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20. 아르켈의 시점
* * *
처음엔 아리아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촉수를 보여주고, 협박 몇 마디 하면 공포에 질려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보일 줄 알았다.
살고 싶은 욕망을 보이면 거기서 끝이지.
그 욕망을 이용해서 정신을 주무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리아는 촉수를 봤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 악독한 마족!”
분명 공포를 느꼈으나, 그녀는 여전히 신실했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물러났다.
처음부터 촉수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정신이 망가진 채로 보내면 신전 쪽에서 지랄할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고 아예 되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없다.
아리아가 돌아가지 않으면 신전 쪽에서 수색대를 보낼 테니까.
“곤란한데.”
세뇌 계열 마법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사용해도 문제다.
신전 쪽에서 아리아가 그런 마법에 걸렸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아밀리아도 아니고, 신전 쪽도 모를 정도로 세뇌하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지.”
우리 다이나토스는 각자 최고라고 자부하는 분야가 있다.
왕인 아르켈은 당연히 다이나토스 최고의 미덕인 무력을 자부한다.
클레안드로는 무기를 다루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르누카는 무언가를 만드는데 있어서는 우리 중 최고다.
그리고 안드로의 부인인 아밀리아는 당하는 사람이 당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은밀하고 확실한 세뇌가 주특기였다.
아마 세뇌 분야에서는 마족 중에서도 따라갈 자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밀리아를 부르면 일이 쉽기는 하겠다만.”
고작 인간 여자 하나를 세뇌하겠다고 부르는 것도 좀 그래.
게다가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침공의 시간이냐고 뭐라 할 걸 생각하면 스트레스받으니 패스.
“내가 시켰다고 말하더라?”
일단 레베카를 달래는 게 먼저구나.
아리아에게 조금쯤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는데, 다 보고 있었나 보다.
그날 밤 레베카를 달래주기 위해 그녀의 몸을 안았다.
질투 때문에 일부러인지 모르겠는데, 레베카는 내 몸을 할퀴었고, 진한 키스 마크를 남겼다.
“상처랑 키스 마크 회복하지 마. 내꺼라는 흔적 남겨둔 거니까.”
그리고 다음 날, 우선 아리아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기로 했다.
레베카가 남긴 자국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다.
“자이로니아.”
“네 주인님 오빠.”
“붙잡은 사제 근처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어.”
자이로니아를 불러 촉수한테 고통받는 여자 목소리를 내라고 명령했다.
“아하. 공포를 심어주려는 거군요. 확실히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사제들은 마물 같은 탁한 존재들한테 범해지면 신성력을 잃으니까요.”
“응?”
자이로니아의 입에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 튀어나왔다.
아, 그래서 촉수를 보고 공포를 느낀 거구나.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 정도로 신실하다면 촉수를 보고도 감정의 미동조차 없을 만도 했으니까.
설마 공포를 느낀 이유가 촉수한테 범해질 수 있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신성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의한 공포이었다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되겠는데.”
머릿속의 퍼즐이 놓인다.
어떻게 해야 아리아가 나를 의존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자이로니아. 사제들은 마물이 아니라 마족한테 범해져도 신성력을 잃어?”
“네. 서큐버스한테 신성력을 잃은 남자 사제들도 엄청 많다고 들었어요.”
과연, 그렇단 말이지.
머릿속에 펼쳐졌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맞춰져간다.
첫날에 적대심이 들지 않게끔 상냥하게 말했던 것을 유효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방향은 잡혔다.
이제 나머지는 실행하고, 내 생각과 다른 오차를 수정하면 된다.
“주인님 오빠, 얼굴이 무서워요.”
왜 질렸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걸까.
어제 레베카도 저런 표정으로 날 보고 있지 않았나?
며칠이 지났다.
아리아가 점점 야위어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내가 남기고 간 음식에 손도 대지 않으니까 당연히 저렇게 되겠지.
“제가 저 여성 분을 대신하겠어요. 그러니까 저 여성 분을 풀어주세요.”
아리아가 자포자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대신할 여성은 허구에 존재에 불과하다.
자이로니아가 연기하는 것뿐이니까.
아리아가 단시간에 이렇게 구석에 몰린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자이로니아의 명품 연기 덕분일 거다.
“신성력을 잃는 게 힘들었어?”
자포자기한 아리아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다.
신실한 사제이면서 처음부터 남을 위해 희생하려고 들지 않았던 그 비겁함을 들춰냈다.
“차라리 신성력을 잃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될 정도라고요!”
구석에 몰린 아리아는 크게 흥분해 내게 소리를 질렀다.
며칠 동안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봐야겠지.
이렇게까지 몰아세웠으니, 이젠 당근을 줄 차례다.
“내가 저렇게 안 되게 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은연 중 그녀에게 반했다는 듯이 굴었다.
“만지지 마요!”
당연히 손을 내칠 줄 알았다.
“아.”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그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어지러울 만도 해.
아리아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아리아가 내 상의를 손으로 붙잡고 쓰러지려는 것을 버텼다.
여기서 한 가지 기쁜 오차가 나타났다.
“어, 어라?”
솔직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최근 레베카가 밤에 날 놔주지 않아서 몸이 상처투성이였으니까.
내가 다른 여자와 잔 흔적을 아리아가 본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것이 무너질 것 같아서 당황했다.
그러나.
“어, 어라?”
순진무구한 아가씨는 이것이 다른 여자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긴 해.
어떤 여자가 이렇게까지 몸을 할퀴겠어.
“당신, 이 상처는 뭐예요?”
게다가 울긋불긋했던 키스 마크가 시간이 지나 푸르딩딩한 멍 자국으로 바뀐 덕에 내 몸은 누군가의 폭력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기회임을 알았다.
“쯧.”
혀를 차고 옷을 여민다.
일부러 너에게 이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그리고는 급하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 날 아리아는 처음으로 내가 남기고 간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자이로니아에게 연기를 그만둬도 된다고 말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제 착각일지 모르겠는데, 옷이 점점 두꺼워지네요.”
“추워서.”
“헛소리도 잘하네요.”
아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인다.
분명 내가 상관에게 얻어맞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반쯤은 맞는 말이기는 하다.
레베카가 밤마다 질투에 휩싸여 내 몸을 할퀴고 물어뜯고 있기는 하니까.
“당신은 정말 마족 같지 않네요.”
“니가 생각하는 마족은 어떤 존잰데?”
“잔인하고, 흉포하고, 음습한 존재들이죠.”
“그럼 묻겠는데.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그 이후부터는 아리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마족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을 조금씩 걷어내려고 노력했다.
그 거부감과 편견을 조금이라도 걷어내야, 내게 호감이 생긴 것을 긍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지도 않으면 내게 호감이 생기는 순간, 아리아는 자괴감에 망가질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네가 말하는 그런 음습한 마족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절대다수가 그러지는 않아.”
아리아는 이 말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을 테지.
나 때문에 말이야.
내가 자기 때문에 상관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저를 고문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절대로 부정할 수 없었을 거다.
“왜 나 때문에 그렇게 상처 입는 것도 감수하는 거예요? 혹시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이때야말로 그동안 열심히 쌓아 올린 호감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아리아는 제 이름을 말해줬다.
어디서 왔는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말해줬다.
내게 호감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
“네.”
레베카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몸을 자해했다.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만.
그리고 아리아에게 찾아갔다.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말했다.
누가 보더라도 상관에게서 그녀를 몰래 빼내 주기 위해 찾아온 모습이 아닌가.
“사제한테 신성력은 중요하잖아…….”
이 말을 하고 기절한 척 하고는 냉정히 상황을 되짚었다.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충분히 호감도가 쌓이지 않았더라면 아리아는 나를 내버려두고 도망칠 거다.
하지만 반대라면?
충분히 호감도가 쌓였다면?
예상대로 아리아는 내 몸을 회복시켜줬다.
그리고 그것이 아리아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올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성력에 의해 몸이 회복된 마족이라니.
사제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기적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와 맺어져도 좋다고, 신이 속삭이는 것 같다고 느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알까.
내 몸이 신성력으로 회복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을.
나는 마족이 아닌, 다이나토스이기에.
다이나토스는 부정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신성력조차 사용할 수 있는 종족이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기에, 아리아는 내게 몸을 허락했다.
그리고 내게 처녀를 잃고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공략이 끝났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아리아를 안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연시 스토리를 이런 식으로 써먹을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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