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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56화 (56/99)

〈 56화 〉 21. 아리아 마무리

* * *

우선 결론만 말하자면, 아리아에게 욕망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레베카의 말에 따르면 사랑과 성욕이 섞인 꽤 볼만한 욕망이었다고 한다.

아리아가 일어난 건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녀는 기절했다는 사실이 민망한지 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아리아.”

“네.”

그래도 부르니까 재깍 날 바라보는 것이, 순종적인 강아지 같아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읏.”

아리아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손을 쳐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금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필사적으로 내 손에 달라붙는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아리아가 내게 얼마나 빠져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우선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지?”

“……네. 보고도 올려야 하니까요.”

갑자기 아리아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뭣 때문에 저러는지는 알겠다.

신전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나를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이미 그 부분도 다 생각해놨다.

“보고가 끝나면, 이 앞에 있는 마을의 신전에 사제로 와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마을에 신전이 필요했다.

모험가 중에는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전에 의지하는 이들도 꽤 많으니까.

하지만 아직 조그마한 마을에 올 사제가 있을 리가 없어서 신전을 세우는 건 보류하고 있었는데.

여기 내게 순종적인 사제님이 계시네?

심지어 이 사제님도 나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건 반기면 반겼지, 절대로 싫어하지는 않을 거다.

“아르케 마을 말씀이시죠?”

윽.

의도적으로 마을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나와 비슷한 마을 이름이라니, 아직도 어색해 죽겠다.

“그러고 보니 아르케 마을이라니. 아르켈과 이름이 비슷하네요?”

아리아가 마을 이름과 내 이름을 연관 지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전부 말해줘야 했으니까.

“아르케 마을의 사제로 와줬으면 해.”

그래도 우선은 지금 하는 이야기부터 마무리하자.

“확실히. 그렇게 하면 제가 던전으로 찾아오기 편하겠네요.”

“내가 찾아갈게.”

위험하게 직접 찾아올 필요 없이 내가 찾아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을에 들를 일은 많으니까. 그때마다 아리아를 만나러 가면 되겠지, 싶다.

“예? 하지만 던전에서 못 벗어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내가 막 질러놓은 부분은 세세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아리아가 언제고 나를 이상하게 바라볼 수 있다.

“아예 못 벗어나는 건 아니야. 결국, 다시 던전으로 돌아와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군요. 하긴, 아예 못 벗어나는 건 말이 안 되네요. 마족 때문에 피해를 입은 국가들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이상함을 발견해도 나를 의존하기에 아닐 거라고 혼자서 납득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아리아는 뭔가 결심이 선 듯이 내 손에서 머리를 때고는 지긋이 나를 올려다보았따.

“아르켈 말대로, 아르케 마을의 신전에 있을게요. 대신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만나러 와주세요.”

그럴 생각이다.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적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날 생각이었다.

아리아는 예쁘고 귀엽기도 하니까.

게다가 이미 손을 댔는데 버린다니, 내 성격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고마워. 사랑해.”

고마움의 표시로 아리아의 볼에 입을 맞춰주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내 입맞춤을 피하기는커녕, 마찬가지로 내 볼에 뽀뽀를 해준다.

“그런데 마족이 마을에 어떻게 들어오려고요? 난리가 날 텐데…….”

“인간으로 변장하는 건 쉬워.”

마법을 사용해서 뿔을 없앤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군요.”

이 모습으로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도 내 모습을 분명 알 거다.

그러니 이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마을에 관한 이야기도 해줘야지.

“게다가 내가 만든 마을이니까, 자리 잡는 것도 쉬울 거야.”

“예? 당신이 만든 마을이요?”

“응.”

최대한 내가 유리한 쪽으로 말을 해줬다.

이 근처에 떠도는 사람들이 있어서, 위험해보여서 한 곳에 모아 마을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만약 아리아가 던전이 인간의 욕망을 모으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말을 믿지 않았겠지.

하지만 신전 고위계층이라면 모를까, 아리아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아리아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위해서 마을을 만들다니. 정말 마족답지 않은 마족이네요.”

내가 그녀에게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내가 마을을 만든 것도 비밀로 해줄래? 마족이 그랬다는 걸 알면 신전 쪽에서 분명 마을을 철거하려고 들 거야.”

당연히 이 이야기가 신전 고위층에 알려지면 곤란하기에 아리아에게 비밀로 해둘 것을 당부했다.

내 말에 아리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백작 영지까지 데려다줄게.”

슬슬 시간이다.

아리아가 이쯤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신전 쪽에서 수색대를 보낼 것이다.

“손잡아.”

아리아가 내 손을 잡자 곧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와.”

감탄사가 나올 만도 하지.

아리아의 입장에선 눈을 감았다가 뜨니, 바르크 백작 영지 코앞에 도달해있는 셈이었으니까.

“순식간이네요.”

“들어가. 나중에 마을에 오면 보자.”

“네, 아르켈. 그때 봬요.”

한동안은 이별이었기에 나는 아리아를 껴안아줬다.

아리아 역시 내 품에 안겨서는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사랑해요.”

“나도.”

이걸로 당분간 신전 쪽의 눈은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던전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성기사단이 오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대책을 마련해둬야 하나.”

신전 고위계층과 만나볼까?

아니, 그런 섣부른 짓은 하지 말자.

그러다가 ‘그 여자’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아르켈은 강하다.

그건 이견의 여지가 없어.

하지만 제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게임상에서 힘을 보이지 않은 존재와 싸우는 건 꺼림칙하다.

당장 대마왕 바르바라와 칠대 마왕이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신전 쪽에서는 ‘그 여자’가 요주의 대상이다.

물론 그 여자랑 진짜로 싸운다고 하면 내가 이기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그 여자의 뒷배다.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그래도 주인공은 만나러 가보고 싶다.

지금쯤 주인공은 대신전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거다.

원래라면 그 여자 때문에라도 대신전에는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리아한테 부탁하면 대신전에 출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중에 고민하고, 일단 쉬자.”

기절한 후 푹 쉰 아리아와 다르게 나는 레베카 때문에 쉬지도 못했다.

아, 쉬러 가야지.

* * *

“아리아 사제님이시군요. 들어가시죠.”

바르크 백작 영지의 관문을 통과한 후, 아리아는 왠지 도시가 전보다 밝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랑을 찾게 되어서 일까?

그게 아니면 오랜만에 푹 휴식을 한 덕분일까.

“아르켈…….”

바로 조금 전 헤어졌음에도 그가 보고 싶어졌다.

안 돼,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곧 대사제님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대사제님께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 사실이 아리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비명 숲 던전의 발전은 심상치 않다. 아리아가 처음 들었던 던전 규모보다 훨씬 커졌어. 분명 보고를 해야 함이 옳다.

하지만.

“그가 다칠 수도 있어요.”

성기사단이 마족과의 충돌을 피한다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마족과 싸울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만약 아르켈이 상처를 입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어.

혹은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아리아는 심장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신성력을 쓸 수 있어요.”

마족과 관계를 맺었는데도 여전히 신성력을 쓸 수 있어.

이 사랑은 분명 신께서 허락하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하는 그를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신을 모시는 대사제께 거짓을 보고한다.

과연 자신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대사제님을 보고도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다.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으며 아리아는 신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사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리아.”

대사제는 따뜻하게 아리아를 맞이해줬다.

그런 대사제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니.

아리아는 양심이 찔렸다.

“조금 늦어서 수색대를 보내야 하나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거리가 하도 멀어서,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대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모험가들이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나요?”

순간 대사제의 입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아리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요, 다들 친절하셨어요….”

예전의 아리아였다면 그저 대사제가 자신을 염려해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대사제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종종 바라보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아리아는 달랐다.

그녀의 눈에 비친 대사제의 모습이 왜 이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럼 다행이군요.”

대사제가 다시금 웃는다.

아리아가 늦은 이유를 의심해서 웃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리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웃음을 지웠던 것일까.

‘나를 평가하듯이 바라봤어요.’

조금 전 대사제의 시선은 모험가들이 제게 보냈던 시선과 똑같았다. 여자를 품평하는 남자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아르켈과 같은 정욕의 시선도 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르켈이 정욕의 시선을 보낼 때는 분명 달콤함을 느낀 것과 달리.

대사제가 보내는 정욕의 시선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사람도 마족도 개체 차이가 있는 거야.]

머릿속에서 아르켈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 그의 말대로였다.

사람도 마족도 결국 각자 차이가 있는 거다.

저 눈을 봐라.

저것이 어찌 신의 뜻을 따르는 이가 보낼 수 있는 시선인가.

예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저 시선에 담긴 뜻을 몰랐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이젠 달라.

“비명 숲 던전은 어땠나요.”

“딱히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아직은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아리아의 말은 믿을 수 있지요.”

친근하다는 듯, 제 이름을 부르는 대사제가 어찌 이리 끔찍하게 느껴질까.

그 덕분에 아리아는 신전에 들어오기 전과 달리 아무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대사제님.”

“네.”

“비명 숲 앞에 있는 마을, 아르케 마을에 신전이 곧 건설되는 것 같아요.”

“그 조그마한 마을에 신전을요? 그것참 신실하신 주민들이 많이 계시나 보군요.”

확실히 아르케 마을은 조그마한 마을이다.

지금 당장 신전을 만들었다고 해도, 정식 신전으로 인정받기도 어려운 그저 간이 신전에 불과한 장소일 것이다.

“네. 그래서 제가 그 신전의 사제로 가고 싶어요.”

“아리아가요?”

대사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굳이 왜요?”

굳이, 라니. 대사제의 말에 아리아는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제가 사람들을 위해 텅 빈 신전으로 가겠다는데 어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여기 있는 게 훨씬 편할 텐데요.”

다시 한 번 아리아는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편하다고?

신을 따르는 이가 편함을 추구하다니.

이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인가.

“신을 따르는 이가 편함을 추구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군요.”

아리아의 정론에 대사제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볼을 쓰다듬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줄 수는 없나요? 아리아가 거친 모험가들을 상대할 것을 생각하니 탐탁지 않아서 말하는 거예요.”

“가고 싶어요.”

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사제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몰라.

“뜻이 완고하니 어쩔 수 없네요. 아쉽군요.”

무엇이 아쉬운 걸까. 아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던전 정찰건은 위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네.”

“그럼 송별회를 해야겠군요.”

“당장 떠나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하도록 하죠. 우선 쉬고 싶어요.”

“아. 긴 여행길을 다녀오셨는데 제가 실수를 했군요. 편히 쉬세요, 아리아.”

아리아는 대사제의 방에서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제 방으로 가서 황급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지금 떠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송별회를 빌미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짐을 싸들고 신도들에게 황급히 인사를 한 후 신전 밖으로 나왔다.

“가야 해요.”

아르케 마을로 가야 한다.

거기라면 아르켈이 지켜줄 수 있을 거야.

아니, 반드시 지켜줄 거야.

원래는 이렇게 급히 다시 아르케 마을로 떠날 생각은 없었다.

친한 신도들과 천천히 인사를 한 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아리아는 급히 아르케 마을로 향하는 마차를 찾아 탑승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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