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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52화 (52/99)

〈 52화 〉 19. 사제 아리아(4)

* * *

그가 남기고 간 것을 먹었음에도 아리아의 몸에는 아무런 지장도 생기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아리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차라리 이상이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차라리 그랬으면.

“안녕.”

“……안녕하세요.”

“제 착각일지 모르겠는데, 옷이 점점 두꺼워지네요.”

“추워서.”

점점 두꺼워지는 그의 옷을 바라보며 이런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헛소리도 잘하네요.”

며칠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그의 배려로 여성의 비명이 들리지 않게 됐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몸에 상처가 더더욱 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당신은 정말 마족 같지 않네요.”

“니가 생각하는 마족은 어떤 존잰데?”

“잔인하고, 흉포하고, 음습한 존재들이죠.”

남자 마족은 내 말에 턱을 긁적였다.

“그럼 묻겠는데.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예?”

“인간 중에서도 마족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잖아. 인육을 탐하고, 어린아이를 강간하고, 남을 상처 주는 짓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의 물음에 아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천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호의호식하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그 사람들도 그럼 마족이야?”

“……아니요.”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다.

그들은 마족이 아니야.

마족과 같은 짓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분명, 인간이었다.

“그럼 반대로 나는 인간이야?”

“그것도 아니죠.”

며칠 대화를 나누며 남자 마족이 인간답다고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눈앞의 존재가 마족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신께 용서를 빈 적이 수없이 많았을 정도다.

결국, 아무리 인간답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존재는 마족일 뿐, 인간일 수 없다.

“그럼 인간과 마족의 차이는 이거 하나 아닐까?”

남자는 제 이마에 달린 뿔을 가리켰다.

그래 저 뿔.

인간에게는 없고, 마족에게는 반드시 있는 저 뿔이 바로.

인간과 마족의 존재를 나누는 요소임은 틀림없다.

“네가 말하는 그런 음습한 마족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절대다수가 그러지는 않아.”

예전의 아리아였다면 남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간악한 술수를 부리지 말라고 소리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저런 말을 하는 남자 마족이야말로, 그 증거였으니까.

마족이지만, 마족이면서도 인간다운 그가 그렇게 말하기에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람도 마족도 개체 차이가 있는 거야.”

“……그렇군요.”

아리아는 남자 마족의 말에 긍정했다.

마족에게 설득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째서인지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남자 마족이 아니, 아르켈이 마족이면서도 착한 마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돼서일까?

“아르켈.”

“어? 이름 불러주는 거야?”

기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켈의 모습에 아리아는 피식 웃었다.

이름 한 번 불렸다고 기뻐하기는.

정말이지 마족답지 않은 마족이다.

‘이곳에 속박되고 나서 처음으로 웃어본 거 아닌가?’

아리아에게 있어 아르켈은 이곳 생활의 낙이었다.

그가 없는 시간에는 조용한 침묵을 견뎌내야 할 뿐이다.

그런 그가 상처 입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상처들, 저 때문이죠?”

“아니야.”

“아니기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부정해봐야, 무게 잡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나 때문에 그렇게 상처 입는 것도 감수하는 거예요? 혹시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그 물음에 아르켈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가 당황하는 것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진짜예요?”

아리아보다 나중에 잡힌 여자를 먼저 고문한 것도.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감수하면서 아리아를 고이고이 놔두고 있는 것도.

아르켈이 아리아에게 한눈에 반했다면 모든 게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아리아는 정말로 오랜만에 크게 웃고 말았다.

마족이 자신에게 반했다는 사실에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시장에 돌아다니는 소설이나, 연극의 소재로도 진부한 설정인데.

그게 실제로 일어나다니.

심지어 그 대상이 나라니.

“설마 마족이 저한테 반할 줄이야.”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르켈이, 사람다운 마족이 제게 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예쁘장한 미모에 감사함조차 느끼고 말았다.

자신이 마족을 인간답다고 생각했음에도.

신께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염없이 웃었다.

“그만 웃어.”

그 웃음은 아르켈이 뭐라고 한 마디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웃긴 걸 어떻게 해요.”

웃음은 그쳤지만, 아직도 입가는 씰룩이고 있다.

아리아는 자세히 보니 아르켈은 잘 생겼음을 느꼈다.

창백한 흰 피부는 이상하게도 따스하게 느껴져.

나풀거리는 흑발이 야성미를 표현하는 것 같아.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고, 아리아를 지켜주고 있다.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신성력을 잃지 않게 해줬어.’

사제에게 있어 신을 믿는다는 증명인 신성력을 잃는다는 것은 더는 사제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처녀를 앗아가지 않는 아르켈에게 점점 호감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속박한 것이 아르켈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아리아는 아르켈의 좋은 점만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리아에요.”

“엥?”

아르켈은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맨날 물어보다가, 오늘은 안 물어보길래 내가 먼저 대답해준 것뿐인데.”

“어느 신전에서 왔는데.”

“바르크 백작 영지의 신전에서 왔어요.”

“누구의 명을 받고?”

“대사제님의 명을 받고 이 던전의 규모를 조사하러 왔답니다.”

지금 아리아의 말에 거짓은 없다. 전부 진실이었다.

첫날, 거짓으로라도 답하라는 말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진실이구나.”

“네. 거짓 하나 없어요.”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같이 도망쳐요.”

같이 도망치자.

맹세하건대 아리아는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자신 때문에 상처가 늘어나는 아르켈이 안쓰러워서.

제게 한눈에 반한 아르켈에게 호감을 느껴서.

“당신도 원해서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물론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을 사랑하다니.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저랑 같이 도망쳐요. 인간으로 변장해서 생활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이렇게 어둡고 음습한 던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밝은 곳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고 싶었다.

“그럴 순 없어.”

그러나 아르켈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어째서?

자신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으면서, 어찌 그리 고민도 없이 대답할 수 있는가.

아리아는 조금 원망스럽다는 듯 아르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던전에 매인 몸이거든.”

씁쓸한 말에 원망이 담겼던 아리아의 눈이 부드럽게 녹았다.

“……그렇군요.”

몰랐던 사실이었다. 괜한 말을 했어. 괜히 헛된 희망을 심어주려고 했어.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아르켈을 향한 미안함 뿐이었다.

“대신 너만은 나갈 수 있게 해줄게. 약속해.”

무언가 결심이 섰다는 듯, 아르켈은 비장한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못 올지도 모르니까, 여기. 그럼 가볼게.”

아리아는 며칠 먹을 빵과 물을 놔두고는 자리를 떠나는 아르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저를 보살펴주소서.”

그저 신께 기도를 올리며 버티고, 버텼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리아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갔다.

정확히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

아르켈이 찾아오지 않으니까, 시간 개념이 너무나 혼란스럽다.

던전이라는 낯선 환경에 감금되었음에도 외롭지 않았다.

그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꼈다.

쓸쓸함을 느꼈다.

신전에서 자신을 찾기나 할까,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빨리 와줘…….”

그녀의 입에서 더 이상 신이 아닌, 아르켈을 찾아 해매는 말이 나올 때쯤.

“빨리 나가.”

아르켈이 찾아왔다.

온몸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채로.

그는 급하게 자신의 발목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당신, 허락받고 나 풀어주는 거 아니죠.”

“알 바 없고 빨리. 쿨럭.”

아르켈이 입에서 피를 쏟는 모습에 아리아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상관께서 사제의 처녀혈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순간, 아리아는 오싹함을 느끼고 말았다.

처녀혈이 필요하다는 것은,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신성력을 잃어야 한다는 뜻이었기에.

“그래서 안 된다고 했더니, 이 꼴이야.”

스스로 괴물의 알을 낳겠다고 말했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공포에 이성이 없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이성이 있다.

그렇기에 신성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니까 빨리 나가……. 던전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못 쫓을 거야.”

말에 두서가 없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이니,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조차 힘든 거겠지.

이렇게 되지 않아도 될 텐데.

차라리 마족답게 상관 마족의 명령에 따라 제 처녀를 앗아가면 될 텐데.

“사제한테 신성력은 중요하잖아…….”

아리아는 아르켈의 배려에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신께 빌었다.

부디 진짜로 존재하신다면, 이 마족을 구원해달라고.

이 마족을 구원할 힘을 제게 달라고.

그 염원을 담아, 아리아는 신성력을 일으켜 아르켈의 몸을 치유했다.

아니, 치유되기를 빌었다.

“아…….”

아르켈의 몸이 치유돼가는 모습에 아리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본디 마족은 어둠의 존재, 빛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마족은 신성한 힘에 의해 몸이 회복되는 중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신의 이적이 틀림이 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마족이 신성력으로 몸이 회복될 수 있겠는가.

“어, 뭐야. 몸이 괜찮아졌어.”

아르켈 역시 조금 놀랍다는 듯, 제 몸을 살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신성력으로 몸을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단시간에 전부 회복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가야 돼. 치료 고마워.”

“자, 잠깐만요! 지금 움직이면 상처가 덧나요!”

벌써 일어나면 상처가 덧날 게 틀림없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 상관이 찾아오면, 난 널 못 지켜줘.”

“그렇다고 당신 혼자 죽으러 갈 생각이에요!?”

“살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끝까지 아리아를 지키려고 했다.

그 사실이 아리아의 마음을 살며시 녹였다.

“기다려봐요.”

마족이 신성력에 의해 몸을 회복했다.

이것은 분명 신의 기적일 것이다.

아리아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께서 이 마족과 이어져도 좋다고 제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사제로서 마족과 이어지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그래, 분명 그런 뜻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를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안아줘요”

“하지 마.”

아르켈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명백한 거부에 아리아는 그를 노려봤다. 왜 거부하는 걸까.

이렇게.

내 속마음을 말해줬는데.

“나 때문에 목숨보다 더 소중한 신앙심을 포기하려고 하지 마. 나는 그게 더 싫어.”

아, 그는 아직도 자신을 배려하고 있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상황에서도 나를 배려하고 있는 거였어.

정말이지, 사람 같은 마족이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마족이었다.

“이 바보 같은 사람.”

처음으로, 그를 마족이 아닌 사람이라고 부른 아리아는 살며시 제 몸을 감싸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여자 입에서 세 번 같은 말이 나오지 않게 해주길 바라요. 절 안아주세요, 아르켈.”

“괜찮겠어?”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또한, 신의 뜻이겠죠.”

설령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후회는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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