든 종족이 감히 반란을 일으켰다. 다이나토스의 근본 그 자체를 부수고, 유린했다. 그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끔찍이 죽어 나갔다.
나약한 노예들 주제에, 나약한 생명체들 주제에 감히 우리를 멸하려고 들다니.
그것은 필시 죄였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멸하려고 드는 것은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다.
죄를 갚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온 만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친 곳이 바로 여기야.”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렇게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아포디미아, 우리의 두 번째 고향.”
이 척박한 땅덩이에서 울분을 씹고 삼키며 견뎌왔다.
“그리고 나는.”
아포디미아의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레베카의 손에서 내 손을 뗀 후 도도히 군림한다.
“아포디미아의 왕인 아르켈 소토르프다.”
도시의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등 뒤로는 수많은 아래 아이가 왕의 귀환을 축복하며 일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