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11. 개판이네(3)
* * *
“분명 이미 한 번 경고했었다.”
그게 아니었네?
아무것도 없었던 안드로의 손에 두 자루의 창이 생겨나는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창 참 멋지네. 중세 판타지다운 화려한 창이 아니라, 스팀펑크 느낌이 가미된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 내가 지금 창을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런데 감히 폐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건방진 태도는 무엇이냐. 내 당장 네년의 그 불충을 나불거리는 입을 베어주마.”
아, 잠깐! 잠깐! 타임!
“자, 잠깐 여보. 셀피나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잘한다, 아밀리아! 잠깐 말리고 있어!
“해보자는 거지!”
아밀리아가 안드로를 가로막고 있는 사이, 셀피나 역시 안드로에게 대항하기 위해 허공에서 사슬을 꺼냈다.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셀피나는 왜 불난 집에서 대피하기는커녕 기름을 부으려고 그래!
아, 진짜 개판이네. 사실 이것들 나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왕의 어전에서 무기를 꺼내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두 분 다 뭐하시는 거예요! 폐하의 어전에서 감히 무기를 꺼내다니!”
그나마 메르넬라의 말이 조금 위로가 되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안드로는 아밀리아를 밀치려고 들고 있었다.
아르켈의 기억 덕분에 안드로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됐다. 셀피나가 내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오히려 안드로가 지금까지 많이 참은 거다.
메르넬라도 말만 그렇게 하면서 내 눈치를 볼 뿐, 딱히 안드로를 말리지는 않고 있다.
아말리아를 제외한 나머지가 안드로의 행동을 말리지 않는 것도 반쯤은 셀피나가 지금까지 내게 보인 태도가 너무 건방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뭐, 감히 안드로를 막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겠지만.
“비켜라, 아밀리아.”
안드로의 눈동자가 십자 형태로 변해간다. 셀리나의 등 뒤의 아우라가 거칠게 요동치는 것을 확인했다.
“하아.”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조용.”
온갖 짜증과 분노를 담아 그리 말했다.
* * *
금색의 십자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을 아는가?
절대적인 힘을 느끼고, 그의 앞에서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그 기분을 알 수 있나?
적어도 안드로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오만한 왕께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탈력감을 느껴 힘이 빠졌기에.
“앉아라, 안드로레.”
“하오나, 폐하.”
“두 번은 없다.”
안드로는 제 입술을 깨물며 셀피나를 노려보았다. 셀피나 역시 안드로와 마찬가지 상태였다.
오랫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왕의 힘을 다시금 깨닫고는 제 무기조차 떨어트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개 같은 년.’
왕의 힘 앞에서 언제나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구는 주제에 감히 그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다시 한 번 걸리면 그때는 정말 저 목을 베어버리리라 맹세한 안드로는 아르켈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안드로는 자신의 왕이자, 제 친우인 아르켈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봤던 왕은 너무 부드러워 보였기에, 다시금 본 친우는 너무나도 물렁해 보였기에 지상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보아라, 저 절대적인 힘을.
등 뒤에 아우라가 보이지 않으니, 그 힘을 전부 보이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어찌 이리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가.
“불만이 있으면 힘으로 말해, 셀피나. 그게 우리잖아. 뭐 이렇고 저렇고 말이 많아. 알았어?”
“……네, 폐하. 죄송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제 잘못을 인정하는 셀피나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안드로는 제 애장을 집어넣었다.
“미안하다, 아밀리아.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어.”
“아니요. 저도 뭐, 셀피나의 저런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여보가 폐하 앞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둘 수는 없잖아요.”
실수?
아밀리아의 말에 안드로는 이성을 잃어 폐하의 어전 앞에서 무장을 든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죄, 죄송합니다. 폐하!”
이제야 이성이 좀 돌아왔나 보네.
“됐어. 니가 왜 그런 줄 아니까. 그래도 둘 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렇게 경고를 남기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들 왜 이렇게 쫄아 있는 것 같지? 힘 좀 내보였다고 저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아, 폐하…….”
메르넬라는 예외구나. 왜 저렇게 존경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표정이 위험해. 왠지 어딘가에 도달한 듯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힘을 좀 내보인 덕분에 생각난 게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힘을 좀 내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자잘하게 통신 좀 걸지 마. 당장은 침공 못 하니까.”
상황이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여기까지 온 가장 큰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정도였을까. 생각해보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네.
“하오나! 폐하!”
메르넬라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를 쳤다.
“폐, 폐하와의 통신까지 못 하면 저는!”
“정기 보고는 계속할 거니까 상관없지 않아?”
딱히 그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는데. 나도 아포디미아의 상황을 계속 예의주시하기는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하오나 폐하!”
아니, 말을 해. 왜 먹은 벙어리처럼 끙끙거리고 있는 거야.
“그, 혹시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셨을 수도 있잖아요. 혹여 폐하의 옥채가 상하실 수도 있으니, 제발 그것만은…….”
갑자기 생각이 난 게 있다.
“잠깐 질문이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폐하.”
“원래 내가 힘을 조금 보인다고 통신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지?”
내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침공 신호는 내가 전력을 드러내는 거였다.
자이로니아 때야 내가 진심으로 전력을 드러내려다가 그만둔 것이니 연락을 할 법도 했었다지만, 적어도 처음 고룡을 잡았을 때는 연락이 올 게 아니었다.
“그런데 메르넬라가 독단으로 한 거였지?”
“정확하세요, 폐하.”
아밀리아가 수상한 미소와 함께 내 말에 대답했다. 뭔데, 그 미소는.
“그 이유를 모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아, 너 지금 재밌구나? 전전긍긍해 하는 메르넬라와 저 애정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나 사이가 재밌어. 그렇지?
거참 아줌마. 아침 드라마 보는 것마냥 재밌어하시네? 응? 아주 그냥 왕님이 니가 애독하는 로맨스소설 주인공으로 보여?
안드로 너도 그래. 니 부인이 지금 하는 말은 건방져 보이지 않냐?
아, 글렀네. 지 부인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어. 젠장.
“그럼 앞으로는 정기 통신 때 외에는 연락하지 않는 쪽으로…….”
“하지만 폐하.”
뭐야, 니 부인이나 그냥 쳐다보고 있을 것이지 또 왜 그래 안드로.
“다른 이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이 아니라 메르넬라의 말이겠지, 이 자식아.
“혹여 폐하께서 봉변을 당하실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지상의 간악한 놈들이 폐하께 무슨 술수를 쓸지 또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한테? 그게 통하기는 하고? 아, 잠깐만. 너 지금 니 부인 편 들어주는 거지? 맞지?
“그러니 저도 폐하가 힘을 내보이실 때마다 연락하자는 의견엔 찬성입니다.”
이 자식, 아밀리아한테 눈 찡긋하는 거 다 봤어. 그럴 거면 안 보이게 좀 하던가!
“저도 찬성이에요.”
아밀리아가 급히 안드로의 말에 찬성했다. 아 저 부부, 정말로 얄밉다.
“저, 저도요!”
메르넬라는 급히 찬성의 의견에 손을 보탰고.
“그래도 폐하를 너무 귀찮게 하기는 그러니, 30% 이상 내보이실 때만 연락하는 게 어때?”
이것들이 지금 절충안을 말하는 거 봐라?
“아니면 그냥 힘을 보이시면 곧바로 침공의 계시로 알아듣는…….”
“내가 졌다. 그냥 이대로 현상 유지 하자.”
너희가 진짜로 내게 충성하는지 의심이 드는데, 내 기우이기를 바란다. 진짜로.
“후우.”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당장 침공의 때가 아님은 모두가 알아준 것 같다. 셀피나는 내 의견에 찬동하지 않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앞으로 힘을 내보여도, 지금이 침공의 때냐고 하면서 지랄은 하지 않겠지……?
이건 장담할 수가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슬프다. 이게 다 이놈들이 워낙 미친놈들이라서 그래. 그래도 이해는 했을 테니까. 그래 앞으로 지랄은 안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통신이 오는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자, 그러면.
“부르누카.”
“예 폐하!”
“내가 가져갈 장식품 가져와 줄래? 가져오는 김에 무기랑 갑옷도 몇 개 가져오고.”
이해했다고 믿고, 던전 보상으로 쓸 장비 몇 개도 챙겨오라고 하는 게 맞겠지. 어차피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 생각도 없으니까.
“무기와 갑옷을요?”
“전쟁 준비입니까?”
“역시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침공 준비를 하시는군요, 폐하.”
아니라고! 이 미친놈들아!
“아래 아이들에게도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아, 머리 아파.
너무 짜증 나서 머리가 아프다. 아까까지 내 설명은 도대체 어디로 들은 거냐? 일단 귓구멍으로 듣지 않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진짜 개판이다, 개판이야.
“그냥 필요해서 몇 개 가져오라고 하는 거니까 호들갑 떨지 마. 부르누카 빼고나머지는 빨리 일하러 가.”
너희가 다 나가면 이 개판도 끝나겠지?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니 내 눈앞에서 사라져.
제발 부탁이니,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나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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