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19. 사제 아리아
* * *
[그리워요, 아르켈님.]
“나도 그래.”
오랜만에 메르넬라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다.
이걸로 몇 번째 정기 통신이더라?
메르넬라한테도 얼굴 한 번 비춰야 하는데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던전은 매일 모험가들이 찾아오고 있다.
덕분에 욕망을 빠르게 수급해서 던전 규모를 넓히는 중이다.
마을 역시 모험가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호케트 상회 쪽에서 이동의 용의를 위해 워프 게이트를 만드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말할 정도다.
그 외에도 마을에 신전도 건설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기는 한데, 이런 촌구석에 사제가 오려고 할까 고민이다.
“나중에 꼭 얼굴 비칠게, 메르넬라.”
[네, 아르켈님. 그럼 오늘 정기 통신은 이걸로 끝이군요.]
“그래. 수고해.”
정기 통신을 마친 후,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메르넬라는 나와 이어진 후 굉장히 여유로워졌다.
침공이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않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아르켈!”
딱 통신이 끝나니까 찾아오는 거 봐. 타이밍 한 번 끝내주네.
그런데 왜 그렇게 난리이십니까, 레베카님.
“사제가 왔어!”
“왜 그렇게 호들갑이신가요.”
고작 사제가 던전에 왔다고 왜 저렇게 호들갑일까.
“분명 던전을 정찰하러 왔을 거야.”
정찰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저번 축제에 참여했었던 마족 분들께 들은 거긴 한데.”
이어지는 레베카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제가 모험가들과 찾아온 후에는 반드시는 아니지만, 잦은 빈도로 성기사단이 던전을 찾아왔다고 한다.
“신전 쪽 인간들은 귀찮아.”
“귀찮다고 해봐야 저희 적수는 아닐 것 같은데요.”
레베카는 본편의 최종 보스다. 젊은 마족 중에서는 가장 강해.
파스칼이나 발락이라고 해도 일대일로는 절대로 레베카를 이길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레베카가 당해내지 못할 적이라고 해도 내가 있다.
“적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은 욕망이 없다고 하더라고.”
“예?”
욕망이 없다니요?
“욕망이 없다고. 오로지 신실한 믿음만을 가지고 던전에 온다고 하더라.”
그제야 나는 레베카가 어째서 신전 쪽 인간들을 귀찮다고 표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욕망이 하나도 없으니, 욕망을 수급할 수도 없어. 그런데 던전은 또 엉망으로 만들어. 덕분에 던전을 수복하는 데 욕망을 써야 해.”
잠깐만.
던전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저희를 토벌하러 오는 게아니라요?”
“조디악님 말로는 그냥 던전을 엉망으로 만들고 물러난다고 했었어.”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신전 쪽에서 기사단을 보냈다면 분명 마족을 토벌하려고 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럼 저희가 먼저 나서서 처리하면 되지 않나요?”
“그리 쉬운 일이면 귀찮다고도 안 했어.”
레베카가 한숨을 내쉰다.
저번 축제에 참여했었던 다른 마족들에게서 신전 쪽 기사단들의 악담을 어지간히 들은 모양이다.
“기사단을 전멸시키면 신전 쪽에서 또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기사단을 보낸다고 하더라고.”
던전에 피해를 주지 못하면 새로운 기사단을 보낸 다라.
재미있는 정보다.
“그래서 던전을 키우기 위해서는 신전 쪽 눈에 되도록 띄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그냥 눈 딱 감고 당해주는 게 나을 정도……. 왜 웃고 있어?”
아,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찌 참을 수가 없다.
레베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들은 결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뭐가?”
“아니, 뭔가 그렇잖아요. 성기사들이 마족을 처치하러 오는 게 아니라, 던전을 엉망으로 만든다니.”
마족은 던전을 이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모은다.
나도 이 세계에서 와서 처음 안 정보였다.
다시 말해,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이와 관련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전 쪽도 당연히 마족들의 진짜 목적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저희가 욕망을 모으는 걸 저지하려고 같지 않습니까.”
“응? 그러네? 그런데 그것도 이상하지 않아? 인간들은 우리의 목적이 뭔지 모르잖아.”
나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음을 확신했다.
신전은 알고 있었던 거야.
신전 쪽에서는 분명, 마족들이 욕망을 모으려고 하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는 신전 상위층들은 다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기사단이 마족을 토벌하려고 들지 않고, 던전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집중하는 거다.
그 새끼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게임에서 봤던 신전의 상위층들을 떠올린다.
하나같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그 모습과 말투를 떠올린다.
너희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알고 있었는데도 주인공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췄다면 분명 떳떳한 이유는 아닐 거야.
“일단 당장 성기사를 파견하지 않게끔 하여야겠네요.”
샐쭉 웃었다.
주인공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긴 신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분노를 담아 웃는다.
주인공에게 정보를 숨겼다는 건 다시 말해.
주인공으로 플레이하던 나조차 속인 꼴이니까.
“너 지금 완전 마족 같아 보여.”
“지금은 마족으로 변장하고 있으니까, 칭찬하시는 거지요?”
칭찬이라고 믿겠습니다, 레베카님.
“우선 관리실로 가죠.”
“뭘 하려고?”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관리실로 들어가 메인 카메라로 던전을 살펴본다.
레베카의 말대로 모험가들과 파티를 맺고 던전에 들어오는 여사제의 모습이 보였다.
여사제는 정찰하듯 이리저리 던전을 살피고 있다.
“어떻게 하려고?”
“일단 저 여사제를 구워삶아 볼 생각입니다.”
그 돼지 새끼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그놈들이 내가 게임을 할 때도 얼마나 많이 꼽을 줬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열이 받는다.
게임에서는 절대로 죽일 수 없는 NPC라서 내버려뒀었지.
지금 당장 죽이러 갈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주인공이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참는다.
하지만 그놈들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은 전혀 없어.
≪ 비명 숲 던전 ≫
□ 등급 : F
□ 명성 : 조금 알려짐
□ 보유 욕망 : 7,400
던전을 넓히고, 괴물들의 숫자를 늘리는데 꽤 많은 욕망을 사용했음에도 아직 욕망이 상당히 많다.
“욕망 좀 쓰겠습니다, 레베카님.”
“어……. 그렇게 해.”
레베카가 왠지 날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내버려두자.
≪ 공터 ≫
□ 레벨 : 2
★ 업그레이드 가능
└ 회복의 우물(Lv1) 3,000 욕망
└ 미로방(Lv1) 4,000 욕망
└ 산란장(Lv1) 5,000 욕망
연구소에서 공터 레벨을 연구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곧바로 공터 하나를 짓고, 산란장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산란장? 이거 맞아? 여자 사제를 산란장에 넣어서 알이나 낳는 기계로 만들 생각이야?”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높은 확률로 던전에 성기사단이 파견될 거다.
물론 성기사단이 찾아오면 격파하면 그만이기는 해.
하지만.
“계속 성기사단을 격파하다 보면 토벌대가 오죠?”
“응. 어떻게 알았어?”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주인공을 포함해 천 명 단위의 성기사가 동원돼서 던전을 초토화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때는 왜 이 던전만 유독 신전에서 과잉 반응을 보이는가 생각했었다.
그 이벤트는 아마, 성기사단을 계속 처리한 던전의 말로를 보여줬던 거겠지.
“감입니다.”
물론 토벌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처리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신전 쪽에서 아예 모험가들이 던전에 들어오지 못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신전 쪽 토벌대가 전멸해버린 던전에 과연 모험가들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되도록 과격한 방법은 지양하도록 하자.
“그래서 산란장을 지어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산란장에 넣으려고요.”
진심이라는 듯, 촉수 한 마리를 고용했다.
“아까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산란 기계로 만들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촉수를 사제한테 쓸 마음은 없다. 그냥 보여주기 용일 뿐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안 잡혀.”
“믿어보세요. 지금까지 잘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레베카는 약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엄청 싫은 기분이 들어.”
내가 뭘 할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저게 여자의 감인가, 싶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부터 뭘 할 거냐면, 정찰하러 들어온 사제를 조교 하려고 한다.
그 신실함 마음을 더럽힐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지 나였다면 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신전 쪽도 부정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이 축제에서 우승하기 위해선 나도, 부정을 저지를 필요가 있다.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빙의 때문에 인간이 아님을 인지하지 못해서, 그래서.
지금까지 너무 사람처럼 굴었다.
“하아. 그래 마음대로 해봐. 바람피울 생각이지?”
“그럴 생각은 아닌데요.”
내가 너랑 메르넬라를 두고 왜 바람을 피워.
“나는 바보가 아니야. 네가 무슨 짓 할지 대충 눈치챘어.”
벌써? 레베카의 눈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구나.
“던전을 위해서야. 조금이라도 사랑을 주면, 죽여버릴 거야.”
“예.”
레베카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이젠 정말 거리낄 것이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