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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30화 (30/99)

〈 30화 〉 11. 개판이네

* * *

원탁의 가장 상석에 놓인 거대한 옥좌에 몸을 뉘이듯 앉았다. 딱딱한 옥좌의 감촉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아르켈은 과거 여기에 앉아 그 누구도 옆에 두지 않은 채 홀로 외로이 군림하였었다.

“왜 하필 레베카였을까.”

레베카를 만나기 전까지 아르켈은 여타 다이나토스와 다르지 않았다. 지상의 존재를 증오했고, 그들을 멸하려고 들었다.

레베카가 아니었다면 이미 지상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불타는 대지 위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재뿐이겠지.

사실 가슴이 아니었을까?

레베카의 그 어마어마한 거유에 반한 거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첫눈에 반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좀 더 신빙성 있지 않나?

“폐하.”

“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하나둘 내 동포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이나토스의 가장 큰 특징은 십자가 형태의 동공이다.

나와 안드로는 평소에는 힘을 봉인하고 있기에 저런 동공이 아니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에 십자 형태의 동공을 자연스레 내보이고 있다.

그 이외에 종족적인 특징이 있다면 역시 저거, 등 뒤의 넘실거리는 아우라겠지.

천족이나 마족과는 확연히 존재 자체가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듯, 넘실거리는 아우라에 잠시 눈을 뺏기고 말았다.

“폐하?”

아, 너무 상념에 빠져있었구나. 고개를 저어 상념을 지운다.

“왔으면 앉아.”

내 허락이 떨어지자 모두가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왼쪽부터 클레안드로, 메르넬라……. 어? 뭐야.

“메르넬라는?”

“목욕 중입니다.”

아, 그래. 내가 온다고 목욕을 하러 가겠다고 하더니 그게 진짜였구나.

“아직도?”

그게 진짜였다고 하더라도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 통화한 지 벌써 두 시간은 더 지나지 않았어?

“후훗. 사랑하는 여자의 목욕은 시간이 오래 필요한 법이어요, 폐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해준 아밀리아 데카토스. 클레안드로의 부인으로 황금으로 짜인 실과 같은 금발과 부드러운 인상이 어울리는 여자다.

그나저나 사랑이라.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에 여러 형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닌 집착인 거 같은데.

“그럼 메르넬라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다 모이면 이야기할게.”

“예.”

“알겠어요.”

좋아, 그럼 이제 멍 좀 때리고 있을까. 아, 그 전에.

“부르누카.”

부르누카 에브도모스, 약간 소심해 보이는 갈색 머리의 남성은 우리 11명의 다이나토스 중 무언가를 만듦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이다.

아포디미아의 이동 수단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무기까지 전부 부르누카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예! 부르누카! 왜 부르셨습니까!”

“목소리 좀 줄여. 편하게 해, 편하게.”

“시정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목소리 좀 줄이라니까.

지금 부르누카의 모습이 대대장한테 불린 이병 같아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만든 작품 중에 장식품 같은 거 남아있어?”

아무리 편하게 하라고 해도, 절대로 편하게 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부른 이유를 말했다.

“무기가 아닌, 장식품 말씀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아포디미아에 온 김에 던전 보상용으로 간단하게 장식품 몇 개를 챙겨갈 생각이다. 이야기가 끝나면 무기도 몇 가지 챙겨가야지.

왜 그러면 무기 이야기도 안 꺼냈느냐고?

“침공이 머지않다고 생각해서 최근에는 무기만 만들었지 말입니다. 장식품은 예전에 만든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무기도 몇 자루 달라는 말을 안 했던 거다.

“그거라도 괜찮으니까 나중에 챙겨줘.”

“알겠습니다!”

“폐하. 혹시 침공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건방진 목소리에 눈을 찌푸리고 목 중간까지 오는 하얀색 머리, 검은색 눈동자 초콜릿보다는 약간 연한 갈색 피부를 가진 여성을 바라본다.

셀피나 오그도오스.

부르누카 다음인 여덟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자,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다이나토스 중 가장 말을 안 듣는 여자다.

셀피나의 지상을 향한 증오는 너무나 짙다. 그 짙은 증오 때문에 충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내 말을 잘 따르지도 않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 조용히 하라고 해야 하나?

“너 진짜 미쳤어?”

“폐하께서 발언을 허하지 않았노라, 셀피나.”

셀피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순간 에이글과 시릴리오가 셀피나를 노려보며 그리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애들이 침공과 관련된 일에서 정신이 나가서 그렇지, 그런 점만 아니면 나한테 과잉충성했었…….

“셀피나.”

누군가가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저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누가 너에게 폐하의 생각을 함부로 재단하라고 허락했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드로였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셀피나를 노려보는 그 모습에는 짙은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아마 내가 조금만 불쾌하다는 듯이 굴었으면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베지 않았을까?

앞서 에이글과 시릴리오가 말했을 때는 여유로워 보였던 셀피나도 안드로의 기세가 무서운지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져 가는 것 같은데 적당히 말려야겠네.

“다들 그만. 메르넬라가 오면 그 부분도 이야기할 거야. 안드로살기 거둬. 셀피나가 무서워하잖아.”

“예. 폐하.”

“칫. 무서워한 거 아닌데.”

아니 너 무서워했었거든? 조금 있으면 식은땀만 흘리는 수준이 아니라, 무서워서 몸도 떨었을 애가 뭘 그렇게 자존심이 있다는 듯이 굴어.

“첫 번째 경고다, 셀피나. 두 번은 없다.”

아니 안드로 너도. 그만하라고 했으면 그만해야지 뭘 한 마디를 더해.

“하아.”

메르넬라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죄송하옵니다! 목욕 때문에 늦었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메르넬라는 양반은 되지 못할 것 같다.

슬며시 메르넬라를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곧게 뻗어 엉덩이까지 올 정도로 긴 분홍색 머릿결은 아직 덜 말라 물기를 머금고 있어, 직전까지 목욕하다가 급히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분홍빛으로 빛나는 십자 형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신기하게도 그 눈빛에서는 집착의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가장 놀란 것은 역시.

“……크다.”

전체적으로 키도 보통 인간 여자들보다는 큰 편이다. 분명 척 봐도 173cm는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켈의 몸에 빙의하기 전, 인간일 적의 내 키와 똑같은 키다.

그러나 내가 크다고 말한 것은 그녀의 키 때문이 아니었다.

뭐냐, 저 가슴은. 레베카가 어마어마한 거유이긴 하지만, 메르넬라는 그 수준이 아니었다.

한쪽 가슴이 머리보다 2배는 커……. 저게 실존할 수 있는 가슴이냐.

아까 생각했던 말 취소다. 아르켈이 레베카의 거유에 반하기는 무슨. 바로 옆에 이런 미친 폭유가 있는데.

“예?”

보자마자 크다는 말을 들었으니 당황할 만도 하지. 지구였으면 당장 성추행으로 잡혀들어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 잠깐 혼잣말이었어. 앉아.”

“예, 폐하.”

메르넬라는 조신히 걸어 안드로의 옆자리에 앉았다. 와, 저렇게 가슴이 크면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어도 가슴이 출렁이는구나.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니까 진정하자, 진정해.

저 어마어마한 폭유를 봤더니 너무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다들 오랜만이야. 정확히 얼마 만에 얼굴을 봤는지는 메르넬라가 알고 있을 테니 궁금하면 물어봐.”

“정확히 오십이 샤, 열 밀, 십일 유가, 칠 마누, 이십 칼파, 삼십이 씰이네요.”

아니 누가 안 물어봤잖아. 메르넬라의 대답에 주변의 몇몇 이들이 하하호호 웃었다. 니들은 이게 웃을 일로 보이냐.

“역시 폐하를 향한 메르넬라의 ‘충성심’은 대단하네요.”

“제 충성심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아밀리아.”

충성심이라는 발음을 강조하지 마.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충성심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알 정도라고.

“크흠.”

아무래도 이대로는 이야기하기가 힘드니까 일부러 헛기침해서 이쪽으로 시선을 모아보……

“폐하께서 헛기침을?!”

“지상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신 것 아닙니까!?”

“메르넬라! 빨리 폐하의 몸을 진찰해!”

아……. 존나 개판이네. 진짜 니들하고 대화 좀 하려고 하면 너무 머리가 아파.

“다들 그만.”

그래 잘한다 안드로. 니가 그래도 유일하게 그나마 제정신인 것 같으니까.

“폐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데 이 무슨 소란이냐! 메르넬라, 폐하를 모셔라.”

안드로, 너마저……. 이건 과잉 충성이 아니라, 과잉 반응이라고 이 미친놈들아!

“그만. 내 몸은 문제없어.”

“폐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야기 끝나면 메르넬라한테 진찰받을게. 그럼 됐지?”

내 말에 안드로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하아, 애들하고는 대화하려고 할 때마다 1분씩 늙어가는 느낌이다.

“오늘 아포디미아에 잠깐 돌아온 건, 지금까지의 정찰 결과를 말하기 위해서야.”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 안 사실은 단 하나. 내 앞에 있는 다이나토스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미친놈들이 과연 내 말을 들어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아르켈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아포디미아와의 소통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결론만 말하자면 지금으로선 침공은 불가능해.”

폭탄을 떨어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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