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15. 공작 부인
* * *
내가 향한 곳은 바르크 백작 영지에 있는 호케트 상회였다. 곧바로 릴리를 찾아가고는 용건을 말했다.
“아르켈님께서 만드시는 마을에 호케트 상회 지점을 내고 싶으시다고요?”
“네.”
호케트 상회가 마을에 지점을 낸다면 모험가에게 필요한 포션과 해독제는 물론이오, 각종 생활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더군다나 모험가들이 던전에서 얻은 물건을 팔 곳도 생긴다.
호케트 상회가 들어오면, 여러모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셈이다.
“그건 좀…….”
정작 제의받은 쪽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지만.
사실 저럴 만도 하다.
호케트 상회가 어중이떠중이 상회도 아니고, 아라엘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상회인데 겨우 외딴 마을에 지점을 낸다니, 사실 말이 안 되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이쪽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비명 숲 안에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예!?”
던전 근처에 있는 도시가 누리는 경제적 호황은 실로 대단하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험가들이 그 도시로 몰리니 당연한 일이다.
던전이 출몰한 지 이제 겨우 몇 달이 됐을 뿐임에도 그렇다.
릴리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그리고 마을 부흥에 드워프 쪽과도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드워프와요?”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희 마을에서 드워프가 만든 장비를 구매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 깐깐한 드워프들이 자기가 만든 물건을 쉽게 팔아줄 리가…….”
“그 부분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기꺼이 팔아주겠다고 하더군요.”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당장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길 텐데 드워프가 만든 장비까지 살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겠어.
“상회 한정으로 1년간 드워프가 만든 장비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굳이 상회 한정이라고 말 한 건 마을에 온 모험가들은 직접 드워프와 거래를 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제시한 권리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마어마하게 크지.
아라엘 왕국, 나아가 모든 인간 왕국에 드워프가 만든 무기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셈이니까.
이 정도로 큰 권리를 제시했다. 이야기는 이제 릴리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제 수준에서 이야기할 게 아니네요. 위쪽에 연락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역시.
릴리가 자리를 떠나자, 나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 이다음 벌어질 일을 생각했다.
그럼 누가 오려나?
호케트 상회는 공식적으론 아라엘 왕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 위를 가진, 호케트 공작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상을 보자면 공작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하고 실권은 공작의 부인이 쥐고 있다.
“역시 그 여자가 오려나.”
호케트 공작부인을 떠올린 순간 눈이 찌푸려진다.
호케트 공작부인은 대중들에겐 굉장히 정숙하고 기품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던전 자하드’의 게이머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공작부인이나 되는 여자가 직접 올 리가 없겠구나.
가면 내가 직접 가야지.
아. 귀찮은데.
“실례하겠습니다, 아르켈님.”
릴리가 돌아오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께서 직접 오시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
직접 오겠다고?
그 정도로 안달이 날 이야기긴 했지만, 공작부인이 직접 온다고?
이거 맞는 거야?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돼요. 전송 마법으로 곧바로 오신다고 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릴리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무래도 내가 눈을 찌푸린 것이 불쾌함을 느낀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다급한 반응을 보니, 그년이 어떻게든 나를 붙들고 있으라고 말했나 보다.
확실히 경쟁 상회에게 뺏기기 싫은 제안이기는 하지.
저렇게 다급한 모습이 저게 바로 중간관리직의 비애가 아닐까 싶다.
“기다리죠.”
애초에 그년 때문에라도 호케트 상회와 거래를 하려고 했었으니까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눈을 감고 공작부인을 기다리며 머릿속의 기억을 정리해보았다.
본디 호케트 상회는 이 정도로 큰 상회가 아니었다.
그저 공작이 부유한 자기 영지의 남아도는 물자를 팔기 위해 만든 상회다.
그렇게 만들어진 호케트 상회가 거대한 상회가 된 것은 모두 공작부인 덕분이었다.
설정상 공작부인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고 한다.
그런 본인의 능력과 몇 가지 방법으로 호케트 상회는 만들어진 지 고작 20년 만에 아라엘 왕국을 대표하는 상회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몇 가지 방법이라는 건 무엇일까.
“실례.”
문을 여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고풍스러운 백색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진 금발을 한껏 휘날리는 한 여성이 기사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당신이 아르켈인가요?”
벨라트릭스 디어 호케트.
호케트 공작의 부인이자, 현 국왕의 여동생.
“예 제가 아르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케트 공작부인.”
소파에서 일어나 공작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공작부인이 마치 아래 사람의 인사를 받은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 모습조차 게임에서 봤던 것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저 매력적인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저년은 꽃뱀이니까.
호케트 상회가 이리도 거대한 상회가 될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벨라트릭스는 상회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라면 제 몸을 쉽사리 팔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게임상에서 공작부인은 주인공에게 돈 냄새를 맡고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주인공이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그 이후부터 공작부인은 그것을 약점 잡아 자꾸만 귀찮은 퀘스트를 내준다.
그 모든 퀘스트는 그저 상회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서일 뿐이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년이다.
이런 년이 무슨 정숙하고 기품이 있다는 걸까.
“부인께 이 무례한 인사인가! 무릎을 꿇지 못할까!”
같이 들어온 기사 중 한 명이 내게 소리를 쳤다.
그 호통에 나도 모르게 비릿한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호케트 상회 아니, 공작부인과 거래를 하려고 한 것은 혹여 저년이 미래에 주인공의 발목을 잡을 것 같아서다.
어떻게 해야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몰라,
그러니 우선 주인공이 세계 멸망을 막게끔 도와야 한다.
그러니 저년의 주인공에게 있어 하등 쓸모가 없다.
존재 자체가 방해인 꽃뱀 년이다.
그래서 내가 굳이 이쪽이랑 거래를 해주겠다는데, 감히 그딴 식으로 말해?
그것도 공작부인 본인이 아니라, 고작 호위 중인 기사 놈이?
“꿇게 만들어보던가.”
살기를 한껏 머금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고작 그 한 마디만으로 이곳의 모든 좌중이 얼어붙었다.
가장 극적인 반응은 내게 호통을 쳤던 기사였다.
제가 기사라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호위 대상을 잊어버렸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었다.
“빈.”
벨라트릭스가 기사를 부르자 곧바로 살기를 풀었다.
“부, 부인…….”
“부끄러운 줄 아세요. 나를 두고 감히 뒷걸음질을 치다니.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나세요.”
기사는 무어라 항명을 하려고 하기에 다시 한 번 노려봐주자 겁을 먹고 곧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은 공작부인은 깔끔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제 기사가 실례를 저질렀어요.”
알면 됐어.
기사 중 한 명이 공작부인에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한다.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 무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내 귀에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반로환동까지 하신 마스터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었군요.”
무려 공작부인을 호위하는 기사다. 마스터 수준까지는 아니라지만, 이들 역시 굉장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
저 기사들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무슨 짓이 벌어질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내가 살기를 보인 걸 급발진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다 계획이 있었다.
“앉으시지요.”
우선 조금 전까지 날 아래 사람으로 보았던 벨라트릭스의 태도가 명백히 달라졌다.
나는 벨라트릭스가 주인공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려면 나와 벨라트릭스 사이의 관계에 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내 힘을 보인 것뿐이다.
“드워프가 만든 장비를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겠다고 들었어요.”
“예.”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하지만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제법 신뢰 관계가 쌓인 릴리와 다르게 나와 벨라트릭스는 오늘 처음 만났다.
그러니 저런 의심을 보낼 법도 하다.
앉자마자 곧바로 저리 말할 줄은 몰랐지만.
분명 내게서 돈 냄새를 맡았을 건데?
으음…….
아, 조금 전 살기를 보인 것이 벨라트릭스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자세히 보니 아주 조금 밖에 티가 나지 않지만, 화가 난 듯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게 보였다.
꽃뱀 년이 자존심은 더럽게 높아서는.
“직접 가서 보시죠.”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직접 보여주면 그만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