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16. 거래
* * *
“지, 직접요?”
왜 그렇게 당황해.
의심이 간다면서.
그럼 당연히 직접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
“부인께서 그 정도 시간은 없으세요, 아르켈님. 마을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2주는 필요하잖아요.”
아, 시간 문제. 확실히 시간은 중요하지.
도로가 깔려도 마차로 10일은 걸릴 텐데 아직 도로 공사에는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
“제가 바쁜 몸인지라…….”
뭐, 그건 당연히 마차로 이동했을 때의 이야기고.
“한 시간이면 됩니다.”
“네?!”
뭘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지 모르겠네.
진짜 한 시간이면 되는데.
“이 도시에 드워프가 와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해도 전 믿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 드워프랑 짜고 사기를 치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거 더럽게 말 많네.
미안한데, 그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어 이 아줌마야.
“자 거기 기사분들.”
“가,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답을 해주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그냥 무시가 답이다.
웃긴 건 공작부인이 화를 내고 있음에도 뒤에 있는 기사 중 누구도 내게 뭐라 못하고 있다는 거다.
아까 윽박 좀 질러준 덕분인가?
“부인과 동행할 기사 선착순으로 딱 한 명.”
그러자 기사 중에서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일 실력이 좋은 기사인가보다.
“따라오시죠.”
그대로 공작부인과 기사를 대동하고 도시의 관문에서 나갔다.
그 와중에 공작부인이 어딜 가느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읏샤.”
일단 몸을 좀 풀어두고.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바로 마을로 이동할 수 있지만, 이들은 내가 검사라고 알고 있다.
그 정도가 딱 좋아.
괜히 마법까지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이유가 없어.
“잠시 실례.”
“꺅!? 이 무례한 자가!”
무례한 자는 무슨 무례한 자야.
그냥 어깨에 태운 거뿐이잖아.
좀 무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빠르게 마을에 도착할 방법은 없다.
“……과연 그래서 한 시간이군요.”
벨라트릭스와 다르게 기사 쪽은 내 의도를 알아차린 알아차렸나보네.
“펠트론 그게 무슨 뜻이죠.”
“아르켈 공께서는 저희를 들고 달리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정답.”
반로환동까지 한 마스터 정도면 여기서 마을까지 한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 정도는 쌉가능이지.
“꽉 잡으시죠.”
벨라트릭스가 땍땍거리긴 해도 일단 여자니까, 너무 빠르게 달리면 버티지 못할 거다.
그래서 풍압에 버틸 수 있게끔 보호 마법을 걸은 후 달리기 시작했다.
“와우.”
순식간에 바르크 백작 영지가 멀어져간다.
벨라트릭스는 그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펠트론. 마스터는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야?”
“그럴 리가요, 부인.”
일반적인 마스터는 불가능하다.
던전 자하드 세계에서 마스터의 경지라는 것은 새로운 지평선이 열릴 뿐이다.
그 지평선을 얼마나 나아갔느냐에 따라 강함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사람이 특별한 거야?”
“그렇습니다. 반로환동까지 하신 분이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지? 마치, 새가 된 것 같아.”
실제로 거의 날듯이 달리고 있기는 하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서, 한 시간 정도 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시간 약간 안 걸린 것 같기도 하고.
“후우.”
“저희 애송이가 실례를 저지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중년 기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 갑자기 왜 이래, 라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이 정도 거리를 이 정도 시간 만에 주파했으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는 경탄할 수밖에 없었겠지.
내 실력을 가늠조차 하지 못할 거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내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괜찮아. 어린놈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그냥 피식 웃어버리며 사과를 받아줬다.
날 무서워하고 있는데 괜히 겁박을 줄 이유가 없다.
“여기가 제가 만들고 있는 마을입니다, 부인.”
“조잡한 나무벽이네요.”
감상평이 겨우 그거냐? 아, 그냥 한 대 쥐어 박아버리고 싶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벨라트릭스가 주인공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벨라트릭스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
“일단 들어가 보시죠.”
나무벽을 넘어 마을 안으로 들어온 순간, 벨라트릭스가 눈을 깜빡였다.
“모양새가 생각보다 그럴듯하네요?”
이제야 좀 긍정적인 말이 나오네.
“건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드워프들이 도와줬으니까요.”
“돌아오셨군요, 아르켈님! 어, 그 인간 여자는 누굽니까?”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드워프들이 딱 왔네.
“인사드려. 너희가 만든 걸 판매하실 분 벨라트릭스 디어 호케트 공작부인이셔.”
“반갑습니다, 공작부인.”
땅딸막한 키로 예의를 차리며 인사하기에 웃길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생각보다 그럴듯하네.
“이젠 좀 믿으시겠습니까?”
이 정도 마을을 건설할 정도로 자금을 투입했다.
더군다나 드워프 10명 정도가 방금 노동을 끝냈다는 듯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살아있는 증명이나 다름이 없어.
“……예. 사기라고 해도 이 정도로 정교하면 당해줄 수밖에 없네요.”
마을을 둘러본 벨라트릭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우아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사과는 빠르네.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저희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저쪽으로 가시죠. 계속 수고해, 나는 부인과 이야기 좀 할게.”
“그러십시오.”
벨라트릭스 그리고 펠타론과 함께 완공 직전인 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펠타론, 50보 밖까지 물러나 있으세요.”
“예, 부인.”
정확히는 나와 공작부인만 여관 건물에 들어갔고, 펠타론이라 불리는 기사는 여관 건물에서 50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호위가 저래도 되나 싶기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저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공작부인을 해코지하는 건 일도 아닌 걸 저 사람도 알 거다.
그리고 펠타론이 끝끝내 물러서지 않으려고 했어도 벨라트릭스가 물러나라고 했을 거다.
지금부터 베아트릭스가 하려는 이야기는 떳떳하지 못한 게 숨겨져 있으니까.
“일 년 독점의 대가는 뭐죠.”
여관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벨라트릭스는 본론을 꺼냈다.
“호오.”
생각보다는 눈치가 빠르네.
바로 계약 조건에 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이런 좋은 조건을 다른 상단을 부르지도 않고, 저희 쪽 접촉한 것을 보니 분명 바라시는 게 있으시겠죠. 국왕과의 접선? 아니면 귀족 자리? 그것도 아니면.”
요염한 표정 짓지 마, 이 꽃뱀 년아.
“나?”
지랄하고 있네.
줘도 안 먹는다. 먹었다가 무슨 탈이 날 줄 알고 먹어.
이런 방법으로 호케트 상회가 덩치를 불린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당하니 어질어질하네.
댁보다 예쁘고 몸매 좋고 나 좋다는 여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내가 굳이 왜?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독점 계약이고 뭐고 없습니다.”
“쯧.”
쯧은 무슨 쯧이야.
“조건은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나요? 일단 들어나 보죠.”
“첫째로 입점과 동시에 마을을 지원해줘야 합니다. 건물을 짓는 물자, 노동력, 생필품 등등 전부요.”
“마을이 커지면 우리 쪽도 이득이 있겠네요. 좋아요. 첫 번째 조건은 수락.”
생각보다 쿨하네.
하긴 드워프 장비를 대륙에 팔 수 있으면 그 정도 지원이 대수랴.
“두 번째는 비명 숲 근처에 던전이 있다고, 그리고 비명 숲 근처에 거점으로 쓰기 좋은 마을이 생겼다는 소문을 퍼트려주시죠.”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지만,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쉽게 가는 법이다.
이미 천릿길의 한 걸음으로써 마을을 만들었고, 던전도 모험가를 맞이할 준비를 갖췄어.
이제는 소문을 퍼트려 모험가를 모을 때다.
“모험가를 끌어들일 생각이시군요. 그것도 좋아요. 이 마을에 돈이 돌고 돌면 저희가 낼 지점도 이득이니까요.”
“세 번째는 나중에 제 부탁 하나를 무조건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 부탁이 뭔데요?”
당연히 네년이 주인공한테 추파를 던지려고 할 때 막으려고 한다.
괜히 주인공이 귀찮고 더러운 일을 한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잖아.
“세 번째 조건은 너무 모호하지 않나요? 내 오라버니를 암살해달라고 부탁하면 난 어떻게 해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내가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하자.
들어줄 수는 있고?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지만, 국왕을 암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할 수 있다고 해도 뒷감당도 못하고.
국왕 시해가 무슨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농담이었어요.”
내가 짜디짠 시선으로 그저 바라만 보자 벨라트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았지만, 농담이라니까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