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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31화 (31/99)

〈 31화 〉 11. 개판이네(2)

* * *

“그건 무슨 뜻입니까.”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한다. 차갑게 노려보는 그 눈에 담긴 실망감이 내 심장을 옥죄인다. 아아,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오겠거니 싶었다.

저들이 아무리 내게 과잉 충성을 보인다고 해도, 지상의 생명체를 향한 증오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은 선조의 뜻을 저버리겠다는 이야기이신지?”

날카로운 말이 검이 되어 나를 찌르려는 듯이 날아온다.

그래, 선조 말이지. 선조라.

본디 다이나토스는 지상에 유일 제국을 세웠던 종족이다. 그런 우리가 아포디미아까지 도망쳐, 이런 도시를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한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영겁과도 같은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를 보살펴준 선조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죽어가면서 말했던 두 가지 부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수였다.

우리의 울분을 풀어달라.

감히 우리를 배반한 지상의 생명체를 단죄해달라.

선조의 유언은 우리의 머릿속 깊은 곳에 남아, 그리하여 선조는 우리 기억 속의 망령이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 옆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그렇기에 나는 저들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다. 아르켈 역시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저들의 실망에 공감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옳지 않다. 아르켈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강압적으로 다른 종족을 지배하던 선조들은 과연 잘못이 없는가?

그 강압을 이기지 못해 반란을 일으킨 다른 종족들은 과연 죄가 있는 걸까.

그리고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지상을 침공하기 시작하면.”

당장 침공을 계시한다고 하면 지상을 멸망시킬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다음은?

“양패구상일 거야. 아래 아이들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누가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어.”

“그건 아니지 않나요? 지상 놈들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확실히 지상의 그 어떤 종족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용이라고 하더라도 걸리적거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나타나면 우선 천족이 나설 거야. 인간을 지키려고 하는 천족 놈들이 끼어들지 않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놈은 없겠지?”

천족은 인족을 비호한다. 주인공 역시 천족에게 비호를 받는 존재다. 그렇기에 지상에 침공을 감행하는 순간, 먼저 천족이 우리를 막아설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족도 인간을 지키려고 하고 있어.”

“마족들이요?”

메르넬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마왕 바르바라는 인간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다.

때문에, 축제 중에도 인간계의 정사 자체를 간섭하는 행동은 금하고 있다.

아마도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나야 뭐, 살아남겠지.”

이 말은 아르켈의 기억에 의해 나온 말이었다. 아르켈은 자신의 힘을 무척이나 신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뭐, 사실이기도 하다. 당장 아르켈이 강대할 뿐만이 아니라 아르켈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다고 하더라도 몸을 바칠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당장 아래 아이들이 그리할 것이며, 눈앞의 10명 역시도 나를 위해 제 목숨은 괘념치 않을 자들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 문제였다.

“너희 모두, 심지어 안드로조차도 죽을 수 있어.”

왕 다음가는 실력자 역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아래 아이들은 분명 전부 죽겠지. 우리가 영겁의 세월 동안 일구어낸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너희를 잃으면서까지 지상을 손에 넣고 싶지 않아.”

……지금 내가 한 말은 본디 아르켈이 외로이 군림했던 이유다. 아르켈은 모든 것이 불타 잿더미가 된 땅의 위에 홀로 선 왕이 될 것까지도 염두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옆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홀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지상이 잿더미가 되는 것도 원치 않고, 그 위에 홀로 외로이 군림하는 왕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균형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지상에 침공하고 싶지 않은 내 말은 진심이다.

그리고 지금 지상에 침공하면 우리도 전멸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사실과 사실을 맞물려 말했으니, 내 말에 거짓은 없다.

“그럼 저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잠시 침묵을 가졌다. 우리는 영겁의 세월 동안 기다려왔다. 그런데 이제 와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한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해지지 않은 기다림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최소한의 시간을 벌어둬야 이놈들이 침공할까요? 소리를 하지 않지.

“마계에서 지금 한창 축제가 벌어지는 중이다.”

어떻게 시간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나도 모르게 그리 말하고 말았다.

“이 축제가 끝나면 마족의 숫자가 꽤 줄어들 테니, 마족 쪽에서는 함부로 나설 수 없게 될 거다.”

만약 게임의 스토리대로 주인공이 활약한다면 던전을 운영하는 모든 마족은 죽음을 맞이 한다.

그 정도 숫자의 마족이 죽었으면 당연히 바르바라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나서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어.

“천계 쪽은 고민을 좀 해봐야겠지만, 당장은 축제가 끝나기를 기다려라.”

이 정도 타협안은 어때?

“확실히 마족과 천족을 모두 상대하는 건 불필요한 짓입니다.”

내 말에 조금 설득이 됐는지, 안드로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

그래 우리의 증오는 오로지 지상의 생명체에 향할 뿐. 그 이외의 존재를 상대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알아줬구나, 안드로!

“하지만 폐하. 저희는, 저희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징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넌 초 좀 치지마, 셀피나!

다들 내 말에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니가 초를 치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애들이 생겼잖아!

“너희가 지상에 얼마나 갖은 증오심을 가졌는지는 알고 있어.”

그들을 이해한다는 마냥 말을 꺼내서 다시금 모두의 시선을 내게로 집중시킨다.

“나 역시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같으니까.”

난 증오심이 조금도 없기는 하다만. 나와 다르게 아르켈은 여전히 지상을 증오하고 있다.

그 증오를 오로지 레베카 때문에 참고 있었다가, 최근 들어서 선조들도 잘못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된 거지.

“하지만 그 증오가 너희보다 중요하지는 않아.”

영겁을 같이 보내왔다. 힘든 시기를 함께 해왔다.

“수많은 아래 아이들이 죽을 거야. 너희도 내 곁을 떠나겠지. 결국, 나 홀로 남을 거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해?”

선조의 유언은 중요해, 그렇기에 우리는 복수에 목말라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유언은 하나가 더 있다.

“우리의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동귀어진하는 것으로 만족하냐고 묻는 거다.”

다시금 생각해보건대, 선조가 유언으로 남긴 부탁은 두 가지였다.

“다들 복수에 눈이 멀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나 본데. 선조의 두 번째 유언이 뭐였지?

“……저 풍요로운 지상에 다시금 우리의 제국을 세워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맞아 셀피나. 복수를 행한 후 다시금 지상에 우리의 제국을 세워달라는 것까지가 선조님의 유언이었어.

“그런데 지금 침공을 계시하겠다고? 그렇다면 나는 너희의 왕으로서 명하지. 지금 당장 침공은 불허한다.”

침묵이 내리 앉았다. 그렇게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갈 곳이 없어 눈동자를 헤메이고 있을 때였다.

“……제국이야 폐하 혼자 재건하시면 되죠. 저희가 거기까지 생각해야 하나요? 그런 거 고민하라고 왕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이 년이?

“지금 내 명령이 꼬우면 나랑 싸워서 이기고 니가 왕 하던가. 셀피나.”

너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어. 확 그냥 지하 감옥에 유폐시켜버리는 수가 있어. 조심해.

“우리 중 세 명이 덤벼도 이기실 수 있는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여요?”

뭐, 아르켈의 힘이 대충 그 정도라고 알고 있기는 하지.

“그래요, 좋아요. 제가 왕 하고 싶으니까 공평하게 메르넬라랑, 에이글, 시릴리오를 제 편으로 붙여주세요. 그럼 싸우죠. 안드로는 폐하랑 비슷하니까 제가 친절히 제외해드렸어요.”

그게 도대체 어디가 공평한 싸움인 거야. 게다가 그렇게 싸워봤자 또 너희 네 명이 왕의 자리를 두고 싸워야 하잖아.

네 명이서 싸우면 셀피나 니가 이길 가능성이 너무 작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고민하던 중이었다.

“셀피나.”

다시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아.”

어느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난 안드로가 살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셀피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쟨 또 왜 저래.

안드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건 눈치챘지만,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설마 이 자리에서 뭘 하려고 하겠어. 그냥 경고나 주려고 하는 거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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