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29. 진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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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네 말을 믿을 근거는?”
바르바라의 말이 이치에 맞아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아직 의심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다. 내가 언젠가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알고 미리 그럴듯한 말을 준비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는 영겁을 살아온 존재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어.
게다가.
“내가 자살 희망자인 네 말을 믿을 근거를 제시해.”
바르바라는 안식을 희망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와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그런 바르바라가 지상을 지키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납득할 이유도 필요하다.
“본래 이 이야기는 너희의 첫 번째 왕이 해줘야 했을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을지 증거를 제시해달라는 뜻이었는데.
“인간이 어째서 무서운 줄 아느냐?”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인간은 발전한다. 끝없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려고 해.”
“지금 그게 내가 한 말이랑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데?”
“그 욕구의 결과물을 보아라. 본디 약하디약한 인간 중에서도 용이나 우리 마족과 맞먹는 이가 나타나질 않았느냐.”
내 말은 무시하고 그냥 니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냐?
“그건 너희 다이나토스도 마찬가지다.”
어?
“잠깐만, 바르바라. 그 말은…….”
“당연한 일이지. 인간은 창조주께서 다이나토스를 모방해서 만든 열화판이니.”
사실 그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었다. 인간과 다이나토스는 생김새가 굉장히 유사하다. 다른 점은 다이나토스가 힘을 발휘할 때 아우라가 나오는 정도.
별 다른 이유는 없겠지 싶어서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다이나토스는 본디 마족이나 천족보다 약한 존재였다.”
바르바라는 싱긋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지. 그대는 적어도, 내 아이 중에서는 그 어떤 이보다 강하다.”
어쩌면 나와 필적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중얼거린 바르바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족이나 우리 마족과 다르게 다르게 다이나토스는 안주하지 않았어.”
분명 지상에서는 견줄 자가 없었다.
“더욱 강해지려고 했다.”
그런데도 다이나토스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동족끼리 경쟁했고, 또 경쟁했다.
“그 결과, 힘을 숭상하는 종족이 되어버렸지.”
바르바라의 말대로다. 다이나토스는 지식보다도, 지혜보다도, 경험보다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힘을 중요시 여긴다. 내가 동포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아르켈이 왕이 됐었을 리가 없다.
“힘을 숭상하였기에 동족을 상잔했다. 그리하여 너희의 첫 번째 왕은 불멸을 잃고,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지.”
대마왕 바르바라나 천족의 왕은 불멸성을 잃은 적이 없다. 애초에 동족에게 도전을 받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이나토스는 서로 경쟁했고, 그렇기에 초대 왕 또한 패배하고 왕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녀석도 나와 같이 창조주의 뜻을 받든 이다. 분명 남겨놓은 것이 있을 게다.”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까지 돌려서 말한 거였구나.
“그걸 찾아라.”
「현재 목표 : 레베카를 도와 던전을 운영해 나가십시오.」
「현재 목표2 : 다이나토스의 첫 번째 왕이 남긴 것을 찾으십시오.」
바르바라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갱신되지 않았던 현재 목표가 새롭게 나타났다.
이것만으로도 바르바라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게 됐다.
어찌 됐든 나는 이 현재 목표로 나아가지 않으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고, 게임 클리어를 못하면 죽는 목숨이니까.
“아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근거를 제시하라니까, 그 근거를 나한테 찾으라고?”
너를 믿을 수 있게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했더니, 믿을 근거를 나한테 찾으라니. 이게 무슨 달콤쌉싸름한 개소리인지 모르겠네.
“그 외에는 이 몸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느니라.”
그렇게 당당히 말하면 오히려 이쪽이 할 말이 없네. 생각해보니까, 바르바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굳이 믿어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지 않나?
바르바라의 뜻대로 인간들의 욕망을 회수하고 있는데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잖아.
그렇네? 아니, 그래도 잠깐만.
“하나만 묻자.”
“무엇이냐.”
“천족이 창조주의 말을 어기려고 하는 거잖아?”
“맞다.”
“너는 창조주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거고.”
“그것 역시 맞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그럼 왜 천족하고 안 싸워?”
창조주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어기려고 드는 천족과 정면충돌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뭔데.
괜히 던전 같은 거 만들 바에야 그냥 처들어가는 게 맞지 않아?
“천계에서는 내 힘이 약해진다. 무조건 지는 싸움을 이 몸이 왜 해야 하느냐.”
아, 그런 거였어? 그럼 반대로 천족이 마계로 와도 힘이 약해지겠구나.
“지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뿐만 아니라 마왕 정도쯤 되면 힘을 제대로 못 쓰느니라. 천족도 그렇고.”
그건 또 그거대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는데.
“너 죽고 싶어 하잖아. 천계로 처들어가는 게 가장 빨리 죽을 방법이지 않아?”
“재미있는 말이구나.”
바르바라는 피식 웃었다.
“분명, 이 몸은 죽음을 희망한다. 그러나 무작정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
“정확히는 무작정 죽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다이나토스를 이끌고 있듯, 나 역시 내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몸이다.”
바르바라의 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임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 몸이 그냥 죽으면 내 아이들은 천족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죽고 싶지만, 이 몸은 위치상 아이들을 염려해야 한다.”
“나한테 죽는 건 괜찮고?”
“그대에게 죽으면 아이들을 부탁할 생각이다.”
그런 속셈이 있었어? 그건 생각도 못 했는데.
“나를 이길 수 있다는 건, 그놈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 레베카에게 반한 그대가 내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냐?”
바르바라한테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내가 그걸 미처 못 알아봤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냐!
결국,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싶었다는 소리잖아.
이 빌어먹을 년이.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아니 좋아해야 하나? 이제까지 아무런 변동도 없는 현재 목표가 하나 추가 됐으니까?
아, 차를 언제 다 마셨데?
“한잔 더 줘.”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바르바라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의 첫 번째 왕이 남겼다는 건 어디서 찾을 수 있는데.”
“그건 이 몸도 모른다.”
하아? 너 지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애초에 지상은 본디 다이나토스의 영역이었다. 이 몸이 알 턱이 있겠느냐.”
“쯧.”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걸 찾으라니.
“그리 이 몸의 말이 의심스러우냐? 근거를 급히 찾아보려고 할 정도로?”
“아니, 그건 아니야.”
현재 목표가 갱신됐으니 당장은 바르바라의 말을 믿을 수 있다. 뭐, 또 미래는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럼 너무 급하지 않아도 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느냐.”
“급하면 왜 돌아가. 바로 직선으로 달려야지.”
“말이 그렇다는 게다. 대충 알아먹거라. 이 몸은 현재 그대 덕분에 굉장히 만족스럽노라.”
“왜 만족스러운데?”
“레베카의 던전이 인간의 욕망을 잘 모아주는 것이 그대 덕분 아니더냐. 고맙노라.”
고맙다라. 딱히 바르바라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입장은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내 목적을 위해서 던전 운영을 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리 고마우면 뭐 좀 줘봐.”
뜯어먹을 수 있으면 뜯어먹어야지. 그렇잖아도 던전에 투자하는 욕망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는데.
“축제는 공평해야 하는 법이니라.”
“그러기에는 첫 시작 지점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불공평하지 않다. 도시에서 가까운 던전은 그만큼 빨리 공략당하니까.”
아, 확실히. 게임에서 퀘스트 라인도 도시에서 가까운 던전을 먼저 공략하는 식으로 짜여있기는 했었지.
“그리 생각하면 나도 참 나쁜 왕이로구나.”
“응?”
“던전이 공략당하면 내 아이도 토벌당하고 만다. 그렇게 내 아이들을 희생해서 지상을 지키려고 하다니. 그것이 창조주의 뜻이기에 지키고는 있지만, 참으로 나쁜 왕이지 않으냐.”
바르바라가 딱히 창조주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천족이 먼저 창조주의 말을 어기려고 드는데, 그녀라고 그 말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바르바라는 창조주의 뜻에 따라 천족을 막기 위해서 마족을 희생시키고 있다.
“사실 그대가 물어봐 줘서 기뻤느니라. 혼자서 안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으니까.”
그것도 다른 마족들은 모르게. 혼자만 그 죄악감을 떠안은채로.
“바르바라…….”
“그리 볼 필요 없다. 전부 이 몸의 선택이니까.”
그리 말하며 웃는 바르바라의 모습은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마치 내가 아닌, 아르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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